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25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부활 제4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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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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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tF5w5VwWTA (최재영 세례자 요한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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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은 우리에게 시시각각 과거를 털고 일어설 것을 요청합니다!>
제비뽑기를 통해 유다를 대신해서 사도단에 가입하게 된 마티아 사도의 축일입니다. 마티아 사도 입장에서 꽤나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도로 선출되는 과정이 무기명 투표나 지명이 아니라 제비뽑기라니, 황당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았던 부담스런 직책을 맡게 된 마티아의 성소를 묵상하면서 제 성소 여정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수도 성소 역시 갑작스런 부르심이었고,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따라나선 전형적인 케이스였습니다.
산업화의 역군으로 현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가 갑작스레 불어온 성령의 바람을 타고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수도원으로 직행해버렸으니, 직장 동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더구나 수도원은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영화에 등장하는 수도사들처럼 늘 대침묵 속에 기도하고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하필 제가 발을 들여놓은 수도회인 살레시오회는 영화에 등장하는 수도원과는 판이하게 다른 사목활동 수도회였습니다.
깊이 있는 심사숙고와 고뇌 끝에 내려진 결정이기보다 분위기에 이끌려, 공연한 객기에 시작하게 된, 동기가 너무나도 어색하고 결핍이 많았던 성소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성소의 동기가 정화되기 까지 죽을 고생을 해왔고, 지금도 고생이 만만치 않은 듯합니다.
이 문제는 저뿐만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아주 훌륭한 삶을 살아가시는 고위성직자께서도 자신의 성소가 순전히 어머니의 의도에 따라 시작된 길이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훌륭한 수도자는 성소의 동기가 다분히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다행히 살아가면서 그분들은 자기중심적인 성소의 동기, 결핍된 선택의 동기들이 나름대로의 ‘정화과정’을 겪으면서, 고통스러운 자기 극복의 기나긴 과정을 체험하면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새로운 선택의 기회를 자신에게 부여하면서 참된 주님의 제자로 다시 태어나는 체험을 하셨겠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또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늘 절실하게 체험하는 바는 철저한 부족함입니다. 지독한 결핍입니다. 물론 어느 순간, 그러한 부족함과 결핍을 성령께서 채워주시겠지만, 우리 각자의 노력 역시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처럼 새로운 직책을 맡는다는 것, 새로운 인생을 출발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가온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면 더욱 부담스럽겠지요.
뿐만 아니라 마티아 사도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비뽑기로 사도로 선택되었습니다. 그런데다 마티아 사도는 전임자의 과오를 두고두고 껴안고, 또 짊어지고 살아가야 했습니다. 배반자 유다의 자리를 대신한 마티아 사도였기에 주변의 눈길 역시 무척 날카로웠겠지요. 더욱 조신하게, 늘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전임자가 불명예스럽게 떠났기에, 그 불명예에 대한 뒷감당이 늘 마티아의 삶을 짓눌렀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 난처한 분위기에서 사도로서의 삶을 출발한 마티아였기에 더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또다시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마티아는 자신에게 부여된 제자직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 제자로서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지금까지 익숙했던 삶의 양식이나 사고방식을 고수한다는 것은 우선 안전합니다. 지난 삶을 통해 검증된 것이기에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데 불편함도 없습니다. 편안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모험을 싫어하지요. 과거에 안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시시각각 과거를 털고 일어설 것을 요청합니다. 매일 매 순간 변화되고 성장할 것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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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마티아 사도가 없었더라면>
미국 조지아주 중서부에서 대부호로 명성을 떨친 레스터가(家)가 있었습니다. 레스터는 이곳에서 담배농사를 지어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주변의 농토들을 모두 사들여 담배농사를 지었습니다.
레스터의 땅을 밟지 않고는 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길을 토바코 로드(담배의 길)로 불렀습니다.
레스터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땅과 돈을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그런데 레스터의 3대 후손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3대손인 지이터가 소작농으로 전락해 유일하게 그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일찍 사망했고 9명은 가출했습니다.
