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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나물의 유익
출 12: 5-10
저희가 어렸을 때에는 학질 즉 말라리아가 몹시 성했습니다. 저도 학질을 여러 번 앓았습니다. 하루 걸러 한 번씩 열이 나고 춥고 고생을 했는데, 이 학질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나중에 고치는 약이 나왔는데, 긍계랍이라고도 하고 키니네(과이나인 Quinine)라고도 하는 이 노랗게 생긴 약만 먹으면 학질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그런데 이 약이 얼마나 쓴지 어린아이들이 먹지 않으려고 합니다. 먹어야 병이 낫겠는데 안먹으려고 합니다. 먹어야 병이 낫겠는데 안먹으려고 하니까, 어떤 엄마는 큰 말누깔 사탕을 보여주면서 먹으면 이 사탕을 주겠다고 달래기도 합니다.
영의 세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신앙의 연단을 주기 위해서, 쓰디 쓴 약을 먹이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기 전에, 일년된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는 대문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먹되 쓴 나물도 아울러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만 먹지 말고 반드시 쓴 나물을 사이 사이에 먹어 가면서 고기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로운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달콤한 것만 주시지 않고 때로는 쓰디 쓴 것을 먹으라고 주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쓴 나물을 먹이실 때는 괴로워도 그것을 먹어야 우리에게 유익하고, 긍계랍 먹은 후 왕사탕을 물려 주듯이 달콤하고 수지맞는 큰 축복을 주십니다.
달콤한 것만 주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반드시 쓴나물을 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에 미국에 부흥회 인도하러 가서 치과 의사 선생님 집에서 숙식하는 때가 있었는데, 그 치과의사는 아이들에게 쵸콜렛을 절대로 먹이질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가 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달콤한 은혜만 주시는 법이 없고, 수지맞는 일만 생기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육간에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람이고, 삼층천에 올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내려온 사람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사탄의 찌르는 가시를 주셔서 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 했습니다.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특별기도를 드렸으나 하나님이 제거해 주시지 않고 " 내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바울이 깨닫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시려고 이 가시를 뽑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귀하게 쓰시는 사람일수록 쓴 나물을 더 많이 먹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 쓴 나물을 먹이시든지 뱉아버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 먹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1. 말씀의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0장 9절에 보면 천사가 사도 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 책을 갖다주며 받아 먹으라고 했습니다. 받아 먹으니까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을 때는 꿀같이 달고 맛이 있지만, 이 말씀을 깨달은대로 내 생활에 실천해 옮기려면 쓰디 쓴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의 쓴 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덜된 신자요, 성숙되지 못한 신자입니다.
어떤 고통이 오고 손해가 와도 말씀대로 실천해 옮기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실 때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 쓴잔이므로 밤새도록 기도하시며 그 쓴잔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십자가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
제1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달콤해 보이는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죄와 멸망을 끌어 들였지만, 제2의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십자가의 쓴 잔을 받아 마심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가져 왔습니다.
말씀의 쓴 맛을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2. 징계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불순종하고 곁길로 갈 때에는 사랑의 채찍으로 때립니다. 무섭게 때릴 때가 있고 약하게 때릴 때가 있습니다. 물질로 때릴 때가 있고 질병으로 때릴 때가 있고, 교통사고나 재난으로 때릴 때가 있습니다. 또 자식을 통해서 때리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5절 이하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11절에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징계의 쓴 나물을 감사히 받아 먹고 회개하면 달콤한 축복의 열매를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일 한번만 범해도, 십일조 하다가 마귀의 시험에 들어서 한 번만 떼어 먹어도 하나님은 징계의 쓴 나물을 먹여서 깨닫게 하십니다.
모든 고통과 슬픔을 우연으로 돌리거나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욥기 5장 17절로부터 보면 "볼지어다 하나님게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신다"고 하셨습니다.
