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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채승병님은 예전 하이텔 밀동 2차대전 방에서 활약하던 분들 중 한 명이었지요.
물론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찌 광신도들의 집합소라는 말도 들었던 곳이었습니다.
롬멜이 북아프리카에 벌인 일련의 전투들을 평가하자면, 한마디로 "wag the dog"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꼬리가 몸통을 뒤흔들고 설쳤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경우에는 대전 직후에 나온 승자로서의 여유가 담긴 서방의 평가가 수용된 이후 새로운 세계 전사학계의 평가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롬멜에 대한 평가가 맹신에 가까울 정도로 우호적이었습니다만,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투는 이미 2차대전사 학계에서는 낭만은 있었지만 무모한 모험주의적인 월권행위였다는 냉혹한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당장 오늘날 독일연방군의 공간전사인 "Das Deutsche Reich und der Zweite Weltkrieg"의 북아프리카 전선 관련 내용만 보더라도 여러 당대의 독일 지휘관들 입을 빌려가면서 롬멜에 대해 냉혹한 평가로 일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롬멜에 대한 비판은 전쟁을 치뤄보지도 않은 채 책상머리에서 펜대 굴리는 사람들에 의해 비롯된게 아니라 당시 롬멜과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독일군 장병들을 지휘했던 숱한 상하급의 지휘관들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 롬멜의 무모한 명령 - 중화기 지원없이 토브룩 요새에 대한 보병 전면공격을 계속 독전한 것 - 에 의해 자기 부하들이 무참히 죽어가는 것을 보고 현장 지휘관들부터 롬멜을 성토해댔습니다. 독일군 공간전사에서 인용하고 있는 예만 들어봐도,
제 1 차 토브룩 공격이 과도한 사상자를 내면서 실패한 이후 제 5 경사단장 슈트라이히 소장은 너무 소극적으로 나섰다는 질책을 받고 롬멜에 의해 면직되었는데 그 때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롬멜 왈, "자네는 자네 부대들의 안녕에만 너무 치중했네!" 그러자 슈트라이히가 일갈을 날립니다: "저는 한 사단장으로서 그 이상의 찬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제 5 경사단 예하 지휘관이었던 키르히하임 소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난 그 시절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때 우리는 불필요하게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왜 롬멜에 대해 비판을 큰 목소리로 하지 않았었던가에 대해도 언급을 하고 있지요:
"롬멜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 생각으로 그건 선전의 덕이었다. 처음에는 괴벨스에 의해, 그 다음에는 몽고메리에 의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독살된 이후에 모든 과거의 적 세력들에 의해 그는 최고의 군사전통의 표상이 되었다. 그의 리더쉽의 자질은 미화되었으며, 그것은 그의 성격, 특히나 기사도정신, 덕성, 겸손함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이러한 전설적인 인간적 매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면 독일 병사로서 가슴 속에 고이 품고 있는 존경심에 상처를 줄 것이었다."
롬멜이 부하들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예하 지휘관들이 보기에는 터무니 없는 명령으로 과도한 희생을 강요했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지휘의 대상이 규율이 잘 잡히고 하급장교들의 통제력이 잘 갖춰진 독일군이었으니 망정이었지, 지휘계통과 장교-사병간 유대감이 문란한 군대였다면 오히려 진작에 조직이 붕괴되었을만큼 위험천만한 순간들이 북아프리카 전선 전사 속에는 많이 숨어있습니다. 게다가 롬멜의 휘하에서 참모장교를 지냈던 이들 또한 모두 롬멜에 대해서는 독일이 가지고 있는 정통적인 지휘통수체계를 무시하고 내멋대로식 지휘로 참모들을 매우 까다롭게 만든 것으로 악평이 또 자자했습니다. 군단장 이상의 고급지휘관이라면 항상 예하 참모들 및 휘하 사단장 예하 부대장들과 유기적으로 지휘통제선을 확보하고 항상 명쾌한 임무를 부여하고 신뢰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롬멜은 수시로 소수의 부하들만 대동한채 전선으로 나가서는 행방불명이 되어버려서 참모장교들이 그의 결재를 받기 위해 아까운 시간 낭비하며 우왕좌왕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게다가 케셀링은 북아프리카에 처음 투입될 당시에는 롬멜을 상당히 존중하고 있었으나 그의 독선적인 모습에 혀를 내두르고 나중에는 결국 조소를 퍼부어댔고, 롬멜 밑에서 아프리카 군단장을 역임한 크뤼벨은 롬멜 밑에 있던 경험을 악평하기 서슴치 않았지요. 훗날 튀니지에서 제 5 기갑군을 지휘한 폰 아르님은 롬멜이 자신의 지휘에 간섭하는 것 자체를 단호히 거부하고 냉소로 일관했습니다. 롬멜이 참모장교 출신이 아니라는 측면과 벼락출세를 했다는 것 때문에 독일군 내에서 고까운 시각으로 보던 원인도 있었지만, 왜 그렇게 많은 독일군 장교들이 그에 대해 비난과 독설을 남겼는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 독일연방군의 공식 견해를 대변하는 공간사에서 조차 군사적인 견지에서 왜 그의 결정들을 비판하고 있는지.
