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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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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8차 인터폴 서울총회 기념 (1999.11.8. 발행)
1999 - 제68차 인터폴 서울총회 개최(8~12일)
제68차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 서울 총회가 지난 11월8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개막했다. 인터폴 총회는 급증하는 국제범죄에 대한 공조체제를 다지기 위해 177개 회원국이 해마다 번갈아가면서 개최하는 세계 경찰의 올림픽 같은 행사다. 12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행사에는 루이스 프리 미국 연방수사국 국장 등 세계 각국의 경찰대표 600여명이 참석했다. ...
이창곤 기자 goni@hani.co.kr /한겨레21 (사람이야기) 1999년 11월 18일 제283호
http://www.hani.co.kr/h21/data/L991108/1pbfb83j.html
1997 - 세계최대 중국 싼샤댐[三峽댐] 물막이공사 완성
세계 최대인 중국 삼협댐 공사중 물막이 공사가 1997년 11월 8일 완성됐다. 물막이 공사는 강 양쪽에서 토사를 부으며 전진, 강 중심에서 맞닿게 하는 작업이다.
중국정부는 물막이 공사완성 후 바로 시작할 댐 공사비로 2천억달러를 예상했다. 중국인들이 장강으로 부르는 이 양자강 물을 가로막는 역사적 장면은 중국 중앙 CCTV를 타고 12억 중국인들에게 중계됐다. 삼협댐 건설은 `물속의 만리장성 공사`라고 불릴만한 대역사였다.
1919년 손문이 처음으로 안을 냈고, 1956년 모택동, 1958년 주은래, 1980년 등소평 등이 의욕을 보였으며, 1992년 4월 중국정부의 결정으로 현실화됐다. 2009년 댐이 완성되면 높이 185m, 길이 2331m 총출력 1820KW, 저수량 393억입방미터로 저수량, 발전용량 모두 세계최대가 된다. 또 양쯔강 중상류 지역에는 평균 너비 1.1Km 길이 6백Km에 달하는 거대한 인공호수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삼협댐은 당시 기후-환경변화와 수질의 변화, 토사침적 등의 문제로 국내외 환경전문가들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조선
1984 -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 제14차 우주여행 시작
디스커버리 우주왕복선(Space Shuttle Discovery, 궤도선 제식번호: OV-103)은 미국 NASA의 우주왕복선 중에서 현재 운용중인 3대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는 애틀랜티스와 인데버이다.)
1984년에 초도비행을 했다.
실제 임무를 수행한 3번째 궤도선이며, 현재 운용되는 3대 중에서는 가장 오래되었다.
디스커버리호는 연구와 국제 우주 정거장 조립 임무에 사용되고 있다.
최초비행일 : 1984년 8월 30일 ~ 1984년 9월 5일
최후비행일 : 2009년 8월 28일 ~ 2009년 9월 11일
/위키백과
1961 - 서독 총리에 아데나워 당선
콘라트 아데나워(독일어: Konrad Adenauer, 1876년 1월 5일 ~ 1967년 4월 19일)는 독일연방공화국(구 서독)의 총리이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9년 ~ 1963년까지 첫번째 총리였으며, 1950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 기독교 민주연합(Christian Democratic Union)의 당의장을 지냈다. /위키백과
1953 - 러시아의 시인, 소설가 부닌(Bunin, Ivan) 사망
부닌 [Bunin, Ivan Alekseevich, 1870.10.22~1953.11.8]
구소련의 시인·소설가.
