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미리보기 맛보기
2018. 6. 금계
3. 철마로(鐵馬路) 주변
오늘이 6월 21일, 하지. 하지의 의미도 사는 곳에 따라 다르다.
인도네시아 발리에 갔더니 거기는 적도 바로 아래라 일 년 내내 밤과 낮의 길이가 비슷해서 해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자고 하지라 해서 특별한 의미가 없단다. 노르웨이에 갔더니 하지 날에는 거의 해가 지지 않았다. 춥고 어두운 동지가 힘들었던 거기 사람들한테는 하지가 가장 고맙고 기쁜 날이라 떠들썩하게 축제를 벌인단다.
금방 더워지니까 꼭두새벽에 출발하는 게 바람직하지만 마나님과 탁구를 치다 보니 빨리 나올 수가 없다. 마나님더러 집 앞에서 사진을 찍어주라 했더니,
“누가 보면 자전거 선수인 줄 알겠소.”
“흐흐흐.......”
물론 전문적인 선수는 아니지만 고등학생 때는 아버지 미곡상 돕는다고 짐바리자전거에다 80kg 쌀 한 가마를 싣고 배달도 다녔고, 평생을 자동차 핸들 한 번 잡지 않고 걷거나 자전거만 타고 다녔으니 자전거라면 자신 있다.
집 앞 길 건너 밭가에 무궁화가 예쁘게 피어났다. 무궁화도 여러 가지이지만 나는 저 모양 저 빛깔을 각별히 좋아한다.
옛날에는 목포에서 서울까지 가장 빠르다는 ‘태극호’ 특급열차를 타도 일곱 여덟 시간이나 걸렸는데 요즘은 KTX로 두 시간 반 걸린다. KTX가 생기면서 목포 시가지를 관통하던 철로는 걷어내고 다른 곳으로 굴을 파서 땅속으로 다닌다. 시에서는 철로를 뜯어낸 폐선부지에 산책로와 자전거도로를 개설했다. 왼쪽 밝은 색이 자전거도로, 오른쪽 어두운 색이 보행로. 3 - 4 km나 될까, 여러 해에 걸쳐 목포역에서 임성역 언저리까지 산책로 공사를 완공한 시청은 그 길에다 ‘웰빙공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국어교사를 했던 탓인지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왜 우리 땅에다가 버터를 발라서 꼬부랑거리는가. 나는 혼자 쓰는 말로 그 산책로에다가 ‘철마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길은 철마가 달리던 길이니까 철마로여, 철마로!
지난겨울 목포대학교 송림캠퍼스 운동장 눈 덮인 사진. 우리 집에서 10여 미터 올라가 철마로를 건너면 바로 송림캠퍼스다.
목포대학교가 청계로 이전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송림캠퍼스는 학생과 교수를 잃고 휑뎅그렁하다. 목포 출신 정의당 국회의원이 의과대학이 없는 곳은 전라남도뿐이라고, 4만 평이 넘는 송림캠퍼스가 의대를 짓기는 최적지라고 아무리 외쳐 봐도 이곳에 의대 정원을 가져오기는 상당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송림캠퍼스 오른쪽에 부설초등학교가 있다. 정식 명칭은 꽤나 길다. 광주교육대학 목포부설초등학교.
이름이 길면 외우기 어렵다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 어릴 적 나주 우리 동네 골목에는 허름한 교회가 있었는데 이름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였다. 외우기 꽤 어려웠을 법한데 뜻밖에도 한번 머릿속에 입력하고 나서는 평생 잊히지 않았다.
우리 세 아들은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부설초등학교를 두고도 연거푸 추첨에 떨어져 먼 이로초등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다른 곳보다 분위기가 민주적이고 창의적이고 유연하여 우리 아들들 못 다닌 것이 더더욱 애석했다.
수십 년 동안 목포의 막걸리 주당들한테 변함없이 봉사해온 막걸리 술도가.
40년이 넘었을까. 아직도 떠나지 않은 두 세대인가를 제외하고는 폐가처럼 방치된 흉물스러운 아파트. 어떻게든 재건축에 들어가야 할 텐데.......