3. 수치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과 칭찬만 받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치도 당하게 합니다. 쓰디 쓴 욕도 먹게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0-33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뺨을 때리시며, 수치를 당하게도 하시는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뺨을 때릴 때는 실컷 맞고, 망신을 주고 수치를 당하게 하실 때는, 아무 변명이 불평하지 말고 실컷 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풍부한 자비대로 갚아 주시는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높이실 때가 있는가 하면 낮추실 때가 있고, 낮추실 때가 있는가 하면 높이실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높여주시지만 않고, 또 언제나 낮추시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만하고 우쭐하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 억울하게 욕을 먹고 핍박을 받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에게유익이 되고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1장 7-8절에는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옥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비방이나 훼방에 지나치게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4. 환난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언제나 맑게 개인 하늘만 계속되면 기분은 좋을런지 모르지만, 나무도 자랄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이 세상은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생활에도 기분좋은 일이나 평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쓰디쓴 고난과 환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안의 꽃처럼 만들기 원치 않습니다. 때때로 환난도 당하고 슬픔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게 합니다. 언제나 성공과 승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도 있고 낭패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죄를 깨닫게 되고, 죄를 끊게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난공불락의 큰 여리고성도 함락시켰는데, 조그마한 아이성 싸움에서 실패하여 크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불의 사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대결해서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 한 여자의 공갈 협박에 낙심하여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아래서 차라리 죽여달라고 까지 요청하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칭찬을 듣고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후에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놓고 큰 망신을 하고 수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늘 승리와 성공의 삶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5장 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통의 쓴 나물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고난에는 몇가지 원칙이 있는데 감당치 못할 고난과 시험은 없는 것과, 고난과 시험 뒤에는 큰 축복이 있다는 것과, 모든 고난은 합동하여 유익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할 렐 루 야 !
보혈과 해방
출 12: 5-10.13-14
어떤 사람이 꿈을 꾸는데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의 채찍에 맞으며 무참히 고문당하시는 것을 보다 못해 뛰어가서 채찍질하는 손을 붙잡으며 때리지 못하게 하는데, 그 사람이 돌아서는 순간 얼굴을 보니까 바로 자기 얼굴이더랍니다. 그래서 슬피 울며 통곡했다고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이 가장 엄숙하고 거룩하게 지내야 하는 한 주간이 있는데 바로 오늘부터 한 주간, 우리 만민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온갖 고난을 다 받으시고 종당에는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간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40일 전부터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며 기도합니다. 이것을 사순절이라고 해서 엄숙하게 지킵니다.
구약의 말씀은 모두 신약의 예표입니다. 오늘 읽은 유월절에 대한 말씀은 바로 대속의 피를 흘려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이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피 때문에 해방을 얻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같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신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모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1. 보혈은 죄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모든 불행과 죽음의 원인이 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죄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되는 것은 가장 큰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그런데 죄의 용서를 받고 죄사함 받는 길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날 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포도즙 잔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나서 “너희가 다 이 잔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죄없는 피를 십자가에서 흘려 주셨습니다. 여기 “언약의 피”란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고 그 피공로를 믿으면 무슨 죄라도 다 용서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으면 죄사함 받고 구원받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고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것은 바로 어린 양이 죽으면서 흘린 피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는 것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공로를 믿는 것입니다. 종교라고 다죄사함 받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구속”이란 말은 “값을 지불하고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3장 23~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셨고 다음 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의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그 무서운 죄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2. 보혈은 율법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다 지켜야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율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아무 생활의 규범이 없이 부도덕하게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될 생활규범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주일의 하루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이라든지, 수입의 십분의 일을 정확히 드린다든지 하는 것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은 엄연히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지켜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계명을 범했다고 심판을 받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지만, 죄를 범하면 그것에 해당하는 징계를 받습니다. 