보로네지의 귀족 집안 출신이다. 중학을 중퇴하였으며, 1889년 집안의 몰락으로 교정계(校正係)·장부계(帳簿係) 등의 일을 하였다. 1887년부터 시를 발표하였으며, 1897년 단편집을 출판하고, 1901년 시집 《낙엽》을 출판하였다. 1900년대에는 고리키가 이끄는 ‘즈나니에’ 문고(文庫)에 협력하였다. 중편 《마을》(1910) 《울보 이오안》(1913) 등을 통해 러시아의 자연과 처참한 농민생활을 치밀하게 묘사했고, 단편 《광석(鑛石)》(1900) 《새길》(1901) 등에서는 오래된 농촌의 몰락을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리는 동시에, 농촌에 대한 자본주의의 침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또한 단편 《형제》(1914)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신사》(1915) 등에서는 자본주의의 악덕(惡德)을 비판하였다. 혁명 후 1920년에 프랑스로 망명하였고, 193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서정주의와 함께 투철한 사실주의로 일관된 그의 작품들은 투르게네프, 체호프와 견줄 만하며,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최후를 장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naver
1946 - 네덜란드의 축구 감독 히딩크(Hiddink, Guus) 출생
히딩크 [Hiddink, Guus, 1946.11.8~ ]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1946년11월 8일 ~ )는 네덜란드파르세벌트(Varsseveld) 출신의 축구 감독이다. 2006년에는 네덜란드 PSV 에인트호벤과 오스트레일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호주 국가 대표팀을 16강까지 올려놓은 바가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위,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4위,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16강에 올린 경력이 있다. 2006년 FIFA 월드컵이 끝난 후부터 러시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유로 2008에서 4강에 올랐다. /위키백과
1942 - 미군 북아프리카 상륙
1942년 오늘!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이 처음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에 상륙한다.
알제리의 알제항과 오만항에 상륙한 미군!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미군은 독일의 롬멜 장군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이 곳에 파병됐다.
미군은 상륙 3일 뒤인 11월 11일 알제리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미군의 북아프리카 점령으로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YTN
1936 - 프랑코, 스페인 총통 취임
프랑코 [Franco, Francisco, 1892~1975]
알카사르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1년 장군이 되었다. 1928년 사라고사에 신설된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으나 1931년 공화제가 수립되자 공화정부에 반대한 이유로 1933년 사관학교는 폐쇄되고 발레아레스섬으로 좌천되었다. 1935년 10월 무어인 부대와 외인부대를 이끌고 아스투리아스의 노동자봉기를 진압, 참모총장이 되었다. 1936년 2월 ‘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되자 즉각 반(反)정부 쿠데타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정부에 의해서 카나리아제도(諸島)의 수비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그해 7월 모로코로 가서 반정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얼마 후 반란군측의 주요인물이 사망 혹은 체포되었기 때문에 프랑코의 세력이 커져 10월 국민당 정부 수반 및 군총사령관이 되었다.
그 후 2년 반에 걸친 에스파냐내란에 승리, 팔랑헤당(黨)의 1당독재에 의한 파시즘국가를 수립하였다. /naver
1923 - 독일, <비어 홀 폭동> 발생
1923년 11월 8일 저녁 히틀러와 소수 나치 당원이 뮌헨의 한 맥주집에서 열리는 우익 정치모임에 난입했다. 히틀러와 소수 나치당은 제1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독일 우익 군사지도자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연합했으며, 1년 전에 있었던 베니토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을 본뜬 '혁명'을 계획했다. 우익 정치모임에 난입해 그곳에 있던 우익 지도자들로부터 베를린에서 일어날 '혁명'에 가담하겠다는 합의를 억지로 얻어냈다. 다음날 나치 당원 약 3,000명이 뮌헨 중심지 마리엔플라츠로 진군하던 중 경찰 저지선에서 일제사격으로 인해 나치 당원 16명과 경찰 3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반란자들은 정부가 강력히 대응하자 '혁명' 계획을 포기했다. 그뒤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 바이에른 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루덴도르프는 석방되었고, 히틀러는 반역죄에 대한 최소 형벌인 5년형의 징역에 처해졌으나 실제로는 란츠베르크에 있는 요새에서 8개월 동안만 복역했다. 이곳에서 히틀러는 그의 교서가 된 <나의 투쟁 Mein Kampf>의 많은 부분을 썼다. /브리태니커
(비어홀 폭동은 맥주홀 폭동, 뮌헨 반란(München Putsch), 히틀러 폭동이라고도 합니다. ^.@)
1922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외과의사 바너드(Barnard, Christiaan) 출생
바너드 [Barnard, Christiaan (Neethling), 1922.11.8~2001.9.2]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흉부외과 의사.
