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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9일
말씀: 골2:14-15
제목: 십자가로만 승리가 보장됩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 때가 금요일입니다. 그러면 이 금요일이 좋은 날일까요? 나쁜 날일까요? 그 날이 저주 받은 날입니까? 우리가 구원 받는 날입니까? 만일 금요일이 저주받은 날이라고 생각한다면 적어도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 십자가는 좋은 날입니까? 놀라운 일 때입니다. 그 놀라운 일이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행사를 그 금요일에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금요일이 좋은 날로만 기억한다면, 십자가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좋은 날일 뿐만 아니라 그 좋은 날을 자랑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날입니다.
십자가는 심판의 대상인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고, 구원의 길을 여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나 진리나 사랑을 아는 것도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고통거리는 십자가의 위대함이나 장엄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완성되어가는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오늘은 이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이 말씀에 함께하십니까? 위대한 승리가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나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골2:14-15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 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법조문으로 쓴 ‘증서’의 헬라어 ‘케이로그라폰’은 문자적으로 ‘손으로 쓴 문서’를 뜻하는 것인데‘법조문으로 쓴 증서’는 ‘규례나 율법적인 계명을 쓴 증서’를 가리키는 것으로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범죄 함으로 타락한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죄의 결과를 규정함으로 대가를 치러 형벌을 받아야 함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모두 제하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괴롭히는 율법을 무효화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폐지를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하여 버리사’옛날 성경에는 ‘도말하다’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헬라어로 ‘엑살레이프사스’는 문자적으로 ‘문질러서 지우다’라는 의미로 증서에 기록된 내용들을 모두 지우고 새롭게 출발함을 뜻합니다. 두 번째,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의 헬라어 ‘에르켄 에크 투 메수 프로셀로사스 아우토 토 스타우로’는 문자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사 제하여 버리시고’라는 의미입니다. '에르겐'은 완료형으로 율법을 제하신 효력이 계속해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율법은 완전히 패기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율법의 제약이나 율법의 고발에 제한받지 않는 뜻입니다. 율법이 우리는 정죄할 수 없고 율법이 고발할 수 없고, 율법이 우리를 괴롭힐 수 없도록 십자가에서 완전히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깐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40년이 지나서 A.D67년에 로마를 상대로 유대인들이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압제에 항거하는 일종의 독립전쟁입니다. 4년 만에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디도가 A.D70년에 예루살렘을 진멸하고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예루살렘성전에서 금촛대와 법궤를 빼앗아 개선행진을 했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디도의 개선문이 있습니다. 디도의 개선문은 디도가 죽은 다음에 우리가 잘 아는 도미시안황제가 자기 형을 기억하도록 하기위해서 로마에 세워놓은 개선문인데 그 개선문은 굉장히 장엄합니다. 4마리 말이 이끄는 병거를 타고 멋진 토라를 입고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마치 신에게 외치듯이 외쳤습니다. 황제아들 만세 황제아들 만세 그런데 이 개선식장면은 요셉푸스의 유대전쟁사 7권5장에 나타나있습니다. 이 유대전쟁사를 보면 주후70년에 유대가 로마에 멸망한 후 로마의 개선에 디도장군의 개선승리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로마 장군이 개선하면 포로들이 끌러갑니다. 그 중에 왕이라든지 귀족을 특별히 부각시켜서 끌고 갑니다. 그리고 노예들이 장군의 앞에서 향을 피웁니다. 또 그 뒤에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끌고 가고 그리고 적장(시몬)을 마지막 순간에 처형하면 개선문의 행렬이 끝이 납니다. 얼마나 엄청난 승리였으면 동전까지 다 만들었겠습니까? 로마황제와 장군들이 전쟁에 승리하면 늘 이런 식으로 개선한 것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개혁성경에 보면 ‘승리하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헬라어로 ‘드리암뷰사스’입니다. 승리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영어의 triumph 와 같은 의미인데 승리라는 표현도 있지만 개선식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드리암’자음이 똑 같습니다. ‘트리암비오’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개선식 할 때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자동사로 쓰면 개선식을 통해 승리를 축하다다는 말이고요 타동사로 쓰면 개선행렬에서 포로를 끌고 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이 개선할 때 유명한 적장이 왕을 포로로 잡아 개선 행진 식에 끌고 가면서 눈요깃거리로 삼았거든요 그렇다면 ‘트리암비오’는 누군가를 승리의 행진에서 포로로 끌고 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골로새서 2:15절을 이렇게 번역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안에서 통치자와 권세 자들을 포로로 끌고 행진하셨다’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로마 장군 디도가 유대인포로를 이끌고 승리의 행진을 한 것처럼 예수께서도 통치자들과 권세를 포로로 끌고 승리의 행진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디도가 개선행진 한 것이나 예수님이 개선 행진한 것이나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디도가 개선 행진하는 모습과 예수님이 개선 행진하는 모습은 너무나 다릅니다. 디도는 멋진 갑옷을 입고 4마리가 이끄는 병거를 타고 보무도 당당하게 입성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리품을 끌고 가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통치자와 권세를 전리품의 포로를 끌고 가는 그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라는 것에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하셨는데 최후 심판 때 나타날 영광을 위해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타난 승리를 우리는 언약과 약속을 통해 붙들고 가는 것입니다.
