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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어떻게 철학이 되는가
- 함은숙 수필집 <식탁 위의 시간>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
권대근
문학박사, 중)하북미술대 객좌교수
"인간은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사유란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다시 바라보는 일이다.“
- 마르틴 하이데거
Ⅰ. 로그인
수필은 삶을 기록하는 문학이지만, 기록 자체가 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체험은 수필의 출발점일 뿐이며, 문학은 그 체험을 새로운 의미로 재구성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좋은 수필은 사건을 나열하지 않고 존재를 탐구하며, 경험을 설명하지 않고 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몽테뉴가 자신의 삶을 통해 인간을 탐구했듯이, 본격수필 역시 일상을 철학으로 전환하는 사유의 문학이어야 한다. 오늘날 수필은 단순한 신변잡기의 차원을 벗어나 존재론적 사유의 장르로 발전하고 있다. 생활은 소재가 되고, 기억은 매개가 되며, 성찰은 문학적 완성으로 이어진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이며, 자신의 일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한다. 수필은 바로 그 일상의 틈에서 인간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길어 올리는 문학이다. 작은 사건 하나가 존재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 되고, 사소한 체험 하나가 삶의 철학으로 승화될 때 수필은 비로소 문학적 깊이를 획득한다. 함은숙의 수필집 <식탁 위의 시간>은 이러한 현대수필의 새로운 방향을 잘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이 수필집에는 극적인 사건도 없고 인위적인 감동도 없다. 대신 식탁과 운동센터, 시장과 어린이집, 상담실과 여행지, 가족과 이웃처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이 차분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작가는 그 평범한 장면들을 단순한 추억으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관계와 기억, 시간과 죽음, 돌봄과 언어라는 존재론적 질문으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집은 생활수필이면서도 철학수필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특히 이 작품집은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첫째는 '관계의 윤리'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돌봄, 공감, 책임의 문제를 통해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방식을 탐구한다. 둘째는 '기억과 시간의 미학'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가족의 추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현재의 존재를 구성하는 시간의 층위로 재해석된다. 셋째는 '일상의 존재론'이다. 차 한 잔, 김치통 하나, 아버지의 등, 한마디 말, 상담 전화와 같은 평범한 사물과 사건은 인간 존재를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 철학적 계기로 기능한다.
이러한 특징은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학, 하이데거의 존재론, 베르그송의 지속, 리쾨르의 기억 이론, 들뢰즈의 사건 철학과도 깊은 접점을 형성한다. 물론 작가가 의도적으로 철학을 끌어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삶을 진실하게 응시한 결과가 자연스럽게 철학적 사유와 만나는 것이다. 이것이 문학의 힘이며, 동시에 이 작품집이 지닌 미학적 가치이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된 일과 불의,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나는 그것들에 대한 책임을 나눠지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들은 모두 가슴 한복판에 녹슬어가는 징을 하나씩 감추고 누군가 아프도록 쳐주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진정한 경험은 마주침에 있는 것이다.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의 정서가 녹아 있는 작가, 함은숙의 수필집 서평문에서 평자는 작품들을 크게 세 범주로 나누어, 첫째는 관계의 윤리와 돌봄의 미학, 둘째는 기억과 시간의 존재론, 셋째는 일상의 사건과 존재의 성찰의 관점에서 살펴보려 한다. 이를 통해 함은숙의 수필이 생활의 기록을 넘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탐색하는 문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밝힐 것이다.
Ⅱ. 관계의 윤리와 돌봄의 미학
함은숙 수필가는 생을 조용히 사유할 수 있는 자세가 된 작가다. 역경의 고개를 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수필가, 함은숙의 수필집을 관통하는 가장 큰 축은 '관계'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관계는 혈연이나 친분처럼 이미 형성된 사회적 연결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작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거리, 책임, 배려, 이해의 과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윤리적 구조를 탐색한다. 그의 관심은 '얼마나 가까운가'보다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수필은 단순한 관계 서사가 아니라 타자와 공존하는 존재방식에 관한 윤리적 탐구라 할 수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의 윤리를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고 보았다. 타자는 내가 이해하거나 소유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끝없이 책임져야 할 존재이다. 이러한 윤리적 사유는 작품집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앞세우기보다 타자의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을 먼저 바라본다. 판단보다 이해를, 비난보다 성찰을 선택하는 시선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적 특징이다. 한 권의 문학 작품은 대개 작품보다 먼저 작가의 창작 의식을 통해 독자와 만난다. 함은숙의 <작가의 말> 역시 단순한 인사말이나 집필 동기를 밝히는 수준을 넘어,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문학적 신념과 창작 윤리를 압축적으로 제시하는 하나의 창작 선언문이라 할 만하다. 작가는 먼저 자신의 글쓰기를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조용한 일기"라고 말한다. 이 짧은 문장은 그의 문학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표현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성찰의 과정임을 보여준다. 몽테뉴가 "나는 내 자신을 연구한다"고 했던 것처럼, 작가에게 글쓰기는 삶을 재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고 존재를 탐구하는 과정이다.