인간을 상대로 한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에 성공했다.
뷰포웨스트(Beaufort West)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심장병으로 죽은 남동생의 영향으로 케이프타운 의과대학교에 들어갔으며 그루트 슈어(Groote Schuur)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을 했다. 1951년 케이프타운 시립병원과 그루트 슈어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석사학위를 따고 1953년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결핵성 수막염 치료에 관한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6년 미국 미네아폴리스 대학교 흉부외과에서 연구하면서 1958년 개에 대한 심장이식 수술에 최초로 성공한 노먼 셤웨이(Norman Shumway)를 알게 되면서 심장이식 수술에 관심을 가졌고 관련 논문도 썼다. 모국으로 돌아와 그루트 슈어 병원 흉부외과의로 임명된 버나드는 심장 부서를 신설했고, 1962년에는 케이프타운 대학교 흉부외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12월 3일 그루트 슈어 병원 수술실에서 외과의인 남동생 마리어스 버나드(Marius Barnard)를 포함한 30명으로 수술팀을 구성해 9시간 동안 인간을 상대로 한 최초의 심장이식 수술을 실시했다. 수술 전날 교통사고로 사망한 데니스 다발(Denise Darvall)이라는 25세 여성의 심장을 불치의 병을 앓고 있던 55세의 루이스 워시칸스키(Louis Washkansky)에게 이식하는 수술이었다.
수술 결과는 성공적이었으나 루이스는 면역 체계 이상으로 폐렴에 걸려 18일 만에 사망했고, 바너드는 심장병 치유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지만 자연의 법칙을 무시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버나드는 1968년 1월 2일 다시 심장이식 수술을 재개하였고 이 환자는 18개월간 생존하였으며, 이후에도 그는 심장이식 수술을 계속했다. 1983년 케이프타운 대학교에서 은퇴하였고, 2001년 키프로스의 파포스(Paphos)에서 휴가 중 사망했다. /naver
1900 - 미국의 여류소설가 미첼(Mitchell, Margaret) 출생
미첼 [Mitchell, Margaret, 1900.11.8~1949.8.16]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미국 소설가이다.
조지아주 애틀랜타 출생. 아버지가 법률가 겸 역사학자였으므로 온 집안이 역사에 흥미를 가졌고, 미첼 역시 남북전쟁 때의 일화(逸話)를 들으면서 성장하였다. 처음에는 의학을 지망하여 매사추세츠주의 스미스칼리지에 다녔으나, 어머니의 사망으로 귀향하여, 몇 해 동안은 고향의 《애틀랜타 저널》지(誌)에 관계하였다. 1925년 결혼 후부터는 남북전쟁과 전후의 재건시대(再建時代)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1936)를 10년이 넘도록 계속 집필하였다.
어렸을 때 가정에서 들었던 전쟁일화와, 장시일에 걸쳐서 모은 자료를 바탕으로 지은 이 1,037페이지짜리 대작은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의 남부 여인 스칼렛 오하라와 야성의 암상인(闇商人) 레트 버틀러를 중심으로, 인간 애욕(愛慾)의 파노라마가 펼져지는 화려한 대형 로맨스인데 세밀한 시대 묘사, 애욕문제의 능숙한 처리 등으로 호평을 받아, 그 해에 100만부를 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국내외에서 기록적인 독자를 획득하였다. 1937년에는 퓰리처상(賞)을 받았다. 또, 발간 후 즉시 영화화되어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 8개 오스카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나 미첼은 그 후의 작품은 없으며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naver
1895 - 독일의 물리학자 뢴트겐, X선 발견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독일의 빌헬름 콘라드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1895년을 20세기 과학사의 기점으로 삼는다. 그만큼 X-선은 현대물리학과 진단의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X-선 발견 역시 우연이었다.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다. 고전압이 걸린 고진공관을 이용해 작업을 하고 있던 뢴트겐이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자 음극선이 금속 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하면서 투과력이 강한 알수 없는 광선이 발생하고, 이 광선이 고진공관을 둘러싼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 책상 위에 있던 백금시안화바륨 종이를 감광시킨 것이다.
