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6~52)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건국대ㆍ경상대 중문과 교수를 거쳐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해외에서 중국 전문서점으로 유명한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을 10여 년 경영하며, 중국 관련 전문서적과 희귀 사진을 수집했다.
<46> 마오쩌둥의 '영어 교사' 장한즈 |제47호| 2008년 2월 3일
▲1995년 스자후퉁의 자택 거실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는 장한즈(왼쪽). 김명호 제공
1963년 12월 26일 마오쩌둥의 70회 생일잔치는 조촐했다. 몇 명의 친척과 장스자오(章士釗) 등 네 명의 동향 노인을 초청한 게 전부였다. 마오는 이들에게 자녀 중 한 명을 데리고 오라고 사전에 통보했다. 부인은 절대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다. 장스자오는 영어교사를 하던 장한즈(章含之)를 데리고 참석했다. 장한즈는 28년 전 상하이에서 외박하고 귀가하던 장스자오가 새벽에 안고 들어온 딸이었다.
마오는 장한즈가 베이징외국어학원 영어교사인 것을 알자 갑자기 영어를 배우겠다고 했다. 춘절(음력 설)이 지나자 장한즈는 매주 한 번 마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진도는 별로 나가지 않았다.
문화혁명 초기에 외교관 양성기관인 외국어학원은 천이(陳毅)·시펑페이(姬鵬飛)·차오관화(喬冠華)의 타도를 주장하는 조반파와 이들을 보호하려는 반대파 간의 투쟁이 치열했다. 장한즈는 반대파에 속했다. 67년 봄 장한즈는 동네 문방구에 물건을 사러 갔다. 시답지 않은 문구를 고르던 중 키가 크고 삐쩍 마른 사람이 들어와 종이를 몇 장 사는 것을 곁눈으로 보았다. 근엄한 모습에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그가 나가자 점원들이 장에게 물었다. “너, 저 사람이 누군지 아니?” “몰라.” “조반파들이 때려잡으려고 하는 차오관화야.” 장은 이날 차오에게서 거대한 압력을 느꼈다고 훗날 말했다.
71년 이른 봄, 장한즈는 마오의 주선으로 외교부에 들어갔다. 사무실은 4층이었다. 하루는 어떤 키 큰 사람이 장의 앞에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걸음이 너무 느렸다. 장이 급히 추월하려고 했다. 뒤에 오던 사람이 팔을 잡았다. “뛰지마. 앞에 차오 부장이 가잖아.” “어떤 차오 부장?” “외교부에 차오 부장이 또 있어?” 그러면서 “얼마 전에 부인 궁펑(澎)이 죽었어. 건강이 엉망이래. 차오 부장이 지나갈 적에 아무도 추월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야”라고 나지막하게 말해줬다. 초대 외교부 대변인인 궁펑은 제네바 회담에 대표로 참석한 중국의 1세대 외교관이었다. 남편에게 외교관의 자질이 있다고 저우언라이에게 차오관화를 처음 추천한 것도 궁펑이었다.
키신저와 닉슨이 연이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중·미관계의 해빙이 본격화됐다. 중국이 유엔에 가입했고 대표단을 파견했다. 차오관화가 단장이고 장한즈는 통역이었다.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마오가 이들을 접견했다.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장한즈를 향해 “너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너와 네 남편은 이미 부부가 아니다. 왜 체면 때문에 남들이 알 것을 두려워하느냐? 자신을 해방시켜라. 그러면 내가 제일 먼저 축하해 주겠다”고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시 장한즈는 남편과 별거 중이었다. 체면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편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풍류 인물이었다. 둘 사이에 딸이 하나 있었다.
미국을 오가며 차오관화와 장한즈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잠시 귀국했을 때 장한즈는 이혼수속을 밟았다. 소식을 들은 마오는 약속을 지켰다. 한밤중에 선물을 보내 축하해 주었다. 마오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글귀가 새겨진, 김일성이 보낸 황주 사과였다. 다음날 눈이 내렸다. 차오관화는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눈을 가리키며 온종일 싱글벙글해 사람들을 민망하게 했다.
장한즈와 결혼한 차오관화에게 마오는 “장한즈에게 장가갔으니 장한즈의 집에 가서 살면 되겠구나”라고 했다. 차오관화는 죽는 날까지 장스자오가 물려준 장한즈의 집에서 살았다. 스자후퉁(史家胡同)의 품위 있는 사합원이었다.