이 부부는 고향을 지키며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지이터 부부가 잡초더미에 불을 놓았는데 그 불이 집에 옮아 붙어 이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부자가 삼대 못 간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물려줘도 삼대 동안 그 유산을 유지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물려준 유산은 무엇일까요? 교회에 물려준 가장 큰 유산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신 것처럼 성찬례의 직무일 것입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으니 성찬례만큼 큰 유산이 없습니다. 그 다음은 “너희가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고,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하시며 죄를 용서하는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교회는 이 유산들을 이천 년 이상이나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족도 아니고 적지도 않은 숫자임에도 흐트러짐 없이 당시의 유산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티아 축일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마티아 사도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사도의 직무를 이어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성인품에 오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 직무 자체가 그만큼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 힘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가리옷 유다는 맡겨진 직무를 포기했고, 마티아 사도는 맡은 직무를 끝까지 수행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나머지 열한 사도가 수행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만이 그리스도께서 뽑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통해 마티아를 뽑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교회를 통하여 계속 당신 직무의 후계자들을 뽑으시겠다는 의지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당신 직무가 사도들로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힘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 사실이 왜 중요하느냐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당시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고 타 그리스도교인들이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유산은 그 때 끝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마티아를 뽑는 이유가 열둘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도 직무를 이어받기 위한 목적’이었음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이 직무가 이어지기에 지금의 모든 성사들이 유효한 것입니다.
사도의 직무를 수행할 또 다른 사도를 그리스도 없이 교회 스스로 뽑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이해하는데 더 없이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마티아 사도가 교회에 의해 뽑혀 사도직무가 이어진 것처럼, 다른 성직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그 직무를 이어온 것을 믿으며 그 교회에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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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5월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복음: 요한 15,9-17: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분과 일치하고 그분 안에서 살아가라고 하신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10절) 우리가 사랑의 관계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없이는 은총도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며, 그분과 튼튼히 연결되어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12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셨듯이 우리의 사랑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계명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를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로, '친구'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늘 새롭게 의식하려는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계명을 잘 지키려 할 때 다른 계명들도 잘 지킬 수 있다. 이 사랑의 계명 안에 다른 모든 계명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3절) 이것은 사랑의 의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으로,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심으로 아버지께 사랑을 드렸다. 이 사랑을 우리도 형제들에게로 향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14절) 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친구라면, 우리도 그분과 같은 사랑을 하여야 한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사랑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16절) 그러므로 이런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내야 한다. 참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칭송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심 없이 주고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 줄 아는 것이다. 이 사랑은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시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며 모두를 그리스도화로 이끄는 사랑이다.
오늘 복음은 '선교'에 관한 말씀으로 마치고 있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다."(16절). '열매를 맺는다.'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사람 가운데 선포되고 널리 퍼져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끼리 주고받는 사랑으로는 족하지 않다. 우리의 사랑이 보편적인 표지가 되어, 마침내 모든 사람이 말로만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형제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끔 하여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사랑 안에 남아있어 하느님 아버지와 깊이 일치되고, 주님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우리는 또한 다른 사람에게 열린 신앙인으로 썩지 않을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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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1)
예수님께서는 40일 단식 후에 마귀로부터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배가 고프니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마귀에게 절하면 부귀와 영화를 준다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켜 주시니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혹을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마귀는 다음 기회를 엿보며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은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언제나 우리를 다시 찾아옵니다. 저는 새로운 마귀의 3가지 유혹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입니다. 실패한 많은 사람들은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유혹입니다. 나의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세상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면서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나는 안 돼’라는 유혹입니다.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마귀의 강력한 유혹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면 언제나 받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성주간 성유축성 미사에서 마귀의 새로운 유혹 3가지를 사제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의 강론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사제 여러분, 악마가 여러분의 마음 안에 교묘하게 숨겨놓은 우상숭배의 세 자리를 조심하십시오. 첫 번째 자리는 하루살이 문화와 보여주기식 문화를 대변하는 ‘영적 세속성’입니다. 영적 세속성은 우리를 십자가 없는 승리주의로 이끕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에 대한 유혹은 인간이 되신 주님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가난한 사람이 되십시오. 본회퍼 목사님도 ‘값싼 은혜’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값싼 은혜는 하느님의 생생한 말씀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부정한다. 값싼 은혜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고 하는 것이다. 은혜가 홀로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모든 것이 케케묵은 상태로 있어도 된다는 것이다. 값싼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 취한 은혜에 불과하다. 싸구려 은혜는 그리스도를 본받음이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 곧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은혜에 불과하다."