‘미지의 빛’이라는 뜻에서 이 새로운 광선을 ‘X-선’이라 명명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했다. 12월 22일, 자신의 처 베르타의 왼손을 감광판 위에 놓고 실험한 결과 살아있는 사람의 뼈가 사진으로 찍혀 나왔다.
사진은 이듬해 학회지에 제출한 그의 논문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와 함께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지만 1901년 첫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할 때까지 “사회의 도덕성에 반한다”는 이유로 그는 대중에게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한 신문은 “여성의 속옷 밑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광선을 발견한 뢴트겐을 사악한 기계장치와 함께 땅속에 파묻어야 한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발명가 에디슨의 조수는 X-선의 효능을 검증해보기 위해 자신의 신체에 X-선을 노출시키는 실험을 하다 죽기도 했다. /조선
뢴트겐 X선 발견 연표
1895.11.08 - 뢴트겐, X선 발견
1895.12.22 - 사람의 손을 X선으로 촬영
1895.12.28 - 논문 '새로운 광선에 관하여' 발표
1896.01.01 - 학술지에 발표
1896.01.05 - 일반 언론을 통해 보도
1881 - 프랑스의 비행술 선구자 에스노 펠트리(Esnault-Pelterie, Robert) 출생
에스노 펠트리 [Esnault-Pelterie, Robert, 1881.11.8~1957]
프랑스의 비행술 선구자.
유럽에서 부력을 이용한 비행선과 다른 항공기의 비행에 크게 공헌했다.
소르본대학교에서 공학을 공부한 뒤, 조종기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라이트 형제의 1902년형 글라이더 복제품의 제작 및 활공을 시작했다. 기술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 비행원리를 비난했지만, 반대로 보조날개(가동 날개부)를 발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07년에는 최초의 단엽기(單葉機) 가운데 하나이며 혁신적인 7기통 성형기관(星形機關)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동력 항공기를 제작했으며, 이 항공기로 비행한 최장거리는 600m였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연료 펌프를 발명했다. 그는 우주탐사에 흥미를 가지고 로켓의 고공비행에 대한 이론을 연구했다. 이를 통해 '우주비행술'(astronautics)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이 분야의 업적에 대하여 매년 주어지는 상(펠 허시 상)을 제정하는 데도 기여했다. /브리태니커
1875 - 중국의 여성혁명가 추진(추근)[秋瑾] 출생
추진(추근) [秋瑾, Qiu Jin, 1875.11.8~1907.7.15]
추근(秋瑾, 1875년~1907년)은 청나라 임종 때의 여성혁명가로 원명은 규근이다. 1904년 일본 유학 시에 이름을 규를 빼고 가을의 미인이란 뜻의 추근으로 바꾸었다. 소흥 사람으로 아명은 옥고, 자는 선경(璿卿), 호는 단오(旦吾)이다.
생애
원적은 저장 성소흥 산음현이지만, 푸젠 성샤먼 태생이다. 그녀의 조부, 추가화가 샤먼의 벼슬아치로 부임하여 이사를 갔다. 당시 샤먼은 영국이 강제로 개방한 항구였고, 부장관인 조부는 영국인에게 끊임없이 모욕을 받았다. 그 분노가 어린 추근에게도 전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양있는 부인이고, 추근은 11세에 시를 짓고, 두보, 신가헌의 시집을 늘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추근은 어머니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62세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애도하기 위해 만모연을 만들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의 생가에서 승마나 격검, 운동 등으로 체력을 단련했다고 전해진다. 사진에 있는 것처럼 도검 애호가로 일본도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결혼
1869년 후난성 대상인의 장남 왕정균과 결혼을 한다. 남편을 따라 북경에 살게 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생겼지만, 성격 차이로 불화를 겪었다. 1904년 가족을 두고 단신으로 일본에 유학하게 된다.