중국 외교계의 꽃, 사상가이며 변호사인 장스자오의 입양 딸, 마오쩌둥의 영어교사, 외교부장 차오관화의 부인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장한즈의 사망 소식이 며칠 전 보도됐다. 외동딸이 빈소를 지킨다는 소식이다. 장한즈는 한동안 영화감독 천카이거(陳凱歌)의 장모이기도 했다.
<47> ‘대만의 사마천’ 언론인 롄야탕 |제48호| 2008년 2월 10일
▲1911년 대륙으로 떠나기 전 가족과 함께한 롄야탕(오른쪽에서 둘째). 맨 왼쪽이 롄잔의 부친 롄전둥(連震東). [김명호 제공]
푸젠(福建)성 룽지(龍溪)현의 롄(連)씨들은 명(明)이 만주인에게 멸망하자 대거 대만으로 이주해 타이난(臺南)의 닝난팡(寧南坊) 마빙잉(馬兵營)에 정착했다. 고목이 울창한 곳을 지나자 안개 속에 끝없이 펼쳐진 연꽃들이 발목을 잡았다고 한다. 이들은 지역 특산물인 사탕수수의 즙을 끓여 백당을 제조하며 약 200년간 타이난의 망족(望族)으로 자리 잡았다.
1895년 갑오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대만을 일본에 내주었다. 롄씨들이 대대로 운영하던 점포 팡란(芳蘭)과 작업장 인근에 일본의 현대적인 제당공장이 들어섰다. 6대에 걸쳐 운영하던 가업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고 농토마저 일본인에게 헐값에 넘어갔다. 각자 살길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7대손 롄야탕(連雅堂)이 18세 때였다.
가업의 도산을 지켜본 롄야탕은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타이펑일보에 취직해 중문부주편으로 6년간 경험을 쌓은 뒤 1905년 대륙으로 건너갔다. 샤먼(廈門)에서 푸젠일일신보를 창간했다. 쑨원(孫文)이 동맹회를 설립한 직후였다. 버려진 땅의 유민이었지만 공개적으로 반청 혁명사상을 전파해 동남아 일대의 동맹회 회원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는 항상 신변에 위협을 받았다. 이발 도중 체포하러 온 사람을 피해 달아나느라 머리를 깎다 만 흉한 모습으로 도망 다녔고 신문사 출근 도중 헐레벌떡 달려와 알려준 친구의 도움으로 암살의 위기를 모면한 적도 있었다. 신문은 폐간 당했다. 처음 쏘아 올린 폭죽은 불발탄이었다. ‘전달해야 할 여론이라는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회의에 빠졌지만 잠시였다. 롄야탕은 ‘여론을 창출하는 것이 신문의 역할’이며 ‘국가의 흥망은 신문의 책임’이라고 확신했다.
식민지 대만으로 돌아온 롄야탕은 1908년 대만문화운동의 중심지 타이중(臺中)으로 이주해 대만신문사 중문판을 제작하며 『대만통사(臺灣通史)』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스스로 대만의 역사를 쓰지 않으면 일본인 손에 일본어로 쓰일지 모른다는 우려와 ‘남에게 땅을 빼앗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신만 살아 있으면 다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역사 편찬의 동기였다.
롄야탕은 언론인과 역사가를 동일시했다. 서재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책벌레가 아니었다. 대만은 물론이고 대륙과 일본의 전역을 유력했다. 가는 곳마다 길게는 3년, 혹은 몇 달씩 머무르며 신문사에 일자리를 구해 사소한 것도 흘려듣지 않았다. 동북, 윈난(雲南), 쓰촨(四川) 등 발길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가는 곳마다 유기(遊記)와 시작(詩作)을 남겼다.
1918년 순전히 혼자 힘으로 『대만통사』를 완성한 롄야탕은 『대만고적지(古蹟誌)』와『대만어전(語典)』등을 연달아 펴냈고 타이베이의 상업 중심지 대도정(지금의 延平北路)에 중국 전문서점을 차려 대만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강연을 열었다. 매번 총독부에서 중단시키는 바람에 끝까지 진행된 적이 거의 없었다.