"잘 산 삶이 아니라 버텨낸 삶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라는 이 문장은 수필집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된다. 여기에는 성공의 서사가 아니라 견딤의 서사를 문학으로 남기겠다는 분명한 창작 의식이 담겨 있다. 현대인은 성취와 경쟁의 언어에 익숙하지만, 작가는 삶의 본질을 '버텨냄'에서 찾는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 존재를 성취보다 과정으로 바라보는 하이데거의 존재 이해와도 맞닿아 있으며, 삶의 진정성은 화려한 결과보다 견디고 지속하는 태도 속에서 형성된다는 철학적 인식을 드러낸다. 또한 작가는 "사람됨이란 조건이 아니라 태도이며, 관계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해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문장은 이 작품집 전체의 윤리적 지향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사람됨을 사회적 조건이나 능력이 아니라 '태도'에서 찾는 시선은 인간 존재를 관계적 실천으로 이해하는 관점이며, 관계를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이해해 가는 과정으로 보는 인식은 레비나스의 타자의식과도 깊이 호응한다.
타자는 소유하거나 완성하는 대상이 아니라 끝없이 이해해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작가의 문학은 관계를 정적인 결과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작가의 말>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다음의 문장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는 언제나 시간이 조금 늦게 도착한다." 이 한 문장은 작품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철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해는 즉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깨달음이다. 부모를 뒤늦게 이해하고, 자식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이해하며, 자신의 삶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작가는 담담한 문장으로 응축해 놓았다. 이는 기억이 현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고 본 리쾨르의 기억철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삶은 결국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의 식탁과 눈빛과 말끝에 남아 있는 온도이기 때문이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이 수필집의 미학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식탁은 가족의 공동체를, 눈빛은 공감을, 말끝의 온도는 관계의 윤리를 상징한다. 작가는 거대한 사건보다 일상의 미세한 정동을 통해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 한다. 이는 일상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현대수필의 본령이며, 동시에 평범한 생활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길어 올리는 작가의 문학적 신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작가의 말>은 작품집의 서문이 아니라 작가의 문학관을 밝힌 선언문이다. 기록을 성찰로, 생활을 존재론으로, 관계를 윤리로 확장하려는 창작 의식이 압축되어 있으며, 이후 이어지는 모든 작품은 이 문학적 신념을 구체적인 삶의 장면 속에서 실천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독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프롤로그를 통해 작가가 지향하는 문학의 방향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확인하게 되며, 이는 작품집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해석의 열쇠가 될 것이다.
인간관계의 본질을 매우 섬세하게 포착한 <관계의 거리>는 신유물론이 강조하는 ‘관계성’을 다룬다. 운동센터에서 만난 한 사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친근함으로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다른 관계의 속도와 기대가 충돌한다. 작품의 중심문장은 다음과 같다. "관계는 가까움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의 문제였다." 이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사유의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친밀함을 관계의 완성으로 생각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적절한 거리가 관계를 오래 지속시키는 조건임을 발견한다. 여기에서 거리는 단절이 아니라 공존의 형식이다. 마르틴 부버가 말했듯이 인간은 타자를 '그것이 아니라 '너'로 만날 때 비로소 참된 관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너'의 관계 역시 상대를 자신의 세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독립성을 인정할 때 유지된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관계의 역설을 생활 속 작은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관계는, 서로의 거리를 지킬 때 오히려 오래 남는 것 같아요. 가까움보다 유지 가능한 간격이 더 중요하더군요.” 관계는 가까움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 지속은 언제나 속도의 조율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결국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호흡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관계는 비로소 무리 없이 제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누구도 서운하지 않은 거리, 말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거리, 사라지지 않되, 침범하지도 않는 거리만 남았다.
<관계의 거리> 중에서
이 작품은 '관계는 가까울수록 좋다'는 통념을 넘어, 지속 가능한 거리를 관계의 본질로 제시함으로써 일상적 경험을 인간관계의 보편적 철학으로 승화시킨 점이 뛰어나다. 특히 "관계는 가까움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의 문제였다."라는 결정적 문장은 앞선 서사를 하나의 철학적 명제로 응축하며, 관계를 속도와 거리의 미학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의 사상적 깊이를 형성한다. 또한 '서로 다른 호흡'과 '말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거리'라는 시적 이미지는 절제된 문체와 여운 있는 결말을 이루어, 관계의 윤리를 존재론적 성찰로 확장한 현대수필의 미학을 보여준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호흡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라는 이 문장은 단순한 생활의 깨달음이 아니다. 인간은 동일한 공간을 공유하더라도 각기 다른 시간성과 감정을 살아간다. 결국 관계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는 과정이다. 이 작품이 뛰어난 이유는 갈등 자체를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갈등을 통해 관계의 구조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철학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자살을 고민하는 여성의 전화를 받으며 상담자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경험을 직업적 회고로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로 확장한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숨>, 이 작품은 상담봉사 경험을 소재로 하지만, 실제 주제는 생명의 존엄과 타자에 대한 책임이다. 작품의 제목 자체가 이미 상징적이다. "말보다 먼저 오는 숨이 있다." 숨은 언어 이전의 존재이다. 인간은 말하기 전에 숨 쉬고, 고통 역시 언어보다 먼저 몸에 도착한다. 작가는 상담자의 임무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숨을 먼저 듣는 사람'으로 규정한다. 이는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호소'와 정확히 연결된다. 타자는 논리보다 먼저 나를 부른다. 윤리는 설명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응답에서 시작된다. 또한 미국의 윤리학자 넬 노딩스의 돌봄윤리를 떠올리게 한다. 노딩스는 인간은 정의보다 돌봄 속에서 성장한다고 보았다. 상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존재를 끝까지 함께 견디는 일이 진정한 돌봄이라는 것이다.