유학
홍문학원의 속성사범반에 편입하여, 후에 청산실천여학교로 입학. 교육, 공예, 간호학 등을 배우고, 독서와 집필에 열중하였다. 그 외 사격과 무술 심지어 폭약 제조법까지 배웠다고 한다.
요코하마의 홍문천지회에 입회하여 참모가 되었고, 1905년 9월에는 손문이 거느리는 혁명단체 중국동맹회에 참가하여 저장 성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때 여성 모임 공애회를 결성하였다.
활동
귀국 후에는 소흥으로 돌아와 1907년 학당을 개설하고, 광복회의 간부를 훈련하기 위한 혁명거점으로 삼았다. 추근은 이곳을 거점으로 체육회를 조직하고, 비밀결사를 결성하여 혁명 청년을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또 저장 성 각지의 회당과 연대하여 광복군을 결성하고,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를 진행했다. 1907년 1월 14일에는 추근이 중심이 되어 중 국 여성해방운동을 위해 상하이에 중국여보를 창간했다.
그러나 귀국 후 불과 1년 6개월 후 추근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1907년 5월 안후이성 안경에서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저장 성에서 호응을 위해 준비를 진행했지만, 무장봉기의 시점의 불일치로 7월 6일 먼저 서석린이 먼저 봉기하는 바람에 청나라 정부에 의해 순식간에 진압되고, 처형되어 버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추근은 동료들과 피신을 하였다. 7월 13일 학당을 포위한 청군에 추근도 체포되어 이틀 후 7월 15일 처형되게 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31세였다. 여성혁명가였던 추근의 처형은 당시 청나라 당국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반향을 불러왔고, 그 후 중국 혁명운동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다.
저작물
시인으로서 그녀의 주제는 중국 여성해방운동을 중심으로 한 것이 많다. 시문의 기조는 웅장하고 호방한 것, 격앙되고 비분강개한 것들이 많아 행간에 억양과 색채가 잘 표현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秋瑾集(북경·중화서국,1960년)에 종합되어 있다. 처형된 다음해 중국여보에 게재된 유작 탄사정위석(彈詞精衛石)이 알려져 있다. /위키백과
秋風秋雨愁殺人(추풍추우수쇄인)
가을바람 가을비가 사람을 못 견디게 한다.
- 추진이 처형되기 전 남긴 마지막 시
- Austin's Seven (1922) and Metro - Austin-Healy 100
1866 - 영국의 실업가 오스틴(Austin, Herbert) 출생
오스틴 [Austin, Herbert, 1866.11.8~1941.5.23]
영국의 실업가.
오스틴자동차회사의 창업주이자 초대회장이다. 이 회사의 '오스틴 세븐'이라는 모델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소형차 모형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883~90년 기술자 및 기술관리자로 일했으며 이후 영국에 있는 우즐리쉽쉬시어링회사의 관리자가 되었고 곧 이사가 되었다. 1895년 오스틴은 최초로 3륜차인 우즐리 자동차를 설계했고, 1900년에는 역시 그가 설계한 첫번째 우즐리 4륜차를 생산했다. 1906년 오스틴은 버밍엄에 있는 롱브리지공장에서 오스틴자동차회사의 차량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7년 오스틴은 기사작위를 받았고, 1919~24년까지 보수당 하원을 지냈다. 1936년에는 남작작위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1864 - 러시아의 배우 코미사르제프스카야(Komissarzhevskaya, Vera) 출생
코미사르제프스카야 [Komissarzhevskaya, Vera Fyodorovna, 1864.11.8~1910.2.23]
러시아의 배우.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이름난 오페라 가수 F.페트로비치의 딸이며, 영국에서 활약한 연출가 T.코미사르제프스키의 누나이다. 1891년 데뷔하여 1896년 알렉산드린스키극장에 참가하여 체호프의 《갈매기》 등에 출연하였으나 1902년 궁정극장의 인습에 불만을 느껴 그만두었다.