롄야탕은 36년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산을 앞둔 며느리에게 ‘중국과 일본은 기필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길 때까지 계속 싸워야 한다’며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롄잔(連戰)’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두 달 후 손자가 태어났다. 며느리는 그대로 했다.
롄잔은 엘살바도르 대사로 관계에 진출해 교통부장, 외교부장, 대만성 주석, 행정원장, 직선 부총통을 거쳐 국민당 주석으로 총통 선거에 두 차례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를 평할 때 학문이 뛰어나고 ‘품종’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대만 4공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런 말을 듣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어림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롄야탕은 대만 문화와 언어의 보존을 위해 평생 고심했고 대만인에게도 역사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최초의 대만인이었다. ‘대만의 사마천(司馬遷)’ ‘일본의 식민지였던 50년을 통틀어 문화계의 제1인’ 소리를 듣는 유일한 대만인이다.
<48> 靑幇 두목 황진룽의 배짱과 굴욕 |제49호| 2008년 2월 17일
▲대세계 앞을 청소하고 있는 황진룽. [김명호 제공]
1949년 5월 26일 국민당군 25만 명이 상하이에서 투항하거나 철수했다. 이틀 뒤 공산당은 상하이시 인민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장제스의 후견인으로 공산당원과 노동자 도살에 앞장섰던 청방(靑幇) 3대형(大亨) 중 장샤오린은 이미 암살당했고 두웨성(杜月笙)은 홍콩으로 피신한 후였다. 그러나 가장 연장자였던 황진룽(黃金榮)은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천명에 따를 뿐이다. 어차피 늙은 목숨이다”라며 태연자약했다.
수십 년간 세 사람은 무슨 일이건 만사형통(萬事亨通)이었다. 그래서 다들 대형(大亨)이라고 불렀다. 공동묘지의 잡초를 무성하게 만든, 이름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산당 치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황진룽이 상하이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변화가 무쌍한 때일수록 변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확고한 철학과 생활습관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게 세 가지 있었다. 아편과 마작·목욕이었다.
황은 공산당 천하가 된 후에도 여전히 집안에 아편을 쌓아 놓고 즐겼다. 그의 집은 지하 황제답지 않게 단출했다. 아들과 손자·며느리·요리사·청소부 등 20여 명이 복작거리며 한집에 살았다. 정원도 없고 담도 없었지만 주변이 모두 부하들의 집이었다. 한 구역이 그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생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와 부하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마작 상대도 여전히 넘쳤다. 하루에 여섯 번 밥 먹는 것이 가장 시시한 일이었다. 홍콩으로 피신은 했지만 부인에게 노래 한 곡 청해 듣는 게 고작이었던 두웨성에 비하면 나은 점이 많았다.
황진룽의 목욕 습관은 특이했다. 대중탕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떼로 몰려가 요란하게 하는 목욕이었다. 집에서는 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고향에 ‘아침에는 피부가 물을 받아들여야 하고, 밤에는 물이 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되씹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황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차를 여러 잔 마시고 온종일 물에는 손도 대지 않다가 밤만 되면 목욕탕으로 향했다. 두웨성이 홍콩으로 가자고 했을 때 “나 같은 팔십 노인들이 매일 밤 갈 수 있는 대중탕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른 것은 궁금해 하지 않았다.
황진룽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죽고 큰며느리가 집안일을 관장했다. 능수능란한 여자였다. 거짓말을 잘했고 꾀가 많았다. 둘러대기를 잘해 황도 깜빡 속을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 시국을 보는 눈도 있었다. 집에 있는 돈을 모조리 챙겨 홍콩으로 달아나 잠적했다. 얼마 후 ‘남편이 없어졌다’며 허둥대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 청소부의 부인이었다.
며느리 때문에 망신은 당했지만 경제적 여유는 여전했다. 상하이 인민정부는 황진룽의 사업 중 도박장과 사창가 외에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동양 최대의 오락장 대세계(大世界)의 영업을 중단시키지 않았고 황금대희원(黃金大戱院)도 중공 화동국 소속 극단이 임대해 매달 일정액을 황에게 지불했다. 시민들의 불만이 컸지만 인민정부는 모른 체했다.
51년 반혁명 소탕운동이 시작됐다. 집 앞에 군중이 몰려와 ‘비판대회에 나오라’고 외쳐댔다. 황의 악행들을 나열한 고발장이 사법기관에 산처럼 쌓여 갔다.
