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김상용 수사]
5년만에 서울에서 작은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는 옛 친구에게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야아, 너, 나 아줌마 됐다고 이제 연락도 않하기냐...?"
결혼을 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그 친구는 부산에서 살고 있다.
봄장마로 들어서려는지 밖에 비가 그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정말 반갑게 그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화곡동 신학원 공동체, 그러니까..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김포 공항과 꽤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관계로 나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김포공항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그 친구는 비디오 아티스트이다.
영화를 함께 공부한 우리들 중에서 유일하게 순수예술분야에 남아있는 친구인데, 우리들 모두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녀의 배경이 남몰래 부러우면서도 모던 아트분야에 더이상 순수, 상업 운운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위하곤 했다. 그만큼 상업적 코드의 집요한 눈치살핌이 필요없이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놓고 하고 있는 그 친구의 표현의 자율성이 부러웠던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수도회에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한 미안함으로 김포공항에서 장미꽃 몇송이를 사서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는 여전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슨 봄비가 저리 굵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무심히 공항 로비에 설치된 액정화면의 비행기 시각표를 보다가 부산발 비행기 전 항로가 김해 공항에서 발이 묶여 있는 안내표시를 읽게 되었다.
순간, 나는 밖을 쳐다보았다.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다.
'아아, 우리나라는 좁구나아-'
왜, 비행기가 결항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나는 곧바로 공중전화 카드 5000원짜리를 하나 구입해서 전화를 걸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친구는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해 공항에서 비행기가 결항되어서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혹시나 비행기가 이륙할 수도 있다는 그곳 안내 방송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했다.
그때, 그 친구는 활주로가 바라다 보이는 공항 대합실에서 나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비가 오는 활주로를 엔진을 켠 여러 비행기들이 지상 운행을 서행으로 계속 움직이며 활주로를 돌고 있는 광경을 잘 묘사해 주었다.
나는 그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나의 주위를 돌아다 보았다.
여러 항공사들이 결항을 알리는 안내방송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 나가고 있었고, 길지 않은 시간에 그 커다란 공항 로비에는 한산하게 비어 나만 남게 되었다.
나는 그때서야 방금 전 내가 그 친구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던 자리에 장미꽃을 두고 왔음을 깨달아, 그 친구에게 잠시 뒤에 다시 전화를 걸기로 하고 자리를 옮기려 했지만 그 친구의 만류로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그 친구의 얘기를 들어 주었다.
뜻하지 않은 그 친구 일상의 얘기들을 들으며, 왜 그 친구가 나를 만나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친구는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친구가 가지고 있는 내밀한 고민들을 텅빈 공항 로비, 그것도 전화를 통해서 들으며 나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인생에서도 가끔 결항될 수도 있다는 지혜를 길러가길 충고해 주고 싶었지만 말을 아끼기로 했다.
우리는 쉬지않고 연속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가동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신은 병들고 영혼은 피폐해져 간다.
욕망 자체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 욕망 한가운 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에너지가 상재하는 까닭이다.
다만, 우리 인생에서 '늘 가동해야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욕망의 엔진'을 잠시 끄고 시원한 비를 맞으며 스스로에게 자신의 시각표를 애써 무시 한 채 <결항>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용기를 키우길 희망한다.
나는 그날 5000원짜리 전화카드를 모두 사용해 가며 결항된 비행기를 사이에 두고 그 친구와 오래도록 전화로 통화했다.
그리고 끝으로 그 친구에게 이 결항이 가져다 주는 "여유"에 대해 잠깐 설명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장미꽃이 생각나 그 자리로 가보았다.
장미꽃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왠지 지금, 김해 공항의 텅빈 로비에서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그녀의 손에 그 꽃이 들려져 있을 것 같은 상상에 마음이 수수로와 졌다.
나는 왔던 길을 차근히 밟아 집으로 돌아왔다.
첫댓글 참 좋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오늘"이라는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씩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들을 접할때가 있곤 합니다. ignatius님이 쓰신 글에 많은 공감을 가져보며 다시한번"내적자유"를 향해 삶의 여정을 떠나봅니다.
좋은 묵상이 되었습니다.감사하며 저도 늘 가동해야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욕망의 엔진을 잠시 끄는 시간을 적절히 아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글로 나마 여유를 꿈꿀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