늦은 밤 상담일지는 빼곡해졌다. 사건이 되지 못한 폭력의 좌표들이 간절함을 말했다. 노란 포스트지를 이정표 삼아 간사의 컴퓨터에 붙였다. “약속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간사님, 도와주세요.”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손이 겹쳐졌다. 전화선 너머의 밤이 사무실의 낮과 맞물렸다. 누군가는 전화를 걸고, 누군가는 문서를 준비했다. 한 사람의 밤이 여러 사람의 낮과 이어졌다. 지금도 기록되지 않은 흔적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말이 붙기 전, 이름이 생기기 전, 그것들은 숨의 방향으로 먼저 도착한다. 잠든 빌딩의 문을 열 때면 나는 다시 수화기를 든다. 말보다 먼저 오는 숨이 있다면, 그 숨이 잠시 걸터앉을 자리는 아직 비워 두었다.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숨> 중에서
이 작품은 보이지 않는 폭력과 타인의 고통을 '말보다 먼저 오는 숨'이라는 탁월한 은유로 형상화하며, 돌봄과 연대의 윤리를 절제된 서사 속에 깊이 있게 구현한 수필문학의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작품 속 상담자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대신 질문 하나를 건넨다. "남동생이 바라는 일상에 누나가 함께 있다면 어떨까요." 이 질문은 해결책이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을 다시 열어주는 문장이다. 상담자는 상대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지만 삶을 계속 살아갈 이유를 함께 찾는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상담의 기록이 아니라 생명의 윤리를 말하는 문학으로 승화된다. 특히 작품 마지막 문장은 이 수필집 전체의 정신을 함축한다. "그 숨이 잠시 걸터앉을 자리는 아직 비워 두었다." 빈자리는 공허가 아니다. 타자를 위해 남겨둔 윤리적 공간이다. 문학이 인간을 위로하는 방식 역시 바로 이러한 '비워 둠'에서 시작된다.
일상은 함은숙의 손에서 철학으로 변하고, 생활은 문학적 성찰의 장으로 확장된다. 시간 속에서 뒤늦게 이해되는 사랑의 구조를 탐구한 작품 <김치통이 비어 있던 날들>은 가족수필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아들의 친구들에게 김치를 내어주던 작가의 일상은 이 작품 속에서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관계가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능한다. 작품의 중심 장면은 빈 김치통이다. 처음에는 허전함을 의미했던 빈 김치통이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의 충만함을 상징하는 표상으로 전환된다. 작가는 사물이 품고 있는 의미의 변화를 통해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내어줌 속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폴 리쾨르는 기억이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현재의 재해석이라고 보았다. 이 작품에서도 김치통은 과거의 물건이 아니라 현재의 존재를 다시 구성하는 기억의 매개체이다. "그때는 몰랐던 마음이, 뒤늦게야 이름을 얻었다."는 고백은 기억이 현재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작가는 특별한 사건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식탁과 김치통, 아이들의 웃음과 빈자리를 통해 관계의 미학을 형상화한다.
언어는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관계를 살리기도 한다. <세 나라의 칼날>은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가 만나는 경험을 소재로 하지만, 작품이 궁극적으로 탐색하는 것은 언어 자체가 아니라 언어가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고 파괴하는가에 대한 윤리적 문제이다. 작가는 세 나라의 문화 속에서 동일한 말이라도 전혀 다른 의미와 감정을 지닐 수 있음을 경험하며, 언어가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타자의 삶을 존중하거나 훼손하는 윤리적 행위임을 깨닫는다. 작품의 제목인 '칼날'은 매우 상징적이다. 칼은 사물을 자르는 도구이지만, 말 또한 사람의 마음을 베고 관계를 끊어 놓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칼이 된다. 반대로 같은 언어도 이해와 배려를 품을 때는 상처를 봉합하는 치유의 손길이 된다. 작가는 이러한 양면성을 과장된 사건이 아니라 생활 속의 작은 오해와 문화적 차이를 통해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언어 역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타자를 향한 윤리적 응답이어야 한다. <세 나라의 칼날>에서 작가는 말의 정확성보다 말을 건네는 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결국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언어의 문법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작품은 조용히 일깨운다. 이 작품은 또한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의 해석학을 떠올리게 한다. 가다머는 이해란 자신의 입장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지평'이 만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작품 속에서 문화의 차이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서로를 새롭게 이해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작가는 언어의 차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를 넓혀 간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관계의 윤리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미학은 타자의 다름을 낯선 것으로 남겨두지 않는 데 있다. 언어의 차이는 결국 인간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고, 상처를 남겼던 말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이처럼 이 수필은 문화적 경험을 소재로 하면서도 언어와 관계의 윤리를 성찰한 수준 높은 철학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이름은 존재를 부르는 가장 따뜻한 언어다. <은숙이와 은석이>는 이름 하나에서 시작되는 소박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내면에는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비슷한 이름에서 비롯된 작은 해프닝을 통해 한 사람의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과 기억, 존재를 품고 있는 상징임을 보여준다. 작품 속에서 이름은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기호가 아니다. 이름을 정확히 불러 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행위이며, 반대로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혼동하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충분히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작가는 이 평범한 경험을 통해 관계란 거창한 희생이 아니라 상대를 세심하게 기억하고 배려하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부버는 인간은 타자를 '그것'으로 대할 때 관계는 기능적 수준에 머물지만, '너'로 만날 때 비로소 인격적 관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은석아, 미안해. 생각해보니 넌 늘 날 위해 살았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이제는 지친 널 위해 내가 힘이 될게. 돌아와 줘.” 진심은 언젠가 전달되리라 믿으며 기다렸다.