악마가 숨겨놓은 두 번째 자리는 ‘숫자에 의존하는 실용주의’입니다. 사람은 숫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성령의 은총을 저울에 달아 베푸시지 않습니다. 숫자에 대한 이러한 유혹 안에서 우리는 실제로 우리 자신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각자의 얼굴이나 사랑의 논리에 관심이 없고 숫자의 논리에 따른 자기만족을 취하게 됩니다. 노숙자가 길에서 죽어가는 현실은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식시장의 주가가 하락하면 큰 뉴스가 됩니다. 가야파도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온 이스라엘이 죽는 것보다 더 유익하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우주의 생명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사이동을 하면 인수인계를 하게 됩니다. 인수인계의 주된 내용은 주로 숫자입니다. 지역의 인구는 얼마인지, 신자의 수는 몇 명인지, 교무금과 헌금은 얼마인지, 통장의 잔고는 얼마인지를 파악합니다. 예비자 교리, 고백성사, 영성체의 숫자를 파악합니다. 주일학교 학생은 몇 명인지, 단체 활동의 숫자를 파악합니다. 모든 것을 숫자로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지막 우상숭배의 자리는 ‘기능주의’입니다. 기능주의는 여정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여정을 계획하는 탁상공론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도록 이끄는 유혹입니다. 기능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진 사제는 성령의 은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그 유혹에 빠지면 크고 작은 문제를 마주 할 때마다 하느님을 흠숭하는 일은 제쳐놓고 계획에 따른 효율성에서 자기만족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인들에게는 분명 어리석음의 표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분명 걸림돌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가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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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함께 모여 식사하는 일이 쉽지 않는 날들입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대게는 환영식을 하고, 단체들과 식사를 하곤 합니다. 이런 자리는 조금 어색하기 마련입니다. 서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한정식을 좋아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한동안 한정식으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좋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환영의 식사자리는 기대감과 설렘이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앞으로 5년 동안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할 분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이렇게 몇 달이 지나면 새로 온 사제에서 본당신부가 됩니다. 한정식만 먹지 않고 칼국수도 먹고, 쭈꾸미도 먹고, 매운탕도 먹고, 아귀찜도 먹습니다. 서로의 식성도 알면서, 서로의 마음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식구라고 불렀습니다. 같이 먹는 사람이 가족입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곳으로 가게 되면 송별식을 하고, 단체들과 식사를 하곤 합니다. 이런 자리는 정이 들어서 정겹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의 자리가 됩니다. 이제 곧 헤어져야 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서운했던 감정도 다 풀리기 마련입니다. 함께 했던 추억이 좋은 안주가 됩니다. 가족수련회를 갔던 일, 동산을 만들었던 일, 도보 성지순례를 갔던 일, 본당 축성 미사를 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눕니다.
새로 오실 신부님과 지금처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교우들도 이제 새로운 곳에서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쉬움은 남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큰 과오 없이 잘 지낼 수 있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환영과 송별의 식사를 10번 넘게 했습니다.
레오나르드다빈치를 비롯해서 유명한 화가들은 ‘최후의 만찬’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3년간의 공생활을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이별을 아직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했고, 그래서 영광의 자리를 원하기도 했습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우리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제자들에게 영원한 선물을 주십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이 빵을 먹을 때마다,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현존하시며, 성체와 성혈을 영하는 제자들의 몸과 마음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는 신앙생활의 정점이 되었습니다.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요즘, 더욱 주님의 성체가 그리울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들은 최후의 만찬을 그렇게 그렸나 봅니다.
