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연구가로 통하는 이동순 시인은 요즘 울분으로 가슴이 찢어진다고 했습니다.
정부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움직임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인은 세계일보 김용출 문화체육 선임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와 관련한 윤석열정부의 입장을 보면 내용 자체가 터무니없이 왜곡돼 있는데다가 굴곡진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탁월한 독립운동가를 모욕하고 낙인찍고 있다”고 통탄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시를 써온 시인이지만, 그는 한편으론 40년 넘게 홍범도 장군을 연구해온 홍범도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투사였던 조부 이명균 선생의 일대기를 들으며 자랐는데, 조부는 김천에서 군자금을 모아 만주와 상해 등지로 보내다가 일경에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숨졌다고 합니다.
집안 어른들의 회고담과 유품, 서찰, 옛 신문기사를 읽고 독립운동사를 공부해 가던 그에게 언젠가부터 인상적인 독립운동가가 다가왔다는데. 바로 홍범도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다른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달리 귀족 출신이 아니라 포수 출신이었습니다. 김좌진 장군에 가려서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측면도 있었고요.”
1980년대부터 홍범도 연구를 시작했고, 특히 2000년에는 미국 하버드대에 가서 국내에서 접하지 못한 많은 자료를 입수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2003년 10권 분량의 장편 서사시 ‘홍범도’를 발표했고, 다시 20년 뒤인 올해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를 펴냈다. 40년이 넘는 집념의 연구였다고 합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80. 신흥무관학교 100주년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 최근 육군사관학교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윤석열 정부를 향해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김 전 관장은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을 문제 삼아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역사인식의 저변에는 "파시즘"이 도사리고 있다고도 분석했다고 합니다.
지금 자천타천으로 홍범도 연구가는 여러 분이 있고 이들은 하나 같이 홍범도 장군을 옹호 찬양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기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홍범도에 대해서는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자료를 보기 전까지는 알량한 지식으로 함부로 얘기해선 안 된다.
그중에서도 꼭 봐야 할 자료가 1932년 홍범도가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과 특혜를 받기 위해 제출한 이력서와 소련 정부 측 질문 항목에 맞춰 응답한 앙케트 자료다. 두 자료는 홍범도가 자신의 삶을 한 번은 자유롭게, 또 한 번은 형식에 맞춰 요약한 것이다. 동아일보가 1993년 대우그룹과 공동 기획해 거금을 주고 러시아에서 구입한 자료에 들어 있었다.
홍범도는 1921년 11월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간 것은 그해 6월 자유시에서 한인 부대 사이에 발생한 유혈 사태를 보고하기 위함이라고 썼다. 단순히 56명의 한인 대표 중 한 명이 아니라 자유시 사변을 보고하기 위해 갔으며, 자유시 사변은 외견상 러시아 부대가 앞장섰지만 한인 부대끼리 싸운 유혈 사태임을 밝히고 있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3개월 전 이미 무장해제를 주도한 칼란다리시빌리 부대의 한인 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음도 밝혔다. 홍범도나 그의 부대가 단순히 무장해제에 응한 것 이상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능하다. 그래야 그가 자유시 사변 후 재판위원을 맡고 레닌에게 권총과 금화를 포상으로 받은 사실이 설명이 된다. 그가 포상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강제 무장 해제된 사할린 부대원 2명에게 암살될 뻔한 사건은 그를 향한 원한이 팽배했음을 보여준다.
국내 홍범도 연구자는 한두 명에 불과하고 홍범도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먹고산다. 그래서 근거도 불분명한 증언을 토대로 홍범도가 자유시 사변에 땅을 치며 통곡했다느니, 재판위원으로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느니 하는 낭설을 늘어놓고 있다.
홍범도는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빨치산 부대를 거느렸다고 썼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는 1920년 6월과 10월의 일이다. 두 전투에 임할 때 그의 자의식은 독립군이 아니라 빨치산이었던 것이다. 그의 빨치산 증명서에는 칼란다리시빌리 부대 편입 전부터 포함해서 1919년 9월부터 1922년 11월까지 적위군(적군을 호위하는 준군사조직)에 근무한 자라고 나온다.
그는 1913년 일본의 수배를 받아 소련의 극동지역으로 건너왔다고 썼다. 그의 부대는 1919년 러시아 적군에게서 훈련을 받고 적군의 도움으로 무장을 강화했다. 산(山)포수였던 홍범도는 극동지역에서 1차 대전과 러시아 내전을 겪으면서 현대 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엽총으로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러시아 적군과 함께하기로 일찍이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이후 독립영웅으로 불리기에는 수치스럽게도 다시 총을 잡지 못했다. 무장 해제된 한인 부대는 교육훈련부대로 편성됐다가 해체됐다. 무장해제의 목적이 본래 그것이었으나 홍범도도 속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구술한 자서전이란 게 남아 있는데 그 책에서 무장해제에 불만다운 불만을 토로한 적이 없다. 심지어 스탈린 치하의 강제 이주에 대해서도 그렇다. 오히려 2차 대전 때 독일이 소련에 개전하자 전쟁터로 보내달라고 나설 정도였다.
그의 1927년 소련 공산당 가입은 형식적인 절차였을 뿐이다. 이미 1919년 무렵부터 그의 자의식 속의 새로운 조국은 소련이었다. 그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해서 공산주의자가 된 사람은 아니지만 ‘당은 개인보다 위대하며 당은 언제나 옳다’고 여긴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였다.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무장투쟁의 여명으로 착각한 황혼이었다. 일본군의 반격으로 간도의 조선인들은 무고한 학살을 당하고 독립군은 땅 끝까지 쫓겨 갔다. 무장해제에 응한 쪽은 영원히 총을 빼앗겼고 무장해제를 거부한 뒤 만주로 돌아온 쪽은 지리멸렬했다. 독립군이 맘 놓고 숨 쉴 땅 한 자락이 없었는데도 이종찬 광복회장은 나라를 잃은 적이 없고 따라서 건국이 뭔 말이냐는 헛소리를 광복절 기념사에서 늘어놓았다.
홍범도보고 지옥에나 꺼지라고 하는 건 아니다. 그는 나름 신조의 사나이였다. 다만 대한민국 현충원은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국방부는 더 아니고 육사는 더욱더 아니다.
재조산하(再造山河) 운운하며 이념적 도발을 시작한 것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다. 도발을 바로잡아 원상태로 되돌리는 걸 똑같이 도발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언제쯤 정신을 차릴 것인가.>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
출처 : 동아일보. 오피니언, [송평인 칼럼]홍범도가 본 홍범도
홍범도는 어느 날 역사 속에서 갑자기 걸어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 대다수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빛나는 영웅입니다. 저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얘기를 들었고 웬만큼 안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봉오동 전투가 홍범도 장군의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특정 인물에 대한 연구는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조건 잘했다고 다 덮어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겠지만 그를 갑자기 논의도 없이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흉상을 세운 것은 세운 사람들이 이 논쟁을 자초했다고 밖에는 더 할 말이 없을 겁니다.
2회 영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