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에서 민국으로…임정, 세계 첫 민주공화제 새기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탄생했다. 4월10일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의정원을 조직해, 첫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임시헌장 10개조를 정했다. 임시헌장은 향후 만들어질 임시헌법의 토대가 될 원칙을 정한 것이다.
임시의정원은 또 임시정부의 수반과 내각 각원들을 선출했는데, 그 구성을 보면 국내에서 전달되어 온 안을 토대로 이를 약간 변형한 것이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만세운동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움직임이 여러 갈래로 진행되고 있었다. 가장 중심이 된 것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단, 그리고 각 도의 대표들이 참여한 ‘국민대회’파였다. ‘국민대회’파는 4월 중순께 이른바 ‘한성정부안’을 만들어 확정했다. 그 과정에서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이 명단을 입수해 이를 다소 변형한 ‘신한민국정부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안을 ‘국민대회’파보다 먼저 상하이에 전달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4월11일 신한민국정부안을 다소 변경해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그해 9월 상하이 임시정부는 러시아령의 대한국민의회 측과 통합하면서 ‘한성정부안’의 명단을 그대로 수용했다. 임시정부는 국내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하고, 대한국민의회 측까지 통합해 정부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진다. 첫째, 임시정부 수립은 한국이 ‘제국’에서 ‘민국’으로 가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4월11일 임시의정원이 채택한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이는 독립 이후에 새로 세워야 할 나라는 전제군주국이나 입헌군주국이 아닌 공화국, 그것도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였던 1905~1910년에는 입헌군주국을 지향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고, 1919년 고종이 서거함으로써 그런 주장은 거의 사라졌다.
또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독일혁명으로 황제가 다스리던 제국들이 다 무너지고 공화국 수립이 세계의 대세가 되었다. 이에 국외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제는 공화국을 세워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3·1운동에 참여했던 민족대표, 청년 학생들이 대부분 공화제를 선호하고 있었다. 임시헌장은 그러한 안팎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 세계 어느 나라도 헌법에 ‘민주공화제’를 규정한 곳은 없었다. 민주공화국의 대표적인 나라라고 할 미국이나 프랑스도 헌법에 그렇게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를 규정했다. 당시 임시헌장을 기초한 이들은 대체로 일본에 유학해 법학을 공부한 이들로서, 국가의 정치체제에는 군주제와 공화제가 있고, 군주제에는 다시 입헌군주제와 전제군주제가 있으며, 공화제에는 귀족공화제와 민주공화제가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공화제라고만 규정하는 것은 미흡하다고 생각해 ‘민주공화제’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임시헌장의 나머지 조항은 민주공화제를 전제로, 대한민국의 모든 인민은 평등하고 자유권을 가지며, 모든 공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는다고 규정하였다. 여기에서는 신분차별, 빈부차별, 남녀차별 같은 것을 모두 배제하였다. 특히 선거권과 피선거권에서 남녀를 차별하지 않았던 것은 매우 선진적인 것이었다.
둘째, 임시정부 수립은 독립운동의 지휘부가 등장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당시 독립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상하이·베이징·만주), 러시아, 미주 등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또 무장투쟁, 외교운동, 실력양성 등 다양한 노선이 있었다. 따라서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을 총지휘할 컨트롤타워가 필요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는 임시정부가 그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임정에는 만주의 무장투쟁이나 국내외의 사회주의 운동까지 지휘하거나 통제할 능력이 없었다.
셋째,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독립 이후 필요한 여러 정책을 수립하고 정부와 의회 조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임정은 1919년 1월 개막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이 독립을 얻을 수도 있다고 기대해 5월 폐막에 앞서 4월에 서둘러 수립된 것이었지만, 파리강화회의는 한국인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러나 세계정세는 수시로 변화하는 것이어서 언제 한국에 독립의 기회가 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과 미국은 만주의 이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많은 이들이 한국의 독립 문제는 결국 미-일 간의 전쟁으로 결론이 날 것으로 전망했다. 그래서 독립 이후를 대비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유지하면서 여러 정책을 구상해 두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면 실제로 임시정부는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떤 업적을 세웠을까. 또 임정의 활동에는 어떤 한계가 있었을까. 임정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역시 외교였다. 임정은 파리강화회의(1919년) 이후에도 워싱턴회의(1921년), 카이로회담(1943년) 등에 대비한 여러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김구 등 임정 지도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를 만나 카이로 선언에 반드시 ‘한국의 독립’ 문구를 넣어주도록 요청했고, 실제로 카이로 선언에는 비록 ‘일정한 과정을 거친 후’라는 단서가 붙기는 했지만 ‘한국의 독립’이 명기되었다.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점이 되고자 노력했다. 초기에는 미주의 안창호와 이승만, 러시아의 이동휘, 상하이의 이동녕·이시영 등 주요 세력의 대표자들이 임정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이승만·이동휘·안창호 등이 임정을 떠나면서 임정은 구심점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임정은 해방을 눈앞에 둔 시기에 다시 민족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아나키스트 세력 등이 참여한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립운동 과정에서 임정에 참여하지 않은 세력도 많았다. 국내외 사회주의 운동 세력은 대부분 임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또 만주의 무장투쟁 세력도 임정과 대체로 소원한 관계에 있다가 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떠나 임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임정은 초기부터 직속 무장부대를 두고자 했으나 여러 여건상 이를 실현하지 못했고, 1940년 충칭에서 광복군을 창설함으로써 처음으로 직속 무장부대를 둘 수 있었다. 그러나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지원과 통제를 받다 보니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고 후방에서 주로 선전활동을 펴야만 했다.
임정은 1930년대 이후 조소앙이 창안한 삼균주의를 수용해 임정의 이념으로 삼았다. 삼균주의란 정치, 경제, 교육에서의 균등을 표방한 것이었다. 임정은 1941년 삼균주의에 기초한 ‘건국강령’을 제정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토지의 국유화, 중요 산업의 국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임정의 건국강령은 건국 이후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구상한 것으로 1948년 제헌국회는 그 취지를 상당 부분 계승해 제헌헌법을 제정했다. 임정은 여러 한계가 있었지만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역사를 시작하였다는 점,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계속 존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