화가들이 많이 그리지는 않았지만 ‘호숫가에서의 식사’가 있습니다. 실의에 빠진 제자들은 고기를 잡으려고 호수로 나갔지만 밤을 새워도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오른편으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을 오른편을 던졌습니다. 그물 가득 고기가 잡혔습니다. 나중에 세어보니 153마리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뜻대로 하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갔더니 예수님께서는 이미 식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막 잡아온 물고기도 몇 마리 가져오라고 하십니다.
이 식사는 이별의 식사가 아니었습니다. 파견의 식사였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나약하고,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제자들은 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음식을 상상해 봅니다. 맛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여러분은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십시오.’
제자들은 파견의 식사를 맛있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제자 중의 한분인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이제 곧 성체성사와 함께 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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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하신 계명은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하여 부탁하거나 지시하는 의무 수칙이 아닙니다.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숙제로 주어진다면 사랑하면 할수록 지쳐 가게 됩니다. 성당 일을 할 때나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갈 때나,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사랑하는 것을 해야 할 일이라고 다짐할수록, 우리는 그 일을 기쁨보다는 의무감으로 대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은 서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한쪽이 다른 쪽을 향하여 건네는 선물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자리에 서로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해야 할 일’로 생각하기보다 ‘하고 있는 일’로 생각하면 어떨까요? 굳이 무엇인가 행동하여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머물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부조리하고 어두운 이 세상에 빛을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거창한 선물을 인간에게 건네주심으로써 인간이 감동받고 회개하여 하느님이신 당신께 돌아오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자리에 인간으로 오신, 그리하여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참으로 하느님다운 것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명령은 더러움을 떠나 깨끗함으로, 부족함을 떠나 완전함으로, 고통을 떠나 행복으로 나아가라는 것이 아니라 더러움을 더럽게 보지 않고, 부족함을 무시하지 않고,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그럼에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좋은 곳에 머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싫어도 미워도 함께 머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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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주님을 따르기로 마음먹은 사도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들의 첫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뜨거운 무엇인가를 느꼈고 이분이야말로 구세주라는 강한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고, 마음 깊이 깨닫지 못하였으며, 나중에 자신들에게 돌아올 부와 명예에 대한 자리싸움(마르 10,37 참조)을 하기도 하고, 마침내는 죽을 상황에 있는 스승을 버리고 달아나기도(마태 26,56 참조)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서 나의 생각을 예수님의 생각이라 밀어붙이며 행동하고, 때로는 신앙이 부담스럽고 힘들다고 느껴지면 달아나기도 합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첫 마음은 어디에 갔나요?
정채봉 시인은 ‘첫 마음’이라는 시에서 “세례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라고 자신의 신앙 체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첫 마음을 유지하고 간직하기에 우리는 너무 나약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잘 아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첫 마음을 되찾는 길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용서를 청하고 또 다른 이들이 용서를 청하면 그것을 받아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서로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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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의미상실의 실패를 하지 않으려면>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아시다시피 마티아 사도는 제비뽑기로 사도가 된 분이기에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뽑은 것이라는 복음을 오늘 마티아 사도 축일의 복음으로 교회 전례는 뽑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뽑으신 거라는 말씀은 마티아 사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께 뽑힌 것이 로또에 당첨되듯이 행운입니까? 아니면 지독한 불운이고 재수가 없어서 뽑힌 것입니까?
어렸을 때 저에게는 소중한 체험이 있습니다. 아버지 없어 돈도 없고 키도 작고 힘도 없는 저를 인정해 주신 선생님 덕분입니다. 저한테만 잘해 주신 것이 아니지만, 아무튼, 저는 선생님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실제로 선생님은 저에게 일을 자주 시키셨습니다.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쌀 때 '찬선이 남아.'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남으면 그날 시험 본 것의 채점을 저에게 맡기시곤 하셨는데 그것을 하다 보면 동무들과 놀 수 없는데도 저는 그것이 전혀 싫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러웠습니다.
