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袈裟)를 다리며
가사는 대략 가로 3미터 세로 1.5미터 정도의 직사각형 형태로 생긴 커다란 천이다.
부처님 당시 부처님의 제자들이 버려진 천 조각들을 모아 꿰매어 옷을 만들어 입은 데서 유래한다.
그 색은 대체적으로 밤색인데 청·적·황·흑·백을 피하고 잡색으로 사용한다. 가사는 수행자의
옷답게 화함을 경계하고 검소하게 살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상복은 아니고 주로 예불할 때와 불교 의식을 치를 때 입는다.
내가 입는 가사는 화학섬유가 아닌 듯해서 세탁기에 빨면 엄청난 주름이 생긴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옷을 다려 입지 않는 나로서도 가사의 다림질만큼은 피해 갈 수 없다.
요즘 나오는 다리미들은 성능이 좋아서 수증기도 나오게 되어 있다. 적당히 열을 받은
다리미가 쉬익쉬익거리다 수증기를 내뿜으며 쓰윽 지나가면 온통 쭈글쭈글하던 가사가
반듯하게 펴진다. 마치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서 쭈욱 뻗은 길을 내는 듯하다.
자세히 보면 주름도 제각각이다. 어떤 것은 히말라야 산맥처럼 치솟아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남도의 들녁 끝자락에 펼쳐진 나즈막한 동산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수선하느라 천을 덧대고
바느질까지 한 곳의 주름은 깊은 협곡을 흐르는 강처럼 푹 패어 있다. 어떤 곳은 비질을 한 것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나란히 주름들이 나있다. 그 모양이 마치 도열해 있는 군인들 같다.
또 어떤 곳은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마냥 제 맘대로 구겨져 있다.
어떤 주름은 빨기 전부터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주름은 세탁기의 거센 물살에 휩쓸려 생겨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거센 물살은 강력한 힘의 세탁기 모터에 의지하고, 모터는 전기에 의지하고, 전기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송전선을 비롯한 송전시스템에 의지하고, 송전시스템은 발전 설비에 의존한다.
송전시스템과 발전 설비는 인간이 이룩한 많은 현대적인 기술을 담고 있다. 나의 가사가
쭈글쭈글해진데는 가히 온 지구가 관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가사 위에서 살아가는 티끌보다도 작은 미생물이 있다면 그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우리 앞에
펼쳐진 광활한 대자연과 같을 것이다. 만약 저 하늘 위 높은 곳, 그러니까 지구와 적당히 떨어진 곳에
지구만큼이나 큰 몸집의 생명체가 있다면 그에게 인간은 너무 작아서 볼 수조차 없는 존재.
다시 말하자면 존재하지도 않는 존재라는 매우 이상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존재에게 작은 주름 같은 것이 우리들에게는 히말라야 산맥이고 그랜드 캐니언일 것이다.
어디 가사에만 주름이 져 있는가? 우리네 마음도 그러하다. 마음 속 어떤 곳은 히말라야 산맥처럼
험하고 거친 산들이 불쑥 솟아 있는가 하면, 어떤 곳은 그랜드 캐니언 같은 깊은 협곡이 패어 있고,
또 어떤 곳은 갱년기 여성의 눈가처럼 잔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가사는
거센 물살이 그리하였다고 하나, 무엇이 마음에 그런 주름을 만들었을까? 그 누구도,
그리고 무엇도 마음을 만져 보기는 커녕 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누구나 느낀다. 마음 속에 깊이 패인 슬픔의 협곡과, 분노의 산봉우리
그리고 소소한 즐거움이 만들어내는 자글자글한 주름들을.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면, 그래서 오직 마음만이 느낄 수 있다면, 만든 이는
결국 마음 자신일 것이다. 마음이 스스로 온갖 주름을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나를 무시하는 타인의 말과 행동이, 짜증나는 날씨가, 유명한 맛집의
근사한 한 끼 식사가 그리하였다고 한다. 물론 이런 것들 없이 마음에 주름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적으로 나 아닌 것들의 책임인 것도 아니다.
옷을 빨았더니 온통 쭈글쭈글해졌다고 세탁기를 탓하는 어리석은 이가 있을까?
다리미가 지나간 곳은 거짓말처럼 반듯하게 펴진다. 가사의 주름은 다리미만 있으면 쉽게
펼 수 있다. 마음의 주름을 펴는 다리미가 있다면 마음의 주름 역시 말끔하게 펼 수 있을 것이다.
옷의 주름을 펴는 다리미는 마트에서 사면 되지만, 안타깝게도 마음의 주름을 펴는 다리미는
돈으로 살 수 없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마음의 주름을 펴는 다리미를 상비하고 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글/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광주일보에서>
蛇足
불교에서는 수행의 과정을 신(信)·해(解)·행(行)·증(證)으로 표현합니다. 믿음에서 출발하여 이해로,
실천으로, 체득으로 나아가니, 곧 증(證)입니다. 깨달음이지요. 깨달음의 마음이 곧 증심이요, 무등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무등산은 어머님의 품속이요, 증심사는 깨달음의 터이니 무등산과 증심사는 몸통과 심장의 관계랍니다.
증심사는 신라 헌안왕 때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지금의 영월 법흥사)을 여시었으며,
화순 쌍봉사를 개창하신 철감 도윤 선사가 창건한 절입니다. 요즘 말하는 명당개념과는 조금 다른 듯 한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은 도선국사가 우리나라 자생 풍수지리를 정립하기 이전이라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주에서 동복, 곡성, 남원으로 가서 섬진강으로 이어지는 가까운 길목에, 그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나름의 국토개발계획에 따라 절은 들어섰겠지요.
옴마니반메흠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