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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사모]한국사를사랑하는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나도사랑을했으면
스웨덴이 고트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시른 괴테보르크나 고틀란드라는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밖에도 스웨덴 제국 문장에서 두 번째 왕관은 고트족과 동일시되는 괴타르족의 왕국을 상징한다.
요르다네스에 의하면 기원전 1490년경에 고트족은 베리그 왕때 스칸차(스탄디나비아) 섬을 출발하였고 먼주 거주하고 있던 다른 민족을 밀고 들어갔었다. 그러다가 베리그 이후 5대 왕쯤 되는 가다리크의 아들 필리메르가 통치하던 시절 다시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서기 150년경까지 언급된 구트족은 우크라이나 고트족의 선조들이었다. 고고학자들은 그들이 거주한 곳이 비수아 강하구에 있던 자생문화가 있던 곳과 같은 곳으로 보고 있다. 빌바르크 혹 빌렌베르크라고 불리는 이 문화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까지 점차 남동쪽으로 이동해서, 키예프 인근에서 그 지방의 이름을 딴 체르냐코프 문화로 계속 이어졌다. 고트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이 문화도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의 산타나드무레슈 문화로 확대되었다. 이 세문화에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은 남자들의 무덤에 무기가 없다는 점이다.
독수리는 고트족의 중심적인 모티브이다.
238년에 고트족이 처음으로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 강 하류에 있는 로마의 속주들을 공격했다. 250년에는 왕의 지휘아래 속주 다키아(루마니아)와 모에시아(북 불가리아)를 공격했다. 그들은 271년까지 수륙 양로로 공격했다.
251년도 고츠족은 꾀가 많은 크니바왕의 지휘 아래 로마 군대를 아브리투스 부근에서 늪지대로 끌어들여 섬멸했다. 데시우스 황제도 이 전투에서 죽었다. 곧이어 고트족은 모에시아와 트라키아를 지나 그리스까지 갔다. 코린트 , 아테네 , 올림피아 , 아르고스 , 스파르타가 보병들의 수중에 넘어갔고, 소아시아 대륙과 크레타, 키프로스 섬은 해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들의 약탈품과 손실 모두 틀림없이 막대했을 것이다. 전투에 함대를 투입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매우 낮선 전쟁기술이었다는 사실이 고려되어야 한다. 사르마티족 동맹군과 함께, 그들은 바다에서부터 번개처럼 빠르게 도시로 밀고 들어갔다. 고트족은 238~271년에 여러 차례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다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에 의해 268년과 269년에 두 번, 그리고 아우렐리우스 황제에 의해 271년과 272년에 도나우 강 남쪽뿐 아니라 그들의 출신지에서도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이로써 3세기의 고트족 폭풍은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 332년에 로마인과 고트족 사이에 최초의 진지한 계약인 '포이두스foedus'가 맺어지게 되었다.
고트족은 로마인과 동맹을 맺은 사르마티 족을 다키아, 즉 오늘날의 트란실바니아에서 공격했다가 등 뒤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부대의 공격을 받아 패했다. 승리를 거둔 황제는 고트족을 로마 제국과 계약을 맺은 포이데라니움 삼음으로써 평화를 얻었다.
울필라스는 341년에 안티오키아에서 주교로 임명 되었다.
고트족을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구분하는 근거는 3세기 말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쪽 집단은 귀족들의 지휘 아래 오늘날의 루마니아에서 형성되었고, 동쪽 집단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있는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서 왕의 지휘 아래 살고 있었다. 동쪽 집단은 자시들의 이름을 일출에서 따서 '오스트로고트족'이라고 불렀고, 서쪽 집단은 자시들을 '선인善人'이라는 뜻의 '베시족'이라고 이해했다. 이런 구분이 6세기 초에 처음으로 서고트족과 동고트족으로 해석되었고,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명칭은 사람들이 흔히 짐작하는 것과는 달리 방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동고트족은 에르마나리크 왕이 통치했다. 요르다네스는 이 왕이 아말러 왕가 출신이라고 했다.발텐 가문이 통치한 서고트족의 수장은 아타나리크였으며, 종시제 군주가 아니라 임기제 군주였다. 그는 로마인과 기독교인들을 증오했기 때문에 젊은 시절에 결코 로마 땅을 밟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게르만족이 아닌 알라니족은 반半 유목민족이다.
에르마나리크 왕은 자신의 왕국이 훈족에게 굴복당한 것을 보자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왕이 죽자 동고트족 대부분이 훈족에게 항복했다.
훈족이 드네스트르 가에 있던 서고트족의 진지를 우회해서 갔기 때문에 기대한 서고트족과 훈족 사이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방어 조치가 실패로 돌아가자 서고트족 지도층은 붕괴되었다. 아리우스교도인 고트족의 프리티게른은 발렌스 황제와 동맹을 맺고 주민 절대다수의 동의를 받아 376년에 서고트족을 로마 제국으로 인도했다.