율법을 범했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니지만 천국 가기 전에 그에 해당하는 죄의 값을 세상에서 치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문에 속한 법”은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면, “비늘 없는 고기는 먹지 말라”든지, “굽이 갈라지지 않거나 삭임질 못하는 짐승은 먹지 말라”든지, “피는 먹지 말라”든지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해방되었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들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6~17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려 구원을 완성했기 때문에 지금도 돼지고기 먹지 말라, 순대를 먹지 말라, 그런 말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3. 보혈은 사망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중국에서 선교하는 박 선교사가 말하는데 어느 날, 중국 사람이 양을 잡는데 목을 자르고 발목, 손목을 자르고 배를 갈라서 피를 다 흘리며 잔인하게 잡더랍니다. 그래서 “왜 양을 잔인하게 피를 흘리며 잡느냐?”고 했더니 한 마디로 “이 다음 죽을 때 천당 가는데 필요하다”고 하더랍니다. 그 사람이 무슬람인지 어느 종교인지 모르지만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피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말인데 기독교 신앙과 같은 데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원수는 “죽음”인데 예수님이 그 피로 죄값을 치루어 주심으로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15절에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했는데, 즉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피를 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종노릇하던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4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3~5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이 죽음에서 해방되고 영생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그의 살을 먹는 법은 영적으로 먹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하여 그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려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영적으로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면서 요한일서 1장 7절에 있는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란 말씀으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모든 죄를 씻어주신다”고 했더니 한 무신론자가 벌떡 일어나서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씻습니까? 설명해보십시오.”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잠시 묵상하다가 “물을 마시면 어떻게 목마름을 해갈시켜 줍니까?”라고 했더니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까?”라고 할 때에 목사님이 “나도 어떻게 예수님의 피가 죄를 씻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믿어보면 체험할 수 있는데 믿지는 않고 머리로 트집만 잡는 사람은 구원도 받을 수 없고 체험도 할 수 없습니다.
여러 해 전에 세계 각 종교의 대표자들이 시카고에 모여서 회의를 가졌는데 Dr. Joseph Cook이란 목사님이 일어나서 “여러분 큰 슬픔에 잠긴 한 여인을 소개하게 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 여자는 사람을 죽이고 손이 피로 더럽혀져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죽인 피를 씻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종교에 이 여자의 죄를 씻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더니 모두 침묵하고 아무 말도 못하더랍니다. 그때 한 사람이 눈을 들어 하늘을 향해 쳐다보더니 “Joseph 박사님, 당신은 이 큰 죄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Joseph 박사님이 잠시 침묵하다가 큰 소리로 “예,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대답해 줄 것이니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요한일서 1장 7절)”고 대답했습니다. 동서양의 어떤 종교도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4. 보혈은 저주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엊그제 방송을 들으니까 요사이 SARS라는 괴질이 세계를 두렵게 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한국에는 그 괴질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어느 의학계에서 추측이겠지만 연구한 바를 말하기를 “한국 사람이 SARS 병에 안 걸리는 것은 발효식품인 김치를 많이 먹고 마늘을 많이 먹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했습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페니실린도 곰팡이를 모아서 만든 것처럼 김치도 발효식품이라 그런 효과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김치는 세계인의 기호식품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찾아오는 저주, 재앙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피입니다. 누구든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음받은 사람은, 저주와 불필요한 재앙과 사고로부터 지켜 주십니다.
본문 출애굽기 12장 13절에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즉 그 양의 피 때문에 죽음과 저주의 사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재앙이 임하지 아니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말미암아 온갖 저주와 재앙을 가지고 마귀가 침투하는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피를 항상 의지하는 자는 온갖 저주와 재앙에서 지켜주십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이란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 믿고 술 먹고 도박하고 음란하여 망령된 죄를 짓던 가문에는 그런 죄를 범하게 하는 마귀가 떠나지 않고 자자손손 또 그런 죄를 범하게 하고 온갖 저주와 불행을 가져다 줍니다. 그런데 흠 없고 점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이런 마귀가 주는 저주와 재앙으로부터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세계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머리 둘 집 한 칸도 없이 가난하게 되시고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은 가난과 저주를 받아 마땅한 우리를 부요케 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오는 징계의 고통도 있고 연단으로 필요한 가난도 있지만 이런 것들은 결과적으로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마귀로부터 오는 저주나 재앙이나 가난은 예수님의 보혈이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8에는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종교 개혁을 단행한 신앙의 영웅 마틴 루터가 몹시 아파서 병상에 누워 있는데 어느 날 마귀가 들어와서 루터를 비웃듯이 응시하더니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안고 온 큰 두루마리 책을 마루에다 두르르 펴놓는데 보니까 마틴 루터가 평생 지은 죄를 다 기록해 놓았더랍니다. 루터는 주눅이 들고 낙심이 돼서 침묵하고 있다가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큰소리로 “너 한 가지 잊은 것이 있구나. 이것은 다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 모든 죄를 다 씻었다”라고 외치자 참소하는 마귀와 두루마리가 사라져 버리고 말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심을 확실히 믿으시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린양의 피
출 12: 5-14
피는 우리의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어떤 외과의사가 의대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환자의 몸에서 갑자기 엄청난 출혈이 발생할 경우 멈추게 할 가장 유용한 도구가 무엇인가?” 그랬더니 학생들은 이런저런 도구를 제시했습니다. 그때 이 노련한 의사는 손을 가로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닐세. 그것은 바로 자네들의 손가락이야.