다급해진 황진룽은 반성문과 청방 간부들의 명단을 공안국에 제출했고 사회봉사를 하겠다며 지난날 그의 영화가 서린 대세계의 문 앞을 빗자루 들고 쓸기 시작했다. 인민정부는 황의 반성문과 청소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인민정부의 골칫거리였던 청방은 몰락했다. 시민들은 그제서야 인민정부가 황진룽을 방치해 두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황진룽은 3년을 그러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49> 칭화대학이 배출한 최고의 才子 |제50호| 2008년 2월 24일
▲1949년 겨울 뤄룽지(왼쪽)와 푸시슈.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김명호 제공]
칭화(淸華)대학은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러나 재자(才子) 소리를 듣는 사람은 세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인 사람이 뤄룽지(羅隆基·1896∼1965)였다. 학생 시절부터 고문(古文)을 적재적소에 인용한 예리하고 미려한 문장과 연설은 필적할 자가 없었다. 그가 연설할 때 그림자가 아름다웠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들었다는 사람이 많다.
미국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던 중 해럴드 래스키에게 심취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다시 돌아와 컬럼비아대학에서 학위를 마치기까지 7년간 서구사상을 폭넓게 접촉했다. 1928년 귀국해 상하이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스(胡適) 등과 『신월(新月)』을 창간했다. 문학 간행물이던 『신월』이 인권·법치·자유의 진지가 된 것은 순전히 뤄룽지 때문이었다.
이성관계에서도 진가를 발휘했다. 런던대 시절 화교 거상의 딸인 장순친(張舜琴)과 결혼했다. 소박하고 조용한 변호사였다. 주일마다 교회에 갔지만 뤄룽지는 문턱에도 가지 않는 등 취향이 달랐다. 부인보다는 서정시인 쉬즈모(徐志摩)에게 이혼당한 장야오이(張幼儀)에게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후베이(湖北) 미인 왕여우자(王右家)와 가까워졌다. 왕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었고 뤄룽지는 감정에 관해서는 다원론자였다. 두 사람은 익세보(益世報)에 함께 근무했고 생활은 베이징에서 했다.
베이징과 톈진을 오가며 여류시인 쉬팡(徐芳)과도 염문을 뿌렸다. 1937년 한 해에 무려 47통의 편지를 쉬팡에게 보냈다. 쉬팡의 부모가 뤄에게 경고하는 바람에 둘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쉬팡은 말년에 한 통의 편지를 공개하며 분실한 나머지 편지들을 아쉬워했다.
왕여우자와 함께 우한(武漢)에 갔을 때 국공 합작으로 두 당의 요인들이 집결해 있었다. 뤄룽지가 나타나자 우한이 술렁거렸다. 부인과 딸 단속에 바빠진 사람이 많았다.
딸도 없고 혁명가 부인을 둔 저우언라이(周恩來)만이 태연했다. 뤄가 서남연합대학 교수로 부임하기 위해 우한을 떠나자 다들 안심했다. 서남에서 뤄룽지는 왕여우자와 정식으로 결혼했지만 곧바로 이혼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사법부장인 스량(史良)도 뤄룽지의 연인이었다. 항일전쟁 시절 전시 수도 충칭(重慶)에서 두 사람은 모두가 묵인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푸시슈(浦熙修)가 나타나는 바람에 스량은 뤄룽지를 포기했다. 푸시슈는 펑더화이(彭德懷)의 처형으로 충칭 신민보(新民報)의 취재부 주임이었다.
1946년 1월 정치협상회의(구 정협) 대표 38명을 취재하던 중 뤄룽지에게 넋을 잃었고 남편과 이혼했다. 펑더화이의 반대로 뤄와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중공 정권 수립 후 뤄룽지에게는 삼림공업부장, 전인대 대표, 민주동맹 부주석 등 여러 개의 직함이 주어졌다. 푸시슈도 문회보(文匯報)의 베이징사무소 주임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왕푸징(王府井) 인근의 같은 골목에 살았다. 푸시슈가 한국전쟁 취재차 떠나 있던 기간을 빼고 사흘이면 이틀을 만나는 사이로 발전했다.
