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건입동 387-4번지. 사라봉 모충사내
시대 ; 대한제국시대(1909년), 탑 건립 1977년
유형 ; 기념탑
1906년(광무10)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제주도는 종전 제주목사가 재판소 판사를 겸하던 제도를 없애고 단지 행정만을 관장하는 군수제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조종환 목사를 끝으로 동년 10월에 윤원구 군수가 부임하였다. 그 후 통감부는 1907년에 제주우편국을 설치하여 일본인을 그 책임자로 파견하고, 관재서(管財署)를 설치하여 통감부 관리로 하여금 이를 장악하게 하였다. 1908년에는 제주경찰서장에 통감부 경부를 임명하여 왜경 다수를 인솔해 와서 대정·정의·서귀포에 경찰관분파소를 설치하고 치안을 담당하였다. 이어서 제주구재판소(濟州區裁判所)에도 일본인 판사와 서기를 파견하였다. 당시 군수 윤원구는 이러한 상황을 보면서 '통신과 재정을 장악하고 치안권과 재판권마저 박탈당하였으니 이 나라가 존립할 수 있겠는가?'라고 개탄하면서 12월에 사임하고 떠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 유생
고사훈(高仕訓,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承天으로 개명함. 또는 景志라고도 함)
이석공(李錫公,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中心으로 개명함)
김석윤(金錫允,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錫命으로 개명함)
조인관(趙仁官, 의병장이 되면서 이름을 丙生으로 개명함)
노상옥(盧尙玉)
등이 모여서 의병을 일으킬 방도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1909년 2월 25일 조병생의 집에서 고승천·이중심·김석명·노상옥·김만석(일명 先一)·김재돌(金詛)·양남석(梁南錫)·한영근(韓永根) 등이 기병할 것을 결의하고 의병장에는 고승천과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그리하여 거사결전일은 3월 3일(음력 2월 10일)로 정하여 우선 병력 동원을 즉각 대정군에서 시발하도록 하였다. 대정군에서 시발하도록 한 까닭은 1860년 임헌대 목사의 비정(秕政)에 항거한 강제검이 대정군 서광리 사람이었고, 이병휘 목사의 남세(藍稅)에 항거한 방성칠도 광평리 백성을 동원하였었고, 1901년 이재수·오대현·강우백도 대정군 사람으로서 대정군에서 시발하여 전도를 휩쓸었던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고승천·조병생·김만석·김재돌·양남석은 당일로 대정에 가서 기병하여 제주성으로 집결하면, 이 때를 기하여 김석명·이중심·양만평·노상옥·한영근 등이 성안에서 허응 기병하여 결전을 벌여 일본인들을 모조리 축출할 계획이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396∼397쪽)
이리하여 제주 광양에 비밀리에 대장간을 차려 놓고 무기를 준비하는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황사평에서 조련을 시작하였다. 당시 창의 부서로는 의병장은 고사훈으로 작전과 모병을 담당하고, 김석윤은 재정을 담당하고, 노상옥은 무기 제작과 의병 조련을 담당하였다.
이 때의 격문은 다음과 같다.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소중한 것은 국은에 대한 충성이요, 부모에 대한 효도다. 만약 자식으로서 부모의 곤궁함을 구하지 못하면 불효요, 나라의 위급함을 걱정하여 나서지 않으면 불충이 되는 것이니 이는 금수와 다를 바가 없다.
지금 교활한 왜적이 병자년 이래 감언이설과 강압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치더니 을사조규로 나라의 주권을 강탈하려 하고 있다. 이제 우리 눈 앞에는 왜적의 무리가 강산을 짓밟고 있으니 그대로 두면 이 강토를 송두리째 삼킬 것이요, 우리들은 왜적의 노예가 될 터이니 어찌 좌시할 수 있으랴?