손가락을 사용해서 피를 멈추게 해야 하네.” 그리고 또 질문했습니다. “환자가 피를 흘리고 있을 때 자네들의 가장 큰 적은 누구인가?” 학생들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의사가 대답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일세. 피 흘리고 있을 때 시간이 가장 큰 적이라네.” 왜냐하면 피를 쏟아낼 때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이 희미해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자네들의 가장 좋은 친구는 누구인가?” 그때 학생들은 일제히 대답합니다. “시간입니다.”
출혈이 멈춰지면 피를 통해서 다시 새 생명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의사들은 피가 생명이라는 성경적인 사실을 절감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 생명의 존엄성을 가장 깊이 인식하는 사람들이 의사입니다. 피란 우리 몸을 유지하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보통 정상적인 사람의 몸에서는 4~5 리터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피는 심장에서 뿜어져 약 23초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온몸을 한바퀴 돕니다. 이처럼 피는 우리 몸속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생명을 지탱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우리가 호흡한 산소를 폐에서부터 각 조직이나 세포에 실어 나르는 것이 피입니다. 피는 소화기간에서 얻은 영양분을 적재적소에 배치시킵니다.
각 세포에서 발생한 찌꺼기를 배설기관에 보내는 것도 피의 역할입니다. 피가 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몸 안 세포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곳에 있는 세포부터 썩기 시작합니다. 피의 순환이 완전히 멈추면 우리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피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 안은 조직체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근육과 뼈, 신경과 지방이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피는 유동성을 지니면서 온몸 전체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죽은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몸입니다. 지금도 피가 우리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피를 먹지 말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피를 떠올리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약간은 두렵기도 하고, 무언가 가슴으로부터 울컥 쏟아져 나오는 느낌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신비로운 느낌까지도 듭니다. 구약성경은 피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합니다. 무엇보다 피를 먹지 말고 고기를 먹어도 피와 더불어 먹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사는 모든 곳에서 새나 짐승의 피나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 무슨 피든지 먹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다 자기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레위기 7:26-27)
만약 피를 먹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위험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표현의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한복음6:53-55)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우리를 살리는 양식과 음료수라고 말씀하십니다.
피는 생명이며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한편으로는 피를 먹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또 한편으로는 피를 먹으라고 요청하실까요? 왜냐하면 둘 다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너무 소중합니다. 짐승을 죽일 때 피가 흐릅니다. 그때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고귀함을 깨닫게 해줍니다.
생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생명이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합니다.
