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의 새로운 이해
5세기 쿠마라굽타 1세에 의해 세워진 나란다사에 나란다 대학이 설립되었다. 나란다사는 인도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주하는 학승과 객승 그리고 그들을 뒷바라지하는 인원을 합치면 1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절은, 우리가 잘 아는 당나라 현장 스님이 631년에 이곳을 찾아 5년 간 수학한 절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나란다사는 8세기 초 굽타왕조의 몰락과 힌두교의 발흥으로 쇠퇴하다가, 13세기 초 아프가니스탄 고르왕조의 장군이었던 무하마드에 의하여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승려들은 무참히 살해되었고 나란다사는 6개월 동안이나 불탔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것은 이 같은 이슬람의 침입에 의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그러한 외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불교 내부의 요인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함께 박해받았던 힌두교는 아직도 건재하여 인도의 주된 종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교 몰락의 자체 원인으로 보통 세 가지 요인을 든다.
첫째, 불교는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왕족과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며 안일에 빠졌다는 것이다. 승려들은 권력자의 비호를 받으면서 일반 세인들과는 유리되어 포교를 게을리 함으로써 그 지지력이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불교의 지나친 수용적 태도 때문이다. 수용성은 불교의 커다란 장점이요 특징이다. 이로 인하여 불교가 들어가는 곳은 기존 종교와 마찰이 없다. 지금도 불교는 여타 종교와 마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사찰 안에 모셔진 산신각은 산신과 호랑이 곧 토속적인 샤마니즘을 수용한 것이고, 독성은 천태산(天泰山)에서 홀로 선정을 닦아 독성(獨聖)이라 불린 나반존자(那畔尊子)를 모신 것이고, 칠성각은 북두칠성 곧 기존의 도교를 수용한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기존의 신앙을 통섭하는 특성을 발휘한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인도에서 기존 힌두교의 잡다한 신을 수용한 나머지 불교의 본질을 벗어나 점차 힌두화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불교가 사라졌다기보다는 힌두 불교로 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불교의 지나친 학문화 때문이다. 불교가 학문화함으로써 승려들은 불교 자체의 연구와 논쟁에 휩싸이게 되어 일반대중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석가가 세상을 떠나고 100여 년이 지나자 교단 내에서는 교리와 계율의 해석 문제를 놓고 논쟁이 일었고, 이에 따라 과거의 계율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과 시대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의 두 입장이 공존하게 되었다.
전자를 상좌부(上座部), 후자를 대중부(大衆部)라 하는데 이들은 크게 대립하여 분열하였다. 이후 다시 200~300년에 걸쳐 이들 두 파로부터 다시 분파가 생겨나 기원전 200년경에는 총 20여 개에 이르는 파가 생겨났는데, 이 시기를 부파불교 시대라 한다. 이때 각 교단은 저마다 석가의 교리와 계율을 연구․정리하여 방대한 논서(論書)를 지어내면서 논쟁을 그치지 않았다. ‘논(論)’이라는 말의 원어가 아비다르마(abhidharma)이고 이를 한역(漢譯)한 것이 아비달마(阿毘達磨)이므로, 부파불교를 달리 아비달마 불교라고도 한다.
당시 교단의 관심은 온통 석가의 가르침에 충실하기 위한 교리의 해석이었으며, 자연히 출가자와 승원(僧院)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불교의 성격을 띠어갔다. 따라서 출가를 전제로 하여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면서 수행하고, 또 타인의 구제보다는 자기 수행의 완성을 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로 인해 교단으로부터 멀어진 대중들은 교단에 반발하며 불탑(佛塔)을 중심으로 석가에게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이로써 대승불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대승 또한 점차 밀교화되어 가다가 본래의 종지를 잃은 채 힌두화되고 말았다.
그러면 이렇게 된 근본적인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말로 불교가 무신론의 종교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불교는 여타 종교처럼 어떤 신을 따르는 종교가 아니다. 세상을 만든 창조주도 없다. 어떤 절대자가 이 세상을 주관하며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인연 즉 원인과 결과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며, 그 안에 어떤 불변의 고정된 실체도 없다는 것이 불교의 교설이다. 수행과 정진으로 자기 안에 있는 불성을 깨우치면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자력을 중시하였다.
반면에 힌두교는 수억의 신이 존재하는 다신교의 종교이며 신께 기도함으로써 복을 얻는다는 신 중심의 종교다. 이에 반해서 불교는 자신의 삶은 신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응보 사상에 기반한다는 그러한 진리를 믿는 종교다.
힌두교는 창조신, 유지신, 파괴신을 비롯하여 3억3천의 수많은 신을 모신다. 그런 신에게 제사지내는 브라만 계급은 왕족이나 귀족보다도 높은 최상의 지위로 대접받았으며, 카스트제도는 신이 정한 불변의 원리로 받아들였다.
이때에 석가가 나타나, 계급은 신이 내린 불변의 진리가 아니며 만민은 평등하다는 것을 선언하였는데, 그러한 가르침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어서 민중들에게 많은 환영을 받았다.
