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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동활의 음악정원 ♣ 원문보기 글쓴이: 자연산2
♝ 만남!
항구 도시 피레에프시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카페의 문이 열리면서 바다의 파도 소리와 함께, 수염을 늘어뜨리고 다리를 떡 벌리고 선 건장한 뱃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레모니 선장!」
나는 구석 자리로 돌아가 다시 내 생각을 집중시키려고 애썼다. (……)
키가 크고 몸이 가는 60대 노인 하나가 유리창을 코로 누른 채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게 가장 강려한 인
상을 준 것은 냉소적이면서도 불길같이 섬뜩한 그의 강렬한 시선이었다. 그는 나를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자기가 찾아다니
던 사람인지 아닌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시선이 만나자 그 낯선 사람은 힘차게 팔을 뻗어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주 빠
른 걸음으로 탁자 사이를 지나 내 앞에 우뚝 섰다.
「여행하시오?」 그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하느님의 섭리만 믿고 가시오?」
「크레타로 가는 길입니다. 왜 묻습니까?」
「날 데려가시겠소?」
나는 주의 깊게 그를 뜯어보았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다 눈동자가 밝고 예리했다.
「왜요?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날 데려가쇼. 요리사라고나 할
까요. 당신이 들어 보지도 못한 수프, 생각해 보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줄 압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가 우선 마음에 들었다. 멀고 쓸쓸한 해안으로 그 헌털뱅이 같
은 친구를 데려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프를 얻어먹고 이야기만 들어도……. 그는 세상을 적잖게 돌
아다닌, 이를테면 뱃사람 신드바드와 비슷한 유형인 것 같았다. 마음에 들었다. (……)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쪽에서 물었다.
「닥치는 대로 하죠. 발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머리로도 하고……. 하지만 해본 일만 해가지고서야 어디 성이 차겠소.」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뭡니까?」
「광산에서 일했지요. 이래봬도 괜찮은 광부랍니다. 금속도 조금 알지요. 광맥을 찾고 갱도 짜는 것도 좀 압니다. 갱 속으로
내려가도 겁은 안 냅니다. 일 참 잘했지요. 전에는 십장을 지냈는데 불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요.」 (……)
「결혼했습니까?」
「나는 사내가 아닌가요? 나는 수컷도 아닌가요? 눈깔이 멀었지…… 나보다 먼저 살고 간 사람들처럼 나도 개골창에 대가리
를 집어넣었던 겁니다. 결혼해 보았다 이 말이지요. 그러고는 내리막길을 걸었어요. 가장이 되고 집을 짓고 새끼를 둘씩이나
까고…….」 (……)
그렇다, 나는 그제야 알아들었다. 조르바는 내가 오랫동안 찾아 다녔으나 만날 수 없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살아 있
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 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母胎)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
언어, 예술, 사랑, 순수성, 정열의 의미는 그 노동자가 지껄인 가장 단순한 인간의 말로 내게 분명히 전해져 왔다. (……)
나는 조르바의 품 안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조르바 씨, 이야기는 끝났어요. 나와 같이 갑시다. 마침 크
레타엔 내 갈탄광이 있어요. 당신은 인부들을 감독하면 될 겁니다. 밤이면 모래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아 먹고 마십시다. 내겐
계집도 새끼도 강아지도 없어요.」 (……)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마침 아침이 완전히 밝아 있었다. 배는 고동을 울렸다. 내 짐을 실은 거룻배 사공이 내게 손짓했다. _
1장에서
♝ 자유!
여자, 과일, 이상……. 이 세상에 기쁨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나가
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
배 위에는 탐욕스럽게 굴리는 교활한 악마의 눈망울, 행상이 파는 허섭스레기 물건 같은 대가리를 한 그리스인들이 가득 탄
채 밀고 당기고 있었다. 그들이 다투는 소리는 흡사 조율이 안 된 피아노, 정직하지만 심술궂은 여자들이 긁는 바가지 같았
다. 성질대로 한다면 두 손으로 배를 붙잡고 바닷물에 꽂아 넣어 술렁술렁 흔들어, 살아서 복작거리는 것들(인간, 쥐, 벌레)
을 깡그리 씻어 내고는 깨끗이 씻긴 모습으로 다시 건져 올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따금 나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곤 했다. 형이상학적인 삼단논법의 결론만큼이나 차가운 불교도의 자비심 같은 것
이었다. 인간만을 위한 자비심이 아니라 싸우고, 울고, 소리치고, 바라면서도 만사 무상(無常)의 허깨비임을 알지 못하는 살
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자비심이었다.
나는 조르바의 찌들고 주름진 얼굴을 보았다.(……)
「돌고래요!」 그가 기쁜 듯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제야 그의 왼손 집게손가락이 반 이상 잘려 나간 걸 알았다.
「손가락은 어떻게 된 겁니까, 조르바.」 내가 물었다.
「기계 만지다 잘렸어요?」
「뭘 안다고 기계 어쩌고 하시오? 내 손으로 잘랐소.」
「안 해본 짓이 없다고 했지요? 한때 도자기를 만들었지요. 그 놀음에 미쳤더랬어요. 프르르! 녹로를 돌리면 진흙 덩이가 동
그랗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요?」 내가 물었다. 「손가락이 어떻게 되었느냐니까?」
「참, 그게 녹로 돌리는 데 자꾸 거치적거리더란 말입니다. 이게 끼어들어 글쎄 내가 만들려던 걸 뭉개어 놓지 뭡니까. 그래
서 어느 날 손도끼를 들어……」
그러나 나는 내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건 좀 심한데요, 조르바.」 내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자리로 들어가 누워 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몇 년 동안 내 마음에 평화와 안식을 가져다주던 『붓다와 목자의 대
화』를 일었다.