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도 함부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짐승도 그렇다면 사람은 어떠할까요? 성경은 사람이 피를 흘리는 것을 엄하게 막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는 살인은 불가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엄성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적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달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피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피를 토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피를 나누어 주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의 과제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숨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신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성찬을 할 때 사람을 죽여서 살과 피를 먹는 잔혹한 사람들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서 우리의 피가 신진대사를 하듯이 예수님의 피가 영혼의 신진대사를 행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피의 역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피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불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허락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육체의 찌꺼기가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영혼의 찌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없앨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속죄하는 은총임을 알고 예수님의 피 앞에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께서 영혼의 찌꺼기를 다 제거하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생명의 피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유월절 하나님께서 명하신 사건에서부터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력화 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생명력을 불어 넣으십니다. 인류 역사 속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신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종 되었던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온 세상에 나타내시고자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려 400년 동안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자유 없이 복종하는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애굽의 성을 쌓기 위한 벽돌 만드는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인격도 없고 공의와 정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존재 가치는 제로 상태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노예인 너희들을 억압에서부터 자유하게 해주고 싶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출애굽을 허락해주겠다. 이제는 노예로 그만 살고 자유자, 해방자로 살아라. 생명을 가지고 살아라.”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죄악의 어둠과 사탄에 억눌려서 살지 말고 불안과 우울에서 뛰쳐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유를 주시겠다고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와 생명력을 줄 테니 너무 머뭇거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사건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종교, 정치, 경제, 문화를 다 바꾸시는 분임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란 세상의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억압당해서 안 된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드리는 것이 인간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인간을 억누르고 핍박하며 자유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의 여호와 종교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은 하나님께만 예배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만 예배의 대상이 되시고 경외의 대상이 되십니다. 하나님만이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심으로 인간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역사의 주체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종이였던 애굽 땅에서 끄집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유의 역사, 해방의 역사, 구원의 역사, 용서의 역사를 만들어가자고 초청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신 이유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의 시내산까지 부르셔서 십계명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정의와 공의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이란 이 땅의 모든 법의 기초가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이 땅의 백성이 되라고 십계명을 통해 새로운 정치질서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목표는 어디일까요?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민족이 독립하여 삶의 풍요를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복된 자리가 될 것이라는 약속과 현실이었습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인물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지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에 맞서는 정치와 종교 세력이 있었습니다.
애굽왕 바로였습니다. 바로는 모세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기적을 보일 때 마술사 등을 동원해서 같이 맞섰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재앙과 두 번째 재앙까지는 마술사들이 모세와 비슷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 번째 기적부터는 똑같이 흉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세상 권력과의 싸움에서 애굽이라는 권력이 하나님을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억압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저항하는 애굽의 권력은 무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바로 왕으로 하여금 확인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로왕은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서 끊임없이 저항했습니다.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일어날 때까지 저항했습니다. 애굽의 막강한 권력이 통곡할 때까지 저항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7:3). 이것이 오만한 제국을 끝장내려는 하나님의 방식이 열 가지 재앙 때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장자의 죽음의 재앙을 넘어갈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질문하세요. 종종 하나님께 따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적대하지는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세계 속에 들어갔을 때는 하나님께 항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적대하지는 마십시오. 그럴 때 바로처럼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출애굽기 11:1)
마지막 재앙은 첫 번째 아들, 짐승의 첫 새끼가 다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로는 이것을 경험할 때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유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굽땅에 있는 유대인과 애굽인에게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양을 잡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피를 내어 양쪽 문설주에 바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피가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의 천사가 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뛰어 넘어가게 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날이 유월절입니다. 영어로는 뛰어 넘는다는 의미로 “Passover”라고 합니다. 이 유월절(逾越節)의 한자어를 몰라 6월에 하는 절기가 아니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유(逾)나 월(越)은 모두 뛰어 넘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긍휼히 여겨주심이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출애굽기 12:13)
예수님의 피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몸과 영혼에 바르십시오.
재앙이 내려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들어 있습니다. 어린양이 죽는 것처럼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를 위해서 죽습니다. 어린양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죽었지만 앞으로 오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온 인류를 위해서 죽으실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린양의 죽음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 주신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1:29)
우리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합니다. 우리 몸에 피가 생명을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영혼의 생명을 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죄 용서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인방과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을 때 그의 피가 죄를 용서받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새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때로 넘어지고 좌절하고 우울하고 흔들릴 때 다시 하나님의 약속된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성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마음으로 받으십시오. 문 인방과 문설주에 피가 발린 것처럼 예수님의 피를 온 몸과 영혼에 발라 생명의 기쁨을 다시 누리십시오. 예수님의 피 때문에 우리가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육체의 피가 우리를 살리듯이 예수님의 피가 생명의 능력을 주십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육체의 피가 우리 몸을 살아가게 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고 살아나는 능력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매일 말씀 앞에 서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영혼을 움직이고 이끌어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께 맡기고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보혈의 능력
출 12: 5-14
여러분, ‘숨은그림찾기’ 아시죠. 어린이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 숨은그림찾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얼른 보면 잘 보이지 않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숨은 그림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숨은 그림이 있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 관한 숨은 그림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성경의 숨은 그림은 이런 겁니다.
