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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_참된 증인이 내린 세 가지 처방약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치명적인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처방이 내려졌다.
1) 하늘의 처방약
처방: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8).
처방 1. 불로 연단한 금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상태를 치료하기 위해 예수께서 내리신 처방은 “불로 연단한 금”이었다. 이것이 무엇이며, 그 의미는 또 무엇일까?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벧전 1:7).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기 23:10).
자신의 가난한 것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이 부요하다고 자랑하고 있는 마지막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그들을 부요하게 해 줄 금이 필요하다. 이것은 불로 연단하여 단단하게 된 금으로, 변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과 사랑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사라고 하시는 믿음과 사랑의 금은 찌꺼기가 하나도 섞여있지 않은 금이다. 참된 믿음, 순수한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의 의를 얻게 해주는 것이며 우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는다. 믿음도 주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고 믿음으로 받는 구원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구원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면 왜 예수께서 값을 지불하여 사라고 하셨을까?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지만 아낌없이 자기 자신, 곧 영과 혼과 몸을 바치는 자들에게만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금을 사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시련을 당해도 없어지지 않을 굳세고 강한 믿음으로 주님께서 주시는 약속을 붙잡고 믿음으로 주시는 구원을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참된 증인이신 예수께서 뜨뜻미지근한 자들에게 사라고 권고하신 순수한 금 곧 믿음과 사랑은 참된 부이다. 세상의 모든 재물을 가지고도 영적 질병을 치유할 귀중한 치료제를 살 수 없다. 이 믿음이야말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으로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고 깨달을 때에 생기게 되며, 또 시련과 역경을 견디면서 더 강해지는 믿음이다. 이 믿음의 금은 순결해지기까지 연단을 받은 금인데, 이것은 연단을 받을수록 그 광채가 더욱 찬란해지는 것이다.
처방 2. 흰 옷
영적으로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기 위해 처방하신 것은 흰 옷이다. 영혼의 헐벗음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옷을 입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혼의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입을 수 있는 옷이 단 한 벌도 없다. 흰 옷은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순결하고 흠이 없는 품성을 표상한다. “또 그녀에게 정결하며 희고 고운 세마포를 차려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고운 세마포는 성도들의 의(righteousness)로다, 하더라”(KJV 계 19:8). 흰옷은 품성의 순결, 곧 죄인에게 나누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의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고 인간이 만든 무화과 잎의 옷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의 직물로 짠 의의 옷, 흠없는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마포는 그리스도의 의로서 믿음으로 예수를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흠이 없는 품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의의 두루마기를 회개하고 믿는 모든 자에게 입혀 주신다. 그리고 하늘 베틀로 짠 이 두루마기에는 사람이 만든 실은 한 올도 섞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이야기에 예복을 입지 않고 잔치에 참석한 사람의 이야이가 나온다(마 22:1~14). 혼인 잔치에 참석한 손님들은 심사를 받았다. 임금의 요구대로 예복을 입은 자들만이 잔치 자리에 앉도록 용납되었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도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의는 옳은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의의 옷을 입을 수 있을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쳐서 예수께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실 때,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과 정신이 그분의 뜻과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이 주님에게 사로잡히게 되면, 마침내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흰 의의 두루마기를 입은 것으로 보게 된다. 믿음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을 선물로 나눠 받는다. 마지막 참된 증인이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벌거벗음을 보시고 그분의 의의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처방을 내리신다. 이 의의 두루마기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 수 없다. 흰 옷은 품성의 순결 곧 죄인에게 나누어 주는 그리스도의 의다. 우리는 믿음으로 매일 이 옷을 입고 살아야 하겠다.
처방 3. 안약
참된 증인께서는 눈이 멀어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안약을 사라고 권고하신다. 안약은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하고 깨닫게 하는 성령을 의미한다.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안약을 발라 보게 하라는 뜻은 양심을 민감하게 하고 진리를 식별케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은혜로 비참한 상태를 먼저 볼 수 있게 되어야 우리는 고침을 받을 수 있다. 우리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한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족한 상태에서 깨어나서 우리의 참된 영적 형편, 의의 옷이 없이 벌거벗은 형편을 보아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눈이 멀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의 마음을 밝혀 주어야 한다.
눈은 예민한 양심이며, 내부의 빛, 곧 영혼과 마음의 빛이다. 온 영혼과 전 존재의 영적 건강은 사물을 보는 눈의 정확한 시력에 달려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인 안약은 그것을 양심에다 적용시킬 때 양심을 예민하게 한다. 성령의 안약은 우리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해 주며, 어떤 가면을 쓴 죄라도 알아낼 수 있게 하는 지혜와 은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눈에 지혜의 안약을 발라 분명하게 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나 책망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안약을 바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라오디게아인들이 완전히 눈이 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완전히 눈이 멀었더라면 안약이 시력을 회복시키는 데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것은 예수께서 사라고 하시는 안약을 사기만 하면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2) 하나님의 호소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19,20).
처방약을 주시고 이어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호소하신다.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그리고 마음 속에 나를 영접하여 함께 생활하자고 호소하신다. 구원은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이다. 예수님을 마음 문밖에 세워두고 있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관계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강요하지 않으신다. 예수께서는 우리 각 개인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며 호소하신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희망은 참된 증인이신 그리스도의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문 앞의 쓰레기를 치워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몰아내는 세상을 향한 우리의 애정, 세속적인 욕심, 교만 이기심 등의 쓰레기를 깨끗이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초청을 받아들여 주님께서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우리 영혼의 성전을 소유하시게 해야 한다. 우리는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여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사는 경험을 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인 생명의 양식을 먹고 주님과 나누는 교제는 극히 사적인 경험이다. 남이 나를 대신해서 먹어 줄 수가 없다.
예수께서 집집마다 다니시며 모든 영혼의 성전 앞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호소 하신다. 우리의 마음 문을 주님께 열지 않겠는가?
** 마치면서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교인들입니다. 우리가 바른 진리를 알고, 또 진리를 받아들였다고 해도 그 사실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는 않습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신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형편 가운데 처해있는 우리들의 상태, 심각한 영적 병에 걸린 우리들을 진단하시고 처방약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자부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 진단과 처방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의롭다는 영적 자만심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진정한 형편을 드러내주고 말해주는 진리에 화를 내고 메시야를 거절했습니다.
아집과 교만과 인간의 전통과 유전에 빠져 있는 완고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요? 우리 마음 속에는 예수님이 좌정해 계신가요?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들여서 함께 먹고 마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영접하고, 그분과 산 관계를 맺는 사람, 순수하고 산 믿음인 금을 소유함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은 사람, 성령의 내재로 깨어서 늘 자신의 모습을 올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죄를 승리하고 마침내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진리되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던 유대인들의 형편과 같지 않게 되기를, 하늘의 진단과 처장을 거절하여 치유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그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그 대신 문밖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그분과 항상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90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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