그뒤 2년의 순업(巡業)을 하다가 190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코미사르제프스카야극장을 개설하고 M.고리키, A.체호프 등의 작품을 상연하여 주목할 만한 활동을 하였다.
그뒤 M.마테를링크, F.K.솔로구프 등의 상징주의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나, 순업 중에 중앙아시아의 타시켄트에서 천연두로 죽었다. H.입센의 노라역 등의 연기를 잘하여 진보적인 젊은 층의 격찬을 받았다. /naver
1847 - 영국의 괴기소설가 스토거(Stoker, Bram) 출생
스토거 [Stoker, Bram, 1847.11.8~1912.4.20]
영국 괴기 소설가.
본명 Abraham Stoker. 더블린 출생.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나온 후 연극계에 입문하여, 1878년부터 연극배우 H.어빙의 비서로 있었다. 후에 《헨리 어빙의 추억 Personal Reminiscences of Henry Irving》을 저술하였다. 1897년 흡혈귀 전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드라큘라 Dracula》를 출판하여 유명해졌으며, 오늘날에도 J.S.레파뉴의 《카밀라 Camilla》 등과 함께 흡혈귀 문학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naver
1793 -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다
루브르 미술관 (파리)
파리 시내 중앙에 자리집고 있는 「루브르」 미술관은 본래 왕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현재 미술관이 있는 자리는 13세기 경 ‘루브르’ 궁이 있었던곳. 이 왕궁이 16세기에 이르러 프랑수아 1세와 루이 14세 등이 수집한 미술작품들이 쌓이면서 미술관으로서 기틀을 만들게 되었다. 루브르 궁전이 미술관으로서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793년 11월 8일,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1759년에 문을 열었으니 이 보다 34년 늦게 개관 되었다. 루브르 미술관은 크게 리슐리(Resully), 슐리(Sully), emshd(Denon)의 3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루브르 미술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보이는 미술 작품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 그리고 슐리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볼 수 있는 승리의 여신 ‘니케’(영어로는 나이키) 상들을 꼽을 수 있다.
자유·평등·박애의 이념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나라 프랑스. 오랜 세월을 두고 세계 각국의 많은 여행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프랑스의 매력은!? 그리고 이 나라의 수도이자 예술의 도시 파리는 어떤가?
[김원곤 기자]
http://www.kynp.co.kr/board/gisa/content.asp?d_code=photo&num=4&ref=4&page=3&startpage=1
1723 - 영국의 해군제독 바이런(Byron, John) 출생
바이런 [Byron, John, 1723.11.8~1786.4.10]
영국의 해군제독.