여기 15절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봅시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무력화하여 라는 뜻은‘아페크뒤 사메노스’인데 이것은 중간태입니다. 중간태는 긍정을 의미하는데요, 그래서 ‘무력화’는 무장해제했다는 뜻입니다. ‘드러내어’란 ‘정체를 보이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장해제 된 통치자와 권세들의 모습을 온 세상에 드러냄으로 수치를 당하게 하심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기셨느니라’헬라어 ‘드리암뷰사스’는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로마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적대 세력인 정사와 권세를 완전히 패배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통치자와 권세들에게 묶여 있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상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승리자의 자리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승리는 오늘날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데요, 그러므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마귀와 그의 세력과 권세들을 이긴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를 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잘 못 이해하고 있고 잘 못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무엇인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주일에 어떻게 보냅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합니다. 그 속에는 말씀이 없고 하나님나라의 통치도 받지 않습니다. 그 분의 뜻을 따르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순종도 안합니다. 다만 현학적이고 영리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까? 어떻게 하면 세상을 바르게 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에는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에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나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삶의 질이나 삶의 올바른 방향성이나 감사거리는 이런 세상에서 전혀 영향을 받지 못합니다.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부분입니다. 편리와 정비된 사회를 구축은 했습니다. 그런데 내면적인 우리의 모습은 절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에 대한 부분에서 우리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열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수세기에 걸쳐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연을 자연 상태로 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세계가 이 무서운 곤경에 처해 있는 전쟁, 기근, 온난화, 지진 등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한 주가 멀다하고 새로운 조사단, 새로운 위원해가 구성되어 여러 난제들, 우리의 삶의 질, 자녀들의 저 출산 문제, 비행 소년들의 문제 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전에도 다 해본 것들입니다. 어쩌면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은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상황이 왜이런가?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인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어떤 것이 문제가 있는가? 이 문제는 성경에서만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눅11:14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그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이게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20절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어서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고 계셨던 일에 대한 우린주님 자신의 진술입니다. 주님은 강한 사람이 무장을 하고 자기의 처소를 지킬 때는 그 소유가 안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삶은 마치 어떤 무장한 강한 자가 죄인을 지배하는 큰 궁정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안에 있을 때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악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고 통치하고 있는 나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그리고 ‘저의 믿든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이 소유를 풀어내고 자유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포악한 권세로 사람들은 꼼짝 못하게 하는 ‘강하고 무장한’마귀를 물리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마귀나 그의 권세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스갯소리로 듣습니다. 마귀의 권세, 악한 세력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이 시대에 굉장히 많습니다. 이런 첨단 과학시대에 마귀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가면 갈수록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죄악에 묶어 놓는 이 악한 세력의 존재를 믿지 않은 다면, 그리스도의 능력 또한 믿고 의지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후4: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 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이 세상의 신이 사람들 어두움에 묶어 두고 있습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악한 세력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악한 세력 어두움의 주관자들이 과학을 탈을 쓰고 나타나고 있습니다.