1957년 반우파 운동이 시작되자 뤄는 우파 두목으로 지목됐다. 공직을 박탈당했고 직급도 4급에서 9급으로 조정됐다. 비판대회에 출석한 푸시슈는 뤄룽지를 호되게 비판했다. 10년에 걸친 두 사람의 인연은 그날로 끝을 맺었다. 뤄룽지의 문전은 쓸쓸해졌지만 캉유웨이(康有爲)의 손녀와 인권운동가 왕리밍(王立明) 등은 아랑곳없이 뤄를 챙겨줬다.
뤄룽지는 학문, 외국어, 정치적인 식견이 탁월했고 달변이었다. 춤도 잘 췄고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렸다.
그러나 중국 천지에 이런 사람은 널려 있었다. 그의 여자친구들은 한결같이 중국인명사전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그냥 알고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다. 재자 소리는 아무나 듣는 게 아니었다. 뤄룽지야말로 재자의 조건을 완벽히 갖춘 사람이었다.
<50> 서남연합대학<上> 戰時에 8년간 문 연 중국 최고 학부 |제51호| 2008년 3월 2일
▲서남연합대학 보행단이 행군하는 모습. [김명호 제공]
1937년 7월 베이징 교외에서 중·일 무력충돌이 벌어졌다. 중국 국민정부는 일본에 전면전을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 대학들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베이징대학 지하실은 일본 헌병대의 고문 장소로 변했다. 중국 최초의 사립대학인 톈진의 난카이(南開)대학은 한 채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폭격으로 주저앉았다.
수천 년간 교육을 중시하던 민족이었다. 최고 통치자 장제스의 전시 교육정책은 간단명료했다. ‘전시일수록 교육은 평소와 다름없어야 한다.”
국민정부는 일본군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70여 개 대학을 이전했다. 국립인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사립인 난카이대학도 후난성 창사(長沙)로 이전했다. 이들은 연합에 합의해 1937년 11월 1일 악록서원(岳麓書院)에 임시대학을 설립했다. 교수 148명, 학생 1452명이었다.
그해 말 수도 난징이 함락됐다. 일본군의 창사 공습은 무자비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이었다. 임시대학은 더 안전한 자리를 물색했다. 서남에 위치한 윈난성 쿤밍(昆明)으로 이전을 결정했다. 기후가 사철 봄날이었고, 철도를 이용한 해외 왕래가 수월한 곳이었다. 전시 교육장소로 최적이었다.
1938년 2월 중순 이전이 시작됐다. 학생 875명이 지원했다. 용감하고 성격 급한 학생들은 군에 지원하거나 낙향했고, 꿈을 좇는 학생들은 혁명 성지 옌안으로 떠난 뒤였다. 체력이 약한 여학생,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은 기차로 광둥을 거쳐 홍콩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베트남을 경유해 쿤밍에 도착했다.
남학생 244명과 교수 10여 명은 보행단을 조직했다. 민심 파악, 풍토 조사, 표본 채집, 신체 단련이 목적이었다. 후난성 정부는 녹색 군복과 일용품을 제공했고, 현역 육군 중장이 직접 이들을 인솔케 했다. 2월 19일 초저녁 보행단은 악록서원을 출발해 상강(湘江)을 건넜다. 900여 년 전 주희(朱熹)가 일과를 끝낸 뒤 악록서원으로 가기 위해 밤마다 배를 저으며 건너던 강이었다.
대도시의 대학생활에 익숙했던 보행단은 행군 과정에서 상상도 못했던 시련을 겪었다. 모든 악조건이 이들을 엄습했다. 일본군이 퍼부어대는 폭격을 목격했고 악천후에 시달렸다. 후일 저명한 철학자로 성장한 런지위(任繼愈)는 “상아탑을 나온 우리는 처음으로 조국을 인식했다. 얼마나 빈곤하고 큰 나라인지를 그제야 알았다. 평소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고 여겼던 아편 장수나 하층민도 나라 잃은 백성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침략자에 대한 그들의 분노와 불복종의 기세는 우리를 교육시켰다. 우리는 이들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보행 도중 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다. 단순한 보행단이 아닌 이동하는 대학이었다.
시인 원이둬(聞一多)는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화폭에 담으며 조국이 처한 현실에 넌덜머리를 냈다. ‘승리하는 날까지 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가는 곳마다 민가를 수집하며 하층민의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힘에 찬탄을 금치 못했다. 68일에 걸친 3500리의 장정이 끝난 뒤 인생관이 완전히 바뀐 그는 쿤밍에 도착한 후부터 평소 즐기던 산책도 걷어 치워 버렸다.