답답하고 수줍음 많던 은숙이인 나.
고집 세고 자유로운 영혼의 의리파 은석이인 나.
정체성은 화장실 갈 때만 기억하자고 웃는다.
산 정상에서 은숙이는 지친 은석이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넨다.
은숙이와 은석이는 결국 나를 살려낸 두 개의 이름이었다.
- <은숙이와 은석이> 중에서
이름을 불러준다는 행위는 상대를 대상이 아니라 '너'로 받아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실천이다. 작가는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곧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며, 사람을 기억하는 일이 곧 관계를 지키는 일임을 생활 속 장면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또한 넬 노딩스의 돌봄윤리 역시 이 작품의 중요한 해석 틀을 제공한다. 노딩스는 돌봄은 거창한 희생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세심하게 살피고 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은숙이와 은석이>에서 작가는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불러주는 사소한 행위를 통해 돌봄이란 결국 '존재를 잊지 않는 일'임을 보여준다. 상대를 기억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깊은 배려이며, 가장 지속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관계를 감상적으로 미화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서로를 다시 기억하려는 노력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힘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절제된 시선은 작품을 단순한 일화에서 벗어나 인간 이해의 깊은 성찰로 이끌어 준다.
유네스코부산 우수잡지 계간 에세이문예 수필 신인상 등단 작품인 <은숙이와 은석이>는 이름 하나에 담긴 인간 존엄의 의미를 섬세하게 형상화하여 함은숙을 문단으로 이끌어낸 작품이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다스림서울 동인회 회원으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수필,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수필을 써내고 있다. 작가는 가장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존재를 존중하는 윤리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상대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고 불러주는 작은 태도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관계의 본질은 사랑을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를 끝까지 기억하고 존중하는 데 있음을 일깨우는 수필이라는 점에서 작품집 전체의 윤리적 지향을 완성하는 중요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Ⅲ. 기억과 시간의 존재론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현재를 구성하는 존재의 방식이다. 함은숙의 수필에서 기억은 과거를 회상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기억은 현재의 삶을 해석하고 존재를 완성하는 시간의 형식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현재의 한 장면은 과거를 호출하고,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자아를 다시 구성한다. 이처럼 그의 수필은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기보다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의 의미를 탐색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시간성'을 통해 존재를 이해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분리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지나간 기억과 앞으로의 가능성을 현재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또한 앙리 베르그송은 시간을 시계의 물리적 시간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속'으로 설명하였다. 폴 리쾨르는 기억이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 속에서 새롭게 의미를 획득하는 해석 행위라고 말했으며,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과 방, 사물은 인간의 기억을 품는 정신적 공간이라고 설명하였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함은숙의 작품을 관통하는 중요한 해석의 지평이 된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을 업어 주던 아버지의 등을 기억하면서, 세월이 흐른 뒤 그 등이 늙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유년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기억을 그려낸 <등 위의 시간>은 아버지의 등을 매개로 시간의 깊이를 탐색한 작품이다. 여기서 '등'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라 가족의 역사와 희생을 품고 있는 시간의 상징이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감각으로 포개지는 순간이다. 어린 시절의 체온과 노년의 굽은 등이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겹쳐지면서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겹겹이 쌓인 층위로 드러난다.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은 바로 이러한 시간이다. 과거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에 응축되어 살아 있으며, 현재는 그 기억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된다. 아버지의 등은 또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시간성을 환기한다. 인간은 현재만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지나간 삶을 품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등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의 기억 속 '등'이 될 것임을 깨닫는다. 개인의 체험은 이 지점에서 세대를 잇는 존재의 성찰로 확장된다.
시장통에서 들려오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식탁에서 아이들이 밥을 먹을 때면 나도 모르게 이북 사투리가 불쑥 흘러나온다. “많이 묵어라.” 아이들은 웃으며 내 말투를 따라 한다. 외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인데, 그 웃음소리 사이로 문득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럴 때면 알게 된다. 아버지가 내게 건네주었던 마음이 어느새 아이들에게도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가족들의 배부른 얼굴을 바라볼 때면 그날의 자전거가 다시 찾아온다. 그날 자전거 등 위에서 처음 만난 아버지의 하루는, 지금도 내 기억 속 언덕을 천천히 오르고 있다.
<등 위의 시간> 중에서
이 작품은 한마디 사투리와 한 끼 식탁, 그리고 자전거의 기억을 통해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사랑의 계승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수필이다. 특히 "많이 묵어라."라는 이북 사투리는 단순한 말버릇이 아니라 아버지의 삶과 사랑이 화자의 몸에 스며든 기억의 언어로 기능하며, 그것이 다시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과정은 가족의 정체성이 언어와 일상을 통해 전승되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마지막의 "그날 자전거 등 위에서 처음 만난 아버지의 하루는, 지금도 내 기억 속 언덕을 천천히 오르고 있다."라는 문장은 어린 시절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삶과 희생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는 시간의 의미를 아름다운 시적 이미지로 승화시킨 압권의 결말이다. 일상의 작은 장면을 통해 기억과 사랑, 세대의 연속성을 보편적 인간 경험으로 확장한 이 작품은, 체험을 존재의 성찰로 승화시키는 현대수필의 미학을 훌륭하게 구현했다.