일단, 대표적인 몇 가지의 문제를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흔히들 많은 분들은 북아프리카의 독일-이탈리아군은 처음부터 절대적인 열세에 놓일 운명이었고 빨리 공세로 나아가 영국군을 아예 구축해내지 못하면 안되었다고 생각하시죠. 그래서 북아프리카의 독일-이탈리아군이 살기 위해서라도 롬멜의 적극적인 공세를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들 막연히 생각하시는 물량이 넘쳐 주체를 못하고 막강하기만 한 영미연합군의 이미지도 1941~42년에는 경우에 맞지 않는 신화에 불과합니다. 1941~42년 영국에게는 북아프리카 및 중동전선에서 독일-이탈리아군에게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적극적 확전으로 나아가는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독일군이 북아프리카에 파병된 이후 이 전선에서 추축동맹군과 영미연합군 측의 상호전력이 매월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한번 보시죠:
1941년 02월: 독일군 1개 사단 (경 1) + 이탈리아군 7개 사단 (기갑 1, 차보 1, 보병 5)
영연방군 4개 사단 (기갑 2, 보병 2)
1941년 03월: 독일군 1개 사단 (경 1) + 이탈리아군 7개 사단 (기갑 1, 차보 1, 보병 5)
영연방군 4개 사단 (기갑 2, 보병 2)
1941년 04월: 독일군 2개 사단 (기갑 1, 경 1) + 이탈리아군 7개 사단 (기갑 1, 차보 1, 보병 5)
영연방군 5개 사단 (기갑 2, 보병 3)
1941년 05월: 독일군 2개 사단 (기갑 1, 경 1) + 이탈리아군 7개 사단 (기갑 1, 차보 1, 보병 5)
영연방군 4개 사단 (기갑 1, 보병 3), 1개 여단 (기갑 1)
1941년 07월: 독일군 2개 사단 (기갑 2) + 이탈리아군 7개 사단 (기갑 1, 차보 1, 보병 5)
영연방군 4개 사단 (기갑 1, 보병 3), 1개 여단 (기갑 1)
1941년 09월: 독일군 3개 사단 (기갑 2, 경 1) + 이탈리아군 8개 사단 (기갑 1, 차보 2, 보병 5)
영연방군 6개 사단 (기갑 1, 보병 5), 2개 여단 (기갑 2)
1941년 11월: 독일군 3개 사단 (기갑 2, 경 1) + 이탈리아군 8개 사단 (기갑 1, 차보 2, 보병 5)
영연방군 7개 사단 (기갑 2, 보병 5), 4개 여단 (기갑 4)
1942년 01월: 독일군 3개 사단 (기갑 2, 경 1) + 이탈리아군 9개 사단 (기갑 2, 차보 2, 보병 5)
영연방군 6개 사단 (기갑 2, 보병 4), 4개 여단 (기갑 4)
1942년 03월: 독일군 3개 사단 (기갑 2, 경 1) + 이탈리아군 8개 사단 (기갑 2, 차보 2, 보병 4)
영연방군 5개 사단 (기갑 2, 보병 3), 5개 여단 (기갑 5)
1942년 05월: 독일군 3개 사단 (기갑 2, 경 1) + 이탈리아군 8개 사단 (기갑 2, 차보 2, 보병 4)
영연방군 7개 사단 (기갑 2, 보병 5), 5개 여단 (기갑 5)
1942년 07월: 독일군 3개 사단 (기갑 2, 경 1) + 이탈리아군 10개 사단 (기갑 2, 차보 2, 보병 6)
영연방군 10개 사단 (기갑 2, 보병 8), 5개 여단 (기갑 5)
1942년 09월: 독일군 4개 사단 (기갑 2, 경 2) + 이탈리아군 9개 사단 (기갑 2, 차보 2, 보병 5)
영연방군 10개 사단 (기갑 3, 보병 7), 6개 여단 (기갑 6)
1942년 11월: 독일군 4개 사단 (기갑 2, 경 2) + 이탈리아군 12개 사단 (기갑 2, 차보 2, 보병 8)
영연방군 9개 사단 (기갑 2, 보병 7), 5개 여단 (기갑 5)
1943년 01월: 독일군 7개 사단 (가갑 4, 경 2, 보병 1) + 이탈리아군 6개 사단 (기갑 1, 차보 1, 보병 4)