378년 8월 9일에 오늘날의 터키에 있는 아드리아노플 부근에서 유명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침 일찍 로마 군다는 완전무장을 하고 고트족의 원형방진을 향해 18km를 행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뜨거운 한낮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곳에 도착했다. 끔찍하게 뜨거운 날씨에다가 고트족은 로마 군단을 더욱 몰아붙이기 위해 풀에다 불까지 질렀다. 군인들은 지쳐 있었는데, 발렌스는 물과 생필품도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다. 여기서 로마군은 총 4만 명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도망쳤고 나머지는 대량 죽임을 당했다.
382년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와 서고트족 사이에 중대한 동맹계약이 체결되었다. 서고트족에게 도나우 강과 발칸 산맥 사이에 있는 트라키아와 모에시아를 세금 없이 너겨주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서고트족에게는 폭넓은 자율성이 보장되었고, 그 지역은 공식적으로 로마 영토로 남았다. 야만족에게는 토착민과 결혼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고트족은 거주권을 얻는 대신 병역의 의무를 졌다. 이 깨지기 쉬운 질서는 겨우 몇 년 동안 유지되다가 395년에 완전히 깨지고 만다. 서고트족에 비해 동고크족은 훈족에게 철저히 패한 이후 두 세대 이상 눈에 띌 만한 역사를 보여주지 못하다가 450년경에 완전히 잊쳐지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 다수가 훈족 밑으로 들어가 451년에 카탈라우니아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틸라 편에서 싸우다 패배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국인들은 오늘날에도 독일인을 '훈족the Huns' 이라고 부르는 경우이다. 1901년에 '의화단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독일 해군을 중국으로 보내며 "1000년 전 아틸라 왕이 이끌던 훈족처럼 행동하라"고 한 것은 황제 빌헬름 2세 자신이었다.
훈족은 근접 전투에는 양날의 장검과 외날의 단도를 사용했다. 이들의 반사궁은 거조한 지역에는 적합한 무기였지만, 서유럽처럼 습한 지역에서는 아교가 떨어져 부서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600년경 아바르족이 유럽에서 등자를 들여왔다.
밑에 보겠지만 훈족은 카탈라우니아 평원의 전투에서 주로 고트족에게 패배하게 된다.
훈족은 서쪽에서 낮선 질병에 노출되었고, 이는 급속히 전염병으로 발전했다. 아이티우스가 사망한 황제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인 갈라 플라키디아에 맞서 요한네스 황제(재위 423~425년)와 동로마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훈족을 불러 들인다.
아이티우스는 일리리쿰 출신으로 , 390년경에 로마 고위장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405~408년 청소년기를 알라리크 1세의 궁전에서 포로로 보냈고, 408~423년에는 훈족의 포로로 지냈다. 호노리우스 황제가 죽음으로써 훈족과의 계약이 끝나고, 그와 더불어 그의 포로 생활도 끝나게 되자 그는 423년 약 서른세 살의 나이에 1만 명의 훈족 병사들을 이끌고 로마의 정치에 개입한다. 그는 군사령관으로서 빠르게 출세했다. 그는 갈라 플라키디아와 화해하고 훈족의 도움을 받아 갈리아에서 봉기를 일으킨 부족들을 정복했다.
아틸라의 훈족은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군사적 수단이 없었다. 초기 훈족의 부대들은 느슨하게 짜여 있었다. 그들은 따로따로 자전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각 부대의 지휘자들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루아 치하에서 훈족은 좀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형성하는 쪽으로 정책이 변화하게 된다. 아틸라는 유목민족인 훈족은 정착민족으로 만들고 통일하려고 했다.
고트족의 전설에 따르면, 훈족은 '악마이지만 친척'이다. 초원지대의 정령들과 고트족 마녀들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아틸라'라는 이름은 고트어로 '아빠'란 뜻이다. 아틸라의 막내아들 이름은 에르나크이다.
고트족 등과 맺은 조약은 그걸 맺은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만 유효했다.
로마의 위임을 받은 고트족은 새로운 왕 왈리아의 지휘 아래 2년 도안 에스파냐에서 반달족, 알라니족과 싸웠다. 왈리아 왕은 418년에 아퀴타니아에 자신의 툴루즈 왕국을 건설할수 있었다. 이것은 로마 땅에 세워진 최초의 게르만 왕국이었다. 왕국에서 다른 민족고의 결혼은 계속 금지되었다. 아마 고트족은 토지재산의 3분의 2가 아니라 거기서 나온 세수입의 3분의 2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림잡아 갈리아 토지의 25%에 이르는 황제의 광대한 농장들(라티푼디움)은 고트족, 정확히 말하면 고트족의 왕들이 인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툴르즈 왕국은로마 제국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서고트족은 곧 에스파냐로 떠난 일부 부족들보다 훨씬 강력하게 로마화 되었다. 서고트족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기여는 451년 카탈라우니아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서고트족의 선구적 업적은 유리크 왕(466~481년)의 이름을 딴『유리크 법전』에서 서고트족의 법을 확립한 것이다. 로마법을 토대로 라틴어로 작성된 이 법전에는 유리크의 아들 알라리크 2세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알라리크 2세가 죽고 그와 함께 툴루즈 왕국도 몰락했다. 서고트족은 피레네 산맥을넘어 에스파냐로 쫒겨났다. 그러나 도시들이 많이 있는 론 강 서쪽의 프랑스 지중해 연안에서는 계속 유지할수 있었다.
