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들
간혹 어릴 때 부모로부터 들었던 잔소리가 성인이 되어 좋은 약이 되었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어릴 땐 잔소리였지만 커서 생각해 보니 다 인생의 지혜였구나, 싶다는 얘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 또한 생각해 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부모님의 잔소리, 잔소리라 칭하지만 내 삶의 방향이 되었던 말들. 솔직히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러나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몇 개의 기억들은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잘 사과하는 편이다. 완벽한 부모가 되려는 노력을 벌써부터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 굴레로부터 비교적 빨리 포기할 수 있었던 경험이 있다. 20대 후반, 엄마는 나에게 불신자 의사와 맞선을 보라고 약속을 잡았다. 내 동의는 구하지도 않은채. 나는 그 때 꽤나 열심당원에 자칭 영적이라 생각하는 정체성이 있어서 불신자와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갖는다 것은 매우 옳지 않다 여겼다. 나가지 않겠다고 강렬하게 저항했지만 이미 잡아놓은 약속이니 체면을 생각하여 나가라는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맞선 자리에 나갔다. 상대도 내가 맘에 든 기색은 아니어서, 그 때의 만남은 헤프닝으로 끝났다.
의무를 마친 나는 엄마를 힐난했다. 엄마가 진짜 내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불신자의 맞선을 보는 자리에는 보내지 않았을 거다.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육신적인 사랑이지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아니라며, 전투적인 마음으로 엄마를 궁지에 몰았다. 나는 당연히 엄마와의 설전을 예상했다.
"니가 인생을 아냐? 고생을 안해봐서 그렇지, 고생을 해봐야 알겠구나!"
나는 엄마로부터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니 말이 맞다. 의사라니 앞뒤 재지 않았다"
반전이 주는 임팩트가 큰 법이다. 하아, 놀랬다. 엄마 입장에서 나는 인생 풋내기에 다름 아니다. 풋내기에게 인생 고수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다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맞선, 만나나 보는 그 일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게까지 엄마를 몰아부칠 일인가, 그당시 나는 고집불통에 어리숙하기 이를 데 없는 꼴통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딸의 어리숙함을 탓하기 보다 자신 안에 있는 정욕의 욕구, 자랑하고픈 욕구를 성찰할 수 있었던 엄마, 우리 엄마는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분이다. 분명 기도의 자리에서 당신의 마음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그곳에서의 성찰이 풋내기의 항변에 단순하고도 순박하게 사과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 때의 기억으로 나는 자식에게 사과하는 법을 배웠다. 아이들과 거의 20년, 나는 엄마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아이들에게 적잖히 잘못을 했다. 성숙하지 않은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 것이 부지기수다. 욕망을 따라 아이들을 판단한 적도 있고, 나의 결핍을 보상 받으려고 아이들을 다그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나와 아이들은 대체적으로 관계가 좋다. 사과를 잘한 몫이 있을 것이라 여긴다.
그 때의 그 기억이 나의 양육의 시간 동안 지침이 된 것이다.
대학 합격자 명단을 확인하러 올라온 길이었다. 낙방이었다. 아빠와 함께 불합격을 확인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길. 나란히 앉았다. 나는 아빠의 얼굴을 쳐다 볼 수 없어서 고개를 수그릴 대로 수그리고 말없이 손가락만 쥐어뜯었다.
따뜻한 손. 내 손 위로 겹쳐지는 아빠의 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저 내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다혈질의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3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나는 그 때의 따뜻함을 기억한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 기억이 있어서 살아가는 동안 때때로 결과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다. 나의 아이들을 키울 때도 적잖히 이 기억을 소환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짐. 이것이 살아갈 힘을 준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의 자양분은 바로 이런 기억들에서 비롯되었다. 많지도 않다. 그러나 그 어떤 잔소리보다도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인 느낌으로 내 삶의 지표가 된 기억들.
그래서 내내 다시 나를 생각해 본다. 나는 어떤 기억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있을까? 아이들은 무얼 기억할까? 아이들의 마음 속에 살아있을 기억들은 무엇일까?
열마디의 잔소리보다 결정적 순간에 잘 처신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함께"임을 기억시켜 줄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도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잔소리를 입안에 머금는다. 나는 내 일이나 잘 하자고 소곤소곤, 이렇게 글로 소곤소곤 거리는 것이다.
2) 취향을 확인받는 방법,,
오늘 남편을 위한 아침 식사는 콩나물 국밥이다. 하룻밤 전에 내놓은 육수에 콩나물을 듬뿍 넣고, 파, 청량고추 송송, 달걀 노른자 풍덩하여 김가루를 얹으면 돈 주고 사먹는 국밥 못지 않은 비주얼이다. 겨울이라 특히 국밥을 내놓는 건데, 국밥 마니아인 남편에 대한 배려가 묵직하게 담겨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국밥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취향도 아닌 일을 하면서 아침부터 앞치마 두르고 국밥집 아줌마 제대로 되어 살아간다.