영연방군 6개 사단 (기갑 2, 보병 4), 5개 여단 (기갑 5)
미군 9개 사단 (기갑 3, 보병 6)
1943년 03월: 독일군 8개 사단 (기갑 4, 경 2, 보병 2) + 이탈리아군 6개 사단 (기갑 1, 차보 1, 보병 4)
영미연합군 18개 사단 (기갑 5, 보병 13), 5개 여단 (기갑 5)
여기 보면 아시겠지만 1941~42년 전 기간을 통틀어 영연방군이 항공전력과 전차의 수효에서 일시적으로 앞선 적은 종종 있지만 적어도 편제상 전력에서부터 추축동맹군측을 "압도"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군이 무슨 전투력이 있냐, 무능력한 부대들 아니었냐고 강변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런 식의 막연한 이해는 전쟁에서 독일군 지원을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룬 이탈리아군 장병들에 대한 모독이지요. 이탈리아군은 장교들의 자질이 대부분 엉망이기는 했어도 북아프리카 전역의 고비고비마다 롬멜에게 결정적인 승리의 기회를 안겨준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과연 이탈리아군의 트리에스테 사단이나 아리에테 사단 없이 독일군이 Totensonntag의 전투(<옮긴이 주>1941년 11월 23일 시디 레젝 남방에서 있었던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는지, 토브룩을 함락하게 해준 가잘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는가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유효한 지휘 하에서 최소한 영국-독일군의 2/3 이상 수준의 전투력은 발휘해준게 이탈리아군입니다. 그러던 북아프리카의 세력균형이 깨지게 된 것은 1943년 미군이 본격적으로 프랑스령 아프리카에 상륙하여 뒤통수를 때리게 된 뒤에나 비로소 가능했던 일입니다. 북아프리카에 독일군이 2~3개 기동사단급의 전력을 투사한 것은 영연방군과의 균형을 고려하여 방어하기에는 적절한 수효였습니다. 이로서 추축동맹군은 약 10개 사단급의 전력을 갖추게 되어 편제상 영연방군 전력과 대등 또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능동적인 방어자세를 견지하다가는 추축동맹군이 가만히 앉아서 다 죽을 정도였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문제는, 이들 편제상으로 대등한 추축동맹군의 전투력을 어느 정도로 아껴가며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느냐는 것입니다. 롬멜의 문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영연방군을 방어하기에는 충분한 전력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전력을 잘 추스려가며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생각은 안 하고 섣부른 공격으로 매번 자신의 전력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서 먼저 소모당하게 만들었다는데 있습니다. 롬멜이 리비아 영내, 적어도 트리폴리와 벵가지의 유효한 보급이 가능할 수 있는 정도까지로 기동범위를 한정하고 과도한 손실을 회피하였다면 짧은 보급로를 바탕으로 1941~42년 내내 영연방군보다 결코 뒤쳐지지 않는 전력을 유지하며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게 오늘날의 평가입니다.