예수님에 관한 예언의 말씀이고, 신약은 그 예언에 대한 성취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게 바로 십자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신약에만 있는 것 같지만, 구약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신학에서 ‘예표론’(豫表論 Typology)이라 말합니다. 구약의 말씀이 예표(豫表 type)입니다. 신약의 말씀은 그 원형(原型 prototype, archetype)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말씀드리면, 구약의 말씀은 예고편(그림자)이고, 신약의 말씀은 본편(실체)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불뱀과 놋뱀 사건(민21:4~9) 아시죠.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를 통과할 때 힘들다며 하나님을 계속 원망합니다. 참다못해 하나님이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며 불뱀을 보냅니다. 뱀에 물린 백성들이 죽겠다며 난리입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죠.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한 가지 비방을 가르쳐 주십니다.
불뱀과 같은 모양으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놓고, 그것을 쳐다보면 살아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한 백성들은 다 살아났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예표로 숨은 그림입니다
. 요3:14~15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3:14~15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the Son of Man)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니까 놋뱀은 예표(예고편)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형(본편)입니다.
이런 예들이 구약에 수두룩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월절 어린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에 노예 살이 하다 해방된 것(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의 광복절인 셈입니다.
좀 더 설명 드리면, 유월절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신음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바로 왕에게 보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60만 장정이 있었는데, 그들의 노동력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전국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하나님이 바로 왕의 고집을 꺾고자 재앙을 내립니다. 계속 고집을 부리니까 강도를 계속 높입니다. 그래서 재앙이 10번째까지 나가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애굽의 10대 재앙’(출7:14~12:42)이라 부릅니다.
본문은 그 중의 10번째 재앙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죠. 그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 어린 양 덕택에 죽임을 당하지 않고 애굽의 속박에서 구원받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는 사실입니다. 고전5:7 “ ...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그러니까 유월절 어린 양은 예표(그림자)이고, 예수님은 원형(실체)입니다.
[1] 유월절 어린 양의 피 :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피
여기서 중요한 것은 ‘피’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피를 예표합니다. 본문 5절 말씀 보시죠. “너희 어린 양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되 양이나 염소 중에서 취하고” 하나님께서 장자 죽음의 재앙을 시행하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어린 양을 잡으라는 겁니다. 그 양은 1년 된 수컷이어야 합니다. 염소도 가능했는데, 이것은 경제 사정을 고려한 것으로 양이든 염소든 피가 중요합니다. 1년 됐다는 것은 가장 좋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한창 때인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또 흠이 없어야 합니다. 6절. “이 달 열나흗날(=아빕 월 14일)까지 간직하였다가 해 질 때에 이스라엘 회중이 그 양을 잡고” 아빕월(유대력으로 정월) 14일까지 간직했다 잡으라고 합니다. 3절 보면, 아빕 월 10일에 양을 취하라고 했으니까 4일간 간수하라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흠이 없나 자세히 살피고 정성으로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어린 양이 흠이 없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린 양이 죄인인 백성들 대신 피를 흘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형 틀인 십자가게 못 박히셨습니다. 고후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의로우신 예수님이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흘린 피는 결국 뭡니까? 대속(代贖 Redemption)의 피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왜 하필이면 피를 흘리게 하지 ... ? 잔인하고, 섬뜩하고, 징그럽고 그렇잖아요. 혹시 다른 방법은 없나? 하나님은 전능하다며 다른 방법으로 하지. 고상하고 품위있게.” 그런데 굳이 피를 흘리게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피는 뭡니까? 생명입니다. 피가 있어야 생명이 있고, 피를 다 쏟으면 생명을 잃고 죽습니다. 죽음의 재앙 가운데 이스라엘 장자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어린 양이 대신 피 흘려 죽는 ‘대속’이 필요했습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심판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사함 받으려면 오직 피 흘림으로 대속해야 됩니다. 히9:22 “ ...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런 원리에 따라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몸소 피 흘려 죽으신 겁니다.