4월 28일 보행단은 쿤밍에 도착했다. 먼저 와 있던 여학생들이 꽃다발을 목에 걸어 주었다. 이날 서로 눈이 맞아 많은 커플이 탄생했다. 이들이 연출해낸 수많은 드라마는 후일 ‘미앙가(未央歌)’라는 장편의 거작을 탄생케 했다.
장정 도중 함께한 체험은 상이한 전통을 자랑하던 세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융합시켰다. 가르치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파악한 뒤인 1938년 8월 국립 서남연합대학은 정식으로 설립을 선포했다. 전란 속에 태어나 8년간 존속한 유랑대학이었다. 그러나 중국 역사상 최고의 학부였다.
<51>대학은 큰 스승이 있는 곳 서남연합대학<中> |제52호| 2008년 3월 9일
▲앞줄 왼쪽부터 판광단·뤄자룬(羅家倫)·메이타이치·펑여우란·주쯔칭(朱自淸). 김명호 제공
서남연합대학에는 총장이 없었다. 세 대학의 총장이 상임위원이었다. 베이징대와 난카이대 총장은 임시 수도 충칭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칭화대 총장 메이타이치(梅胎琦) 혼자 대학을 끌고 나갔다. 그가 총장이나 다름없었다.
판잣집에 양철 지붕을 덮은 기숙사와 교실·실험실 등 82채의 건물을 짓는 데 1년이 걸렸다. 윈난성 주석 룽윈(龍雲)의 지원을 받았는데 예산이 부족해 창문은 있었지만 유리는 끼지 못했다. 그래도 설계자는 량치차오의 아들인 세계적인 건축가 량스청(梁思成)이었다.
메이타이치는 1930년대 입학생들에게 ‘대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다. 큰 스승이 있는 곳이다’라는 명언을 한 교육자였다. 그는 통재(通才)교육의 신봉자였고 교수치교(敎授治校)의 제창자였다. 실용교육을 경멸했다. “한 가지 재능만 갖추면 된다는 식의 교육은 장인을 배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학이 할 일이 아니다” “대학은 교수들이 모든 일을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항상 말했다. 학습환경 보장 외에 그 어떤 것도 정부에 요구하지 않았고, 간섭도 허용하지 않았다.
39년 교육부는 교과 과정과 교재의 통일, 연합고사 실시를 교육부장 훈령으로 모든 대학에 통보했다. 서남연대는 철학과 교수 펑여우란(馮友蘭)이 ‘대학은 교육부의 일개 과(科)가 아니다. 훈령대로 한다면 교수는 교육부 직원과 다를 바 없고, 교과과정을 교육부가 정한다면 부장이 바뀔 때마다 창조와 개혁을 들먹이며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연구를 진행할 수 없고 학생들에게 혼란을 준다. 바꾸기만 하면 좋아진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는 서신을 교육부에 발송했을 뿐 대학 명의로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삼민주의를 교과목에 넣는 데는 동의했다. 단, 시험을 치르지 않았고 학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교육부의 교수자격 심사를 거부했고, 학장들은 필히 국민당에 가입하라고 했을 때도 응하는 교수가 없었다.
교수들의 생활은 빈곤했다. 일본군의 공습으로 유통이 원활치 못한 데다 인플레로 인해 한 달 급료는 전쟁 전에 비해 2% 정도의 구매력밖에 가지지 못했다. 부양가족이 8명이었던 원이둬(聞一多)는 밤마다 주문받은 도장을 팠고, 메이타이치의 부인은 사회학자 판광단(潘光旦)의 부인과 함께 빵을 만들어 제과점에 납품했다.
핵 연구에 불멸의 업적을 남긴 화학과 교수 자오중야오(趙忠堯)도 직접 만든 비누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후일 중국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는 인재들을 키워냈다. 그러나 교육부가 보직 교수들에게 특별판공비를 지급했을 때 서남연대 교수들은 ‘국난의 시기에 가당치 않다. 보조금을 받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며 돌려보냈다.
