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가 아프다. 계단 내려가는게 힘이 들어 절둑 거린다. 세상에나, 뚜둑 뼈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누가 들을까 겁난다. 세월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엑스레이를 찍으니 퇴행성 관절염 4기란다.
한창 산을 누비던 시절이 그립다. 이제 세월의 강이 되었지만, 추억의 알갱이는 영롱한 보석이되어 내 가슴에 살아 숨쉰다. 한 때는 이 다리로 설악산 대청봉을 거쳐 한라산 백록담. 지리산 천황봉, 전국의 유명 산을 누비고 다녔다.
파스텔 색으로 물들었던 봄동산, 여리디 여딘 연두색 잎새들이연한 핑크빛 진달래의 향연은 화려한 가을이 부럽지 않았다. 온 나뭇가지에 크리스탈이 주렁주렁 달린 눈 덮인 산길을 하루 종일 걷기도 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내가 등산을 하게 된 계기는, 산을 좋아하는 이웃을 만났기 때문이다.
단칸방 셋방 살이를 겨우 면하고 독체 전세에 살 때다. 한 집에서 나는 일층에 양희는 이층에 살았다. 선자는 앞집에 살았다. 새댁 때 만나 함께 엄마가 되었고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우리는 이웃사촌 40년지기다.
양희가 ywca에 소속된 여울 산악회 회원이었다. 그 인연으로 산을 알게 되었다. 그시절 부산에서는 유일한 여성산악회였다. 산대장도 당연히 여자였고, 남자라고는 유일하게 버스기사 한 사람이었다.회원이 대부분 주부였기에 주중인 목요일마다 산행을했다.
규율이 엄격했지만 품위가 있었다.선발대는 산대장이 항상 선두를 섰다. 가끔 신입회원이 규율을 어기고 산대장 앞으로 가면 제재를 받기도 했다. 산정상에 올라서면, 정상식을 하였다. 야호를 세번 외쳤고 애국가와 여울가를 부르곤했다.
처음 산을 올랐을때 어찌나 힘이 들든지 산행을 다녀 온 뒤에는 며칠 동안 굴신를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그 시절만해도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등산복도 재대로 갖추어 입지 않았다. 등산 지식도 체력도 없었다. 몸하나 가누기도 힘이들었다. 간단한 도시락이 든 배낭을 메는데도 힘이 들어 투덜거렸다. 양희는 높은산도 성큼성큼 잘도 올라갔고 배낭도 불룩하게 매어우리를 챙겨 주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영남 알프스 억산에 오를 때다. 그 시절엔 등산화는 없었고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겨울 산행이라 춥다고 안에 면으로 된 내복을 입고 갔다. 그런데 갸파른 산길을 걷다보니 너무 더웠다.얼굴이 벌겋게 달아 오르며 땀이 나서 옷이 젖었다. 나중에는 땀이 식어 추워서 혼이 났다.
한
부산시민등산학교에 입학하여
우연히 등산학교를 다녔다. 많은 산 정상을 찍었다.
경사가 가파른 산길을 내려 오면서 늘매서운 바람 불어대던 겨울산을 아이젠을 신고 얼음길을 콱콱 찍으며 내려오기도 했다. 이 큰 덩치를 끌고 오너라 무릎관절이 더 망가진것 같다. 누가 이리 될 줄 짐작이나 했나.
길거리에 다리 아픈 사람들이 많이 눈에 뛴다. 대부분 몸 자세가 바르지 못 하고 다리를 끌고 다니는 사람도 보인다. 먼 나라의 이야기 인줄 알았는데 이 나아가 되어 보니, 어른들의 심정을 아해하갰다.
어느날. 어머니께서 갑자기 다리를 다쳤다. 손빨래를 하고 일어 서려는데 뚝 하는 소리가 들리며 바닥에 누워 꼼짝을 못하셨다. 부랴부랴 119를 불러 병원에갔다. 엑스레이를 찍으니 고관절이 골절라고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수술을 할것인가, 기브스를 할 것인가 보호자가 결정하라고 했다. 수술을 할경우 80의 고령이라. 마취을 하고 수술하는 과정에서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회복후에 치매가 올 수 있다는 했다.
기부스를 하게되면 몇 달을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데,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어른이라 그 일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형제들끼리 의견이 분분했다. 아주버님과시동생들은 수술을 반대하였고, 남편은 해드리는게 맞다고 맞섰다. 위험을 감수하고. 결국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때 당시는 대부분 보호자들이 간병을 했다. 며느리가 네 명이 되어도 집에 놀고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늘 내차지였다.
병원비 문제 있고해서 6인실을 어렵사리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