목자 내 식사는 준비되었고 암양의 젖도 짜 두었습니다. 내 집 대문은 잠기어 있고 불은 타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
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붓다 내게는 더 이상 음식이나 젖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바람이 내 처소이며 불 또한 꺼졌습 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음대
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목자 내게는 황소가 있습니다. 내겐 암소가 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목초지도 있 고 내 암소를 모두 거느릴 씨
받이 소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붓다 내게는 황소도 암소도, 목초지도 없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 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늘이
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목자 내게는 말 잘 듣고 부지런한 양치기 여자가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이 여자는 내 아내였 습니다. 밤에 아내를 희롱하는
나는 행복합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 습니다.
붓다 내게는 자유롭고 착한 영혼이 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내 영혼을 길들여 왔고, 나와 희롱하는 것도 가르쳐 놓았습니
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이 두 목소리는 잠들 때까지 내 귀를 울렸다.
내가 일어난 아침, 배 오른편에는 자랑스러운 섬이 돌올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크레타가 초행이냐고 물었지요…….」 그가 말을 시작했다. 「……아니올시다. 초행이 아니올시다. 1896년에 나는 벌써 클
대로 다 커버렸지요. (……) 그런데 악마가 훼방을 시작했습니다. 크레타에 혁명이 일어난 거예요.
그즈음 나는 행상을 하고 다녔지요. 나는 팔던 잡화를 치워 놓고는 총을 들고 크레타 독립군에 가담했지요…….」 (……)
조르바가 고개를 돌려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두목,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아시오? 터키 놈들의 목을
얼마나 자르고, 터키인들의 귀를 얼마나 술에 절였는지(이건 크레타의 풍습이오만) 뭐 그런 이야긴 줄 아시겠지만. 천만에
요, ……오늘 같은 날 약간 제정신이 든 김에 나 자신에게 물어봤어요. 도대체 무슨 지랄이 도져 우리에게 별로 나쁜 짓도 안
한 놈들을 덮쳐 깨물고 코를 도려내고 귀를 잘라 내고 창자를 후벼 내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를 도우소서, 그랬을까?
글쎄 전능하신 하느님이 남의 귀와 코를 도려내어 작살내 버리기를 바란 것일까요!
그렇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그때는 내 피가 뜨거웠어요. 도무지 <왜>라든지 <어째서> 같은 걸 생각해 볼 수가 없었으니까
요. ……사람이란 젊을 동안은 아주 야수 같은가 봐요.」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그는 수염을 거두고 찬물을 한 컵 가득 부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르바, 크레타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겁니까? 이야기 좀 들읍시다.」
「그 길고 긴 이야기를 꼭 해야 하는 거요?」 조르바의 말투가 퉁명스러워졌다. 「……보세요, 내 말씀드립지요만, 이 세상
은 수수께끼, 인간이란 야만스러운 짐승에 지나지 않아요. 야수이면서도 신이기도 하지요. 마케도니아에서 나와 함께 온 반
란군 상놈 중에 요르가란 놈이 있었습니다. 극형에 처해야 마땅한 진짜 돼지 같은 놈이었답니다. 아, 글쎄 이런 놈까지 울지
않겠어요. <왜 우느냐, 요르가, 이 개새끼야. 너 같은 돼지 새끼가 뭣 하러 다 우니?> 내가 물었지요. 나도 눈물을 마구 흘리
고 있었답니다. 그랬더니 이자는 내목을 안고 애새끼처럼 꺼이꺼이 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개자식은 지갑을 꺼내어 터키
놈들에게서 빼앗은 금화를 주르륵 쏟아 내더니 한 주먹씩 공중으로 던지는 겁니다. 두목, 이제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
요?」
나는 일어서서 갑판으로 올라갔다. 맑은 바닷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였다.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
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 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
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
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 (……)
나는 한동안 모래 위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았다. 붓다의 노래가 내가 선 대지에서 솟아나 내 존재의 심연으로 들어왔다. <내
언제면 혼자, 친구도 없이, 기쁨과 슬픔도 없이, 오직 만사가 꿈이라는 신성한 확신 하나에만 의지한 채 고독에 들 수 있을
까? 언제면 욕망을 털고 누더기 하나만으로 산속에 묻힐 수 있을까? 언제면 내 육신은 단지 병이며 죄악이며 늙음이며 죽음
이란 확신을 얻고 두려움 없이 숲으로 은거할 수 있을까. 언제면, 오 언제면?> _ 2장에서
♝ 최후의 인간!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조르바는 벌써 나가고 없었다. 추워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머리 위로 손을 뻗치
고 서가에서 좋아서 갖고 다니던 책 한 권을 뽑아내었다. 말라르메의 시집이었다. 천천히 마음 내키는 대로 읽었다. 읽다가
책을 닫았다가 다시 펼쳤다. 그러다 나는 결국 그 책을 놓고 말았다. 그의 시는 핏기도 없고 냄새도 없고 인간의 본질을 비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경험한 느낌이었다. 그의 시가 창백한 진공 속의 공허한 언어로 보였던 것이다. 박테리아 한 마리
없는 완벽한 증류수였지만 영양분 역시 하나 없는 물 같은 것, 요컨대 생명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창조의 섬광을 상실한 종교에서 제신(諸神)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 벽면을 치장하는 시적 모티브나 예배 용품으로 전락했다.
말라르메의 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대지와 씨앗을 품은 심장의 열화 같은 호흡이 완벽한 지적 놀음, 교묘
하면서도 덧없는 구조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다시 시집을 열고 읽어 보았다. 이런 시들이 어째서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던 것일까! 순수시! 인생은 한 방울
의 피도 방해할 수 없는 밝고 투명한 놀음이 되어 있었다.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사
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승화시켜 보라. 정신의 도가니 속에서 연금술의 과
정을 좇아 순화시키고 증발시켜 보라.
전에는 그토록 나를 매혹하던 시편들이 그날 아침에는 느닷없이 지적인 광대놀음, 세련된 사기극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가!
