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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Hill 2014. 8.6. songbird
Lin Hai (林海)
林海는 중국과 대만에서 최고의 주목을 받고 있는 피아니스트다.
1969년 중국 복건성에서 태어난 린 하이는
작곡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4세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고
중국 음악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전국 경연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정규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과정을 거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다.
대학 2학년 때, 미국의 반 클라이번(Van Cliburn) 국제 피아노 콩쿨에
중국을 대표하여 참가하였는데 중국 유사 이래 준결승까지 오른 최초의 중국인으로
전도가 유망한 클래식 연주자로 촉망을 받았다.
정통 클래식 연주자에서 뉴 에이지 뮤지션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Lin Hai.
오른손으로는 동양, 왼손으로는 서양의 정서를 담아내고 있으며
쇼팽의 맑음과 드뷔시의 나른한 우아함이 깃들여진 연주자...
세상을 빛낸 음악가들에 비유하며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그에 대한 음악 평론가들의 평들이다.
세계 음악계에 과감히 출사표를 던진 젊은 피아니스트 린하이는
중국음악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대변하는 대표적 아티스트이다.
뉴에지에서부터 모던음악, 재즈 등 다양한 장르를 어우르는 깨끗하고 맑은 피아노의 선율은
따뜻함, 편안하고 고요함... 때로는 참신한 변화무쌍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접목하여 우리의 일상에 가깝게 스며드는 음악이다.
‘ Loss’는 그의 앨범 <Wings of Silence>에 수록된 곡이다.
상실(Loss)
어떤 이유에서든 아픈 언어다.
잃는다는 것,
떠난다는 것,
나에게서 무언가가 사라져 가는....
잡을 수 없어 상실이고
돌아올 수 없어... 영원한 상실이다.
가고 없지만
슬픔으로 남은 자리,
추억이 일렁이는 듯... 울림이 하도 맑아서 슬퍼지는 피아노.
가슴이 무너져 내리 듯
지울 수 없는 그리움이 통째로 들어와 깊이 여울져 흐르는 첼로...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지만
깊이 자리한 그리운 사랑인.... 상실이다.
내 곁에 남은 기인 그림자, 그대이려니...!
<황혼에 서서>
어영도의 대표작품 중의 하나다.
청마는 같지만
그의 곁을 맴돌며 떠나질 못하는 한 세월의 그리운 마음,
네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세월은 덧없이 흐른다 해도
언제나 변함없는 나의 사랑,
아픈 그리움으로 견뎌내는 상실의 한 세월이라.
그윽한 깊이와 무게로 다가오는 그리움.
시조의 운율이 이런 깊이인 줄이야...!
영원한 그리움이다.
< 사 랑 >
이영도(李永道. 1916-1976)는 누구인가.
그녀의 시 세계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잊혀져가는 고유의 우리 가락을
시조에서 재현하여 현대적으로 승화시키며
간결하고 섬세한 표현으로 여성의 맑고 경건한 마음, 기다림 등의 정서를 다스리며
관조적인 인생관을 보여준다.
‘죽순’에 시조 ‘제야’로 등단하여 통영여중, 부산 남성여고, 마산의 성지여고,
부산여자 대학(현 신라대학)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부산 어린이 회관도 운영하였다.
한국 시조 시인 협회 부회장과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현대시학> 편집위원 등을 지냈다.
시집으로는 <청저집(1954)>, <언약>, 오라버니인 이호우와 공동시조집 <석류(1968)>등을 발간하고
수필집으로 <춘근집>, <비둘기내리는 뜨락>, <애정은 기도처럼>,
<나의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머나먼 사념의 길목>등 일곱권이 있으며 수필가로서의 명성도 크게 이루었다.
부산의 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이영도는
1966년에 <말없이 행동하는 문화인에게> 수여하는 취지의
눌원 문화상(訥園文化賞)을 수상하였다.
청마 유치환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
이영도는 20년간 이어지며 이영도에게 남긴 5000여통의 편지들 가운데
200통을 간추려 청마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하였다.
청마가 운명하자마자 연서를 상품화한다는 비난도 감수하며
이영도가 예의 서간집을 펴낸 것은
청마의 이미지 훼손을 막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만5천부나 팔렸던 당시로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 베스트셀러의 서간깁이다.