1768년에 발표된 남아메리카에서의 난파경험에 관한 그의 기록은 그의 손자인 시인 바이런 경이 〈돈 주안 Don Juan〉을 쓸 때 일부분 이용되었다. 바이런 남작 4세의 차남으로 1741년 조지 앤슨이 세계일주 항해중이던 '웨이저호'가 칠레 해안 부근에서 좌초되었을 때 수습 해군사관으로서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커다란 난관을 겪은 뒤 결국 스페인의 감옥에 갇혔다가 1745년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1764년 프리깃 함 '돌핀호'의 함장으로 임명되어 가상의 남부 대륙을 찾아내는 임무를 띠고 태평양으로 파견되었으나 22개월에 걸쳐 아무 소득 없이 항해일주를 하는 데 그쳤다. 1769년 뉴펀들랜드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1775년에 해군 장성이 되었으며 1778년에 부제독이 되었다. 1779년 아메리카의 영국군을 위한 증원군을 실은 함대를 이끌고 가다가 '악천후의 사나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대서양에서 사상 최악의 태풍을 만났다. 바이런 경은 〈오거스타에게 보내는 서신 Epistle to Augusta〉에서 이 같은 상황을 암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기묘한 운명이 그대 아버지의 아들에게 주어졌으니 이는 고칠 수 없는 일이라 되돌릴 길이 없도다. 우리 할아버지가 먼 옛적에 겪었던 운명이 그에게 거꾸로 닥쳐왔으니 그가 바다에서 안식을 얻지 못했듯이 나는 뭍에서 그러하도다". 그는 1779년 서인도제도 총사령관으로서 그라나다 근해에서 에스탱 백작과 백중지세의 전투를 벌였다. /브리태니커
1674 - 영국의 시인 밀턴(Milton, John) 사망
밀턴 [Milton, John, 1608.12.9~1674.11.8]
장편 서사시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의 작가 존 밀턴이 1674년 11월 8일 사망했다. 66세였다. 영어로 작품을 쓴 위대한 작가를 꼽으라면 세익스피어 다음 사람으로 기록될 정도로 그의 시들은 뛰어났다.
밀턴의 삶을 지탱한 두개의 지주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청교도주의와 르네상스적 교육을 통해 얻은 인문주의였다. 크롬웰이 이끈 청교도 혁명 속에서 밀턴의 종교적 신념과 인문주의적 교양은 서로 합쳐져 역사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되었다. 열두 권으로 이뤄진 '실낙원'은 구약성서를 소재로 삼아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낙원추방을 묘사하고 있다.
밀턴은 젊은 시절부터 장편 서사시를 쓸 계획이 있었지만 청교도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틈을 내지 못하다가, 만년에야 이 웅대한 시를 쓰게 되었다. 밀턴은 죽기 3년 전에 인간의 마음속에 낙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한 서사시 '봄낙원'을 출간해 '실락원'과 짝을 맞추었다. /조선
1656 - 영국의 천문학자 핼리(Halley, Edmund) 출생
핼리 [Halley, Edmund, 1656.11.8~1742.1.14]
핼리는 현대사상의 기초를 확립한 과학혁명의 시기를 살다 간 영국의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이다. 그는 핼리 혜성의 궤도를 처음으로 계산해냈다. 1673년 옥스퍼드대학교 퀸스 칼리지에 들어갔으며, 존 플램스티드가 연구를 하고 있던 왕립 그리니치 천문대를 방문하고 나서부터 천문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687년 뉴턴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프린키피아>라고도 부름)를 출판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86년 대양에 분포하는 탁월풍을 나타낸 기상도를 제작했고, 1693년 브레슬로 시의 사망률 통계표를 출판했다. 인구의 사망률과 나이를 관련시켜 설명을 시도한 그의 통계표는 나중에 생명보험회사의 보험통계표 개발에 영향을 주었다. 1698~1700년 순수한 과학적 목적의 항해를 한 후, 1701년 대서양과 태평양 지역의 자기도(磁氣圖)를 처음으로 출판했다. 1531, 1607, 1682년에 관측된 3개의 혜성이 같은 혜성임을 밝혀내고 1758년에 다시 돌아올 것을 정확히 예측했는데 혜성은 그가 예측했던 대로 되돌아왔고 그의 이름을 따서 핼리 혜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브리태니커
"비록 핼리가 다시 그 혜성을 목격할 만큼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혜성은 그가 예측했던 대로 되돌아왔다.
(중략)
그 혜성은 지금까지 핼리 혜성으로 불리고 있다."