게다가 아쇼카왕의 불교 옹호정책에 의해 인도 전역으로 불교가 힌두교를 누르고 퍼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신흥사상이라 하더라도 수천년간 그들의 생활과 밀착되어 있던 힌두사상과는 관계가 쉽게 단절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카스트제도를 떨쳐버릴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수행하고 진리를 찾아,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는 수행 위주의 불교 가르침은 지속적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당장 신에게 무언가 필요한 것을 빌고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나를 보호해주는 기복성향을 일반인들이 더 추구하기 때문에, 자력신앙인 불교는 서서히 일부 출가 수행자에게만 수용되고, 일반인에게선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에 곁들여 잠시 생각해 볼 사항이 있다. 지금의 대승불교 곧 한국불교를 보면 석가를 신앙 대상으로 하고 있음은 물론 아미타불 그리고 관세음보살을 비롯한 많은 보살들을 의지처로 한 기복신앙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분명 근본불교에서 벗어난 현상이다. 석가는 입멸시에도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즉 석가 아닌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하였다. 석가는 자기를 신앙 대상으로 삼으라든지 자기를 따르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지금의 대승불교는 그 만큼 근본불교에서 멀어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불교 본래의 무신론에서 멀어져 있다.
대승불교는 원래 없던 약사여래나 지장보살, 관음보살을 내세워 이를 신격화하였다. 또 원래 없던 기도라는 것도 만들어 이런 불보살에게 화를 면하게 해달라거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빌게 하였다.
이는 소승과 대승의 차이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소승은 자신의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보고, 대승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최고의 이상으로 본다는 차이점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인 일면을 말한 것일 뿐이다. 사실 양자 사이에는 커다란 내질적 차이가 있다.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는 승단(僧團)의 규율이나 행동 규범 등에서 큰 차이가 없지만, 그들의 이론에는 근본적인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즉 소승 불교에서는 부처마저도 인간으로 보고, 고타마 싯달타로 태어난 것은 성불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보았으나, 대승 불교에서의 부처는 신의 화신으로 본다. 이와 같이 양자의 시선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대승불교는 본래의 자력 신앙에서 타력 신앙의 자세로 민중들에게 다가가려 한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경전이 이른바 대승경전들인데, 금강경을 비롯하여 미륵경, 법화경, 화엄경, 지장경, 아미타경 등이 그것이다.
아무튼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이런 견해를 바탕으로 하여 대두된 것이 이른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 곧 대승불교의 경전은 석가모니가 설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대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의 사상가인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 1715∼1746)가 자신의 저서 출정후어(出定後語)에서 주장한 설이다. 이 주장은 근대 불교학의 선구로서 처음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그 후 점차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르면 경전은 역사적으로 성립된 것이지 부처가 모두 설한 것이 아니다. 특히 여러 경전이 서로 모순되는 점이 많고 이설(異說)도 많은 것은 결국 부처 한 사람의 설이 아니라는 것이며, 부처가 직접 설한 것은 아함경 중의 일부분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대승불교는 초기불교와는 달리, 무신론이 아닌 유신론이 도입된 불교로 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순수 자력신앙에서 타력신앙적인 면을 많이 받아들였다. 이는 내 안의 무한한 가능성을 찾는 수행 위주의 불교 가르침이, 힌두교와 같은 신 중심의 여타 종교에 대하여 지속적인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방편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발 늦은 개혁의 몸부림은 기존의 신 중심 종교에 힘이 밀려 본토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 한국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 해결에도 하나의 시사가 될 법하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 표본 집계를 보면, 10년 사이에 불교인구가 약 300만 명 감소하였다.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지금의 한국불교가 초심자로 하여금 여러 가지 혼란스러움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그 일차적 요인이라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대승불교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한 단면 몇 가지를 더듬어 본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다. 깨달음의 종교요 무신론의 종교다. 그런데 지금은 부처상이 하나의 신상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보살상도 나반존자도 산신도 다 신격화되었다. ‘참 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비는 종교가 되었다. 초심자로서는 무엇이 불교의 참모습인지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불교는 자력신앙이자 타력신앙이라고 한다. 출가자는 선 위주의 수행을 하는가 하면, 일반 신도들은 관음신앙 같은 타력 신앙에 의지하며 기도 위주의 신행을 한다. 자력, 타력이라는 이중적 모습은, 밖에서 보는 이들을 역시 혼란스럽게 한다.
또 신도들에게 근본 교리를 충실히 가르치지 않은 점도 혼란의 한 요인이다. 지금 절에 다니는 신도 중에는 삼법인(三法印)은 몰라도 미신인 삼재(三災)는 잘 알고, 사성제(四聖諦)는 몰라도 민간에서 내려오는 손 없는 날은 잘 아는 이가 많다. 수능 점수를 잘 받게 해 달라고 갓바위에 빌 줄은 알아도 설법 제일 부루나(富樓那)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불교 본연의 것이 아닌 잡것이 섞인 이런 모습 또한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
지금 한국불교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젊은 신도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다. 특히 청소년들에 대한 포교에 힘을 쏟아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젊은 세대들에게 그러한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나도록, 우리 대승불교의 개념을 확실히 정립하여 보여 주어야 한다. 개념에 대한 혼란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기복 위주의 불교가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빛을 비춰주는 불교 본래의 길을 안내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 대승불교의 진면목이 어떤 것인가를 젊은이들에게 새롭고 명료하게 알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