406년 가을, 슐레지엔과 슬로바키아에서 훈족과 서고트족에게 밀려난 반달족이 서쪽으로 몰려왔다. 다행히 로마 국경부대와 동맹한 프랑크족은 라인 국경선을 지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고데기젤이 이끄는 반달족 2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알라니족 덕분에 반달족 행렬이 섬멸당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몇 달 후 진짜로 국경은 무너져 버렸다. 406년 12월 31일 밤에 반달족과 수에비족, 그리고 알라니족이 마인츠 부근에서 얼어붙은 라인강을 건너 빙겐에서 젤츠 사이의 로마 국경을 파괴했다.
2년동안 갈리아를 휘젓고 다니며 초토화 시킨후 몇몇은 갈리아 북부에서 프랑크족과 싸우게 되었다. 이때 이들 눈에 들어온 것이 에스파냐 였다. 이당시 에스파냐는 부유했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394년 9월 5일 오늘날의 슬로베니아 지역에서 프랑크족과 '이들의' 황제 아르보가스트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서로마제국의 복수를 했다. 당시 테오도시우스의 동로마 군대는 대부분 훈족과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카탈라우니아 전투에서 훈족 편에서 싸운 민족들은 동고트족 과 튀링겐족,헤룰리족, 스키리족, 그리고 카르파티아 산맥에서온 게르다이족과 루기족, 마르코만니족 등이다.
호노리아가 아틸라의 화를 더 돋우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는 조금 덜 화가 난 채로 카탈라우니아의 전투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아틸라가 자신의 왕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서로마제국 땅에서만 가능했다. 갈리아에서는 글자 그대로 아직도 국가가 만들어질수 있었다. 그에 반해 동로마제국은 훈족과 그 동맹국들이 정복하기는 힘든 상태였다. 게다가 훈족의 왕에게 늘 풍부한 선물을 보내던 북아프리카 반달 왕국의 가이세리크 왕이 강력하게 충동질을 했다. 프랑스의 서고트족과 에스파냐의 수에비족이 그의 대문 앞에서 수상쩍은 행동을 한 것이다.
436년에 로마의 총사령관 아이티우스가 1만 명의 훈족 용병들을 지휘해서 마인츠와 보름스에서 부르군트족을 무차별 학살한다.
사르마티족, 브레톤족은 서로마제구의 아이티우스 편에서 451년 훈족 연합군과 싸운다.
요르다네스에 따르면, 동고트족의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나중에 서고트와 동고트족이 서로 싸우게 된 상황이 강요된 형제살해라고 말했다. 그러나 테오도리쿠스의 발언에는 자신만의 이유가 있었다. 자기 가문인 아말러 왕가의 일원 하나가 차을 던져서 서고트족인 발티 왕조의 테오도리크 1세를 죽였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양 고트족의 왕이을 자임하는 테오도리쿠스로서는 그 행위에 대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후 3시에 시작된 전투는 밤중까지 이어졌다. 아틸라는 군대의 중앙에 자리를 잡앗고 측면에는 동맹군들이 정렬했다. 지형이 워낙 광활하다 보니 양쪽 진영은 결국 산발적으로 흩어져서 싸우게 되었다. 저돌적으로 싸우던 서고트족의 테오도리크 1세가 전사했지만, 아틸라는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는 전투를 포기하고 진지로 돌아갔다. 진지 안에는 통나무를 잔뜩 쌓아놓았는데, 이는 그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될 경우에 스스로를 화형하려는 목적으로 마련해놓은 것이다.
반달족은 유틀란드 반도에서 유래했으며, 킴브리족 및 테우토네스족과 이웃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래서 유틀란드 북부는 오늘날에도 반달족의 거주지를 뜻하는 벤시셀Vendsyssel이라고 불린다. 이들은 100년 경에 구토니족의 남서쪽 오데르 강변에 자리를 잡은 후, 켈트족이 우세하던 부족연합을 게르만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들은 반달족을 프셰보르스키 문화와 연결한다. 반달족은 실링기족-슐렌지엔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왔다-과 '긴머리 부족'이란 뜻의 아스딩기족으로 나뉘엇다. 이들은 3세기에 티소강 상류와 오늘날의 트란실바니아에 머무른 것으로 확인된다.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은 몰다우 강과 모라바 강 유역의 고향을 떠나서 자신들의 이름을 포기했다 이 후로는 도나우 강 남쪽에서든 서유럽에서는 그저 수에비족이라는 이름으로만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이 엄청난 수의 무리는 406년에 마인츠와 보름스 사이에서 라인 강을 거너 살인과 약탈을 일삼으며 갈리아로 이동했다. 409년 가을에 반달족과 알라니족, 그리고 수에비족으로이루어진 부족연합이 에스파냐로 진입했다. 당시 에스파냐는 500여 년 이상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상대적 안정을 누려왔다.