빈곤보다 더 두려운 게 일본군의 공습이었다. 38년 9월 1차 쿤밍 공습이 있었고, 40년부터 43년까지 공습이 빈번했다. 수업 도중 경보가 울리면 교수나 학생 할 것 없이 모두 후문 뒷산으로 냅다 달려야 했다. 공습경보와 함께 뛰어 달리는 것은 교수와 학생의 공동필수 과목이었다. 경보가 긴 날은 산속에서 수업을 했다. 진위에린(金岳霖)은 산으로 뛰는 도중 67만 자에 달하는 ‘지식론’의 원고를 분실했다. 다시 쓰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41년 8월 공습으로 기숙사와 식당·도서관이 파괴됐다. 교수 대부분이 교외로 이사했다. 물리학과 교수 우다요우(吳大猷)는 마차를 얻어 타고 학교에 오다 굴러 떨어져 뇌진탕으로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날도 마차를 타고 나와 토굴 속에 손수 만든 실험실에서 수업을 강행했다. 이때 키워낸 제자 중 두 명이 후일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서남연대 교수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대학의 자율이 보장되는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지, 권력의 애완견이나 금력의 노예가 되지 않는지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전시에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배출한 서남연대의 기적은 우연이 아니었다.
<52> 狂人 류원덴과 향토작가 선충원서남연합대학<下> |제53호| 2008년 3월 16일
▲서남연합대학 시절 학생들에게 강의 중인 류원덴. [김명호 제공]
서남연합대학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마르지 않는 샘에 비유하는 사람이 많다. 원인 제공자는 교수들이었다. 개성 강한 사람들이 객지의 작은 도시에 뒤섞여 있다 보니 평소에 드러나지 않던 괴팍한 행동들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이 한두 가지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류원덴(劉文典)을 능가할 사람은 없었다.
1938년 11월, 서남연대는 소설가 선충원(沈從文)을 교수로 초빙했다. 전국을 진동시킨 대사건이었다. 중국의 학계와 문화계가 발칵 뒤집혔다. 전시(戰時)임을 까먹을 정도였다. 각 분야의 최고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학자들이 운집해 있는 서남연대였다. 대를 이은 서향세가(書香世家)에서 태어나 구미의 명문대학에 유학한 학자가 대부분이었고, 적어도 베이징대나 칭화대에서 혹독한 수련 과정을 거치며 평가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선충원은 요즘에야 장자제(張家界) 덕분에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후난(湖南)성 펑황(鳳凰) 출신이었다. 문성각(文星閣)과 문창각(文昌閣)이라는 남녀 초등학교가 있었지만 이름만 거창했지 바위 위에 통나무를 엮어 대충 지은 무허가였다. 선충원은 그곳마저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학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구 업적이 전무한 소설가였다. 학계에 발을 디뎌본 적이 없었다. 선이 하루아침에 서남연대 교수로 오자 반발하는 교수들이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접한 후부터는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류원덴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1934년 칭다오 시절의 선충원 부부.
류는 고전의 대가였다. “중국 역사상 장자(莊子)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두 명 반뿐이다”라고 항상 말했다. 장자가 그중 한 사람이고 반은 류원덴 자신이었다. 다른 한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다. 학문의 깊이만큼 문장도 세련되고 품위가 있었다. 그러나 성격은 유별난 데가 있었다. 서남연대 교수로 오기 10년 전인 1928년 봄 안후이(安徽)대 총장에 취임하며 남들이 흉내 내기 힘든 행동을 했다. 취임식 날 “대학은 관공서가 아니다”라며 축하하러 온 안후이성 주석과 지역 위수사령관을 학교 밖으로 쫓아 버렸다. 하객들이 쉬쉬하는 바람에 그냥 넘어갔지만 평범한 사건은 아니었다.