- 아이작 아시모프
- Gustav I Vasa
1520 - 덴마크, 스톡홀름 대학살[Stockholms Blodbad, Stockholm Bloodbath] 자행
1520년 11월 8일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Christian II, 1481~1559)가 스웨덴을 침공해 스웨덴 귀족들을 대거 처형했다. 1397년 스칸디나비아 3국인 노르웨이·스웨덴·덴마크 왕국이 단일 군주 아래 결속한다는 내용의 칼마르 동맹(Kalmar Union)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스웨덴 국민들은 이 동맹에 불만을 품고 소(小)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스웨덴의 반(反)동맹파를 결성했다. 반동맹파가 동맹 옹호자인 대주교 구스타프 트롤레를 투옥하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1519년 대규모 용병군을 이끌고 스웨덴을 침공했다. 1520년 9월 스투레의 군대를 격파하고 스톡홀름을 점령한 크리스티안 2세는 11월 8~9일에 80명이 넘는 스웨덴 귀족들을 처형했다. 스웨덴과 핀란드 전역에 걸쳐 계속해서 처형이 자행되자 학살은 커다란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사실상 모든 스웨덴인 파벌들이 칼마르 동맹에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결국 1552년경 구스타프 1세 바사(Gustav I Vasa, 1496?~1560)가 달라르나 지역의 농민들과 한자 동맹의 도움에 힘입어 스웨덴에서 덴마크인들을 몰아내고 칼마르 동맹을 해체했다. /브리태니커
- Spain 1000 (Banknote) 통화 : 페세타(Peseta)
1519 -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들어가다.
페르난도 코르테스 모노로이 피자로 알타미라노(스페인어: Fernando Cortés Monroy Pizarro Altamirano, 1484년 ~ 1547년 12월 2일)는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의 정복자이다.
아즈텍 문명 정복
그는 스페인의 시골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급 귀족 출신으로 살라망카대학에서 수학 후 19세때인 1504년 대서양을 건너 에스파뇰라섬에서 근무하였다. 1511년 총독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휘하에 근무하면서 쿠바를 점령하였고 이 전투에서 상당한 공적을 세웠다. 코르테스는 유카탄반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탐험대장으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승승장구를 두려워한 총독 벨라스케스가 이를 번복하자 1519년 병사 508명과 말 16필을 11척의 배에 나누어타고 독자적으로 유카탄반도에 상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베라쿠르즈라는 도시를 건설하였고 유카탄반도의 마야족들과 전투를 벌이면서 부족들을 점령해나갔다. 말이나 대포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인디오들은 공포 속에서 코르테스에게 항복하였다. 코르테스는 원주민을 통해 황금으로 가득찬 아스텍왕국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진군하였다. 하지만 아즈텍의 왕은 코르테스 일행의 행색을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착각하였고 그들을 환대하였다. 코르테스는 아즈텍왕국을 기습공격하여 왕인 몬테수마 2세를 인질로 잡고 에스파냐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케 하였다. 그리고 아즈텍의 우상을 파괴하고 왕국의 실력자들을 살해하였으며 그들의 왕국인 테노치티틀란에 교회를 세웠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은 임무를 넘어선 반란으로 간주되어 쿠바에서 원정군이 왔으나 코르테스는 이들을 격파하였다. 그 동안에 아즈텍에서는 인디오의 반란이 일어나 많은 에스파냐 정복자들과 전투를 벌였으며 이때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학살당하였다. 후일 에스파냐 인들은 이것을 ‘슬픔의 밤’(1520.6.30)이라고 불렀다.
이듬해 9월 유럽의 정복자들에 의해 옮겨진 천연두가 창궐하자 아즈텍 원주민들이 죽어나갔고 코르테스는 철저한 파괴와 유혈 가운데 테노치티틀란(멕시코)를 탈환하였다. 인구 500만명의 왕국이 에스파냐 600여명의 정복자에게 완전하게 점령되었다. 1522년 에르난 코르테스는 테노치틀란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526년 월권혐의로 파면되었고,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왕을 설득하여 재차 멕시코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만(灣) 등을 발견하였다. 1540년 귀국한 후에도 계속 카를로스 1세(카를 5세)의 냉대를 받아 실의 속에 죽었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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