저를 부려먹으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저를 인정하시고 사랑하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 책임을 맡으라고 하면 빼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평의원 선출을 하면 대부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직책과 책임을 맡게 된 것이 하느님께서 나를 그 일의 적합자로 인정하시고 무엇보다 사랑하신 거라고 생각하기보다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일꾼으로만 부르시고 뽑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뽑으신 것은 종이요 일꾼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로서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이렇게 주님 사랑 안에 머물러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살라고 하시는데 사랑의 기쁨과 행복의 성소를 살지 못하고 일꾼의 성소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머물지 않기에 불행하고 죽으라 일만 하기 때문에 지칩니다.
수도자들을 보면 사랑의 성소에 실패하여 얼굴에 그늘이 있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은 부부간의 사랑이나 자녀의 사랑이라도 있어서 작은 행복이 있는데 주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에 실패하고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도 실패한 수도자들은 기쁨과 행복을 사랑 안에서 찾지 못하고 일의 보람에서 찾으려다가 그리된 겁니다.
사랑 없이 하는 일은 지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일의 보람을 얻기 위해 일을 했는데 보람도 없게 됩니다.
그것은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뽑으신 이유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있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시는데 사랑 안에 머물지 않음으로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도자가 성소에 실패할 경우 초기에는 의미를 찾지 못해 실패하는 데 비해 나이를 먹어서 수도원을 떠나는 것은 의미를 잃기 때문인데 왜 의미를 잃겠습니까?
사랑을 잃으면 의미를 잃는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어쩌면 이런 '의미 상실의 실패'를 한 것이 아닐까요?
그에 비해 그의 자리를 이은 마티아 사도는 길이 남을 열매를 맺었고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의 축일을 지내며 사랑의 성소를 다시 마음에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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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
요한 15,9-17 (나는 참포도나무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벗>
서로
다가가니
벗
서로
깃드니
벗
서로
머무니
벗
서로
품으니
벗
서로
느끼니
벗
서로
닮으니
벗
서로
사랑하니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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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억지로 하면 헛고생>
무슨 일을 하든 억지로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하면 기쁨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면 보람과 기쁨이 큽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명령이나 의무에 의해 한다면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내리는 분의 뜻을 알기 위해 또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지킨다면 그 의미가 풍요로워집니다. 사실 진정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그만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부족한 사랑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 우리 존재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머물러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들을 위한 당신의 사랑이 선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내리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께 받은 사랑은 제자들을 위한 사랑의 기초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 예수님께서 받으셨고,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제자들 간 서로 사랑을 하는 것에 머물지 말고, 이웃 사람에게로 사랑의 손길을 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5)
예수님께서 사랑 안에 머무르시라고 당부하는 것은 당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전해 주고 그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쁨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충만한 기쁨을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닌 척해도 있는 사랑을 오래 감출 수 없고, 없는 사랑을 있는 척 속일 수 없습니다."
혹 계명을 억지로 지키는 사람은 헛고생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속 깊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채비가 갖추어져 있는 만큼 그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디아도쿠스주교)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됩니다.”(작은 거인들에서) 망설이지 말고 사랑을 위한 사랑을 함으로써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제자임을 자랑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기억합니다. "여러분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랍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정체되어 있다면 부족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사랑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마티아 사도는 유다의 빈자리를 채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택될 때 사도들은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3-25). 사도들은 ‘주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요한 15,16)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주님께서 뽑아 쓰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겸손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최고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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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은 유다의 자리를 마티아가 대신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런데 마티아의 선출 이야기 외에 성경 어디에서도 마티아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복음서 밖에서도 그에 관한 전승은 매우 빈약하여 그가 어떻게 복음을 증언하다가 순교하였는지조차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배반자였던 유다의 자리를 대신하여 뽑혔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생애가 그리 순탄하지 못하였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마티아 사도가 거론될 때마다 가리옷 사람 유다가 자연스럽게 함께 떠올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연치 않게 다른 사람의 자리를 떠맡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전임자가 훌륭할 경우 그의 위업을 계속 이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겨나게 됩니다. 반대로 마티아 사도처럼 전임자가 잘못을 저지른 경우에도 그의 흔적과 어두움을 지워 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과 재능을 다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해 나간다면 어느새 과거는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현재의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지 않을까요?
