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3:14] (없음)
[마 23:1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교인 하나 지옥 자식이 되게 - 두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역시 저주의 대상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여기서 먼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란 13절의 소극적인 면과는 대조적으로 적극적인 활약상을 암시한다. 한편 당시 유대교인들은 선교에 적극성을 띠었다고 전한다
그들 유대인들의 전도활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갖는 파당적인 종교적 성격을 추종하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한편 여기 교인(프로세뤼토스)이란 공동번역 성경과 같이 '개종자'로 이해해야 되는데 그 개종자들은 할례를 받고 성전세를 내는 등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는 모든 전통과 규범을 따름으로써 유대화 해야만 했다.
이런 절차상의 문제에서 절대적인 권한을 지녔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무지한 이방사람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쳤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진리를 배운 사람들을 더 지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지옥'은 헬라어로 '게엔나'라고 표기되어 있다. 아람어로는 게힌남 히브리어로는 '게힌놈'이라고 음역되는데 이는 '힌놈 골짜기'(고도 말한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계곡으로서 유대의 후기신앙은 최후의 심판이 그곳에서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이 죽음 이후에 벌을 받는 곳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지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한편 본문에서는 더 지독한 위선자를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강조 하기 위해 개종한 자들을 '지옥의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로 그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이교적 습속(習俗)에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덧입힘으로써 구원과는 거리가 먼 상태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의 개종자가 '배나 더' 지옥의 자식이라는 표현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을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개종자들이 더
악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욱 완고한 위선자들을 생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한 저주를 강조한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위해 노력하지만 참으로 전도할 대상에게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월감을 갖고 나간다거나
섬김의 자세 보다는 '선생'이라는 의식을 갖고 나간다면 도리어 교회 문을 막는 결과가 될 뿐 아니라 피 전도자가 비록 교인이 된다 하여도 잘못 배워 잘못된 신앙으로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 잘못된 성경관과 신앙은 제거되어야지 재생산 되어서는 안된다.
[마 23:16]
화 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된 인도자여 - 세번째 저주 선언문이다. 여기서 저주의 대상은 13절이나 15절과는 달리 '소경된 인도자'로 지목되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 역시 진리에 눈이 먼 완고한 무지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키는것이 분명하다 자신들의 행실도 온전치 못하면서 자기를 따르라 하는 지도자는 자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지옥으로 빠뜨린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 이 말은 성소나 지성소 또는 제단등의 건물로서의 성전을 근거로 맹세하면 이를 기필코 지켜야 하는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맹세의 구속력을 무시하는 처사인 동시에 성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가르침이다.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
`여기서 '성전의 금'이란 성전에 바치는 예물로서의 금이라고 볼 수도 있고, 성전 안에 비치된 금장식 또는 성전 금고에 간직된 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하튼 본문은 제사나 하나님보다 성전 제물에 더 큰 관심을 지닌 바리새주의자들 교권주의자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준다.
그러나 실로 율법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과 맹세했을 경우에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두고 맹세한 것만 효력(效力)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거짓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황금보다 낮추어 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셨던 예수께서는 그런 것이라면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탐욕과 공명심에 근거하여, 실천 의지가 전혀 깃들지 않은 맹세를 철저히 거부해야 할 것으로 말한다.
[마 23:17]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 여기서 다시 16절에서 지칭하였던 '소경된 인도자'를 우맹이라는 말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우맹을 가리키는 헬라어 '모로이'라는 말은 지각과 판단력이 결여된 '어리석은 이라는 뜻으로서 5:22;고전 3:18,딤후 2:23등에서도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은 말을 사용하여 저주받은 자들에 대한 경멸적 표현을 점증시킨다....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은 16절에서 묘사한 행위에 대하여 반문하면서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즉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책망하면서 그 답이 너무도 자명한 질문을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명쾌한 질문을 통해 스스로 자신들의 행위를 돌아보게 하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극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셨다.이와 같은 질문의 의미는 신앙의 척도가 돈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로 본질적으로 거룩한 것들 하나님, 성전에 의해 부차적으로 거룩한 것 성전의 금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마 23:18]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너희가 또 이르되 지킬지라 - 여기서 다시 16절의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다만 '소경된 자'가 '너희'로 바뀌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고, '성전의 금'이 '그 위에 있는 예물'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17절과 19절도 서로 대칭되고 있다.
이런 형태는 마태복음의 특징인 대칭적 구조이다. 이렇게 서로 교차하는 운율적 반복형태는 호소력이 강하다. 실로 거룩과 생명의 근원적인 실체를 외면한 모든 종교 행위는 허식이요 우상 숭배일 뿐이다.
[마 23:19]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 이 구절 역시 17절과의 대칭적 구조로서 반복되는 형태의 문장이다. 17절과의 차이점은 17절의 '우맹'이라는 칭호가 빠졌다. 또 18절과 마찬가지로 '금'이 '예물'로 바뀌었고 '성전'이 '제단'으로 바뀌었다. 여하튼 예물은 제단으로 인해 거룩해지는 후속적 성물이다
[마 23:20]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그러므로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 이 구절은 맹세에 대한 결론적 선언이다. 내용은 제단 앞에서 맹세를 하는 것이나 예물을 제단위에 두고 맹세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결국 맹세는 어떻게하든 무조건 정직하게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5:33-37에서는 결단코 맹세는 하지말라고 선언하셨는데
그 내용과는 상호 모순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표면상으로 볼 때 상호 모순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각각 그 언급 내용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면 오히려 모순이 아니라 상호보완 적인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즉 5:33-37의 내용은 엄격하게 맹세를 금지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외에 다른것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그 모든 맹세를 거부했던 것이다. 결국 맹세 할수 있는 궁극적 대상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뿐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본문의 내용은 모든 맹세는 어떤 물질적 대상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정직함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내용은 이미 5:33-37에서 언급된 맹세에 대한 교훈을 보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이 21-22절에 계속 점증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 23:21]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 앞의 20절에서는 제단 위의 예물이 제단에 속하여 있음을 밝히고, 예물과 제단을 대비시켜 제단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높인 것에 이어서 본문에서는 그 제단이 있는 성전을 하나님과 대비시켜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물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자나, 그리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자 모두가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정직하게 지켜야 함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안에 계신 이 - 공동번역에서는 '그 안에 계신 분'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계신'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토이케산티'는 '카토이케오'의 과거분사이다.
그 뜻은 '산다', '거주한다', '자리잡는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 초자연적 존재가하나님, 성령, 그리스도 등 사람과 가지는 관계를 묘사하는 말로서 '거하다' 등으로 쓰인다. 따라서 특정한 장소에 대해 쓰여지기도 하며, 사람과의 인격적관계의 의미로 쓰여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것이 좋다.
'카토이케산티'라는 단어가 문법적으로 분사형이기 때문에 과거의 행위를 나타낸다 1회적 의미 따라서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지금은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금 계신다는 의미로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을 솔로몬이 완성하여 헌당하였을 때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는 전통적 믿음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전 중심 사상은 포로기를 거치면서 보편적 하나님 임재 사상으로 바뀐다. 즉 하나님은 특정한 장소에만 계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이 실현되는 곳,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속에 계신다 따라서 본문의 강조점은 성전이나, 제단 위의 제물, 또는 제단과 같이 장소나 물질적인 것을 두고 맹세의 근거를 삼아서는 안된다는데 있다.
그 맹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장소가 중요하지 않다. 실로 예수에게는 특정한 장소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내면적 신실성이 문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