벧전1:18~19 “18 ...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죄를 대속할 수도,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보배로운 피(=보혈)로만 죄 사함과 구원이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2]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 : 믿음의 고백
그런데 아무리 어린 양의 피가 중요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중요해도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이게 뭔가 하면, 믿음의 고백을 하라는 겁니다. 본문 7절을 보시죠.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뜻으로 대문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라고 했는지! 그것은 믿음을 고백하라는 겁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고백하라는 뜻입니다. 문설주와 인방은 문을 대표하고, 대문은 그 집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문패를 다는 것도 그런 게 아닙니까? 그들이 만일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페인트도 아니고 피로 칠하라는 겁니다.
애굽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습니까? 또 얼마나 조롱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집만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 믿음은 공개적으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롬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confess)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believe) 구원을 받으리라”
마음으로 믿어도 입술로 공개적으로 고백하지 않으면 그 믿음의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숨어서 예수를 믿어요. 물론 북한이나 이슬람 같이 믿음을 공개하면 당장 감옥에 가고 처형당하는 위험한 곳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혹은 자유로운 지역이라도 집안에서 심각한 핍박을 받는다면 일시적으로 양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아닌데 믿음을 숨기면 곤란합니다. 왕따 될까 봐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왕따는 좋은 겁니다. 할 만한 겁니다.
아무리 유월절 어린 양이 있어도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은 모두 죽음의 재앙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의 피를 흘리셨어도 개인적으로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믿고 고백하는 사람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들, 즉 택자(擇子)들만 제한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제한 속죄(制限贖罪 Limited Atonement)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흘린 피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지만, 실제로 구원받는 것은 믿는 자들로 제한된다는 사실입니다.
[3] 보혈의 능력 : 구원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본문 12절~13절에서 살펴봅니다. “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13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가 사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sign)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pass over you)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어린 양의 피가 표적 즉 사인(sign)이 되어서 그런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다는 겁니다. 간단히 말하면, ‘통과’입니다. 그래서 이 절기를 가리켜 유월절(逾越節 Passover)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보혈의 능력으로 통과하는 겁니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구원의 내용은 아주 다양하고 풍성합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① 죄에서 의로 :
보혈의 능력을 믿으면 죄가 우리에게 통과되고 의가 주어집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장자에게만 재앙을 내린 것은 하나의 샘플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을 샘플로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인생이 고통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통 중 대표적인 게 바로 양심의 가책입니다. 그런데 보혈의 능력을 믿으면 죄에서 벗어나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됩니다. 그리고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롬3:23~
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죄 가운데 있을 때 겪는 양심의 고통일 얼마나 큰지 시32:3~4은 이렇게 말합니다.