같은 해 가을 교내에 좌익이 주동한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다. 때마침 안칭(安慶)에 시찰차 와 있던 장제스가 류원덴을 만났다. 서로 초면이었다. 류는 평소 세수를 하지 않고 이 닦는 것을 아주 귀찮아했다. 옷도 한번 입으면 누더기가 될 때까지 갈아입는 법이 없었다. 평소 류의 책을 즐겨 보던 장제스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거리에 옮겨 놓으면 영락없는 걸인의 몰골이었다. “네가 정말 류원덴이냐”고 물었다. 류도 지지 않았다. “네가 정말 장제스냐.” 장제스는 “소요를 일으킨 학생들은 공산당원들”이라며 처벌을 요구했다. 류는 “대학에는 교수와 학생만이 있을 뿐이다. 누가 공산당원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총사령관이라면 부하들이나 잘 통솔해라. 내가 총장인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은 내가 책임지고 처리한다”고 답했다. 완전 훈계조였다. 대노한 장제스가 질책하자 류가 발끈했다. 장의 코를 손가락질하며 “어디서 군벌 따위가…”라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따귀를 때릴 자세를 취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의 경호원들이 황급하게 류를 끌고 나갔다. 장제스는 식식거리며 계단 위까지 달려와 끌려 내려가는 류의 등을 향해 “정말 미친놈(眞疯子)”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장제스와 쑹메이링(宋美齡)의 결혼식 주례를 섰던 차이위안페이(蔡元培) 전 베이징대 총장이 소식을 듣고 장에게 달려가 사정한 덕택에 총장직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겨우 수습됐다.
군인을 싫어했고 신(新)문학을 거들떠보지 않던 류원덴의 눈에 선충원이 사람으로 보일 리 없었다. 선은 졸병이었지만 군인 생활을 오래 했고 신문학을 연구한 사람도 아니었다. 류는 평소 다니지 않던 학교 부근 찻집을 부지런히 다니기 시작했다. 서남연대 부근에는 찻집이 많았다. 쿤밍(昆明)의 순박한 인심이 학생들에게 제공한 또 하나의 교실이었다. 도서관이 비좁았던 탓에 학생들은 인근 찻집에서 독서를 하곤 했다.
가격이 저렴했고 학생들이 오면 찻집 주인은 화로에 물주전자를 올려놓고 가버렸다.
온종일 앉아 있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 온종일 들락날락하는 곳이었다. 류는 찻집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자리에 끼어 앉아 선충원의 험담을 해대기 시작했다. 용모나 옷차림이 학생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접근하기도 쉬웠다. 수업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자 강의에 열중하다가 갑자기 선을 매도해 학생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대학자 천인커(陳寅恪)가 100원 가치가 있다면 나는 10원짜리다. 선충원은 1원짜리도 못 된다.” 한번은 수업 도중 공습경보가 울렸다. 학생들과 함께 천인커를 에워싸고 교실을 빠져나온 류원덴은 선충원이 옆 교실에서 황급히 달려 나오자 “내가 폭격으로 죽으면 학생들에게 장자를 가르칠 사람이 없다. 너는 도대체 뛰는 이유가 뭐냐”고 호통을 쳤다.
류는 강의도 빼먹는 날이 많았다. 열 번에 세 번 정도 교실에 들어오는 게 고작이었다. 서양문학과 교수 우미(吳宓)는 항상 그의 강의를 청강하며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류는 우미가 질문할 때마다 무식함에 혀를 차며 화부터 내고 설명을 시작했다. 화를 많이 내는 날일수록 강의는 막힘이 없었다. 또 보름달을 좋아해서 달밤에 야외에서 수업하기를 즐겼다. 빙 둘러앉은 학생들 가운데 서서 달빛에 젖은 채 달에 관한 고인들의 시를 끊임없이 토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학생들은 진정한 풍류를 발견하곤 했다.
선충원은 평생을 ‘촌뜨기’라고 자처한 사람이었다. 예민하고 상처를 잘 받는 성격이었지만 스스로를 낮추며 자존심을 지켰다. 류원덴에 대한 불만도 토로하지 않았다. 그의 지독한 후난 방언을 알아듣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고 강의 내용도 시작과 끝이 불분명했다. 수강생도 별로 없었다. “종교를 대신할 것이 있다면 중국의 미(美)가 유일하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그래도 서남연대는 후일 루쉰(魯迅)과 비견되는 대작가로 중국인들이 영원히 기억할 것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처럼 선을 끝까지 보호했다. 1988년 10월 노벨문학상 수상자 소식이 전해지던 날 국내외의 중국인들은 5개월 전 베이징 충원먼(崇文門) 부근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세상을 떠난 선충원을 생각하며 아쉬워했다.
|
첫댓글 서남연합대학은 6.25 때 부산 대신동에 있었던 '전시연합대학'을 연상하네.
서남연합대학 만큼 개성이 강한 선생이 있었다는 소린 못 들었지만...
중국은 한마디로 어떻다 이야기 하기는
너무 크고 복잡하고 깊고...
그런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