또한 롬멜에게 부여된 임무가 꼭 참호 파고서 틀어박혀 적이 쳐들어올 때까지 가만히 주저앉아 있으라는 식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당대의 기록을 잘 안 들여다보신 것이지요. 롬멜에게 설정된 트리폴리 동쪽 500km 정도의 공간은 독일군의 증원계획이 완료되고 편제대로 예하 사단들이 완전히 준비를 마칠 때까지의 1차적인 목표였습니다. 독일군 수뇌부는 기갑-보병-포병 등이 모두 도착하여 조화로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그 선에서 수세적인 태세를 견지하다가 증원이 완료되면 제한적인 적극적 방어작전을 수행하라는 의도를 깔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국군이 공세를 준비하며 대규모 전투력을 축적하고 있으면 기회를 보아 파쇄공격(spoiling attack)을 수행하고 적의 전투력을 능동적으로 소모시키는 재량권 정도는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롬멜은 도착하자마자 포병도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키레나이카 전체를 내달려버리고 허겁지겁 도착한 경보병과 수색부대를 토브룩 전면에 꽂아넣는 등의 조급함으로 일관하여 충분한 전투력이 축적되기도 이전에 소모시키기 바빴습니다. 본국에서 적당한 판돈 쥐어주고 잘 해보라고 다독거렸더니 첫판부터 올인~ 외치면서 대박과 쪽박을 번갈아 차고서는 자신에게 판돈 더 보내달라고 투덜대는 꼴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연방군에게 1941~42년은 이집트 및 중동지방에 10개 사단 남짓한 병력을 유지하면서도 사실 엄청난 부담으로 고전하던 시기였습니다. 희망봉을 돌아 이집트에 보급하는게 그리 녹녹한줄 아시는 모양이지만 당시 영국을 떠난 상선이 희망봉을 돌아 이집트에 보급하고 돌아오려면 6개월 이상이 걸렸습니다. 배틀액스니 크루세이더 작전 등을 하는데 있어 영국이 보급측면에서 기울인 노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영국군이 독일군보다 빠르게 회복할 수 있던 것처럼 보이던 이유는 적어도 필수 보급품 - 식료품, 피복류 등등 - 측면에서 이집트와 중동의 식민지에서 어느 이상 충당이 가능했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지, 영연방군도 독일-이탈리아군을 병력부터 압도하고 들어갈 정도로 축적하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게 특히나 이집트에서 2000km 이상 떨어진 리비아 영내 깊숙히라면 훨씬 심했을 겁니다. 영국같은 해양대국이니까 그런 과중한 부담을 견뎌내면서도 10개 사단 남짓한 전력을 보급해낼 수 있었지만 애시당초 독일과 이탈리아가 노린 것 자체가 바로 그렇게 영국의 힘이 맨날 희망봉 돌아가느라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며 지치게 만드는데 있던 겁니다. 독일의 제 1 목표는 미국이 참전하기 이전에 소련을 석권하는 것이었고, 여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련을 조기에 무너뜨리고 그 다음에 소련전선에서 풀려난 독일군을 전환한다면 영미연합군의 증원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못 막아낼 이유가 없었지요. 아니 아마도 그랬다면 부담을 느낀 영국-미국 측에서 외교적인 해결을 먼저 모색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롬멜에게 주어진 전력은 그가 개인적으로 열망하던 결정적인 승리 - 이집트 정복 - 를 달성하기에는 부족했지만, 반면 리비아를 지켜내는 방어를 하는데 있어서는 충분한 수준이었습니다 - 물론 "롬멜이 예하 전력을 쓸데없이 낭비만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롬멜은 "일개 야전군 사령관"의 신분에서 그 이상의 정치외교적 전략문제까지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일차적으로 독일이 소련에서의 전쟁을 끝내기 이전까지 영연방군을 살살 약올리면서 적이 치고 들어올라치면 적절한 파쇄공격으로 힘을 빼주는 식으로 1942년까지 버텨내는 것이 그렇게 터무니없이 어려운 임무였다고는 평가되지 않습니다. 소련에서 벌이는 건곤일척의 독일의 국가적 승부에 부담을 주지 않고 영국군을 견제하여, 성공적으로 소련전역이 종결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것이 군인의 신분으로서 롬멜이 해내야 할 임무였습니다. 롬멜이 그 임무에 충실했다고 하면 그토록 숱한 전설들로 윤색된 영웅은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독일의 대국적인 전쟁 수행의 노력에는 좀 더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패배한 군대 가운데에 우뚝 솟은 소영웅은 승자인 영미연합군의 여유로운 시각에서는 돋보이는 인물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정작 함께 독일을 위해 싸웠던 동료 장교들에게는 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크게 쌓였다는 양면의 의미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군대라는 조직에서 과연 그런 돌출행동으로 아군에게는 골칫거리를, 적들에게는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영웅이 필요한건지, 아니면 전체를 위해 헌신적으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묵묵한 장교들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생각해 보시기를 아울러 당부드립니다.