예전에 철도 건널목이 있던 곳. 이제는 신호등이 설치되고 보행자들의 건널목이 되었다. 도심지에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철
도 건널목이 사라진 것은 무척 다행스런 일이다.
주택공사의 재건축 아파트 인스빌. 저기도 옛날에는 스산한 서민아파트였는데 깔끔하게 새로 단장했다.
아파트 앞의 밝게 빛나는 건물이 이로초등학교. 우리 마나님과 우리 세 아들이 저 학교를 졸업했다. 마나님과 세 아들은 초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이로초등학교에서 조금 더 간 곳에 목포시립의료원. 저 병원은 특히 형편이 어려운 시민들을 위하여 꾸준히 봉사해 왔다.
지금 저기 원장은 외과의사인 최 박사님이시다 시립의료원 노조와 경영진의 사이가 아주 원만하다고 한다. 나는 시민운동 원로모임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최 박사님을 뵙는다.
목포대 송림캠퍼스 뒤쪽의 양을산 (126m). 삼림욕장도 있고 운동시설도 갖추어져 있고 둘레 길도 여러 군데 잘 마련되어 있다. 새벽이면 우리 집 앞 도로로 송림캠퍼스를 거쳐 양을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이 끊이지 않는다. 나는 허리가 부실하여 잘 올라가지 않는다.
역시 양을산 자락에 터를 잡은 목포과학대. 같은 재단에서 운영하는 목포여자상업고등학교와 영화중학교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이 학교들은 나름대로 목포 교육 발전에 꾸준히 기여해 왔다.
철마로 바로 곁에 꽤 넓은 공터. 여기에서는 시청의 지원으로 공휴일을 제외하고 날마다 밤 여덟 시부터 아홉 시까지 에어로빅 교실을 운영한다. 강사가 열성적이어서 인기가 높아 입소문을 타고 장소가 비좁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린단다.
우리 마나님도 몇 년 동안 열심히 여기에 다니며 땀을 뺐다. 덕분에 건강도 유지하고 동작도 많이 유연해졌다.
철마로에서 살짝 떨어진 영흥중고등학교. 마침 등교시간인가 보다. 예전에는 남학생들만 다녔는데 언제부터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는지 여학생들이 눈에 띈다.
철마로에서 길 건너 올려다 보이는 목포한국병원. 목포권역(신안, 무안, 영암, 해남, 완도, 진도)의료 응급센터로 지정. 헬리콥터 상시 대기.
작년 5월에 나는 저 병원 심장내과에서 관상동맥에 스텐트 한 개를 끼워 넣는 시술을 받았다. 저 병원에 들어가면 무슨 과 무슨 과 진찰실 앞 대기실마다 빽빽하게 앉아 있는 환자들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진다. 모르면 몰라도 하루에 드나드는 환자들이 천 명은 넘을 것 같다.
한국병원 왼쪽에 대형 건물 상리교회. 목포에는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이 많은가 보다. 철마로를 걷다 보면 열 걸음, 스무 걸음에 하나씩 교회가 보인다.
아침 햇볕이니 괜찮을 법도 한데 그도 싫어서일까. 아주머니 두 분이 가리개를 히잡처럼 둘러쓰고 철마로를 걷는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목포버스공용정류장. 전라도 일원은 물론이려니와 서울 강릉 부산, 전국 방방곡곡 안 다니는 곳이 없다.
버스 정류장에는 금호고속 버스가 대부분이다. 금호고속은 전라남도의 주요 노선을 독점하였지만 역설적이게도 하늘로 진출하여 대한항공의 독점을 깨뜨렸다.
철마로에 버티고 서 있는 표지판 - 웰빙공원 이용자 준수사항
치매 예방 겸해서 아무리 외워보려 해도 꼭 한두 가지씩 까먹는다.
준수사항의 말씨도 좀 고쳤으면 좋을 듯. 예를 들면 “금연 금주 공원입니다.‘는 ’흡연 음주 조심‘ 이 정도면 다 알아먹으면서도 부드럽지 않을까.
우리예닮교회 - 한글식 제목이 마음에 든다. 예수를 닮는다는 뜻이렷다.