문명의 사양(斜陽)은 그렇게 되게 마련인 것이다. 인간의 고뇌는 정교하게 짠 속임수(순수시, 순수 음악, 순수사고) 속에서
그렇게 끝나게 마련인 것이다. 최후의 인간(모든 믿음에서 모든 환상에서 해방된, 그래서 기대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어
진)은 자신의 원료가 되어 정신을 산출한 진흙이며, 이 정신이 뿌리내리고 수액을 빨아올릴 토양은 아무 데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인간이다. 최후의 인간은 자신을 비운 인간이다. 그 몸에는 씨앗도 똥도 피도 없다. 모든 것은 언어가 되고, 언어의
집합은 음악이 되어도 최후의 인간은 거기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절대의 고독 속에서 음악을 침묵으로, 수학적인
방정식으로 환원시킨다.
나는 놀랐다. 「붓다가 그 최후의 인간이다!」 나는 부르짖었다.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다. 붓다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붓다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空)이다. 「네 육신을 비워라, 네 정신을 비워라, 네
가슴을 비워라!」
나는 외친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에서 물은 흐르지 않고 풀은 자라지 않으며 아기는 태어나지 않는다.
나는 생각했다. <내 기필코 언어를 동원하고 언어의 주술적인 힘을 빌리고 그 마술적인 율동에 의지하여 그를 포위 공격하
고 무찔러 내 오장 육부에서 내쫓고 말리라> 하고 (……)
나는 단호하게 원고를 잡았다. 내 목표를 정한 이상 찔러야 할 곳을 알게 되었던 셈이다. 붓다는 최후의 인간이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 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이 숨이 가뿐 사
람은 우리에게 너무 빨리 찾아온 것이었다. 우리는 되도록 빨리 그를 내몰아야 했다. _12장에서
♝ 정신의 갱도 속으로!
나는 갱도를 나와 바다 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에서 들고 갔던 책을 펼쳤다. 배가 고팠지만 나는 그걸 잊어버렸다. <명상도
일종의 광산이 아닌가, 그럼 나도 파야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신의 거대한 갱도 속으로 들어갔다.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책이었다. 티베트의 눈 덮인 산, 저 신비스러운 수도원에서 담황색 가사 차림으로 정신을 집중시켜
하늘에 충만한 정기(精氣)를 자기 마음대로 어떤 형상으로 바꾸는, 묵상의 수도사들 이야기였다.
높은 산꼭대기, 공기는 정기로 충만해 있다. 인간사 부질없는 소음이 그 높은 곳까지 닿을 리 만무하다. 위대한 금욕주의자
는 열여섯에서 열여덟 살까지의 제자들을 이끌고 한밤중에 산속의 얼어붙은 호수로 간다. 그들은 옷을 벗고 얼음을 깬 다음
옷을 그 속에 넣어 얼리고 다시 입어, 입은 채 말린다. 그러고는 다시 적시어 또 헌 번 체온으로 마르게 한다. 계속해서 그들
은 일곱 번을 이렇게 한다. 그런 다음 아침예불을 위해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들은 4천5백 내지 5천4백 미터에 이
르는 산꼭대기로 오른다. 거기에 앉아 깊이, 그리고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이다. 웃통을 벗어부치고 있지만 추위를 모른다.
찬물을 담은 바루를 들고 그 안을 바라보며 모든 힘을 거기 집중시키면 물이 끓는다. 그것으로 차를 준비하는 것이다.
위대한 금욕주의자는 제자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가르친다.
「자기 자신 안에 행복이 근원을 갖지 않은 자에게 화 있을 진저!」
「남을 즐겁게 하려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 진저!」
어둠이 내려 책을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 이 모든 허깨비들에게서 풀려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붓다,
하느님, 조국, 이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지 못하는 자에게 화있을진저…….
어느새 바다는 검게 변해 있었다. 어린 달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개들이 슬프게 짖자 계곡 전체가 그 소리
에 화답했다.
조르바가 진흙을 잔뜩 뒤집어쓰고 나타났다. 셔츠가 갈가리 찢긴 채 그의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가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오늘 일은 일사천리…… 꽤 많이 했지요.」 그가 기분이 좋은 듯이 말했다. _16장에서
*가사(袈裟) : 승려의 법의.
*바루 :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는 독특한 식기(食器).
♝ 인간!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고 있었다.
「……오, 우리 할배…… 하느님이 할배의 유해를 축복하소서!」 얼마 후에 그가 말을 이었다. 「……할배 역시 나와 똑같은
난봉꾼이었지요. 그러나 이 늙은 난봉꾼께서는 성지를 순례하시고 하지ⁱ가 되었답니다. 할배가 돌아오시자, 평생 좋은 일 한
토막 해본 적이 있기는커녕, 알아주는 염소 도둑인 옛 친구 한 분이 그러셨다나. <그래, 이 친구야, 성지를 다녀왔으니 내 몫
으로 성스러운 십자가 한 조각이라도 뜯어 왔으렷다?> 할배 왈. <이 사람아, 우리가 어떤 사이라고 빈손으로 오겠나. 오늘밤
우리 집으로 오되 신부님도 모시고 오게나. 내가 자네에게 이 성스러운 물건을 건넬 때 함께 축복해 주시도록 말일세. 그리
고 애저구이 한 마리랑 포도주도 한 통 가져오게. 그래야 재수가 있다네.>」
그날 밤 할배는 집으로 오셔서 벌레 먹은 문설주에서 나무를 조금 떼어 냈어요. 쌀알 하나보다 크지는 않았습니다. 할아버지
는 이걸 보드라운 천 조각에 싸시더니 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뜨리고는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 문제의 사나이가 애저구이와
포도주를 들고 신부님과 함께 왔습니다. 신부님은 스톨을 꺼내 입으시고 축복했습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두목, 문제의 사
나이는 이 귀한 나뭇조각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는 끈으로 꿰어 목에다 걸었습니다. 그러고는 그날부터 영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이 싹 달라진 것입니다. 그는 산으로 들어가 아르마톨과 클레프트 산적 떼에 가담하여 터키 마을을 불태
우는 데 일익을 맡았습니다. 뿐입니까? 겁 없이 총탄의 소나기 속을 누볐습니다.