오호라! 천도(天道)가 무심하리오? 경향각지의 충의지사들은 국권수호를 위하여 궐기하였다. 우리 제주민도 진충보은(盡忠報恩)하고 자손만대에 선롱(先 龍」을 지키게 할 때가 왔도다. 피끓는 충의지사는 죽음으로써 왜적을 격퇴하여 국운을 회복하고, 성은에 보답할 자는 의성(義聲)을 합창하여 삼천리 금수강산을 지키는 데 생사를 같이한다면 이보다 다행하고 이보다 더한 충효가 어디 있으랴? 열혈(熱血)의 충의지사여, 팔뚝을 걷어부치고 너도 나도 앞을 다투어 황사평으로 모이라. 기유 2월 초6일 의병장 고승천 의병장 이중심」(제주항일독립운동사 398쪽)
부산에 있는 중요문서기록보관소에서 입수한 「제경비발(濟警秘發) 제38호」'폭도상황보고'에 의하면 이 격문은 2월 25일 제주군 중면(현 제주시)에 거주하는 고승천 등 9인과 신우면(현 애월읍) 어음리 한영근(韓永根) 등 10여 인이 제주시 조병생(趙丙生)의 집에서 쓰고 봉기를 계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제민일보 4326.11.20)
1909년 이른 봄에 전도적으로 궐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고승천은 의병 김만석을 대동하고 대정읍으로 모병차 나갔다가 서광리에서 왜경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왜경은 대정에서 하루밤을 지내면서 고사훈의 비범한 인품을 보아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고사훈이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 할 때 백성으로서 나라를 구하고자 함은 국민된 도리이다. 지금 나는 의(義)를 위하여 나선 이상 구차하게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들을 필요가 없다. 오직 죽음으로써 국은에 보답할 따름이다."
하였다. 왜경은 2월 13일 제주로 연행하기에 앞서 '만일 당신이 회심만 하면 곧 상부에 보고하여 고관으로 천거하겠다.'고 재차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옛날 박제상(朴堤上)이 너희 왜나라에 인질로 간 신라의 왕자를 탈출시킬 목적으로 갔을 때, 왜왕이 만일 왜국의 신하가 되어 준다면 중록(重祿)으로 상을 주겠노라고 하자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는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고 싶지 않으며 차라리 신라의 형장(刑杖)은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너희 나라에서 불태워 죽음을 당하였다. 이게 우리 나라 백성의 나라에 대한 마음이다. 어찌 구차하게 너의 감언이설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느냐?"
하여(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5쪽) 완강히 거부하므로 안성리 밖에서 김만석과 함께 총살하였다. 고승천이 순국하자 그의 형 기훈과 아우 경훈이 밤을 새워 가매장 현장에 이르러 가매장한 마을 하인을 앞세워 시체를 수습하고 제주면 영평 동남쪽 두곡(杜谷)에 안장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9세이고 유가족으로는 부인 남평문씨와 어린 윤석(允錫)·중석(仲錫)이 있었다.
의병 김만석은 남의 어려움을 즐겨 돕는 사람으로 의병에 자진 참여하였다가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족이 전혀 없어서 가매장된 채로 있었는데 안성리 송기남씨의 증언으로 확인되었고, 방치되고 있던 묘는 전보성초등학교장 좌태진 선생에 의하여 단장되어 오다가(제주일보 1997년 8월 31일) 1977년 남제주군수(현치방)에 의하여 의병의 묘로 안장되었다.