거울은 단순히 현재의 모습을 반영하는 도구가 아니라 지나온 세월을 응축한 존재의 표면이다. <낯선 거울 앞에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통해 시간의 흔적을 읽어내는 작품이다. 작가는 낯설어진 자신의 얼굴에서 늙음을 발견하지만, 그 낯섦은 상실이 아니라 삶이 축적된 결과임을 받아들인다. 거울은 바슐라르가 말한 상상력의 공간이다. 현실을 비추는 동시에 내면을 성찰하게 하는 장소이다. 작가는 거울 속 주름을 시간의 흔적이자 삶의 문장으로 읽는다. 외형의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 속에서 형성된 존재의 깊이다. 이 작품은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을 향한 존재'를 은연중에 떠올리게 한다. 인간은 유한성을 자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진정성 있게 살아갈 수 있다. 거울은 늙음을 확인하는 사물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히 살아가도록 이끄는 존재론적 매개체가 된다.
리쾨르는 기억을 과거의 복원이 아니라 현재에서 다시 구성되는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이 작품에서도 번역되지 않은 말은 이해되지 못한 언어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의미를 얻는 삶의 경험이다. <번역되지 않은 말>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 감정의 본질을 탐색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중심은 언어가 아니라 기억이다. 어떤 말은 사전으로 옮겨지지 않지만,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살아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언어보다 먼저 존재했던 감정을 회복하며 기억이 어떻게 인간을 이어주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번역되지 않은 것은 말이 아니라 관계이며, 시간이 흘러야만 이해되는 마음이다. 이 작품은 언어의 한계를 통해 기억의 가능성을 드러내는 철학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공간은 기억을 품는 존재의 집이다. <고방산 중턱의 그 집>에서 집은 건축물이 아니라 기억이 머무는 정신적 공간이다. 작가는 오래된 집을 찾아가며 과거를 회상하지만, 그 공간은 단순한 추억의 배경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형성한 근원으로 기능한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기억을 간직한 장소라고 했다. 집은 거주하는 공간이 아니라 영혼이 쉬는 공간이며, 인간은 집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집을 통해 자신을 기억한다. 작가는 고방산의 집을 바라보며 과거를 복원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공간 속에서 현재의 자신을 다시 발견한다. 공간은 과거를 보존하는 창고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은 공간의 존재론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수필이라 평가할 수 있다.
자기 삶의 시간을 긍정하는 용기를 다룬 <쌈 마이 웨이>는 삶의 속도와 방향을 다시 묻는 작품이다. 잊고 지내던 그리움에 쓴 글이다. 종가집 며느리로 유일한 친구였던 시할머님과 어린 시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히 녹아 있다. 이 수필에서 작가는 타인의 기준에 맞추기보다 자신의 리듬대로 살아가는 삶을 긍정하며, 성공보다 지속을 선택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베르그송은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흐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인간은 각자의 지속 속에서 살아가며, 그 지속이 곧 삶의 개성이 된다. 작가 역시 자신의 삶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도 인간은 타인의 삶을 모방하는 비본래적 존재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능성을 선택할 때 비로소 본래적 존재가 된다. <쌈 마이 웨이>는 이러한 존재의 자각을 생활 속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이다. '나만의 길'은 경쟁의 선언이 아니라 자기 시간에 대한 신뢰이며, 존재를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윤리적 결단이다.
며칠 전 못 먹은 육회가 떠올라 장터로 향했다. 국밥이 맛있다는 집을 지날 때였다. 낯익은 사투리가 들렸다. “아지매요?” 허리를 굽힌 채 호박잎을 다듬는, 손톱 끝이 검게 물든 할머니. 시할머니를 닮은 그 손길에 마음이 저릿했다. 자석처럼 끌리듯 호박잎 한 봉지를 들었다. 국밥집을 지나 정육점으로 향했다. 오늘은 고기 쌈밥을 먹자. 갓 찐 호박잎과 상추가 상에 올랐다. 소주 한 잔 곁들인 쌈밥이 이상하게 달았다. 맵지 않았다. 대신 그리움이 알싸하게 올라왔다.
“고기 먹고 날래 일어나라우. 민하게 살지 말라. 아프면 니만 손해야.”
배가 부르자 마음 한구석도 오래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환해졌다. 그제야 그리움도 한 끼 식사처럼 따뜻하게 목을 넘어갔다.
- <쌈 마이 웨이> 중에서
이 작품은 미각의 체험을 단순한 향수로 머물게 하지 않고, 음식을 통해 기억과 사랑, 그리고 인간됨의 본질을 환기하는 존재론적 수필로 승화시킨 점에서 높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육회와 호박잎, 쌈밥이라는 일상적 소재는 시할머니의 삶과 사랑을 현재로 불러오는 기억의 매개가 되고, "맵지 않았다. 대신 그리움이 알싸하게 올라왔다."라는 문장은 미각을 정서로 전환하는 탁월한 감각적 표현으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어지는 시할머니의 사투리, "민하게 살지 말라. 아프면 니만 손해야."는 꾸밈없는 생활언어이지만, 그 안에는 평생 가족을 보듬어 온 삶의 지혜와 무조건적인 사랑이 응축되어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그리움을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한 끼 식사를 통해 삶을 다시 살아갈 힘으로 승화시키는 절제된 미학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술에서 작가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타인의 사랑을 오래 기억하고 작은 인연을 소중히 간직하는 따뜻한 심성과 깊은 공감 능력을 지닌 사람임을 드러낸다.