마티아 사도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를 되돌아봅시다. 지금 어떤 자리에 서 있습니까?
설령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아 보이며 턱없이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자기 자리에서 늘 충실하려고 노력할 때 그 자리는 어느새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리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 있고 또 앞으로 서게 될 모든 자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자리라는 사실도 함께 기억합시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는 이, 나아가 세상의 빛이요 희망으로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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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
<아버지께 가는 길!>
믿는 이들의 여정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어 하느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계신 곳으로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곳에 가셔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놓겠다고, 그래서 당신께서 계신 곳에 우리도 함께 있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당신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요즘 '말 그릇'(김윤나 지음)이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31-34쪽 참조)
"말은 한 사람의 인격이자 됨됨이라고 한다. 말을 들으면 그 말이 탄생한 곳, 말이 살아온 역사, 말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말은 한 사람이 가꾸어 온 내면의 깊이를 드러내기 때문에 말 그릇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내면이 성장해야 한다."
"말 그릇이 큰 사람들은 공간이 충분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들은 말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타인의 분노에 쉽게 대항하지도 않고, 설령 말에 넘어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순간의 감정을 조절할 줄 안다."
"반대로 말 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조급하고 틈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차분하게 듣질 못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로만 말 그릇을 채운다.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고, 과장된 말을 사용하고, 두루뭉술한 말 속에 의중을 숨긴다."
저자는 '말 그릇'은 곧 '내 마음'이며, 이 마음을 키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 마음의 창고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그분의 영께서 머물러 계시게 하는 것이 내면이 성장하는 것이고, 말 그릇을 키우는 일이 아닐까?
내 마음의 창고에 예수님께서 머물러 계시면, 쉽게 헛생각과 헛말과 헛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나의 말 그릇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담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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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 인간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죽는다’로 이야기를 끝맺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야기 역시 ‘죽는다’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삶은 아무것도 아닐까요? 아닙니다. 이야기가 남기 때문입니다. 삶에 관한 이야기로, 남아 있는 사람들은 서로 웃고 울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됩니다.
삶을 이룬 이야기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단순히 이야기의 끝인 죽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만드는 좋은 이야기 만들기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의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죽음이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드라마를 많이 봅니다. 특히 인기 있으며 화제성을 가져오는 드라마의 내용을 보면 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내용입니다. 이런 특별한 내용에 사람들은 더 큰 사랑을 보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사랑을 실천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이 주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것은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 역시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사랑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분께서 내리신 사랑의 계명을 끝까지 지켜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게 되면 결국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 훨씬 손쉽게 됩니다.
지금은 사랑의 실천에 어려움을 느끼고 힘들다고 한숨을 내쉴 수도 있지만, 그 나라에 들어가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그렇게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실천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만 충만한 기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사랑이 얽히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훌륭한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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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의 학교>
-서로 사랑하여라-
"알렐루야, 사도들의 임금이신 우리 주님께, 어서 와 조배 드리세."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사도 축일 공통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으로 하루를 여니 기분이 참 상쾌합니다. 엊그제 방문했던 포천 수녀원은 왕방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우리 요셉 수도원은 불암산을 배경으로 합니다. 명산대찰名山大刹이라 말마디처럼 명산을 배경으로 한 불교 대 사찰들입니다. 신록으로 빛나는 불암산 배경의 우리 요셉 수도원은 참 자랑스럽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발
뒤로 물러나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배경의 품이 되어 살고 싶다
산처럼!”