또한 롬멜의 이런 무리하고 일방적인 공격제일주의는 물론이요 그의 전장에서의 상황판단 능력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오늘날 가해지고 있습니다. 롬멜이 번번히 범한 실책은 전장에서 영연방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일이 잦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크루세이더 작전에서 독일은 Totensonntag 전투에서 크뤼벨과 예하 기갑사단 장병들, 특히나 그 이전에 영국군을 소모시켜 준 이탈리아군 장병들의 헌신적인 노고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군 제 30 군단이 펀치를 먹고 물러난 시점에서 크뤼벨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하 기갑사단들을 동쪽으로 내달리게 해서 영국군 제 13 군단 방향으로 전환시키지요. 이것은 영국군 제 30 군단이 펀치 한 번으로 전투력을 모조리 상실하고 붕괴되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상황판단이었습니다. 크뤼벨이 제 30 군단을 추격하여 끝장을 내버리자는 거듭된 주장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직접 기갑부대들과 함께 내달려버려서 놓아준 제 30 군단은 이후 독일군 배후에서 다시 살아나 독일군 후방을 휩쓸어서 결국 추축동맹군을 패배시켰으며, 할파야 고지 등에서 선전한 독일-이탈리아군은 덧없이 항복하게 됩니다.
1942년 6월 토브룩 함락 이후에 미친듯이 이집트로 내달리던 순간에도 롬멜은 자기가 전진하기만 하면 영국군은 모두 손들고 뛰어나올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로만 전진했습니다. 자신의 부대는 이미 너덜너덜해지고 공세종말점을 한참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고작 대대급 전열로 쇄도하는 독일군 앞에 영국군에게는 이집트 가까이에 아직도 중동에서 불러올 수 있는 예비전력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그토록 무모한 진격으로 일관함으로서 독일-이탈리아군은 유리한 상황에서 아군을 추스릴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독일이 토브룩 함락의 유리한 상황을 살려 당시 가용했던 13개 사단의 전력을 충분히 다시 재정비하고 예정된 몰타 공격을 성공리에 치룬 후에 다시 한번 영국군을 끌어들여서 파쇄공격을 시도했다면 밀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이탈리아군은 보급문제로 6월 및 8월의 전투에서 거의 회복되지 못하고 고통받고 있던 12개 사단을 가지고 영연방군 9개 사단 및 5개 여단의 공격을 거의 실패로 만들기 직전까지 버텨냈습니다. 그 12개 사단이 더 뒤로 물러나서 짧은 보급선과 더 안정된 독일-이탈리아 공군의 지원을 가지고 재정비를 했다면 역시 안일했던 몽고메리의 영연방군을 충분히 방어해냈을 것입니다.
결론을 내자면, 북아프리카에 투입된 독일-이탈리아군과 영연방군은 1941~42년 내내 절묘히 대등한 세력균형을 가질 수준의 규모였습니다. 양자 모두 10개 사단 내외의 규모로 투입되었으며, 이 상황에서는 무리한 소모적인 공격보다는 유연한 방어가 훨씬 유리했습니다. 미군이 투입되기 이전 롬멜이 이 유연한 적극적인 방어자세를 견지했다면 조바심내고 맨땅에 헤딩할 쪽은 영국이었습니다. 지중해 항로의 차단으로 영국은 같은 물자를 중동과 인도에 보급하는데도 상선단의 부담이 3배 이상으로 가중되던 차였으므로 과민한 처칠의 압력으로 인해 소모적인 공격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군을 압도하지도 못하는 적이 계속 막무가내로 나에게 달려드는 것만큼 용병에서 좋은 상황이 어딨습니까? 그런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지 못하고 내가 알아서 탈진해서 영국군에게 우위를 내준 것이 롬멜의 북아프리카 전역에서의 작전이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게 롬멜의 잘못이었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롬멜이라는 위험한 인물에게 독일군 총사령부의 영향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북아프리카의 임무를 맡긴 것부터가 히틀러 인사정책의 실패였고, 이후로도 롬멜이 훌륭한 선전대상이라는 부분에 집착하여 그에 대해 엄격한 제재를 가하지 못한 점에서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롬멜 자신이 몽고메리나 패튼처럼 언론 플레이를 자청해서 능수능란하게 하고 자신을 과대포장한 것은 아닌만큼 그가 영웅으로 한껏 치켜세워진 점에 대해서 롬멜이 비판받아야 할 필요 또한 없지요.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흔히들 신적인 것으로 오해하는 그의 군사적인 능력과 대국적인 식견이라는 것이 정작 알려진 것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그런 면에서 그가 비판받아야 할 점이 분명히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독일연방군은 롬멜의 현장에서의 부하사랑의 정신과 일신을 아끼지 않는 지휘자세에 대해서는 장교가 갖출 덕목의 일부로 높이 평가하지만, 그의 자신의 임무를 망각한 월권행위들과 무모한 희생의 강요, 적에 대한 안일한 평가로 조급하게 움직이는 통찰력 부족 등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엄정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롬멜의 북아프리카 작전에 대해서는 손자병법의 군쟁편의 한 부분이 흔히들 인용되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겠습니다:
"전군을 들어 이익을 다투면 이르지 못하고, 군대를 버리고 이익을 다투면 치중이 버려진다.