그의 인간성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그리움을 감사로 바꾸는 성숙한 인격 속에서 자연스럽게 빛나며, 이는 작품의 진정성과 감동을 더욱 깊게 만드는 중요한 문학적 자산이 된다. 이들 수필은 모두 시간을 과거의 흐름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기억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공간은 시간을 저장하는 그릇이고, 언어는 기억을 이어주는 매개이며, 몸은 삶의 흔적을 새기는 장소가 된다. 작가는 이러한 일상의 체험을 통해 인간 존재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기억 속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형상화한다. 그의 수필에서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며, 기억은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새롭게 해석하는 존재론적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작품들은 생활의 기록을 시간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현대수필의 의미 있는 성취라고 평가할 수 있다.
Ⅳ. 일상의 사건과 존재의 성찰
사소한 사건은 함은숙의 수필 속에서 어떻게 존재를 변화시키는가를 살펴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문명의 피치 앞에서 삶의 페이소스를 진하게 환기시키는 작가 함은숙의 수필에서 사건은 거대한 역사나 극적인 갈등이 아니다. 그의 작품을 움직이는 것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 장면, 거울 앞에서 문득 마주한 자신의 얼굴, 아이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순간, 조용히 내리는 함박눈, 식탁을 둘러싼 가족의 풍경, 아무 말 없이 견뎌낸 어느 밤과 같은 생활의 미세한 경험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사건들은 단순한 체험으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삶의 의미를 새롭게 자각하게 하는 존재론적 계기로 전환된다.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사건은 단순히 일어난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의미의 생성이라고 설명한다. 같은 일을 겪더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삶 전체를 다시 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인본적 태도를 지양하면서 더불어 사는 자세를 가진 작가, 함은숙의 수필은 바로 이러한 '사건의 존재론'을 생활 속에서 실현한다. 작가는 거대한 서사를 만들지 않고도 사소한 경험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순간, 나를 성찰하다. <차창 너머의 분노>는 교통 상황에서 마주한 짧은 갈등을 소재로 하지만, 작품이 탐색하는 것은 분노 자체가 아니라 분노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다. 차창 밖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은 순간적인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폭력성과 이해의 가능성을 성찰하게 만든다. 들뢰즈에게 사건은 외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계기이다. 이 작품에서도 차창 밖의 상황보다 중요한 것은 그 장면 이후 달라지는 화자의 의식이다. 처음에는 타인을 비난하던 시선이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조급함과 편견을 돌아보는 성찰로 전환된다. 찰스 테일러가 말한 자기 이해는 이러한 과정을 잘 설명한다. 인간은 타인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존재 방식을 발견한다. <차창 너머의 분노>는 결국 타인의 분노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읽어 내는 존재론적 수필이라 할 수 있다.
늙음은 상실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다. 수필 <낯선 거울 앞에서>는 외모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다. 거울 앞에서 낯설어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화자는 시간의 흔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다시 읽는다. 메를로퐁티는 몸은 인간이 세계를 경험하는 가장 근원적인 장소라고 보았다. 몸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삶의 역사가 축적된 존재의 현장이다. 거울 속 얼굴은 세월이 만든 흔적이며, 지나온 삶이 새겨진 시간의 텍스트이다. 따라서 작품에서 거울은 현실을 비추는 물건이 아니라 존재를 비추는 철학적 장치가 된다. 작가는 늙음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삶의 깊이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태도는 하이데거가 말한 '본래적 존재'의 자세와도 통한다.
인간은 모두 상처 입은 시간을 품고 살아간다. <누군가의 가장 여린 시절>이란 수필은 아이의 성장 과정이나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한다. 작가는 누구에게나 '가장 여린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며, 현재의 모습을 판단하기 전에 그 존재가 지나온 시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그의 약함을 바라보는 데 있다고 했다. 작가는 현재의 행동보다 과거의 상처를 먼저 바라본다. 이러한 시선은 인간을 평가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 특히 이 작품은 돌봄의 윤리를 시간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삶을 형성하며,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그의 과거를 함께 품어 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어머니가 임종 전 내게 물으셨던 말이 있다. “넌 어떤 남자가 좋니?” 그 질문 속에는 딸이 평생 누구의 곁에서 울고 웃게 될지 끝내 놓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의 이상형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어머니께 웃으며 말했다. “돈이 많지 않아도 괜찮아요. 몸이 조금 불편해도 괜찮고요. 내가 먹여 살리면 되죠. 대신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마치 딸이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대기만 하며 살아갈 아이는 아니라는 걸, 그제야 조금 안심하신 사람처럼. 나는 그날의 어머니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제는 나도 아들에게 묻고 싶어진다. 너는 어떤 사람과 함께 늙어가고 싶니.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바라게 된다. 내 아들이 누군가의 불안과 상처를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사람이기를. 누군가의 가장 여린 시절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기를.