“3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뼈가 쇠하는 것 같다고 했을까요? 여름에 가뭄으로 바짝 마르는 것으로 표현했을까요? 그런데 보혈의 능력으로 죄사함을 받으면 양심의 고통에서 해방됩니다. 영혼이 참 평안으로 충만해집니다. 그러면 너무 좋습니다. 담대해집니다. 잠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
보혈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양심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마치 감옥살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몇 년 전 조흥은행이 신한은행에 병합될 때 은행장 앞으로 편지 한 통과 10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이 배달됐습니다. 편지 내용은 이랬습니다. 20년 전에 청원 경찰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기름 10통을 착복하고, 자판기에 동전을 몇 번 꺼내 썼다는 겁니다. 조흥은행이 문을 닫기 전에 그 값을 치르니 받아주시기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20년간 양심의 고통을 받았던 겁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요? 그러니까 죄값은 장차 심판 후에 지옥에서 받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서도 받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은 보혈의 능력으로 이미 죄 사함을 받은 의인이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분상으로는 의인이 되었어도 죄성을 품고 있는 인간인지라 시시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합니다. 그럴 때마다 보혈의 능력을 힘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의 고통에서 참 자유와 평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② 사망에서 영생으로 :
보혈의 능력을 믿으면 우리에게 사망이 통과되고 영생이 주어집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고, 그 죄값은 사망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죄의 결과는 반드시 사망입니다. 영적인 사망, 육적인 사망, 그리고 영원한 사망(지옥의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이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해서 큰 소리 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인간은 마치 사과 속에 들어 있는 벌레와 같다!” 무슨 말인가요? 사과 속을 파먹는 동안은 달콤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빨리 뛰쳐나와야 합니다. 그게 바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대로 영생의 확신이 생기면 아무 것도 무섭지 않습니다. 죽음 앞에서조차 당당할 수 있습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일화입니다. 선생이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던 일본인 기자가 찾아왔습니다. 당국에서 그를 앞세워 선생을 회유하려고 한 겁니다. “선생! 인도의 간디는 사람이 태어났으면 100년은 살아야 한다고 했는데, 선생은 앞으로 몇 년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더 오래 살고 싶으면 일제에 순응하고 감옥에서 나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선생은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왜 내가 100년만 살겠는가? 영생을 해야지.” “아니, 어떻게 영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 믿으면 된다네. 자네가 이렇게 나를 만나러 온 것을 보니 나를 통해 예수 믿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 같구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자네도 예수나 믿으시게.” 그러자 기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영생의 확신이 있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이 생기는 겁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십자가 피를 믿는 믿음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사망이 우리에게 통과되어 영생을 얻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 심령 속에 영생의 기쁨과 천국의 소망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③ 저주에서 축복으로 :
보혈의 능력을 믿으면 우리에게 저주가 통과되고 축복이 주어집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이 세상에 저주가 닥쳐왔습니다. 모든 인간이 종신토록 고생하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저주를 대신 담당해 주셨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 십자가는 저주 가운데 가장 큰 저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저주를 당하심으로 믿는 자마다 저주에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러므로 보혈의 능력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인생이 달라집니다. 잠3: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의인은 보혈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는 일마다 복이 됩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 살다보니 때때로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그 가운데 보호해 주십니다. 고난을 역전시켜 축복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게 바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롬8:28)의 뜻입니다.
마치 우산 아래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겁니다. 아무리 비가 억수로 쏟아져도 우산 안에 들어오면 괜찮습니다. 그와 같이 보혈의 능력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 우산 안에 들어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축복의 확신을 가지고 늘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④ 질병에서 치유로 :
보혈의 능력을 믿으면 우리에게 질병이 통과되고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질병의 원인은 개인적 차원에서 보면 유전적 요인, 음식이나 공기 등 환경적 요인, 세균 감염 요인 등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인류 전체로 보면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범죄함으로 질병이 생긴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실 뿐 아니라, 보혈의 능력으로 질병을 고쳐 주십니다. 벧전2:24 “ ...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물론 의학도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 줍니다. 그래서 의학의 발전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보혈의 능력으로 직접 우리 질병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안 고쳐주시는 병’은 있을 수 있지만 ‘못 고치는 병’은 없습니다. 아, 한 가지 있기는 하네요. 꾀병! 이것 말고는 ‘못’ 고칠 병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감기나 암이나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병을 ‘안’ 고쳐주십니다. 그 이유는 연단을 위함이기도 하고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방편으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오. 남의 병은 중병이라도 기도로 고쳐준 바울이 자기 병은 고침 받지 못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우리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해지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질병이 있으십니까?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치유의 기쁨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사순절에 이런 치유의 은총을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을 통해 보여주신 보혈의 능력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죄에서 의로, 사망에서 영생으로, 저주에서 축복으로, 질병에서 치유로 구원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금년 사순절에 그 어느 해보다도 풍성한 은혜를 경험한 절기로 기억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