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초등학생 때 나는 특정 상황에서
말하기를 거부하는 선택적 함구증을 앓았다.
친구와 선생님의 말에 고갯짓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소통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는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자연스럽게 '병어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벙어리가 아니라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서
맴돌았지만 끝내 내뱉을 수 없었다.
가시방석 같은 학교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면 더 가시 돋친 말이 오갔다.
부모님의 몸과 마음에는
멍과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아빠는 엄마가 한 말과 행동을 내게
폭로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자영업을 했던 아빠는 가게를 닫은 채
하루 종일 집에서 소주를 들이켰다.
욕설을 내뱉으며
소위 한바탕할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런 상황이라 내게도 멍과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집에서도 벙어리 신세인 나 자신이
미워서 현관문을 박차고 나왔다.
돈도 없거니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던 나는 정처 없이 걸었다.
그때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를 타고 나를 찾으러 온 아빠가
내 팔목을 거세게 잡아당겼다.
짧은 가출은 그렇게 끝났다.
밖에서 '예' '아니요' 같은 간단한
의사 표현도 하지 못했던 나는
부모님에게도 마음을 표현하는 게 어려웠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랑 이혼하면 좋겠어."
나의 눈시울보다 빨간 김치 냉장고
앞에 앉아 있던 엄마가 답했다.
"다 너를 위해서야."
아빠 없는 자식으로 키울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를 위한다면서 매일 밤 베갯잇을 적시며
'고통 없이 죽는 법' 따위의 질문을
검색하게 했다.
내 생에 지금보다 더한 고통은
없을 것 같았다. 엄마와 아빠는
이제 막 한바탕을 시작했겠지만,
나는 이미 학교에서 한바탕을 하고 온 뒤였다.
집에는 더 큰 폭풍이 일었으므로
나는 안식처 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건 도서실이었다.
도서실은 벙어리들 천지였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와중에 얕은 숨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 언뜻 들릴 뿐이었다.
책을 열면 온통 이야기 세상이었다.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는
나의 말소리를 닮아 있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도서실로 향했다.
그러던 중 벽에 붙은
교내 백일장 포스터를 봤다.
참가 신청서를 소중히 챙겨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공책에 시를 쓰며 놀았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마냥 좋았다.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글로 쓰며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백일장에서 상을 탄 뒤론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학년이 끝날 때마다
같은 반 친구들이 돌려 써 주는 편지에
'말 좀 해.' 같은 말이 아닌
'글을 참 잘 쓰는 것 같아.'
하는 칭찬이 적히기 시작했다.
고백적 글쓰기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덕분에 지난날의 아픔을 치유하고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불화를 보며
사랑을 불신했지만, 지금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외로웠던 내 어린 시절을 토닥이며
나를 아프게 한 모든 것을 용서했다.
희로애락을 전부 끄집어낼 수 있게
해 준 문학에게 너무나도 고맙다.
문학으로 나와 독자들을 치유하고
공감케 할 수 있다면,
단언컨대 평생 벙어리여도 좋다.
김수진 | 대전시 대덕구
(제9회 청년이야기대상 수상작 대상)
첫댓글 자기만의 무언의 도피처가 필요하더군요.
벙어리가 병아리가 되듯이...
말을 잘 하는 사람과
글을 잘 쓰는 사람..
둘다 잘 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