목포 어느 중학교 제자 이름이 태멘이었다.
“니 이름은 왜 태멘이데?”
“예, 아버지께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아멘.’에서 첫 자와 끝 자를 따서 지었대요.”
철마로 주변 자투리땅의 채마전. 직접 텃밭을 가꾸므로 농사에 관심이 많은 우리 마나님은 언젠가 이 길을 걷다가 감탄했다.
“오메, 농사를 잘도 지었소, 잉!”
자동차 타는 사람 눈에는 자동차만 보이고, 자전거 애호가 눈에는 자전거만 보인다.
멀찍이 맥도날드 가게가 보인다. 노르웨이 제2도시 베르겐에 갔더니 가이드가 화장실 급하면 맥도날드 가게로 가라고 귀띔해주었다. 아무것도 사먹지 않고 힐끔힐끔 눈치 보면서 화장실로 들어가는 우리를 보고도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국 어떤 평범한 아저씨가 저 노란색 마크로 맥도날드 가게를 차려서 떼돈을 벌었다던가. 나는 아직 맥도날드 빵을 한 번도 사먹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 입맛에는 쌀밥에 된장국이 제격이다.
철마로에서 개울 하나 건너 중장비교습소에서 강의를 듣는 사람들. 큰일 났다. 목포는 조선소가 찌그러지는 바람에 실직자가 늘고 경기가 바닥을 치고 있다. 저들도 다 한 집안의 가장들일 텐디, 얼릉얼릉 일자리를 찾아야 할 텐디.......
여기는 하당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빠져드는 삼향천의 상류쯤 되는 곳. 이쯤에서 철마로가 끝난다. 왼쪽이 무화과나무. 한 달쯤 지나면 무화과 수확이 시작될 것이다.
임성 역이 저만큼 떨어진 곳에서 철마로가 끝난다. 때마침 서울 가는 고속열차가 굴에서 빠져나와 쏜살같이 임성 역 쪽으로 내뺀다.
예전에는 목포에서 서울 가는 초특급 태극호가 일곱 여덟 시간 걸렸다. 지금은 두 시간 반. 참 세월 좋아졌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돌아오는 길에 청호시장에 들른다. 수산물이 가장 많이 눈에 띈다. 하당신도심에서 유일하게 큰 시장이다.
예쁜 줄무늬를 자랑하는 돌돔이 수족관 안에서 노닥거린다.
인생이 참 덧없고 부질없어라. 엄마 손 잡고 아장아장 걷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70년이 비까번쩍 지나가서 하릴없이 구부정한 허리로 철마로나 걷고 있다니. 그러나 천천히 돌이켜보면 참 까마득하게도 긴 세월을 살았다.
버스공용정류장 언저리 철마로에 부부가 아이들 보듬고 있는 조각상이 참 다정해보인다. 6.25전쟁 전후로는 아이들 태어나면 하늘이 다 알아서 먹을 것까지 챙겨주신다고 믿었던지 보통 한 집에 자녀가 일곱 여덟 명이었다. 우리 집도 7남매였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불어나자 부랴부랴 정부에서는 가족계획으로 ‘잘 키운 한 아이 열 아들 안 부럽다’고 수선을 떨었다. 나는 아들만 셋이었는데 둘까지는 면제고 셋째는 주민세를 물렸다. 주민세가 몇 푼이나 될까마는 그게 참 고깝고 서운했다.
또 세월이 흐르자 이제는 아이들이 모자라다고, 많이 낳으라고, 낳을 때마다 출산장려금을 주겠다고 호들갑이다.
세월은 요지경 속이다. 시간은 둔갑술을 부린다. 영원히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시간이 변덕을 부리면 가족의 구성원 수효까지 줄었다 늘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그 많은 자식들 먹이고 입히느라 부모님 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을까마는 나는 칠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것이 무척 고맙고 행복하다. 형제간이 하나 둘인 집안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이 사회의 기초 단위는 가족이다. 이 세계의 모든 가정이 먹을 것, 입을 것 걱정하지 않고 오순도순 행복하게 지내기를 가만히 빌어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