그 수익금을 바탕으로 자신의 아호를 딴 정운 문학상(丁芸 文學賞)을 제정하여
재능 있는 시조 시인들을 지도하면서 문단에 등단시키며
시조시인을 양성하는 데에 큰 업적을 남긴 이영도다.
초기엔 아호를 정향(丁香)으로 쓰다가 후에 정운(丁芸)으로 바꾸었다.
여성스럽고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 정갈한 몸가짐의 이영도,
그녀를 기리는 평전도 몇 권 있다.
이영도(1916-1976)는 경북 청도에서
아버지가 지방 군수인 좋은 집안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으며
시인 이호우의 누이이기도 하다.
한학자인 할아버지 이규현의 영향을 받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며
타고난 문학적 재능을 키웠다.
그러나 그녀의 총명과 곧은 성격은 오히려 조부모의 염려를 사서
객지로 유학을 가지 못하고 조부모가 운영하는 학당에서 공부를 했다.
이영도는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20세에 대구의 부호와 결혼을 하였지만
그 이듬해인 1936년에 딸을 낳은 후 신혼의 꿈도 얼마가지 못하고
폐결핵으로 병약하던 남편을 수발하다 결국 1945년 8월, 29세에 남편과 사별을 하게 되었다.
이영도는 결혼하면서 덮어 두었던 시조 노트를 다시 꺼내 들었고
1945년 10월, 통영 여자 중학교 가사 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또 한 번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청마 유치환과의 숙명적인 만남이다.
마침 그 학교에는 유치환 외에도 시인 김춘수.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초정(草汀) 김상옥 시인 등 유능한 예술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농장을 경영하고 싶어 1940년 가족을 이끌고 떠났던 북만주.
어린 아들을 잃고 삽이 들어가지 않는 허허벌판의 광막한 언 땅에 묻으며
“암담한 진창에 갇힌 철벽같은 절망의 광야”인 북만주를
부인 권재순의 집요한 요구로 떠나와 해방직전인 1945년 6월 고향땅 통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통영 여중에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몇 달 후, 새로 부임한 가사교사 이영도!
어쩔 수 없는... 숙명처럼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이었다.
시조시인이기도한 이영도는
평생 한복을 입었던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고독과 방황으로 북만주를 떠돌다 귀향해 통영여중 국어 교사가 된 38세의 기혼자인 청마는
새로 부임한 이영도의 '그 높고 외롭고 정(淨)함'에,
슬프도록 빛나고 청초한 모습에 온통 마음이 사로잡힌다.
청마의 일방적인 혼자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룰 수 없는 인연이기에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힘들고 안타까운 세월,
20년이라는 격랑의 긴 세월동안 지속된 사랑은
서로의 문학 세계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깊은 울림의 아프고 아름다운 시들로 태어났다.
외길 사랑으로 외롭던 청마의 애타는 마음.
뭍같이 까딱 않는 정운에게 바친 절규 같은 그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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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애절하고 아름다운 청마의 편지 중 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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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귀한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 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던 청마,
같이 할 수 없는 애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이토록 절절하다.
물처럼 까딱 않던 이영도.
청마가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시와 편지를 보내며 지내온 지 3년,
마침내 정운의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6.25 동란이 터지면서 청마와 재회의 기약도 없이 헤어지게 되자
정운은 그동안 우정인 줄만 알았던 마음이 비로소 사랑이라는 걸 느끼게 된 것이다.
드디어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인연이기에
그들의 만남은 안타까움 일 수밖에 없었다.
'지애(至愛)한 정운, 최애(最愛)한 당신'인 정운을 향한 청마의 사랑과 편지는 끝없었다.
둘의 연모는 통영과 부산, 그들이 같이한 20여 년의 긴 세월 속에
전무후무한 애틋한 사랑으로 이어졌다.
1954년 서정보 시조시인의 특별한 배려로
통영에 있던 이영도가 부산에 왔을 때,
청마는 경남 함안군 나의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유치환은 매일 편지 띄우는 것도 모자라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이영도에게 달려가는 지극한 사랑이었다.