<누군가의 가장 여린 시절> 중에서
보육원에서 자란 아들의 첫사랑을 통해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을 담아낸 이 작품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다시 부모가 된 화자의 시선을 하나의 생애 서사로 연결하며 돌봄의 윤리와 세대 간 사랑의 계승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수필이다. 특히 임종을 앞둔 어머니의 질문인 "넌 어떤 남자가 좋니?"는 배우자를 묻는 일상적 대화를 넘어, 딸의 남은 생애를 끝까지 염려하는 모성의 본질을 응축한 상징적 장면으로 기능한다. 이에 대한 화자의 대답은 물질적 조건보다 '끝까지 내 편이 되어 줄 사람'이라는 관계의 본질을 제시하며, 삶의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신뢰와 연대에 있음을 일깨운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시선은 다시 아들에게 향하며, "누군가의 가장 여린 시절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기를."이라는 바람으로 확장된다. 이 한 문장은 개인의 가족사를 넘어 인간은 서로의 상처와 연약함을 품어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보편적 윤리로 승화되며, 일상의 대화를 생애의 철학으로 확장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침묵은 존재를 가장 깊이 말하는 언어다. <함박눈은 소리가 없었다>라는 수필에서 함박눈은 요란하게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가장 깊이 변화시킨다. 작가는 이 자연현상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변화는 언제나 조용히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함박눈’에서 작가 함은숙의 세계관이 느껴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함박눈의 받침과 함은숙이란 이름의 받침 지음이 위치만 다를 뿐, 구성은 동일하다. 이는 단순한 음운의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적 징후로도 읽힌다. '함박눈'과 '함은숙'이 같은 자음의 배열을 공유하듯, 작가의 삶과 작품 또한 서로를 비추며 순환하는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일상과 문학, 경험과 성찰이 하나의 동일한 존재론적 리듬 속에서 완성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보다 침묵이 존재를 더 깊이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작품에서 눈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침묵의 상징이다.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덮어 주고, 소리를 내지 않지만 세상을 바꾸는 존재이다.
작가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인간의 사랑과 용서 역시 큰 말보다 작은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자연의 풍경이 결국 인간 존재의 윤리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식탁은 공동체를 회복하는 존재의 공간이다. <착한 마녀의 식탁>이란 작품에서 식탁은 음식을 먹는 장소가 아니다. 식탁은 가족과 이웃, 세대와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는 삶의 공동체이다. 이 수필은 결혼해서 두 아들을 키우며 책속 마녀로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무서운 존재로 남아야 했던 이야기다. 가스통 바슐라르가 집을 기억의 공간이라 했다면, 작가는 수필 속에서 식탁을 관계가 살아 움직이는 공간으로 형상화한다. 함께 밥을 먹는 행위는 생명을 유지하는 생물학적 행위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고 인정하는 윤리적 실천이다. '착한 마녀'라는 역설적인 표현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존재, 꾸짖으면서도 끝내 품어 주는 존재가 바로 가족이라는 사실을 상징한다. 작가는 생활 속 유머를 통해 돌봄의 철학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어른들의 농담과 말들이 겹쳐진 자리에서 그 이름은 아이들 안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한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그 말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설명되지 못한 표정들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나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했고, 나는 그 두 감정 사이에서 어느 쪽도 쉽게 지워낼 수 없었다. 지키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느 순간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무서움’으로 번역되고 있었다. 그 오해를 바로잡는 일조차, 한순간의 말로는 부족했다. 나는 끝내 악역을 피할 수 없는 자리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무서운 엄마’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착한 마녀의 식탁> 중에서
이 작품은 부모의 훈육이라는 일상적 경험을 단순한 육아담으로 그리지 않고, 사랑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돌봄의 역설을 섬세하게 형상화한 점에서 문학적 완성도가 높다. 특히 "지키기 위해 했던 말들이 어느 순간 아이들의 세계에서는 '무서움'으로 번역되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부모의 의도와 아이의 수용 사이에 존재하는 해석의 간극을 예리하게 포착하며, 관계란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오해와 이해를 반복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의 "무서운 엄마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라는 고백은 희생을 감상적으로 미화하지 않고, 사랑은 때로 오해를 감수하는 윤리적 책임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이 작품은 가족의 일상을 통해 돌봄의 윤리와 부모됨의 존재론적 의미를 깊이 있게 성찰한 수필로서, 생활의 체험을 보편적 인간 이해로 승화시킨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침묵은 관계가 견디는 시간이다. <말없이 지나간 밤>은 갈등을 해결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밤을 통해 관계가 성숙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현대인은 모든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작가는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하는 순간이 있음을 보여 준다. 침묵은 단절이 아니라 기다림이며, 포기가 아니라 관계를 지키기 위한 시간이다. 리쾨르는 이해는 즉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성숙한다고 설명한다. 작품 속 침묵 역시 관계를 끝내는 침묵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를 준비하는 침묵이다. 결국 지나간 밤은 아무 일도 없었던 시간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만든 존재의 시간이었다.
이제는 하루의 끝마다 가장 낮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정말 괜찮았니.” 희미해진 아들의 상처를 바라보며, 내 안의 오래된 흔적도 억지로 지워내지 않기로 했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는 자리에 놓아두면 된다. 언젠가 골목의 후진 경고음에도 심장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날이 온다면, 나는 아들의 등을 조용히 쓸어내리며 말하고 싶다.
“건강하게 잘 살아라.”