무장한 왜경들이 광양 창의소(倡義所)를 급습하여 무기를 압수하고 김석윤을 체포하였으나, 노상옥·이석공·조병생·양만평·양남석 등은 도민의 도움으로 귀덕 포구에서 육지로 탈출하였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8쪽)
김석명(金錫命 일명 金錫允)은 본관은 광산, 자(字)는 허수(許受). 오라리 무과 출신 부호 김창규(金昌圭)의 장남으로 1877년 태어나 어려서부터(11세) 김병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7세부터는 大興寺·威鳳寺에서 수도 생활. 22세에 光陽私塾의 훈장. 30세에 연동촌 文龜私塾 훈장. 경서에 능통하였다. 당시 33세로 고승천과 의병 모의가 있자 그는 의병항쟁에 따른 자금을 전담하기로 하고 고승천이 대정에서 기병하여 제주성에 당도하면 제주성내에서 호응하여 이중심과 함께 항쟁하기로 하였다. 또 전도민에게 보내는 격문과 통고문은 그가 초안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내란죄로 기소되어 광주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4월 2일에 유배형 10년이 언도되었다. 그는 재력이 있었으므로 즉시 대구공소원에 공소(控訴)하여 무죄가 선고되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6쪽) 일설에는 홍종시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풀려났다고도 한다. 1912년부터는 범어사에서 수도하면서 불교를 통한 구국운동을 궁리하였다. 1938년부터 토산리·평대리·하례리 등에 포교소를 설치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평생을 항일에 뜻을 두고 살다가 해방후에는 정실에 월정사를 창건하였으나 4·3사건 때 소실되었다. 1949년 8월 25일 돈 한 푼, 쌀 한 톨, 걸칠 옷 한 벌 없는 상태에서 73세로 돌아가셨다.(濟州鄕校誌 633쪽, 제주통사 203-205쪽)
한편 격문과 통고문에 접한 이장들은 이민들을 모아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는데 지휘자의 상실로 모든 것이 무산되었다. 그 중에서도 신좌면 대흘리 이장 부우기(夫祐基)는 장정 20여인의 연판장을 만들어 참가하려 하였고, 구우면 두모리 이장 김재형(金栽瀅)은 이민 227인을 동원하여 도통기(都統記)를 작성하여 참가하려 하다가 문서가 경찰에 압수 체포되어 1909년 4월 3일에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유배형 3년이 선고되었다.(제주항일독립운동사 418쪽)
이와 같이 모병단계에서 탄로나 실패하고 말았지만 제주의병항쟁은 제주항일운동사에서 볼 때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도민의 주체적 대응이었으며 이를 계기로 항일의식을 더욱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이 기념탑은 이러한 의병창의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이를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19977년 1월 11일)
탑의 3면에는 봉헌의 글, 격문, 의병행장이 새겨져 있다.
봉헌의 글 : 국운이 쇠진하여 국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가려는 역사의 비운 앞에서 백의민족의 피를 이어받은 제주 젊은이들이 그 울분을 참을 수 있겠느뇨.
장하도다! 제주 한라의 신비로운 기상과 더불어 자라온 우리 선조들이여! 선조들의 그 거룩한 뜻은 결코 헛되이 흘려 버릴 수 없는 귀중하고 영원히 간직하여야 할 애국애족의 산 교훈이라고 그 누가 믿지 않겠느뇨.
우리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풍요한 역사를 창조해가는 원동력은 선조들이 흘리고 떠나간 그 값진 생명이 있었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선조들이 남기고 간 훌륭한 교훈이 있었기에 제주의 참된 역사가 끊임없이 전진해 가는도다.
조국과 민족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목숨을 다 바친 선조들이여! 이제 제주도민은 선조들의 넋을 영원토록 받들고자 이 탑을 여기에 세우노니 고이 잠들지어라.
서기1977년 1월 11일
기념탑의 기단부 옆에는 무기를 든 2인의 농민상, 나이든 남녀가 만세 부르는 모습, 몽둥이를 든 학생복 입은 남자와 태극기를 든 여성(여학생을 표현한 것으로 보임)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당시 제주도에는 학생복을 입는 남학생이 제주공립농업학교밖에 없었는데 이들이 의병에 가담하였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만세를 부르는 모습은 조천 만세운동을 연상케 하며 남녀학생은 당시 의병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므로 의병항쟁기념탑에는 적절치 않다.
《작성 2008.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