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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머니는 1999년 탈북(脫北)했다. 올해로 한국 생활 12년째를 맞고 있다. 성경은 18살 때 고향 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60년 넘게 간직한 성경에는 북한에서 겪은 고통의 세월과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1993년 사회안전부가 그의 집을 수색했다. 요원들이 오기 전 할머니는 성경을 뒤뜰 김치 움에 묻었다. 폭우가 내린 며칠 뒤 꺼낸 성경은 퉁퉁 불어 있었다. 할머니는 망가진 창세기(創世紀) 부분을 태워 재를 가족과 나눠 마셨다.
할머니는 "새벽이면 성경을 방 한가운데 놓고 아이들과 예배를 올리며 '노아의 방주' '모세의 기적'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했다. 딸이 사는 집에 갈 때는 성경을 허리춤에 숨기고 다녔다.
1959년 할머니 가족은 기독교를 믿는 게 발각돼 평양에서 산간 오지로 추방됐다. 남편은 거기서 옥사(獄死)했다. 다른 기독교 신자들도 똑같은 비극을 경험했다. 처형되고 수용소로 끌려가고 오지로 추방된 것이다.
8·15 해방 전까지 북한에는 교회가 2600개나 있고 금강산 등 명산마다 유명한 사찰(寺刹)이 많았다. 평양의 교회 수만 270여개였다.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부를 정도로 기독교가 왕성한 도시였다.
그런 분위기가 공산정권 수립 후 확 바뀌었다. 교회뿐 아니라 많은 사찰도 폐쇄했다. 목사나 스님들은 모두 농장원 등으로 변했다. 그런 가운데 많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이 남으로 내려와 일군 게 영락·충현교회 등이다.
그렇다면 지금 북한의 종교인들은 김일성·김정일의 대(代)를 이은 탄압에 '씨'가 말랐을까. 놀랍게도 북한엔 여전히 '지하 신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1957년 평북 용천군에서 이만화 목사 등 36명이 총살되고 130여명이 체포됐다. 종교를 탄압하는 김일성을 지지하지 말라고 한 게 적발된 것이다. 1966년 평북 박천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야산 토굴에서 13명의 신자들이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적발돼 처벌받은 것이다.
북한 헌법 68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평양에 봉수교회와 칠골교회, 가톨릭성당, 러시아정교회 같은 교회가 있고 목사를 배출하는 신학원과 김일성종합대학 종교학과도 있다. 불교 사원도 3곳이 있다.
겉으로 보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67년 김일성이 "종교는 미신"이라고 한 뒤 신자들은 처형되거나 추방되고 있다.
북한 선교단체들은 북한의 '지하 교인'들이 4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해방 전부터의 신자들과 1990년대 이후 친척 방문으로 중국에 왔다가 기독교를 접하거나 한국의 기독교 방송을 듣고 자생적인 신자가 된 경우다.
선교단체들은 '한 손엔 성경, 한 손엔 식량'을 들고 주로 탈북자들을 상대로 북한 선교에 나선다. 국내 기독교 단체들도 선교용 '삐라'를 풍선에 실어 매년 북한에 날려보낸다. 모퉁이돌 선교회는 특별히 북한식 용어로 만든 성경책을 북한에 보내고 있다.
북한도 이런 지하교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는 2008년 12월 간첩을 잡았다고 발표한 담화에서 "종교의 탈을 쓰고 불순 적대 분자들을 조직적으로 규합하려던 비밀 지하교회 결성 음모를 적발했다"고 북한의 지하교회 존재를 밝혔다.
북한에서 기독교 신자로 붙잡히면 '스파이'로 몰리고 고초를 겪는다. 감옥에 3년간 붙잡혔다가 나온 김모(34)씨가 국내 선교단체에 보낸 편지를 보자.
"가장 힘든 건 15일간 허리를 90도로 구부리고 서 있게 한 것입니다. 겨울에 옷을 다 벗겨 눈밭을 기게 하고 바가지로 찬물을 끼얹어 바깥에 1시간을 세워 온몸에 동상이 걸렸습니다. 전기곤봉으로 맞아 정신을 잃기도 했습니다."
매년 '기독교 박해지수'를 만들어 발표하는 국제기독교 선교단체 '오픈도어즈'는 이런 북한을 기독교 박해 50개 국가 중 1위라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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