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서로 사맛디 아니하다. 소통이 안된다는 말이겠지?
아니 뭔가 쌈박하지 않다는 이야기겠지?
세종의 걱정은 나랏말인즉 한국어와 중국어가 사맛디 아니하다는 것이렷다.
근데..같은 나랏말을 사용하는 데도 사맛디 아니한 것은 무슨 연유일까?
흔히 그것은 언어 때문이 아니라 그 단어의 <정의>때문이라고
제법 기특한 타협책을 내놓기도 하지만...그럴까? (고거이는 먹물 너네들 이야기고...)
단어의 정의? 합의?
일견 맞는 말이지만 道의 입장에선 ..젠장..또 합의봐야 하나..짜증날 뿐이고..
道의 입장이란 "이미 합의봤다 치고.." 진도나가는 것이렷다.
뭐 또 회의하고 연구하고 합의보고 합의본 자들끼리 상위 클라스 이너서클 먹고..이딴 짓 안한다.
각설하고..
인간은 언어다.
나는 이 말에 깊히, 심각하게, 진지하게 동의하는데..
아마 제법 道깨나 했다는 사람들은 또 내 동의에 깊히.진지하게,심각하게 우려할 것이렷다.
왜?
그노무 언어를 넘어서려고 입 꾹 처닫고 가부좌 튼지 어언 몇십성상인데...
한숨 나오는 소리. 거의 비명수준으로 내 귀엔 들린다..그러나 마나..인간은 언어다.
인간은 언어다..그러나 끝까지 들어라.
언어란 소통이다..그래서 인간은 소통이다.
道 역시 소통이다..길이란 소통을 의미한다.
사맛디 않다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선 道가 통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도통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어의 정의 때문이라구?
아니다.결론치면..
전제의 부분에서 일치가 되지 않아서이다.
단어의 정의를 따진다면 이미 전제의 일치에서 어긋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끝난 것이고 따져봤자 소용없고 따진다는 것이 이미 글러먹은 것이다.)
1 + 1 => 2
이거 안된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사맛디 않다. 합의보려는 수작이지만 1 + 1 에서 이미 글러먹은 것.
2 => 1 + 1
이래야 된다..정의 안해도 된다. 달라도 된다. 심지어는 몰라도 된다.
다투어도 된다. 멀어져도 된다. 왜? 이미 전제에서 일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그냥 언어가 아니다.
언어 이전에 전제가 깔려있다.
(조심하라, 단어의 정의가 일치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언어 그 자체에는 <왜?>라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언어를 사용하는 순간에 전제가 깔려버리기 때문이다.
당신이 여기서 글을 쓰는 순간에..
그 글 내용에 관계없이 90%의 언어가 이미 깔려있는 것이다.
거기서 일치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전제의 일치에 비하면 글 내용은 사실 작은 것이다.
여기서 전제의 일치란 흔히 <비언어>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비언어에서 이미 소통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안되어 있으니..결국 사맛디 않게 되는 것이다.
첨부터 사맛디 않았던 것이다.
말하지 말라..가 아니라
말하기 전에..이 비언어, 즉 전제부터 깨끗히 하라는 것.
목욕재계하고 언어를 사용하라는 것.
인간은 언어다.
그러나 듣는 자는 그 언어의 90%인 비언어를 듣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비언어다.
책을 볼 때 그렇게 보라. 비언어를 보라..
그 전제를 보라~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는 것은 비언어를 본다는 뜻이다.
이해..라는 것은, 글의 이해라는 것은..
단어의 정의..에서 합의점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 전제의 일치감을 <재확인>하여 환해지는 것이다.
빠이~
첫댓글 수정.
2 => 1+1
이거 영 모양이 아니다.
1 => 1/2 + 1/2 로 수정함.
하나의 단어는 수백 갤런의 피를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