실링기족의 왕과 알라니족의 왕이 로마와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두 민족이 독립을 포기하고 아스딩기족에 합병된다. 이후 사람들은 반달족을 하나의 단위로 거론하게 되었다.
435년에 이곳에서 가이세리크 왕과 라벤나 사이에 최초의 동맹계약이 체결되었다.
로마인들은 이것으로 가이세리크를 마족시키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그건 치명적 오류였다. 439년에 가이세리크는 부유한 속주 아프리카를 기습해서 오래되고 귀중한 수도 카르타고를 점령했다.
수도인 카르타고는 주민수가 10만 명 이상을 헤아렸고,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콘스탄티노플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여긴 도시였다.
대다수의 반달족 사람들은 카르타고 주변 지역에 정착했고, 일부는 체르첼Cherchel과 테베사 부근의 비옥한 평야나 콩스탕틴 주변의 광활한 지역에 정착했다.
반달족과 베르베르족이 동맹을 맺은 반달 왕국은 무적이었다. 베르베르족이 떨어져나가면서 비로소 왕국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100여년 이후에 벌어진다.
440년에는 반달족 군대가 시칠리아에 침입해서 이탈리아를 위협했다.
450년경에 반달 군은 또다시 출정하여 카푸아와 나폴리를 약탈했다. 455년에 가이세리크의 대함대는 로마 근교 테베레 강 하구에 나타났다.
반달족은 여러 해동안 지나치게 자신들의 해군력을 믿고 도시를 지키는 일에는 소홀했을 것이다.
알레마니 족(이 명칭은 훗날 독일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한다.)은 다양한 집단, 그 가운데서도 주로 수에비족 집단에서 나왔다. 참고로 19세기부터 바덴 지방의 슈바벤 사람들은 '알레만인'이라고 불렀는데, 이건 단지 역사를 고려한 것처럼 보이는 현대적인 구분일 뿐이다.
알레마니족은 346년 이후 로마의 군대에서 쫒겨났다.
5세기 중반에 성장한 도나우 강 중류의 수에비 족이 알레마니족 연합에 통합되기 시작했다. 알레마니족 왕 하나hana는 파사우를 접수하고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의 도나우 강변에 위치한 노리쿰 리펜세를 위협했다.
497년경과 그 후 몇 년 동안-약간 과정해서 말한다면-프랑스가 오늘날 도이칠란드 즉, 알레마녜(도이칠란드를 가리키는 프랑스어)라고 불리지 않고, 도이칠란드가 프랑스라고 불리지 않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패배한 알레마니족 프랑크족의 지배를 받았다. 알레마니족이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동고트의 테오도리쿠스가 그들을 위해 개입했기 대문인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전투가 끝난 후 테오토리쿠스는 처남인 클로비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기진맥진한 나머지 알레마니족'이 무사할수 있도록 자신의 보호 아래 받아들였다.
537년경 알레마니아는 프랑크 왕국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프랑크족의 왕의 통제를 받는 귀족계급이 형성되어 영향력이 점점 커졌지만, 746년에는 카롤링거 왕조의 카를 마르텔에 의해 '칸슈타트의 피의 재판'에서 완전히 분쇄된다.
사실 알레마니족은 357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로마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을 때 이미 군대를 거느린 동등한 지위의 왕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처럼 알레마니 족은 5세기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이 여러 명의 군주가 동시에 통치하고 있었다.
부르군트 족(고대 프랑스어를 사용한 민족)의 이름은 브른홀름 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413년 군다하르Gundahar 왕 치하에서 호노리우스 황제의 승인을 얻어 라인 강 중류 지역에 왕국을 건설했다. 그 중심지는 보름스와 스트라스부르, 그리고 슈파이어였다. 그리고 이해에 부르군트족은 갈리아의 왕위 찬탈자 요비누스Jovinus와 결탁해서 갈리아를 공격했고, 그후 갈리아의 일부를 얻었다. 435년에 군다하르는 또다시 자신의 민족을 이끌고 갈리아의 속주 벨기카로 영토를 확자하려 했지만, 로마의 총사령관 아이티우스에게 저지당했다. 436년 2만명의 부르군족이 훈족에게 포위당한 후 학살된다.1만에서 2만 5천명 정도로 추정되는 부르군트족은 443년 아이티우스에 의해 로마의 동맹부족으로서 사부아 지방에 자리 잡게 되었다.남쪽으로는 제네바 호에서부터 북쪽으로는 로잔까지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들은 적이 역습할 경우 알프스의 고갯길을 지켜야 했다.