이러한 까닭으로 갑옷을 벗고 서둘러 달려가 밤낮으로 쉬지 않아,
길을 두배로 하여 밤낮으로 행군하되 백리나 되는 먼 길을 가서 이익을 얻으려 하면
삼군의 장수가 사로잡힐 것이니 건장한 자는 먼저 가고 피로한 자는 뒤에 남아
그 방법으로는 병력의 10분의 1만이 도달하기 때문이다.
오십리를 달려가 이익을 얻으려 하면 상군의 주장이 꺾일 것이니
이러한 방법으로는 병력의 반수만이 도달하기 때문이다.
삼십리를 달려가 이익을 다투면 병력의 3분의 2만이 도달할 수 있다.
이런 까닭으로 군에 치중이 없으면 망하고, 양식이 없으면 망하며, 위적이 없으면 망한다.
그러므로 제후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자는 외교에 참여할 수 없고,
산림과 험조, 저택의 지형을 알지 못하는 자는 행군할 수 없으며,
향도를 쓰지 않는 자는 지리를 얻을 수 없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출처 : 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table=gamu&uid=15733
첫댓글 짝짝짝 훌륭한 글입니다. 그러나 롬멜이 아무리 잘싸워 서 영국군을 지치게 만들고 설사 엘알라메인을 점령한다 하더라도 미군의 상륙과 동부전선의 패배는 막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밀리터리게시판으로 -_-/
롬멜 저거 순 거품이었구만 롬멜의 스킬을 3으로!!! 책략가랑 병참의 귀재도 뺍시다 아오뺚쳐
거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호이에서의 능력을 내릴 필요는 없을듯. 호이에서는 롬멜이 플레이어의 말 안듣고 멋대로 닥돌하고 그러지는 않잖아요.
AI에게 위임하면...(응?)
공격적 지휘관은 또 나름 쓸 곳이 있을테죠.. 저 상황에 저기에 있었던게 문제였을겁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롬멜이_롬멜을_평가하다.JPG
결국 프랑스공세의 유령사단정도가 그의 역량인듯?
자기 자신에 대한 혹독한 평가!
오오 재미있고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채승병, 역시 이 분의 글은 항상 좋은 것 같습니다.
페리스코프 날라갔죠? 아쉬울 따름입니다.
아직 페리스코프 있어요. 채승병님도 간간히 자신의 블로그에다가 2차대전 관련 글도 올리시고 Archive에도 몇몇 자료가 있습니다. 과거의 페리스코프가 어떠했는지는 잘 몰라서 자료가 많이 상실된건지 어떤건지 모르겠지만...
롬멜을 동부전선으로!
했으면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했을 텐데말입니다.
히틀러때문이야 귀족들때문에 롬멜이라는 인물을 영웅화 만들었기 때문에~
힛총이 사람을 잘못보았지요. 그래도 저는 좋아할랍니다.
롬멜은 대령으로 썩다가 히틀러의 눈에 들어서 고속 진급을 하다보니 사단장까지는 훌륭한 능력을 보였는데 군사령관 수준으로 올라가서는 항상 현장에 나서는 스타일 때문에 부하참모들이 고생많이 했죠. 덕분에 좋은 기회도 꽤 잡았지만.