문득 떠오른 “산처럼!”이라는 짧은 시입니다. 산 배경의 품같이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의 어른이 참 그리운 시절입니다. 수도원 배경의 산을 볼 때 마다 산 배경같은 사랑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마티아 사도는 물론 나머지 열한 사도 및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산 배경의 사랑의 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성 마티아 사도 축일입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불행한 유다를 대신하여 뽑힌 12사도중 맨 마지막 사도가 성 마티아입니다. 성서에도 별로 등장하지 않는 사도이나 베드로 사도의 추천 내용을 보면 묵묵히 예수님을 따르며 스승 예수님의 사랑을 평생 보고 배웠을 제자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말마디가 문득 생각납니다. 평생 보고 배우며 공부해야 하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아주 오래전 ‘사랑이 무엇이냐?’는 한 자매의 뜬금없는 질문에 당황했던 일도 생각납니다. 사랑도 받고, 보고 배워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평생 보고 배우며 공부해야 할 사랑이요, 우리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공부해야 할 사랑의 평생학인이요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 학인임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성 마티아 사도 역시 평생 예수님을 따르며 또 동료 제자들을 보며 사랑을 배웠을 것입니다. 특히 배반자 유다 사도 대신 뽑혔기에 자주 유다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주님께 대한 사랑을 새로이 하며 분투의 노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납니다. 사랑이란 말마디가 무려 9회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주님의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있으며, 이 때 주님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도 충만할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충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처방도 이런 주님의 아가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답은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 막연한 제멋대로, 제 좋을 대로의 무질서한 감정적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기준은 주님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란 말씀이 사랑의 교본입니다. 주님의 무사한 사랑을 평생 공부하고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서로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 무집착의 초연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존중하고 배려하며 경청하는 사랑, 아가페 순수한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주님 사랑을 배우고 공부하여 서로 사랑 실천에 항구하면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합니다. ‘주님의 친구’라는 호칭은 얼마나 영예로운지요! 서로의 형제 사랑과 주님의 친구로서 우정의 사랑은 함께 감을 봅니다. 날로 깊어가는 주님 사랑의 우정과 더불어 형제 사랑도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부단히 열매를 맺으라 당신 제자로 뽑아주신 우리의 신원입니다. 무슨 열매입니까? 사랑의 열매입니다. 언제나 영원히 남아있을 열매가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가을철에 둥글둥글 주렁주렁 무수히 열매 맺는 과일나무들처럼 인생 가을을 맞이하였을 때 우리 사랑의 열매도 이러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랑의 열매가 빈약할 때 텅빈 충만이 아닌 텅빈 허무의 삶이 될 것입니다. 흡사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처럼 생각되는 사랑의 명령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밖엔 길이, 답이 없습니다. 바로 제 졸저의 책명이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입니다. 사랑은 삶의 의미이자 존재이유입니다.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이자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의 신비, 사랑의 지혜, 사랑의 분별, 사랑의 관상, 사랑의 순교, 사랑의 성사, 사랑의 수행, 사랑의 기적, 사랑의 치유, 사랑의 사도등 도대체 사랑이 붙지 않는 말마디들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우리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정의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사랑을 빼놓으면 뭐가 남겠는지요. 오늘 강론에서 사랑이란 말마디를 빼놓으면 뭐가 남겠는지요. 완전 허무일 것입니다. 허무의 어둠을 몰아내는 사랑의 빛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평생 전사”
“주님의 사랑의 평생 학인”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사랑의 영적전투요, 사랑의 학교에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아가페 순수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은 주님 사랑의 제자로, 친구로,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 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97,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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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RjCDVJtdA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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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 17)
서로 사랑하는
여기에
하느님이
계신다.
서로를
알고 있는
것보다
서로를
더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핵심이다.
모든 복음은
서로 사랑하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서로 사랑하는
여정이
참된
사랑의
여정이다
비뚤어진
사랑을
치유하는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길이다.
사랑은
직면에서
더 깊어진다.
오늘 서로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자아에
갇혀 있지
않으며
서로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내놓지 않고서는
사랑에 머무를 수
없고 충만할 수
없다.
사랑하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서로 사랑하는
실천이 있다.
사랑의 실천이
사랑의 참된
열매이다.
사랑으로 청하면
사랑으로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사랑의
안과 밖도
사랑이듯
사랑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되는
사랑의
기도이다.
마티아를
사도로
새로 다시
뽑으시는
사랑이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사랑의 새로운
실천이며
모두를 다시
살게하는
충만한 교회의
기쁨이다.
서로 사랑하는
기쁨이
가장 큰
하느님의
기쁨이다.
하느님의
친구가
되게 하는
사랑의 참된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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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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