456년에 부르군트족은 로마의 명을 받아 서고트족과 함께 에스파냐의 수에비족과 싸웠다. 나중에 그들은 갈리아 중심부의 대부분을 점령하여 상다한 지역이 이들에게 속하게 된다. 남쪽으로는 프로방스, 동쪽으로는 제네바 호, 서쪽과 북쪽은 손 강이 꼭짓점 이었다. 왕과 섭정은 리용과 제네바에 거주했다. 그리고 워주민들의 로망어(후대의 프랑스어)를 받아들였다.
5세기 후반의 25년 동안이 힐페리히Chilperich 1세와 군도바트(Gundobad, 재위 474~516년) 왕 치하에서 이들의 궈력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군도바트 왕은 아들 지기스문트Sigismund는 동고트의 테오토리쿠스의 딸과 결혼햇고, 기독교도인 그의 질녀 클로틸드는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와 결혼했다.
532년에 부르군트족은 오튕 부근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프랑크족에게 항복하게 된다.
사실「니벨룽겐의 노래」의 니벨룽겐족에게 이름을 준 기비쿵겐Gibikungen 왕가는 이미 400년경에 몰락했었고 또다른 작품「디트리히 전설」에서는 서로 다른 시대에 산 세 명의 위대한 인물들, 즉 동고트 왕 에르마나리크(375년 사망)와 훈족의 왕 에첼(아틸라, 453년 사망), 그리고 디트리히 폰 베른(테오도리쿠스 대왕, 526년 사망)이 같은 시기에 등장한다.
4세기 후반과 5세기의 튀링겐 족과 로마 제정기의 흐문두리족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앵글족과 바르니족이 튀링겐족의 형성에 참여했을 수도 있다.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왕 비신Bisin은 아들이 셋 있었는데, 그가 죽은 후 이들이 왕국을 나누어가졌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헤르미나프리트Herminafrid 왕에게 자신의 질녀 아말라베르가Amalaberga를 시집보냄으로써 호의를 표시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헤르미나프리트가 프랑크족의 침입을 막게 한 것이다. 비신의 딸 라네군다는 영향력 있고 추진력 넘치는 롬바르드족의 왕 와코(Wacho, 재위 510~540)의 첫 번째 왕비가 되었다.
526년에 튀링겐족의 수호신 역할을 한 테오도리쿠스 대왕이 죽자 프랑크족은 튀링겐족 왕들의 경쟁심을 이용했고,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괴롭혔다. 531년에 튀링겐족은 프랑크족과의 혈전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헤르미나프리트는 3년을 더 버텼고, 그 후에야 튀링겐 왕국이 무너졌다.
헤르미나프리트 왕이 전사하자 왕비인 아말라베르가는 고향인 동고트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그녀는 라베나에서 동로마의 총사령관 벨리사리우스에게 붙잡혀 비잔틴 제국으로 보내졌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녀를 알보인Alboin 왕의 아버지인 롬바르드 왕 아우도인Audoin에게 두 번째 아내로 주었다.
프랑크족은 튀링겐족을 왕국을 동쪽 끝부분에서 살게 놔두었다.
하지만 717년경에 카를 마르텔이 프랑크 왕국을 재건하면서 튀링겐족의 독립도 끝나게 되었다.
바이에른 족은 요르다네스에 의해 551년에 '바이바로스baibaros'라고 처음으로 언급되고, 그 후 565년에 푸아티에의 주교인 베난티우스 포르투나투스에 의해 '바이오바리baiovarii'로 나온다.
'바이오바리'란 명칭은 '바이아Baia 땅 출신의 사람들', 즉 보헤미아 출신의 사람들이란 뜻인 듯하다.
남부 바이에른 지방은 536년까지 동고트 왕국의 영향권에 속했다. 알레마니족도다수가 클로비스 왕을 피해 그곳으로 왔다.
메로빙거 왕조의 테오데베르트(Theudebert, 재위 534~548년)는 바이에른의 통치자 였다.
6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바이에른족 대공가문 아길로핑거Agilofinger가 상다한 권력을 발전시켰다. 이들은 레겐스부르크에 있는 자신들의 영지에서 집중적으로 이주정책과 선교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 나라도 788년에 샤를마뉴가 아길로핑거가의 마지막 대공 타시로Tassilo를 폐위시키고, 가족과 함께 바이에른에서 추방시킴으로써 무너진다.
바이에른족이 '독일인'이라고 간주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여러 조건에서도 서로마 제국이 100년 가까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어쩌면 로마가 이 짧은 유예 기간을얻게 된 것은 훈족 덕택일지도 모른다.