조르바는 껄껄 웃었다.
「……만사는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럼 낡은 문설주에서 떼어 낸 나무 조각도 성물(聖物)」이
될 수 있습니다.
「전쟁해 본 적 있어요, 조르바?」
「내 말은, 나라를 위해서 싸워 본 적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다른 이야기 좀 할 수 없나요? 까짓 터무니없는 수작은 깨끗이 끝나고 깨끗이 잊은 지 오랩니다.」
「조르바, 터무니없는 수작이라니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조국을 그렇게 부르다니.」
조르바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도대체 무슨 덜 익은 수작이오? 교장선생님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겠구먼.」
「그래요, 당신은 나를 그 잘난 머리로 이해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
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조르바, 어물쩍 내 질문을 피하지 마시고! 내 보기에는 당신은 조국 같은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은데, 어때요? 그
런가요?」
그는 화를 내며 주먹으로 석유 드럼통으로 만든 벽을 꽝 갈겼다.
「두목, 당신 앞에 있는 사람으로 말하면……, 한때는 제 대가리 털로, 터키 놈들이 이슬람 사원으로 쓰고 있던 성 소피아 성
당 장식을 엮어 목에 부적처럼 차고 다녔습니다요. 그리요, 두목, 내가 바로 그 사람이오. 파블로스 멜라스²와 함께 마케도니
아 산맥을 떠돌아다닌 적도 있소.」
그는 셔츠를 열고 바지를 내렸다.
흉터와 탄흔과 칼 흠집으로 그의 몸은 흡사 여과기(濾過器) 같았다.
「……구역질이 다 나는군. 사람이라는 게 언제쯤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하게 될까요? 우리는 바지를 입고 셔츠를 걸치고 칼라
를 세우고 모자를 씁니다만 그래 봐야 노새 새끼, 여우 새끼, 이리 새끼, 돼지 새끼를 못 면해요. 하느님 형상으로 만들어졌
다고? 누가, 우리가?」
쓰라린 추억이 가슴으로 돌아오는 것 같았다.
「……당신이 어디를 만지든 나는 소리를 지를 겁니다. 내 몸은 상처와 옹이투성입니다.
어느 날 석양 무렵 나는 불가리아 마을로 내려와 마구간에 숨었습니다. 그게 바로 신부의 집이었는데…… 신부도 신부 나름
이지 잔인하고 무자비한 불가리아 비정규군 신부의 집이었단 말입니다. 밤이 되니까 이자는 법복을 벗더니 양치기 복장으로
갈아입고는 총을 들고 이웃 그리스인들의 마을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자는 새벽에 진흙과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와서는 다
시 신도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한답시고 교회로 갑디다. 내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이 신부는 잠자는 그리스인 교장 선생을 살
해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부네 집 마구간에서 기다렸던 거지요. 저녁때가 되자 신부는 양에게 풀을 먹이려고 마구
간으로 오더군요. 나는 이놈을 덮쳐 양 목 따듯이 멱을 따버렸습니다. 귀도 잘라 내 주머니에 넣었지요. 아시겠지만 나는 그
즈음 불가리아 놈들의 귀를 수집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신부 놈의 귀를 잘라 가지고 튄 겁니다.
며칠 뒤 나는 다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정오쯤 되었던가? 이번에는 행상으로 잠입한 거지요. 총은 산에다 숨겨 두고 동료
들을 위해 빵과 소금과 장화를 사러 갔던 겁니다. 거기서 나는 집 앞에서 노는 애들 다섯을 만났습니다. 이 애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었는데 맨발로 손에 손을 잡고 구걸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뉘 집 아이들이야?> 내가 불가리아 말로 물었지요.
<신부 댁 애들입니다. 아버지는 며칠 전 마구간에서 목이 잘렸습니다.> 이러는 게 아니겠어요.
눈물이 핑 돌고 지구가 연자매 돌듯이 빙글빙글 돕디다.
내가 벽을 지고 앉자 그제야 멈추던군요.
<이리 오너라. 예들아. 내 가까이 오렴.>
나는 이렇게 말하며 지갑을 꺼냈습니다. 터키 파운드랑 그리스 돈이 가득했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돈을 몽땅 바닥에
쏟았지요.
<저, 가져가거라. 마음대로 가지렴.> 내가 소리쳤습니다.
애들이 우르르 땅에 엎드리더니 허겁지겁 돈을 집더군요.
몽땅 털어 주었지요. 마을로 빠져나오자 나는 셔츠 앞을 헤쳐 애써 땋은 성 소피아 성당 장식을 떼어 내어 갈기갈기 찢어발
기고는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지요.
지금도 도망치고 있습니다…….」
「……이로써 나는 구제를 받은 겁니다.」
「조국으로부터 구제받았다는 겁니까?」
「그럼요, 내 조국이지요.」 그는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 조국으로부터 구제받고, 신부들로부터 구제받고, 돈으로부터 구제받았습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짐을 덜었습니
다. 자,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해탈의 길을 찾은 겁니다. 나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조르바의 두 눈이 빛나면서 큰 입은 호탕하게 웃었다.
「……내게는, 저건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
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짓도 하고 강간
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다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
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 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
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까.
그런데, 여자라면…… 젠장, 눈이 빠지게 울고 싶어집니다요. 두목, 당신은 내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고 놀리지요. 내가 어
떻게 이것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젖통만 쥐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손을 들어 버리는 이 가엾은 것들을 말
입니다.