이 집은 한국식 난방이 되지 않는다. 집안의 냉기가 늘상 새롭다. 밤새 전기장판에 데워진 몸을 일으켜 부엌에 도착하면 집안 전체에 감도는 냉냉함이 온몸에 찰싹 달라붙어 모든 근육을 움켜쥐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래서인지 그 냉냉함이 어린 시절, 부뚜막이 있던 부엌, 연탄 아궁이가 있던 부엌을 회상 시키곤 한다. 바깥 세계와의 통로가 되었던 당시의 부엌, 확연한 공간 구분에서 오는 그 시절의 겨울 부엌에서 일어나는 음식 냄새는 냉기로움 속에서 묘한 정서를 불러 일으키곤 했는데, 지금처럼 사방이 하나로 연결된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식 난방시설이 없는 중국식 아파트에서는 침실(전기장판 사용)과 주방의 온도차가 사뭇 생생하다. 그래서 소환되는 것이다. 나 어릴 때 엄마가 밥을 짓던 그 부엌. 부뚜막의 연탄불에서 국이 끓어올라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던 음식의 기운. 찬 공기 속에서 하얗게 피어오르던 수증기는 아침 길을 나서는 가족들을 도닥이는 일종의 격려같았다.
이 겨울에 국밥을 끓일 때면 가족들을 향한 내 마음도 사뭇 더욱 따뜻해진다. 뱃 속에 들어갈 뜨뜻한 한 술의 국물이 예사롭지만은 않겠지 싶어서 꽤 괜찮은 일을 하는 사람마냥 저절로 내 마음을 쓰담쓰담 한다.
남편을 만나고서부터 양평 해장국이네, 순대국이네, 내장탕이네, 선지국밥이네, 소머리국밥이네, 이런 데를 다녔다. 한 10년 정도 살았던 어느 날, 어느 한 양평 해장국 집에서 삭힌 매운 고추 다대기와 양념 다대기를 넣으며 자각했다. 결혼 내내 외식이랍시고 먹은 음식이라곤 탕, 국밥들이란 걸. 결혼 전에는 먹어보지도 않았던 것들이었는데 말이다. 아들 둘의 입맛까지 남편의 취향대로 제대로 길들여진 이 난공불락의 상황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 한 끼라도 밥하는 일에서부터 해방 되려면.
아, 나는 나의 입맛 취향을 제대로 잃었다. 여름엔 갓 딴 고추와 상추에 된장 조금, 흰 쌀밥을 싸먹고, 차가운 냉수 한그릇 마시면 만족스럽던 입맛, 고기 냄새에는 왜 이리 민감한지, 소, 돼지, 닭, 오리 모두 냄새가 나지 않은 것들이 없고, 이것들을 안전하게 내 위장에 도착하게 하려면 온갖 야채에 감싸 집어넣어야만 하는 나는 완전 채식마니아다. 고기 냄새는 싫어도 야채의 특유한 향은 좋아해서(기꺼이 향이라 하겠다, 냄새가 아니라) 쑥갓, 깻잎, 신선초 등의 향이 진한 야채는 더욱 탐하는 채식 식성. 심지어 중국에 와서는 시향차이(香菜)라고 하는 고수까지 접수했다. 중국에서는 훠궈, 마라탕 등을 먹을 때, 스스로 자기 양념장을 만들어 곁들이는데, 나는 그 양념장에 고수를 엄청 집어넣는다. 마라탕을 먹을 때도 반드시 고수를 집어넣는다. 고수는 중국 음식의 느끼한 맛을 잡아주는데 적격이다.
그러나 채소 반찬은 집에서 자주 조리할 수가 없다. 세 남자 모두의 취향이 아니다. 먹게 하려면 고기 70%에 채소 30%의 비율로 샐러드를 해주었을 때다. 그러니까 돈가스 샐러드나, 차돌박이 샐러드나, 닭가슴살 샐러드 등등의 메뉴에 섞어져 나오는 채소들, 아니면 삽겹살을 먹을 때 함께하는 상추 정도를 애교로 먹어주는 가족들이다. 그러니 나 먹겠다고 각종 나물입네 만들어 놓으면 결국엔 버리기 일쑤다. 나 또한 입맛이 사치스러운지(?) 한 두번 먹은 반찬은 다시 먹고 싶지 않다.
주부란 기본적으로 가족들을 위하여 밥을 하는 존재다. 나의 입맛보다 가족들의 입맛이 우선 순위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덧 식탁에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사라지고 가족들 입맛을 맞추는 음식만 차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내 취향과는 먼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식구들 없이 혼자 식사를 하게될 때면, 토끼마냥 각종 쌈채에 된장을 올려 아삭아삭 씹어 먹곤 한다. 고기 샐러드 말고 야채 샐러드는 어쩜 이렇게도 내 취향인지, 그간 남자들의 식성 속에서 굶주렸던 나의 취향저격, 확인사살 한 방을 호기롭게 받아들이고 만족한다. "어.쩌.다.가" 말이다.
그니까 비로소 내가 얼마나 야채를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건데, 이게 또 오랜만에 손을 댄 취미생활마냥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기분이란 거.
간간히 취향을 새롭게 확인하며 살아가는 맛이라니!! 이것은 희생인가? 보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