게르만 민족들이 수적인 우세를토대로 서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파괴했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약 10만 명의 서고트족이, 그 중에서도 2만 명에 불과한 병사들이, 어떻게 75만 제곱킬로미터의 영토와 1천만 명의 주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었겠는가? 약 1200만명의 인구를 헤아리는 이탈리아에 동고트의 병사들은 겨우 2만 명뿐이었으며, 북아프리카에 들어간 반달족 병사들은 단 1만 5천 명이었다.
5세기 이탈리아 원로원 세 명이 서로마 재정 전체에 맞먹는 수입을 가지고 있었다.
아틸라 몰락 이후 동고트족들은 로마의 동맹부족으로 사방 강과 드라바 강 유역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이웃 민족들에게 둘러 사인 채 콘스탄티노플에서 오는 원조에 의존했다.
테오도리쿠스는 아말러 가문 출신의 테오데미르Theodemir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 소년은 동맹계약을 보증하기 위한 포로의 신분으로 비잔틴 제국의 궁정으로 보내져서 그곳에서 10년을 보냈다. 자극적이면서도 영감을 주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대도시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테오도리쿠스는 그리스-로마 문화에 매우 정통 하게 되었다. 그는 글을 쓸 줄 몰랐다고 전해졌지만, 이런 비난은 오래전에 근거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교욱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은 단지 수사학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의 옥새는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고, 이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기 의헤 제노 황제에게 어도아케르를 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제노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제노 황제는 테오도리쿠스를 양자로 삼고 동로마의 집정관으로 임명했다. 제노와 테오도리쿠스가 체결한 계약에 따르면, 테오도리쿠스는 "오도아케르를 정복한 후 그의 노력의 대가로 황제가 그곳(이탈리아)으로 올 때가지 황제를 대신하여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뒤이은 동고트족의 침입은 군대 행렬이라기보다는 민족의 이동에 가까웠다. 약 10만 명이 움직였는데, 그 가운데 병사는 2만 명이었다. 489년에 서른여덟 살의 테오도리쿠스와 거의 환갑이 다 된 오도아케르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테오도리쿠스는 493년에야 비로소 서로마의 라벤나를 접수하는 데 성공한다. 그것도 군사적 수단보다는 외교적 수단을 이용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 내부 및 외부의 게르만 군주들과의 평화로운 동맹 체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유는 바로 프랑크족의 팽창정책 때문이었다.
506년에 테오도리쿠스는 크로비스 왕에 의해 궁지에 물리게 된 알레마니족의 일부를 자기 나라에 받아들여 콘스탄츠 호수의 남쪽과 북동부 이탈리아, 그리고 오늘날의 슬로베니아에 살게 했다. 서고트 왕국이 메로빙거 왕조에 빼앗긴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이주가 늘어났다.
비잔틴 제국은 이탈리아에 있는 야만족 왕국의 존재를 결코 현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동고트족과 그들의 왕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단지 전설에서 아멜룽 왕국으로만 남게 된다.
584년 왕국이 튼튼하게 자리 잡게 되면서 롬바르드족 국가가 세 개로 나누어지는 토대가 마련되었다.즉 포 평원과 토스카나느 파비아를 수도로 하는 왕국을 이루었고, 스폴레토와 베네벤토는 왕과 다름없는 영주인 '두체duce'가 통치했다. 8세기 후반에 롬바르드의 마지막 두왕 아이스툴프(Aistulf, 재위 749~757년)와 데시데리우스(Desiderius, 재위 757~774년)는 로마와 프랑크족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수에비족은 에스파냐 북서쪽에 있고 530년경에는 서고트 왕국의 존립은 안정되었다. 586년 비로소 그들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된다. 두 명의 중요한 왕인 레오비길드(Leovigid, 재위 568~586년) 와 그의 아들 레카레드 1세(Reccared, 재위 586~601년 치하에서 에스파냐는 기독교-고대 문화의 후기 전성기를 맞이했다. 로마식으로 '톨레툼'이라고 불린 톨레도가 수도가 되었다. 인구가 적은 내륙에 있던 톨레도는 고대 메트로폴리스라기보다는 왕성이었다.