살면서 그 말 하나 끝내 남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할 것 같다.
<말이 지나간 밤> 중에서
어린 아들의 교통사고 이후 유산과 함께 찾아온 공황장애를 아들과 가족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전하고 싶어 쓴 이 작품은 개인의 상처를 치유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상처를 안고도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는 삶의 윤리로 승화시킨 점에서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특히 "상처는 사라지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는 자리에 놓아두면 된다."라는 문장은 상처의 극복보다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의 지혜를 담아낸 작품의 핵심 진술로, 깊은 철학적 울림을 지닌다. 또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아들의 성장과 연결하여 세대 간 상처의 대물림을 끊고자 하는 성찰은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인 인간 이해로 확장시키며, 마지막의 "건강하게 잘 살아라."라는 짧은 한마디는 부모의 사랑을 가장 절제되고 깊이 있는 언어로 응축해 강한 여운을 남긴다.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절제된 문장 속에 치유와 용서, 삶의 희망을 담아낸 이 작품은 일상의 체험을 존재론적 성찰로 승화시킨 현대수필의 빼어난 성과라 할 수 있다.
이들 수필은 모두 평범한 일상을 존재의 철학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이다. 차창 밖의 짧은 분노, 거울 앞의 낯선 얼굴, 한 사람의 어린 시절, 조용히 내리는 함박눈,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 말없이 지나간 밤은 모두 사소한 사실에 불과하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사실들을 '사건'으로 전환한다.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사건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의미의 생성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작가, 함은숙의 수필은 바로 이러한 사건의 철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며, 일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존재를 다시 사유하게 하는 문학으로 승화시킨다. 그의 작품은 생활의 기록이 곧 존재의 성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현대수필의 중요한 성과이며, 일상의 미세한 경험을 인간 존재의 보편적 의미로 확장하는 데 성공한 뛰어난 문학적 성취라 평가할 수 있다.
Ⅲ. 로그아웃
인생이란 의미를 깊이 반추하는 작가, 함은숙의 수필집은 평범한 생활의 기록을 넘어 인간 존재를 성찰하는 철학적 수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가는 가족과 이웃, 여행과 상담, 어린 시절의 기억과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을 소재로 삼지만, 그것을 단순한 체험담이나 회고담으로 머물게 하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 마주한 작은 사건들은 기억과 시간, 관계와 돌봄, 언어와 죽음이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장되며, 독자는 개별적인 경험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보편적 의미를 만나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수필은 생활을 소재로 삼되 생활을 초월하고, 체험에서 출발하되 존재에 이르는 현대수필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히 이 작품집의 가장 큰 성과는 '관계의 존재론'을 문학적으로 구현했다는 데 있다. <관계의 거리>는 타인과의 적절한 간격이야말로 관계를 지속시키는 윤리임을 보여주었고, <말보다 먼저 도착하는 숨>은 타자의 고통 앞에서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생명의 윤리로 승화시켰다. <김치통이 비어 있던 날들>은 비어 있음이 오히려 사랑의 충만함이 될 수 있음을 말하며, <세 나라의 칼날>은 언어가 지닌 폭력성과 윤리성을 성찰하게 한다. 또한 <등 위의 시간>과 <고방산 중턱의 그 집>은 기억과 죽음을 통해 삶의 본질을 되묻게 하고, <번역되지 않은 말>은 문화와 언어를 넘어 인간 이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처럼 개별 작품들은 서로 다른 소재를 다루면서도 결국 '인간은 어떻게 타자와 더불어 살아갈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철학적으로 보더라도 이 수필집은 현대 사유와 깊은 접점을 형성한다.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는 관계를 책임으로 이해하는 작가의 시선 속에서 구현되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일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는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다. 베르그송의 지속은 기억의 현재성을 설명하며, 리쾨르의 기억과 서사 이론은 과거를 현재 속에서 새롭게 구성하는 작가의 서술 방식과 연결된다. 또한 들뢰즈의 사건철학은 일상의 미세한 경험들이 삶 전체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작품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철학이 작품 밖에서 덧씌워진 것이 아니라, 작가가 삶을 성실하게 응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문학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 철학은 설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결 속에서 체화될 때 비로소 문학이 된다. 무엇보다도 이 수필집은 현대사회가 점차 상실해 가는 돌봄의 감각과 관계의 윤리를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복원한다. 경쟁과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작가는 기다림과 배려, 침묵과 공감, 그리고 함께 존재하는 삶의 가치를 끊임없이 환기한다.
그의 문장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며, 사건을 극적으로 확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문체와 담담한 서술 속에서 독자의 내면을 움직이는 울림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설명보다 여운을 남기고, 감동보다 성찰을 이끌어내는 수필문학의 본령이라 할 수 있다. 희망의 땅으로 우리를 인도해나갈 존재의 작가, 함은숙의 수필은 식탁과 시장, 길 위와 상담실, 여행지와 어린 시절의 골목처럼 가장 가까운 삶의 공간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길어 올린다. 그의 문학은 일상을 철학으로, 체험을 존재론으로, 기억을 윤리로 전환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성취는 생활수필을 존재론적 수필로 한 단계 끌어올리는 의미 있는 사례이며, 한국 현대수필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미학적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독자는 이 작품집을 덮는 순간, 타인의 삶을 읽었다는 느낌보다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문학이 독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선물이며, 이 수필집이 오래 읽힐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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