이영도를 한 두 시간 만나기 위하여
하루 종일 그 흙먼지 뿌옇게 이는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시달리며...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새벽 6시에 그 느린 부산행 버스를 타고
열 두 시간을 달려 부산에 와 이영도를 만나곤 했던 유치환.
2년간을 600리의 멀고도 불편한 길을 한주도 거르지 않고 오가며
휴일을 다 써버리곤 하던...
그의 모든 열정을 다 바친 유치환이었다.
흔들림 없는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최애(最愛)한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고 돌아가곤 했던 청마.
정운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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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 1954년)>에 실렸던 작품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민망하고 말이 도로 없어지는 저 사랑의 깊이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말을 할 수가 없었겠지,
하늘처럼 우러르는 사모의 마음이 벅차기만 하여...
“나의 하늘은 투명한 9만리”
이영도의 투명하고 드높은 하늘인 청마.
그들의 사랑은 과연 깊고 깊은 그윽한 사랑이었다.
하나 딸을 키우며 그녀의 외로운 삶을 지탱하게 해준 정신적인 지주,
시를 아름답게 이끌어준 그녀의 ‘하늘’.
청마는 그녀의 믿음이자 의지였을 것이다.
유교적인 가풍의 전통적인 규범을 깨뜨릴 수 없었던 그들.
‘도덕’이라는 한국적 모랄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 모셔놓은 성스러운 신전이었고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크나큰 우주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1967년 2월 부산에 함께 있던 청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이 세상을 버렸다.
영원한... 영혼의 반려였던 그가...!
이영도의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상실의 한으로 남은 죽음... 이영도의 수필 「유성」에 남긴 글이다.
“일지기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와 함께 우러르던 그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는 날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당신과 함께 떠납시다.
이것만은, 이 한만은 서로 풀도록 기약합시다.
그렇지도 못한다면 영혼도 눈감을 수 없는 애달픔인 것입니다.”
이룰 수 없는 한스러운 사랑,
같이 죽어 하늘에서 영혼으로 만나자는...!
유치환의 애절한 편지(195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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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라는 시로 아픈 심경을 고백하며
청마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이영도.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였노라" 던
그 진실하고 아픈 사랑이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
두 사람의 끝나지 않은 미완성의 사랑!
아니! 어쩌면 완성된... 미완성을 통해 이루어진 완전한 사랑이 아닐까!
긴 세월 이어져온 지극한 사랑의 그 깊고 아득한 의미에
뜨거운 눈물로 내가 대신 울고 있다.
그들의 사랑이 나의 사랑인양...
이영도는 더 이상 부산에 머물기가 힘들었던지 그해 9월 서울로 영영 옮겨 가 버렸다.
애일당(愛日堂).
이영도가 10여 년간 부산에 머물동안 글도 쓰며 청마와 같이 만나던 곳이다.
하루하루를 아끼며 나누던 깊고 고고한 '애일당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지금도 그 사랑의 깊은 여운은 ‘애일당’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인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20여년에 걸친 플라토닉한 사랑은
어쩌면 이 시대의 깊은 울림의 전설과 같은 것이다.
사별한 남편으로부터였을까,
마산 결핵 요양소에 1년 동안 요양을 하기도 하면서
평생 건강하지 못했던 이영도는 끝내 1976년 61세에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은상 시인을 장례 위원장으로 문인장을 치른 뒤
화장을 하여 친정의 선영, 오라버니 이호우 곁에 묻혔다.
“이영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맑고, 고요하고, 격조 높은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고,
또 시를 생활화하고 간 여인이었다.”
이은상 시조시인이 시조집 『언약』 서문에 밝힌 글이다.
청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청마를 보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고 살았다.
<황혼에 서서>
남은 세월을 그리움으로 살다간....
영원한 청마!
못 잊을 사랑이 남긴 아름다운 명시다.
부산 금강공원에 있는 이영도 시비
유치환의 결혼(1928)
어려서부터 내성적인 성격의 유치환이었다.
부유한 환경 속에 자라며 중학교를 일본 유학까지 갔으나
친구를 사귀는 대신 책에 몰두하던 유치환이었다.
그러면서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 같이 편지와 신문을 보냈다.