레오비길드는 자신의 민족은 아리우스교로 통일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레오비길드의 어려움은 그의 큰아들 헤르메네길드Hermenegild에 이득이 되었다. 그는 579년에 메로빙거 가문의 인군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열성적인 로마 가톨릭교도 였고, 헤르메네길드느 그녀를 따라 아버지와 대립했다. 궁정을 떠나야 했던 헤르메네길드는 아버지에 대응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과 프랑크족, 그리고 수에비족과 동맹을 맺었다. 세비야에서 그느 스스로 왕이라 선언하고, 고유의 화페를 주고하기 시작했다. 세비야 외에도 코르도바와 메리다 같은 부유한 도시들이 그의 통치지역에 속했다. 그러나 헤르메네길드에 의해 맺어진 동맹은 막강한 레오비길드에 맞서 유지될 만큼 강력하고 단호하지 못했다. 부자간의 신앙 및 권력 다툼이 발생한 지 5년 후 레오비길드가 세비야를 접수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났다. 서고트족은 수에비족의 왕국까지 없애버렸다. 헤르메네길드는 모든 지위를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는 585년에 타라고나에서 살해당했는데, 자세한 정황과 배후 주종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인군트와 그녀의 아들은 비잔틴 제국으로 망명했다. 573년에는 레오비길드가 자신이 머무르면서 왕국을 통치할 도시를 만들기 위해 톨레도 북동쪽에 레코폴리스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는 바로 자기 아들인 레카레드를 위한 도시라는 뜻이다. 그깨까지만 해도 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황제의 특권이었다.
레오비길드는 자신의 아들들을 공동 통치자로 책봉함으로써 왕위 계승을 안정시키고 왕조를 건설했다. 이는 서고트 왕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앞을 내다보는 조처로, 두 아들들이 곧바로 아버지의 뒤를 이을수 있게 한 것이다. 자신의 초상화를 새긴 금화를 주조한 것도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레오비길드의 법률 개정도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변화된 사회관계를 바탕으로 법률을 개정했다. 고트족과 로마인들은 서로 동등한 지위가 되고 두 문화가 융합되었다. 그러니 두 민족 간의 혼인금지법을 없애는 것보다 더 시급한 일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이 시점부터 왕국의 모든 주민은 서로 결혼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던 테오도리쿠스의 동고트 왕국에서는 민족 간의 결혼이 이론적으로는 허용되지 않았다.
서고트의 군대는 카타라우니아 전투 당시 강력한 적수가 될 있었던 전투력을 이미 상실한 지 오래였다. 군대는 전통적으로 귀족 기병대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들은 매우 변덕스러워서, 자기 일에 크게 이익이 되면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이익이 적으면 그 반대로 행동했다. 귀족 지휘자 밑에는 주로 노예들이 있었는데, 금전적인 이유 때문에 기병이 아니라 가볍게 무장한 보병들로 구성되었다. 고트족 군대의 질은 서고트족의 문화적 상승과 발맞추지 못했다.
수인틸라(Suintila, 재위 621~631년): 서고트의 왕
672~682년에 아라비아의 해적들은 이미 에스파냐 해안에 출몰하여 수많은 도시들을 공격하고 약탈했다. 그러나 서고트의 귀족들은 709년까지도 아라비아인들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지언정 서고트 왕국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었다.
711년 여름 타리크Tarik 사령관의 지휘 아래 휼륭하게 조직된 원정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항해를 시작했다. 이때 서고트족은 왕권 다툼이 한창이었다. 1년전에 선출된 로데리크Roderic는 왕위를 요구하는 경쟁 가문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두 가문은 결국 무어족 군대와 전투를 하기 위해 화해 했으나, 711년 7월 23일에 헤레스데라프론테라에서 적에게 굴복했다.
'고도godo'(고트)라는 명칭은 순수한 혈통의 에스파냐 귀족을 가리키며 '옐모yelmo'는 투구(고트어로 hilm)를, 그리고 '자봉jabo'n'은 비누(고트어로 sapom)를 뜻한다. 오늘날의 수맣은 인명들이 서고트어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로드리고와 알폰소, 페르난도, 엘비라 등이 이에 해당한다. 에스파냐어는 옛 히스파니아 지방에서 쓰이던 라틴어 구어에서 발전된 것이다.
기원전 55년과 54년에 카이사르는 켈트족에 속하는 브리튼족과 대륙의 갈리아인 사이의 연대를 끊어버리기 위해 브리타니아로 최초의 돌격을 감행했다.
경찰용 국경선으로 시작된 리메스 장벼과 비교해볼 때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군사용 국경선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높이도 더 높았고 모든 방향으로 더 강력하게 안정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교적 짧은 구간에만 안전조치를 하면 된다는 이점도 있었다.(리메스가 548km에 비하여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120km)
스콧족은 5~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일랜드 북쪽에서 스코틀랜드로 왔다.
콜체스터와 윈체스터, 그리고 레스터와 같은 스터가 뒤에 붙은 지명에는라틴어 단어 카스트룸(요새, 성)이 들어 있다.
켈트부족의 영주들은 그들의 부족들을 관리하기 위해 로마의 시민으로 임명되었다. 원주민에게 부과된 10%의 세금은 견딜 만 한 것이었다. 앵글로 색슨족 부대들은 로마 군대에서 대단히 환영받았다.
베네라빌리스가 쓴 『앵글족의 교회사』에 442년경 앵글족과 색슨족은 보르티게른 왕의 초대를 받아 브리타니아로 와서 이 왕의 명령으로 섬의 동부에 정착했다고 나온다.