어느 해 또 다른 불가리아인 마을로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의 늙은이 하나가(그 마을의 장로였지요) 나를 알
아보고 딴 놈들을 불렀습니다. 놈들은 내가 투숙한 집을 포위했습니다. 나는 발코니를 통해 지붕에서 지붕으로 뛰어 달아났
지요. 마침 달이 떠 있어서 나는 고양이처럼 발코니에서 발코니로 뛰어다녔습니다. 놈들은 내 그림자를 찾고는 지붕으로 뛰
어 올라와 총질을 해댑니다. 자, 이러니 어쩌겠어요? 나는 마당으로 뛰어내렸는데…… 보니까, 불가리아 여자 하나가 침대
위에서 자고 있더군요. 여자는 잠옷 바람으로 일어나 나를 보고는 소리를 지르려고 했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며 속삭였지요.
<자비를, 자비를 베푸시오. 제발 소릴랑 지르지 마오!> 그러고는 젖통을 움켜쥐었지요. 여자는 창백해지더니 반쯤 까무러치
는 겁니다.
<안으로 들어와요. 그래야 남의 눈에 띄지 않지요.> 여자가 속삭였습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여자는 내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묻더군요. <당신은 그리스인지요?> <그렇소. 그리스인이오. 나
를 배신하지 마오.> 나는 여자의 허리를 안았지요.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오냐, 조르바, 이 개새끼야. 네 앞에 여
자가 있다. 인간이라는 게 무엇이더냐? 여자가 무엇인가? 불가리아인이면 어떻고 그리스인이면 어떻고 파푸아인이면 어떠
하냐. 중요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여자도 인간이란 것이다. 입이 있고 젖가슴이 있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인간이란 것이다.
죽이는 게 지겹지도 않으냐, 염병할 놈의 돼지 새끼야!>
여자와 온기를 나누면서 내가 내내 한 생각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친개 같은 내 조국이 나를 평화롭게 내버려두었
을 것 같습니까? 나는 이튿날 아침 불가리아 여자가 주는 옷으로 갈아입고 꺼졌지요. 과부였던 겁니다. 여자는 죽은 서방 옷
을 장롱에서 꺼내 주면서 내 무릎을 붙잡고 돌아오라고 통사정을 합디다.
아, 물론 돌아갔지요. 그 이튿날 밤에. 그 시절에는 나도 애국자였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애국자였지요. 나는 파라핀 한
통을 들고 들어가 마을에다 불을 싸질렀습니다. 이 불쌍한 계집도 딴 것들과 함께 타 죽었을 겁니다. 이름이 루드밀라라고
했지요.」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
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
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나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날 밤 처음 들은 꾀꼬리 우는 소리는 우리 고독을 더할 나위 없는 슬픔으로 채웠다.
ⁱ 하지 : 메카나 예루살렘을 순례한 사람.
² 파블로스 멜라스 : 불가리아 비정규군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유명한 그리스 장교. _20장에서
♝ 바다, 여자, 술, 그리고 힘든 노동!
나는 단호하게 마을 쪽으로 돌아서 걸었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봄의 깊은 숨결을 만끽했다. 저녁 하늘의 별이 까불거리며
춤추기 시작했다. 「……그렇다, 바다, 여자, 술, 그리고 힘든 노동! 일과 술과 사랑에 자신을 던져 넣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
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것이 젊음이란 것이다!」 나는 조르바의 말을 되풀이함으로써 나 자신을 격려하며 걸음을 재촉했
다.
그러나 한순간 나는 목적지에 이르기라도 한 듯이 걸음을 멈추었다. 어딜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가부의 뜰 앞에
이르러 있었다. 갈대와 사시배나무 뒤에서 여자의 부드러운 콧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갈대를 헤쳤다. 거
기 오렌지나무 밑에 검은 옷을 입은 여자가 엄청나게 부풀어 오른 유방을 흔들고 있었다. 여자는 꽃가지를 꺾으며 노래를 부
르고 있었다.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도 나는 반쯤 드러난 흰 유방을 볼 수 있었다.
숨이 탁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여자도 그걸 알고 있다. 여자에게 사내란 얼마나 가련하고 불합
리하고 무방비 상태인 동물일 것인가! 여자는 곤충의 암컷((사마귀 암컷, 방아깨비 암컷, 거미 암컷)처럼 크고 탐욕스러워 보
였다. 그 여자 역시 새벽이면 수컷을 잡아먹을 것 같았다.
여자가 내 시선을 의식했던 것일까? 여자는 갑자기 노래를 거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의 시선이 만났다. 나는 무릎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갈대숲에서 호랑이라도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세요?」 여자가 주름 잡힌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고는 목도리로 가슴을 가렸다.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돌아서고 싶었다. 그러나 조르바의 말이 내 머리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었다. <바다, 여자, 술…….>
「납니다. 들어가게 해주세요.」 내가 대답했다.
나는 공포에 사로잡힌 채로 이 한마디를 겨우 했다. 그러나 돌아서고 싶었다. 몹시 창피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격려했다.
「나라니, 내가 누구예요?」
부인이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다가와 허리를 구부였다. 반쯤 감긴 여자의 눈이 내게로 다가와 내 얼굴을 훑
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인 채로 다가왔다.
갑자기 여자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혀끝을 내밀고 여자는 제 입술을 빨았다.
「사장님이시군요!」 여자가 부드러운 소리로 말했다.
여자는 다시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기세였다.
「사장님이시죠?」 여자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소!」
「들어오세요.」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조르바는 집으로 돌아와 오두막 앞 해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내가 나타나자 조르바는 고개를 돌리고 나를 관찰했다. 그러더니 목을 쑥 빼고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활
짝 밝아졌다. 내게서 과부의 냄새를 맡는 것이었다.
