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전복이 진정한 나를 만든다 - 니체와 바그너
불협화음이 이끌어나가는 혁명적 음악
독일의 음악가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발표되었을 때, 그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음악은 흔히 후기 낭만주의 혹은 표현주의로 분류되는데, 어쩌면 이 음악은 이러한 분류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징후로 받아들여져야 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것은 곧 과거의 궁극적인 가치기준을 뒤집어엎는다는 말과도 같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에 나타난 이른바 ‘트리스탄 코드(Tristan Chord)’는 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얼핏 까다로울 수도 있지만 조금만 집중하면 음악에 문외한이라고 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므로 트리스탄 코드가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해보자.
아래의 악보에 나타나 있듯이 시작 부분에 올림표나 내림표의 조표가 붙어 있지 않으므로 이 곡은 C(다)장조 혹은 A(가)단조이다. 그런데 첫 음이 ‘도(C)’가 아닌 ‘라(A)’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 곡은 A단조의 곡이다. A음표 하나만 있는 첫 못갖춘마디를 제외한 두 번째 마디의 네 개의 음으로 이루어진 첫 음(표시한 부분)이 바로 그 유명한 트리스탄 코드다. 악보의 ①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음은 F, B, D#, G#이라는 네 개의 음이 동시에 울리는 음군이다. 그런데 이 네 개의 음은 A단조에 어울리는 화음(코드)이 아닐뿐더러 전통적인 음악의 관행에서 볼 때 설명할 수 없는 불협화음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타난 트리스탄 코드
물론 이 오페라의 특이함은 ‘트리스탄 코드’라는 불협화음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불협화음은 화음을 가장 중요시하였던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에서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다만 과거에는 불협화음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협화음으로 해소된다는 전제 아래에서 행해졌다. 이에 반해서 트리스탄 코드는 협화음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다시 악보로 돌아가보자. 트리스탄 코드 바로 다음에 ‘라’(악보의 ② 부분 참조) 음이 나오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보면 트리스탄 코드의 불협화음이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왜냐하면 ‘라’ 음은 A단조의 으뜸음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관행으로 보아 불협화음이 으뜸음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곧 안정된 상태로 해소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곡을 직접 들어보면 불협화음이 A라는 으뜸음으로 해소되기는커녕 오히려 A음이 임시적인 경과음처럼 들리며, 바로 이어지는 A#음으로 해결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 A#음 역시 A단조와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의 음이다. 결국 이 곡에서 트리스탄 코드의 불안정함은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불협화음은 곡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가장 중요한 모티프 역할을 한다. 흔히 이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 주도동기)’라고 부르는데, 이는 곡 전체(나아가 오페라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요소를 뜻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불협화음이 곡 전체를 이끄는 핵심요소가 된다는 것은 전통적인 음악 관행과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가령 주인공이 다른 인물과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식으로 끝을 맺는 것이 전통적인 소설이나 서사의 형식이었다면, 바그너의 오페라에서는 해결은커녕 해소되어야 할 갈등 자체가 주제이자 결말이 된 것이다. 이는 화합(화음)과 갈등의 해소라는 기존의 음악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허물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을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용어를 빌려 묘사하자면 ‘가치전도(Umwertung)’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말하는 ‘가치전도’란 사람들이 이제껏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 믿었던 가치가 허물어짐을 뜻한다. 음악은 불협화음을 거치지만 궁극적으로는 화음에 의해서 해소되는 대화합의 장이 되어야 한다거나 세상에는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지만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식의 믿음은 전통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가치에 대한 숭상은 이미 끝나버렸다. 니체는 실제로 바그너의 음악, 특히 바로 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음악을 듣고 그의 음악이야말로 기존의 가치를 전도시켜버리는 혁명적인 음악으로 이해하였으며, 나아가 새로운 가치전도의 시대를 여는 징후로 생각하였다. 비록 이후에 바그너와는 사이가 틀어지고 그의 음악이 구시대의 가치(기독교적 가치)로 회귀했다고 비난하게 되지만, 적어도 초창기에 니체의 눈에 비친 바그너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혁명가임에 틀림없었다.
레이튼, 〈노래의 끝〉The end of the song, 1902‘트리스탄과 이졸데’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하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서곡, 1859
이 곡에 나타난 ‘트리스탄 코드’는 과거의 기준을 뒤엎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보여준다. 니체는 기존 가치의 전복이 허무주의를 불러오고, 인간은 이 허무주의를 통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바그너,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
[네이버 지식백과] 불협화음이 이끌어나가는 혁명적 음악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