로마 제국이 끝나기 훨씬 전에 이미 영국해협의 양쪽 지역은 (성벽을 쌓은) 색슨 해안'이라고 불렀다. 색슨족 해적들을 막기 위해 브리타니아 동쪽과 갈리아 북쪽에 리투스 삭소니쿰이라는 군사적 국경선이 만들어 진것이다. 서고트족과 남프랑스 루아르 강과 가론 강 하구에 진지를 구축한 색슨족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이미 4세기에 색슨족 집단의 이주가 시작된 것이 확실하다.
6세기 초에 브리튼족은 유명한 몬스바도니쿠스 전투에서 앵글로 색슨족에게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후대에 가서는 이 전투가 아서 왕 전설과 결합해서 아서 왕이 앵글로색슨족 이교도들과 영광스러운 투쟁을 하는 영웅으로 그려지고 있다.
서식스와 에식스, 그리고 웨식스는 각각 남색슨, 동색슨, 서색슨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개인들은 그들의 주인, 또는 글자 그대로 '빵의 수호자'(hlaf는 '빵', weard는 '보호자'를 뜻함)인 '라포드hlaford'(고대 영어로 'Lord'(반지의 제왕 아시죠?)에게 자신을 맡겼다.
서색슨 왕국의(즉 웨식스) 엘프레드 대왕(재위 871~899)이 878년에 덴마크의 바이킹들을 에딩턴에서 물리친 후 섬 전체를 다스리는 최초의 전제군주가 되었다.
머시어는 잉글랜드의 중간에 있고, 웨식스는 남쪽에 서섹스는 그 오른쪽에 밑 즉 잉글랜드의 남쪽끝에서 야간 동쪽에 있고 에식스는 동남쪽에 있다. 에식스의 위는 이스트앵글로 아래는 켄트가 있다.
위트레흐트(695년 설립), 에히터나흐(698년), 프륌(721년), 호른바흐(740년), 뷔르츠부르크(741년), 라이헤나우 섬(724년) 처럼 중요한 수도원들 가운데 많은 수가 군사적으로 불안정한 변방지역에 있었다.
아이티우스가 440년에 아라스에서 프랑크족 군대를 물리친 후 잘리족 프랑크 왕 클로디오와 동맹을 맺고 그에게 투르네 주변 지역을 맡긴다.
갈리아에 남아 있던 로마 제국의 최후의 잔재였던, 랭스와 캉브레 부근의 소위 시아그리우스Syagrius 왕국은 486년 제거된다.
힐데리히는 집권 초에 수많은 평민 출신의 소녀들과 관계를 맺는 바람에 권력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튀링겐족의 왕에게 도망쳤는데, 튀링겐의 왕비 바시나가 그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고 그를 따라갔다. 이 사이에서 클로비스가 태어났다.
클로비스는 라인프랑크족의 왕 지기베르트Sigibert의 아들 클로데리크Chloderic를 부추겨 지기베르트를 살해하도록 했다. 그런 뒤에 클로데리크도 죽여보렸다.
496년에 알레마니족을 굴복시킨 후 클로비스는 부르군트족을 정복하려 했지만, 그들은 너무 강했다. 그래서 서고트족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테오도리쿠스 대왕은 클로비스가 지중해로 가는 길을 차단했다.
11세기까지도 트리어 부근 지역에서는 주로 로망어(고대 프랑스어)가 사용되었다.
고트라는 말은 여저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예를 들면 카라니라 제도 주민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본토 에스파냐인들을 아직도 고트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가들이 알프스 북쪽의 보기 흉한 성당 건축 양식을 보고 바로 전 시대의 건축가들을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려는 의도에서 고딕 양식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고딕이라는 개념은 18세기 말경 영국 문학에 등장한 '고딕 소설'에서 '무섭고 아름답고 낭만적'이라는 특징을 얻게 된다. 고딕 소설은무시무시한 이야기들로 독자들에게 기분 좋은 공포를 느끼게 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마리 셸리의『프랑켄슈타인』이다. '고트적인 것'의 의미가 긍정적으로 변화된 것은 독일 낭만주의자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도안 고트족은 문화 적대성이나 야만성과 동의어로 여겨져야 했다. 이런 상황은 18세기 말에 이 불행하고 부당한 꼬리표를 반달족에게 넘겨주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반달리즘이란 개념은 1794년 블루아의 주교 그레구아르에 만들어졌다.
고트어는 16세기 경에 크림 반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난 젋은 사람들이 공공도서관에서 주간잡지, 영화잡지, 신문을 애용하는 것을 흐뭇하게 본다. 이것은 공화국, 민국에 현대에 굴복한 것이 아니다. 난 이들이 반항심 보다는 책을 읽기 바란다. 그리고 이들 청년이 이곳에서 로망스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도 한다. 그러니까 퀸카 여성이 도서관에 출몰하여 이 청년들 근처에 앉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