천천히 일어난 그는 활짝 웃으면서 팔을 벌리고 나를 껴안았다.
「축복을 받으시오!」
나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나는 조용히 규칙 바르게 호흡하는 바다의 숨소리를 들었다. 나도 갈매기처럼 파도 위에 뜬
채 파도의 율동으로 오르내리는 기분이었다.
정오쯤 잠에서 깨어났다.
내존재의 심연에서 전날 밤에 느낀 즐거움이 솟아올라 필경은 흙으로 빚어졌을 내 육체라는 대지에 물을 대어 주는 것 같았
다. 그날 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영혼이 곧 육체, 다소 변화무쌍하고 투명하고 더 자유롭긴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
았다. 그리고 다소 과장되어 있고 긴 여행으로 지치고 물려받은 짐에 짓눌려 있기는 하지만 역시 육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돌연 나는 몸을 일으켜 오두막으로 달려갔다. 나는 붓다의 원고를 폈다. 원고는 완성되어 있었다. 최후의 봇다는 꽃피는 나
무 밑에 누워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다섯 가지 요소(흙, 물, 불, 공기, 정신)에게 해제(解除)를 명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던 이런 이미지에 시달릴 필요는 없었다. 나는 뛰어넘은 터였다. 붓다에 대한 예배는 완성된 셈이었다.
나 역시 손을 들어 붓다에게 해제를 명한 것이었다.
나는 뭉툿한 끈을 찾아 원고를 묶었다. 힘센 적의 팔다리를 묶어 버린 듯한 야릇한 쾌감이, 세상을 떠난 사랑하는 사람의 시
신을 무덤에서 귀신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꽁꽁 묶어 버리고 난 야만인 같은 야릇한 쾌감이 나를 휩쌌다. _ 21장에서
♝ 케이블 고가선 개통식 실패하고...
살아 있는 한 4월 말일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케이블 고가선의 준비는 끝났다. 철탑과 케이블과 도르래는 아침 햇살에 번쩍
거렸다. 거대한 소나무 목재는 산꼭대기에 쌓여 있었고 인부들은 그걸 케이블에 매달아 바다로 내려 보내려고 신호를 기다
리고 있었다.
산 위 출발점의 철탑 꼭대기에는 커다란 그리스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똑같은 국기는 바닷가에도 게양되어 있었다. 오두
막 앞에 조르바는 조그만 포도주 통까지 준비해 둔 다음이었다. 그 옆에서 인부들은 꼬챙이에 살진 양을 꿰어 굽고 있었다.
축도와 개통식이 끝나면 손님들은 술을 마시며 우리의 성공을 축복해 줄 참이었다. (……)
「수도원장님, 개통식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성처녀께서 우리 일을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태양이 이미 중천으로 올라 꽤 더웠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수도승들은 국기가 게양된 철탑을 둘러쌌다. 그들은 널찍한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고 <정초식(定礎式)>에 올리는 기도문을 읊었다.
「주여, 오, 주여, 이 건물을 반석 위에 세우시어 물도 바람도 흔들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은 성수 살포기를 놋그릇 속
에 담갔다가 철탑, 케이블, 도르래, 조르바, 나, 농부들, 일꾼들, 바다 할 것 없이 아무 데나 뿌렸다. (……)
고가선은 통나무 세 개로 시운전하게 되어 있었다. 즉 삼위일체의 숫자에 맞춤 것이었다. 그러나 조르바는 이를 고쳐 복수의
성처녀에 대한 감사의 징표로 네 번 시운전하기로 했다.
「성부, 성자, 성신과 성처녀의 이름으로 인하여 하나이다!」 그들이 웅얼거렸다.
조르바는 단숨에 첫 번째 철탑 아래로 달려가 줄을 당겨 기를 내렸다. 산 위의 인부들이 기다리고 있던 신호였다. 구경꾼들
은 뒤로 물러서며 산 위를 바라보았다.
「성부의 이름으로!」 수도원장이 외쳤다.
그때 일어나 일은 필설로 표현할 수 없다. 파국은 벼락처럼 우리를 덮쳤다. 우리에겐 도망칠 틈도 없었다. 구조물 전체가 휘
청거렸다. 인부들이 케이블에다 매단 통나무엔 흡사 악령 같은 가속도가 붙었다. 불꽃과 나뭇조각이 공중으로 날렸다. 몇 초
후 그 나무가 바닥에 이르렀을 때는 나무가 아니라 아예 통숯이었다. (……)
조르바가 손을 들고 외쳤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첫 번째는 다 그런 것 아닙니까. 기계가 이제 길이 들었습니다……. 자 보세요!」
그가 기를 올려 두 번째 신호를 보내고는 도망쳤다.
「성자의 이름으로!」 수도원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두 번째 통나무가 풀려났다. 철탑이 흔들리며 통나무에 속도가 붙어 흡사 돌고래처럼 뛰며 똑바로 우리 앞으로 돌진해왔다.
그러나 계속 내려오진 못했다. 내려오다 말고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놈의 것!」 조르바가 수염을 물어뜯으며 뇌까렸다. 「……경사면이 아직 제대로 안 된 건가!」
그는 철탑 아래로 달려가 난폭하게 다시 한 번 깃발을 내렸다. 세 번째 시도였다. 수도승들은 노새 뒤에 숨어 성호를 그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쪽 발을 들고 도망칠 준비를 단단히 하고 기다렸다.
「성신의 이름으로!」 수도원장이 도망칠 준비로 옷자락을 단단히 거머쥐고 떠듬거렸다.
세 번째 통나무는 엄청나게 컸다. 산꼭대기에서 풀어 놓자마자 통나무는 벽력같은 소리를 내었다.