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현혹케 하고 온전한 분별력을 어둡게 함으로 인해 죄인 된 삶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장로님께 영상을 하나 받았습니다. T.V에서 방영한 것인데요, 시골풍경을 그리며 장기간 드라마로 안방의 인기를 차지했던 전원일기 출현 자들이 모인 가운데 전원일기의 응삼의 역할을 했던 고 박윤배씨가 디지털 휴먼기법으로 복원시켜 영상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전원일기 출연자들의 반응이 과학이 참 많이 발전했다는 것에 놀라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응삼의 화면 속으로 빠져들어 울음바다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서로 대화가 가능한데요, 특히 옛날에 식사하자고 약속을 했는데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까지 고 박윤배씨가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딸이 보고 싶다하여 딸이 출연했는데 딸이 화면으로 재생되어 아빠와 대화하는 장면은 실질적으로 살아있는 아빠와 대화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디지털 휴먼기법으로 복원 시켜 죽은 사람이 나와서 대화하는 것이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실처럼 각인되고 대화하며 감정을 폭발시킵니다,
무당이 죽은 자를 불러 대화하는 것을 이제 과학기술로 대신하고 있는 과학첨단의 우상숭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사울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신접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극하거나 귀신을 불러내는 우상숭배의 행위입니다. 이제 하늘에 계신 부모님을 비롯해서 보고 싶은 사람을 다 불려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세를 현실화 시켜 하나님나라를 준비 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는 우리 몸의 DMA 유전자를 축출해 놓았다가 죽은 사람을 실질적으로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았던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론 탑입니다. 역청을 개발해서 이제 얼마든지 벽돌을 구워 높이 탑을 쌓을 수 있는 신기술이 발달하자 그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과학의 발달이 인류의 문명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류의 꿈을 실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과학은 칼과 같다고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에 공헌하느냐 아니면 우상숭배의 시대를 맞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HOMO DEUS’ 시대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가상세계의 시대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미래의 메타버스 속에서 게임을 하게 되면 기계조작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기가 그 캐릭터가 되어 그 가상 속으로 들어가서 게임을 하게 됩니다. 게임 속에서 싸우다가 맞으면 실질적으로 아프기까지 합니다. 가상세계에서 사랑도 나누게 되는데 이것 또한 실질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 접촉으로 가상여행, 가상 게임, 이런 것들이 결국 현실과 가상세계의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인간들은 훨씬 현실세계의 괴로움과 고통을 가상세계에서 만족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도 가상세계가 낳은 중독은 자녀들에게 아니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마는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을 조금이라도 방치하면, 밤과 낮이 바뀌어서 낮에 활동을 전해 못하는, 이성으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중독성 자녀들이 굉장히 많아질 것입니다. 그리고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착각하여 나타난 범죄는 앞으로 계속 들어날 것입니다.
사실 많이 두렵습니다, 과학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세계질서가 재편 될 것이며 멸망을 자초 할 수 있다는 위기감을 가집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가상세계에 빠져 현실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악한 세력에 묶여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중독자들이 계속 들어날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감동, 감사, 베려, 소통, 교제, 함께 함, 정을 나눔, 사랑, 이런 단어는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나" 에 빠져 나만을 위한 공간 나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이제 부모도, 형제도 없고 나만의 공간에서 현실을 망각한 체 디지털세계, 가상세계에 빠져 자신을 매몰시키며 환각적 삶을 살아 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는 이와 싸울 무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이끄시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디지털로 증명하는 세계를 뿌리칠 수 있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실질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는 복음의 역사로만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가상세계 중독의 세계에서 구하는 일은 십자가 복음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믿게 하는 이 방법 밖에 없습니다. 허구와 진리, 악과 선, 어두움과 빛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졌습니다, 이제 가상세계에서 현실세계와 나누어져서 AI로 말미암아 다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걸러질 것입니다, 이제부터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남은 자를 통해 현실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시대를 열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이제 주님의 재림이 얼마 남지 않은 사인임을 아시고 생명을 건 전투를 시작 할 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욱더 십자가의 복음위에 세워져야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