그래도 그런 부분이라도 있잖아요 ㅇㅅㅇ
싸움을 어쨌든 조낸 잘하는 장군인건 분명하죠. 문제는 벌인 싸움이 쓸데없는 싸움이라 그렇지... 이것이야말로 쁘라스 마이나스 제로!
만약 쿠르스크 전투에서 모델대신 북쪽의 공세를 롬멜이 이끌었다고 한다면, 롬멜은 정말 돌파해냈을지도...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 롬멜은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기 전에 소련을 밀기 위해서 (그건 매우 힘든 일이므로) 오히려 아프리카 전선을 빠르게 정리하고 소련으로 병력을 투입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롬멜에 관한 글을 읽다보면 롬멜은 정작 소련군과 싸운 적은 없지만 언제나 소련을 주적으로 염두해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빠르게 아프리카를 정리하고 러시아에서 싸우길 개인적으로 염원했을지도 모르지요. 물론 제 망상입니다만.
아마 그 기사도 정신이 공명심으로 이어진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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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쿡장군님들은 거진 저런 성향을 보이죠....-_-;;;;; 뭐 군대문화의 차일에서 나온것일수도 있겠습니다만....-_-;;
할더가 과연 뛰어난 인물인지는 의문이군요. 슐리펜 계획을 현대화했던 작전을 그대로 써먹으려고 했던 것은 그가 과연 뛰어난 인물이었는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더군다나 러시아 침공 때 짰던 계획은 그대로 실행되었더라도 모스크바까지 가지는 어려웠습니다. 폴란드 침공 때에도 그가 준비한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슐리펜 계획은 1차 세계대전 때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드러났으며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적에게 예측 가능한 작전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장비는 좋지 않았던 데다 이탈리아 군의 계획대로 했을 때 과연 영국군을 막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군요.
더군다나 영국은 꽤 많은 부분을 아프리카 쪽에 투입하였지만 아프리카에서의 독일은 많이 부족했습니다. 웨이벨 장군이 뛰어나기는 했지만 그 밑의 부하들이 지휘 능력이 문제가 있어 실패한 작전이 많았고 오코너 장군과 오친렉 장군은 뛰어났지만 밑에 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군은 원해서 전쟁을 하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기가 낮았습니다. 아프리카에서의 독일은 전력 면에서 여러가지로 부족했던 부분이 많았기에 쓴 소리와 위선적인 말들로 전투력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 문제라고 하기는 그렇군요.
애초에 수송역량 부족으로 추축국은 저 전력 이상을 아프리카에 투입할 수 없습니다. 항구의 일일 처리 가능량도 한계가 명확하고 항구에서 내려도 그걸 다시 전선으로 보내는 건 이야기가 다르죠.
슐리펜 계획을 그대로 써먹네 한 거야 애초에 프랑스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위급 지휘관이 없는데 공격계획을 제시하라고 닥달해대서 어쩔수 없이 지어낸 거죠. 만슈타인에 비해 뒤떨어졌다고 해서 뛰어나지 않다고 한다면 그게 참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만슈타인이 후방으로 밀려난 뒤에는 힐더가 오히려 낫질작전의 최대 옹호자가 되었습니다. 이정도면 충분히 능력있는 거죠. 애초에 계획대로 모두 진행되는 군사작전은 존재하지
않으니 계획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해서 능력없음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만슈타인보다 못하다고 해서 뛰어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적들도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어느 정도 슐리펜 계획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만슈타인이 내세웠던 낫질작전을 가장 반대하여 난리쳤던 사람이 할더였습니다. 할더의 계획이 누설되고 난 뒤 다른 대책으로 내세워야 하는 게 낫질작전이었기에 지원을 했지 원래 낫질작전에 대한 지원을 하고자 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가 수송하는데 부족한 점이 컸기에 아프리카 전선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할더가 소련 침공시 소련을 낮추어 본 것 때문에 히틀러 문제도 있지만 침공 작전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할더가 소련 침공시 계획했던 대로 했더라도 소련의 기후 등 여러가지 조건으로 제대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습니다.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할더는 기갑 전력에 대해 못 미더워 했으며 계획했던 것보다 길어짐으로서 프랑스, 영국 등의 공격에 대비하기 어려워진 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웨이벨 장군, 오코너 장군, 오친렉 장군 등이 뛰어난 전략들을 세우고 했지만 영국군의 지휘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전차를 집중시켜 화력을 모으지 않고 분산시킴으로서 영국군이 뛰어난 점이 많았지만 깨진 적이 많았습니다. 영국에서 뛰어난 장군들은 많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기갑 전력을 말의 대용으로 생각하여 전차의 운용에 대한 지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제대로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이 적었던 것이 지휘의 문제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토브룩에서의 패배는 롬멜이 요새전에 대해서는 능력이 부족한 점이 컸으며 토브룩이 가진 이점이 있었기에 토브룩에 집착했던 것입니다. 롬멜이 패배에 가장 큰 원인은 보급 문제였습니다.