「모두 엎드려! 빌어먹을 놈의 것!」 조르바가 도망치며 소리쳤다. 수도승들은 땅바닥에 엎드렸고 마을 사람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통나무는 한차례 펄쩍 뛰더니 케이블에 걸린 채 뒤집어지며 불꽃의 소나기를 날렸다. 그러고는 눈 깜빡할 사이에 무시무시
한 속도로 산을 내려와 해변 모래사장을 넘어 바다에 처박히며 엄청난 포말을 날렸다.
철탑은 무섭게 흔들리고 있었다. 몇 개는 이미 기울어지고 있었다. 노새들은 고삐를 끊고 도망쳤다.
「아무것도 아니오. 걱정할 건 하나도 없어.」 조르바가 주위 사람들에게 악을 썼다. 「……이제 진짜 기계가 길들었어. 제대
로 될 거요!」
그가 다시 한 번 기를 올렸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그를 보며 결과를 애타게 기다렸다.
「<복수의 성처녀> 이름으로!」 수도원장이 바위 뒤로 도망치며 소리쳤다.
네 번째 통나무가 풀려났다. 다시 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오며 철탑은 카드장처럼 차례차례 쓰러졌다.
「주여 긍련히 여기소서, 주여 긍련히 여기소서!」 마을 사람들과 인부들과 수도승들이 도망가면서 외쳤다.
통나무 파편이 데메트리오스의 허벅지에 상처를 입혔고 또 하나는 수도원장의 눈을 뺄 뻔했다. 마을 사람들은 사라지고 없
었다.
수도승들은 성처녀의 성상을 거두고 비명을 지르는 데메트리오스를 부축하더니 노새를 모아 올라타고 퇴각했다. 꼬챙이를
돌리며 양을 굽고 있던 인부들도 혼비백산 달아나 버려 고기는 타기 시작했다.
「양고기가 숯이 되어 버릴라!」 조르바가 이렇게 소리치며 꼬챙이 쪽으로 달려갔다.
나도 그의 옆에 앉았다. 해변에는 우리 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가버린 것이었다.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저하
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는 내가 이 파국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파국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이프를 들어 다시 양고기를 베어 맛을 보고는 재빨리 고기를 들어내어 꼬챙이째 나무에다 기대어 놓았다.
「잘 구워 졌어요. 잘 익었는데요, 두목. 한 점 해보시겠어요?」
「빵과 술도 가져와요. 배가 고픈데.」 (……)
우리는 마시고 양고기를 깨끗이 먹어 치웠다. 그러고 나니 세상이 좀 더 밝아진 것 같았다. 바다는 푸근해 보였고 대지는 배
의 갑판처럼 일렁거렸으며 두 마리 갈매기는 사람들처럼 뭐라고 서로 재잘거리며 자갈밭은 걸어갔다.
나는 일어섰다.
「조르바! 이리 와 보세요! 춤 좀 가르쳐 주세요!」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 이리 오쇼!」
「조르바, 갑시다. 내 인생은 바뀌었어요. 자, 놉시다!」
「처음엔 제임베키코를 가르쳐 드리지. 이건 아주거친 군대식 춤이지요. 게릴라 노릇 할 때, 출전하기 전에는 늘 이 춤을 추
곤 했지요.」 (……)
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고 엄숙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틀린 부분을 고쳐주었다.
나는 차츰 대담해졌다. 내 가슴은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브라보! 아주 잘하시는데!」 조르바는 박자를 맞추느라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브라보, 젊은이! 종이와 잉크는 지옥
으로나 보내 벼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그는 맨발로 자갈밭을 짓이기며 손뼉을 쳤다.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
천사 같았다. 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밖
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
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날램,
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그의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다 인간의 신들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는 춤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흩어진 케이블 선과 무너진 철탑 더미를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면서 그림자가 늘어났다. 조르
바는 나를 돌아보며 특유의 몸짓을 해보이며 손바닥으로 입술을 가렸다.
「두목, 아까 불꽃의 소낙비 보았소?」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조르바는 내게 다가와 끌어안고 키스했다.
우리는 웃으면서 한동안 장난으로 씨름을 했다. 그러다 바닥에 널브러져 자갈밭 위에 네 활개를 뻗었고 이윽고 서로의 필을
베고 곯아떨어졌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해변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내 심장은 가슴속에서 뛰고 있었다. 내 생애 그 같은 기쁨은
누려 본 적이 없었다. 예사 기쁨이 아닌, 숭고하면서도 이상야릇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움 같은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닐가 서ᅟᅥᆯ명할 수 있는 모든 것과 극을 이루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
를 모두 잃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
이지 않는 강력한 적(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
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
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자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_25장에서
♝ 아이기나 섬의 카잔차키스 집에서 ‘그리스인 조르바’의 원고를...!
어느 날 밤, 나는 아이기나 섬의 바닷가 내 집에 홀로 앉아 있었다. 나는 행복했다. 내 창문은 바다 쪽으로 열려 있어서 달빛
이 흘러 들어왔고 바다는 느긋하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수영을 느긋하게 한 나머지 깊이 잠들 수 있었다.
새벽이 되기 조금 전 그 행복의 안개 속에서 조르바가 꿈으로 나타났다. 그가 무슨 말을 했던지, 왜 왔던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깨었을 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까닭 모르게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나는 그와 더불어 크레타 해안에서 함께 보
냈던 생활을 재구성하고, 기억을 더듬어, 조르바가 내 마음에다 뿌렸던 말, 절규, 몸짓, 눈물, 춤을 모아 보존하고 싶다는 욕
망을 주체할 수 없었다. (…… )
한동안 나는, 조르바의 추억을 모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주저했다. 유치한 공포가 나를 엄습했다.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한다면 이것은 조르바가 죽음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징후이다. 나는 내게 이 일을 시키는 저 신비로운 소나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틀, 사흘, 일주일을 버티었다. 나는 다른 걸 쓰거나 하루 종일 나돌아 다니거나 책을 읽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따
돌릴 때마다 쓰는 나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조르바를 대신하여 이 엄청난 격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어느 날 나는 바닷가 우리 집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정오경이었다. 태양은 뜨거웠고 나는 앞에 보이는 살라미스 섬의 민둥
민둥한 옆구리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끌리어 테라스의 뜨겁게 달아오른 판석 위에다 종이
를 펼쳐 놓고 조르바의 말과 행적을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과거를 현재로 재현시키고 조르바를 기억해 내어 실체 그대로 소생시키면서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 그가 사라지면 그
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가능한 이 옛 친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나갔다.