바로 그 소녀가 훗날 휴치환의 부인이 된 권재순이다.
청마는 귀국 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유치원 보모로 있던 한 살 연하의 권재순과 결혼했다.
그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식의 성대한 결혼식으로,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든 화동중의 하나가작고한 김춘수 시인이기도 하다.
평생을 유치환의 그늘에서 조용히 유치원을 경영하며 살아온 권재순.
이영도와의 사랑을 모를 리 없었겠지마는
남편으로, 또한 시인 유치환으로...
이해와 지극한 사랑으로 받들며 모시며.. 세 딸을 기르며...
말없이 가정을 지켜온 지혜로운 훌륭한 부인으로 생각된다.
“경주 남산기슭에 초간 삼간 짓고 할망구와 단둘이 살다가 뼈를 묻겠다.”
경주 고등학교, 경주 여자 고등학교 등에서 오랜 기간 교장으로 재직하였던 곳인
천년 고도 경주를 특히 사랑하던 청마는 아내 권재순과의 약속은 끝내 지키지 못했지만
그 마음을 가슴깊이 간직하고 살았으리라.
오늘까지 시인 유치환에게만 집중했던 나의 시선이었다.
유치환이 사랑했던 ‘이영도’,
청마의 처로서 남편을 다른 여인에게 빼앗긴(?) 채 살다 간
측은한 여인, ‘권재순’으로만 생각하며 청마의 부수적인 인물들로만 생각했었다.
극히 피상적이었던...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관심 없는 섣부른 생각이 얼마나 잘 못되었나를 깨우치며
깊은 감동과 함께 사뭇 기쁘기까지 하다.
아아! 그랬었구나!
권재순, 유치환, 이영도.
주어진 영역에서 자기 빛을 발하며 살다간 사람들이라면 내가 지나칠까!
시인으로서의 유치환,
가정을 거느린 남편으로서의 유치환,
그는 그 모두를 소중한 사랑으로 이끌며 살았다.
푸른 하늘 드높이 펄럭이는 고고한 이상의 <깃발>처럼...
권재순은 유명한 시인의 처로서 남편의 바깥사랑을 모르진 않았으련만
이해와 사랑으로 남편을 떠받들며 사랑하며... 지극히 위하며...
주어진 자리에서 정성과 열정으로 꿋꿋이 가정을 지켰다.
평생의 반려, 권재순이 있었기에 유치환이 더 빛나는 건 아니었을까.
비록 평생을 두고 기혼자를 사랑했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고 고고한 자세로 소중히 이어나간 이영도.
그 사랑을 시로 꽃피우며
당당히 살다간 현명하고 아름다운 여인, 이영도이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가 빛난다.
아름다운 <사랑>이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아름답게 다듬으며 흩뜨림 없이 살다간 그들,
그래서 쓰는 마음이 이렇게 뿌듯하고 행복하다.
울고 싶도록 진실하고 지극했던 사랑,
그들의 이룰 수 없던 사랑이
그래서 더 눈부시고 아름답게 우리 곁에 살아있다.
내가 좋아하는 또 한편의 아름다운 시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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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에서 만난 새벽비의 사진
1954년 처음 출간한 시조집인 <청저집(靑苧集)>에 실린 그녀의 초기 작품으로
우리 옛 정취의 고풍이 잔잔히 흐르는 애달픈 가락.
유치환을 향한 그리움이다.
나직이 내리는 빗소리에 님이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하는
여리고 다소곳한 여인의 애잔한 모습,
간결하지만 깊이로 엮어내는 청초하고 단아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
이영도 다운 사모의 고즈넉한 모습이다.
기다림은... 그리움은... 외로운 안타까움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그날이 오리라는 믿음으로 기다리는 마음,
보배 냥 오붓하다.
보배인 양 소중히 품은 그윽한 사랑이다.
소록 소록... 속삭이듯 내리는 밤비소리에
가만히 들어와 앉는 <오붓한> 그리움,
어드메로 전해야 할지 길은 아득하지만
꿈을 꾸는 마음은 행복하나니...
뉘라고 말하랴!
그냥... 비를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이 그리움을...!
이 소슬한 애틋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