이탈리아군을 보조해서 시레나이카에서의 확고한 '방어전'을 수행할 것이 롬멜에게 주어졌지만 이탈리아군이 그만큼 몰리도록 2차 세계대전에 걸맞는 전력이 아니었습니다. 롬멜의 독선과 고집 등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을 과연 제대로 방어해낼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탈리아군이 무능했다는 것이 아니라 무기 수준이 1차 세계대전 이후 크게 향상된 부분이 없었으며 기갑전력은 좋지 않았으며 수송을 하는데 문제가 있었으며 점점 영국 해군에게 털려 수송에 더욱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롬멜전사록에서 읽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이탈리아군이 뛰어났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무기들이 좋지 못해 문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보병전에서 경험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롬멜전사록을 읽어보셨다면 영연방군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신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공군 쪽에서 쳐지기 시작한 쪽은 추축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알기로 독일 1개 기갑사단(150대)<영국 1개 기갑여단(150~200대) 이고 영국 1개 기갑사단 = 3개 기갑여단 인걸로 알고있습니다만...단순히 편제로만 전력을 비교하면 안됩니다.
영국의 전차사단은 두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되고, 사단의 완편시 전차 보유수는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200대 전후였죠. 독일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아주 힘을 물어준 장군이죠..
예전에 상당한 리플이 달리던 글이군요. 뭐 전 2차대전은 잘 모르니...
호.....
최근에 보이는 롬멜 비판은 지극히 결과론적으로만 판단내리고 비판하는게 대부분입니다. 만약 그당시 롬멜이 북아프리카에서 방어태세로 짱박혀 있는채로 날이 갈수록 보충되어지는 연합군에게 나중가서 밀렸으면 분명히 현재에 "그당시 적이 보충되기 이전에 어째서 공격하지 않았는가?" 라는식으로 비판 받았을께 분명합니다. "적이 쓰리플 넥서스인데 성큰이나 깔고 앉아있었다"라는 조롱성 스타크래프트 비유등과 함께 말이죠.
분명 롬멜도 지적 받아야 하는점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도를 지나친 평가들이 너무 많다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마치 롬멜을 까야만이 2차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정세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라는 분위기 조성이 한국같은 경우는 디씨2대갤 에서부터 퍼진듯합니다.
롬멜을 까는 건, 좋은데 그럼 다른 사람이면 뭐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롬멜"이 생각하기에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장기전은 옳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것같습니다. 약한 해군력으로 인한 보급이 영국군에 비해서 처질것은 뻔했으며, 앞으로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경우 북아프리카 전선은 신경 밖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급량이 영국군이 적다고 하셨는데 독일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단에서 위 분이 말씀하셨던 2개 사단을 제외하고는 전투력이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전투력이 3/2나 됬다면 전차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이탈리아가 영국에게 밀린 것 일 까요?, 이탈리아의 대부분 부대는 그다지 정예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도중에 까먹은 양도 꽤나 있지만 영국도 상당히 까먹었습니다. 전투중에.. 여러 작전중에 잃은 양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영국은 물량을 투입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사단은 지속적으로 보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롬멜은 영국군의 보급품을 노획해야 할 필요성이 절실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하지만 롬멜이 전술을 잘했다는 점은 이해를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롬멜이 소모적이긴 했지만 무모할 정도의 과감성 덕분에 얻은 이점을 본다면 그 소모율이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프리카전선은 보급등의 주변 상황고려가 조금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