나는, 꿈에 본 조상의 모습을 동굴에다 생생하게 그려 놓으면 조상들의 혼이 자기 몸인 줄 알고 그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믿던 아프리카 야만족의 마술사처럼 일했다.
몇 주일 만에 조르바에 대한 나의 연대기는 완성되었다. 마지막 날 나는 첫날처럼 테라스에 앉아 늦은 오후의 바다를 바라보
고 있었다. 내 무릎 위에는 탈고한 원고가 놓여 있었다. 나는 짐 한 덩어리를 내려놓은 것처럼 느긋했다. 갓 나온 아기를 안
은 여자 같은 기분이었다.
펠로폰네소스의 산 뒤로 붉은 해가 질 즈음, 시내에서 내 우편물을 날라다 주는 농가의 계집아이 술라가 테라스로 올라왔다.
술라는 편지 한 장을 내밀고는 달아났다……. 나는 알았다. 적어도 나는 알 것 같았다. 편지를 뜯어보고 나는 날뛰지도 소리
지르지도 않았다.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내 생각 그대로였다. 나는 원고를 무릎 위에 올리고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그 편지
를 받으리라고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용히 나는 편지를 읽었다. 세르비아의 스코플리예 가까운 마을에서 온 것으로 마구잡이 독일어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편
지를 번역했다.
저는 이 마을 교장으로 이곳 동광 주인인 알렉시스 조르바가 지난 일요일 오후 6시에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전하고
자 이 글을 올립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교장 선생, 이리 좀 오시오. 내겐 그리스에 친구가 하나 있소. 내가 죽거든 편지를 좀 써주시어,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말짱했고 그 사람을 생각하더라고 전해주시오. 그리고 나는 무슨 짓을 했건 후회는 않더라고 해주시오. 그 사람의 건투를 빌
고 이제 좀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더라고 전해 주시오.
잠깐만 더 들어요.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 성사를 하러 오거든 빨리 꺼지는 건 물론이고 온 김에 저주나 잔뜩 내
려 주고 꺼지라고 해요. 내 평생 별짓을 다 해보았지만 아직도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 년을 살아야 하는 건
데…….」
이게 그분의 유언입니다. 유언이 끝나자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시트를 걷어붙이며 일어서려고 했습니다. 우리가(부인인 류
바, 저, 이웃의 장정 몇 사람이) 달려가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모두를 한쪽으로 밀어붙이고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창
문가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창틀을 거머쥐고 먼 산을 바라보다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습니다. 이렇게 창틀
에 손톱을 박고 서 있을 동안 죽음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_마지막 26장에서
/ 니코스 카잔차키스 장편소설 | 이윤기 옮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20세기의 오디세우스
☞ 호쾌한 기인 조르바의 어록
1.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손가락이 자꾸 거치적
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려쳐 잘라 버렸어요.
2. 하느님요? 자비로우시고말고요. 하지만 여자가 잠자리로 꾀는데도 이거 거절하는 자는 용서하시지 않을 걸요. 거절당한
여자는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쉴 테고, 그 한숨 소리가 하느님 귀에 들어가면, 그자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쌓았대도 절
대 용서하시지 않을 거라고요.
3. 도 닦는 데 방해가 된다고 그걸 잘랐어? 이 병신아, 그선 장애물이 아니라 열쇠야, 열쇠.
4. 결혼 말인가요? 공식적으로는 한 번 했지요. 비공식적으로는 천 번, 아니, 3천 번쯤 될 거요. 정확하게 몇 번인지 내가 어
떻게 알아요? 수탉이 장부 가지고 다니는 거 봤어요?
5. 확대경으로 보면 물속에 벌레가 우글우글하대요. 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 확 부숴 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6. 두목, 당신의 그 많은 책 쌓아 놓고 불이나 싸질러 버리시구려, 그러면 알아요? 혹 인간이 될지?
☞ 카잔차키스가 자기 영혼에 깊은 골을 남긴 사람으로 호메로스, 베르그송, 니체 다음으로 꼽은 사람이 조르바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서전 『영혼의 자서전』에서 실존 인물 조르바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힌두교도들은 ⟪구루(사부)⟫라고 부르고 수도승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한 사람 선택해야 했다면 나
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했을 것이다……. 주린 영혼을 채우기 위해 오랜 세월 책으로부터 빨아들인 영양분의 질량과, 겨우
몇 달 사이에 조르바로부터 느낀 자유의 질량을 돌이켜 볼 때마다 책으로 보낸 세월이 억울해서 나는 격분과 마음의 쓰라림
을 견디지 못한다. 둘이서 벌인 사업이 거덜 난 날 우리는 해변에 마주 앉았다. 조르바는 숨이 막혔던지 벌떡 일어나 춤을 추
었다. 그는 중력에 저항이라도 하는 듯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면서 소리를 질렀다.>
호쾌하고 농탕한 사나이 조르바는, 떠도는 인간 카잔차키스가 한동안 쉬어 가고 싶어 하던 구원의 오아시스였다.
☞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마련해 놓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 <거룩한 인간>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카잔차키스를 이렇게 추억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나에게 감동을 준 이는 없다. 그의 작품은 깊고, 지니는 가치는 이중적이다. 이 세상에서 그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알고, 많은 것을 생산하고 갔다.>
_소설의 부록 <20세기의 오디세우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