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진도군(珍島郡) 군내면(郡內面) 녹진리(鹿津里)와 해남군(海南郡) 문내면(門內面) 학동리(鶴洞里)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총길이 484m, 나비 11.7m의 연륙교이다. 1981년 착공, 85년 준공된 사장교(斜長橋)로서 외팔보공법(free-cantilever method)으로 시공되었으며, 양교대와 양교각으로 지지되는 3경간 연속강상형(連續鋼箱形) 들보가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69m로 탑주는 A형, 케이블 배치는 방사형으로 되어 있으며, 교탑 기초는 직사각형 기초슬래브로 지지되는 철근콘크리트 교각 위에 세워졌다. 이 다리의 건설로 농수산물의 육지출하가 원활해지고 차량운행비와 통행시간이 감소되어 경비를 절감하고 섬을 육지와 연결시켜 당시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연안여객선을 대신하게 되었다.
[1956년] 체코 태생 미국의 테니스 선수 나브라틸로바/Martina Navratilova 출생
1956. 10. 18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1970년대말과 1980년대에 여자 테니스계를 석권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최고 선수로서 왼손잡이인 그녀는 1975년 페더레이션컵(테니스 연맹 컵)대회에서 자기 팀을 승리로 이끌어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해 미국으로 망명해 1981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녀는 1975년부터 계속 여자선수 최고 5위 안에 들었다. 1978년 버지니아슬림스 선수권대회와 윔블던 여자단식 결승전에서 우승한 뒤 처음으로 자신을 제1인자라고 자부했다. 1979년 윔블던 여자복식뿐만 아니라 단식에서 또다시 우승해서, 논란의 여지가 없는 최고선수로 평가받았다.
1982년 나브라틸로바는 93번의 시합에서 90번을 이겼다. 이중에는 41번의 연승기록과 윔블던 여자단식 및 프랑스 오픈 여자단식을 비롯해 15번의 토너먼트 대회에서의 우승이 포함된다. 이듬해 87번의 경기 중 86번을 승리했고 1994년 은퇴, 2000년 코트에 복귀.
2003년 영국 윔블던테니스대회 혼합복식 결승 우승, 170번째 복식 우승 , 단식 167번째 타이틀, 남녀 통산 최다 타이틀 기록 보유
74경기 연속 승리 기록, 보유
윔블던테니스대회 최고령, 최다 우승자
[1950년] 고당 조만식 선생 사망
고당 조만식 선생이 6.25의 기습남침으로 밀렸다가 반격에 나선 국군과 유엔군에 쫒겨 인민군이 패주하고 있던 수라장속에서, 1950년 10월 어느날 그를 감시하던 한 인민군의 총탄에 타계했다. 10월 18일은 정확한 기일이 아니고 추정일이다.
고당 선생은 1883년 2월 평양에서 출생했다. 7세에서 15세까지는 엄한 부친 밑에서 한학을 배웠고, 17세에서 23세까지는 영세 포목상으로 생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24세때 처자를 거느린 가장으로써 숭실중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명치대학 법학과에 진학하여 32세때 졸업했다. 선생의 이러한 만학은 신구문명이 교착하고 있던 당시의 한국청년으로서는 극히 정상적인 코스였다. 대학을 나온후 선생은 오산고보 교사-교장, 평양YMCA 총무, 숭인학교장, 신간회 조직, 조선일보 사장 등의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3.1운동때는 옥고도 치렀다.
선생은 고결한 인격자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조선의 간디'라는 추앙도 받았다. 해방직후 고당은 조선건국평남준비위원회를 창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이것을 공산주의자와 동수로 개편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란 연립정부를 수립했고 선생은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것이 고당의 비극의 단초였다. 한편 자유민주주의적인 조선민주당을 창립, 당수로 선출됐다.
[1945년] 뉘른베르크 재판 1차 공판 개정
1945년 10월 18일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나치 지도자들에 대한 재판의 1차 공판이 베를린에서 열렸다. 나치 지도자들은 ①평화에 관한 죄, ②인도(人道)에 관한 죄, ③전쟁범죄, ④앞의 범죄행위를 계획․공모한 죄 등으로 기소되었다. 이 재판은 1945년 8월 8일 미국․영국․소련․프랑스 임시정부의 대표가 조인한 런던 협정에 바탕을 둔 것이다. 국제군사법정이 주관했으며 소련의 I. T. 니키첸코 장군의 주재 아래 열렸다. 이 재판에는 24명이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게슈타포와 같은 여러 조직이 유죄로 기소되었다. 1945년 11월 20일 이후의 재판은 영국측 제프리 로런스 재판관의 주재 아래 뉘른베르크에서 열렸으며 1946년 10월 1일 216차에 걸친 공판이 끝났다. 공판이 끝난 뒤, 수감 중 자살한 로베르트 라이와 정신적․신체적 장애로 재판을 받을 수 없었던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운트 할부흐를 제외한 22명에 대한 판결이 언도되었다. 피고인 가운데 3명은 형이 면제되었고, 12명은 교수형, 3명은 종신형, 4명은 10년에서 20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 사망
← 자신의 납관식(蠟管式) 축음기를 작동해보이는 에디슨, Mathew Brady가 찍은 사진(1878)
천재란 1%의 영감과 99%의 땀이다라는 신조로 일생을 발명에 몰두한 토마스 에디슨이 1931년 10월 18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에디슨은 1847년 2월 11일 캐나다 국경에서 멀지 않은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제재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새뮤얼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7세때 미시간주 포트 휴런으로 이사해 8세때 국민학교에 들어갔으나 엉뚱한 질문을 퍼붓다 지진아라는 판정을 받고 석달만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에디슨은 16세부터 84세로 타계하기 전까지 평생동안 1천92건의 발명특허를 얻음으로써 한달에 1건꼴로 발명을 해내는 불후의 기록을 세웠다. 에디슨의 첫 발명품은 21세때 만든 전신기를 응용한 자동투표기록기이다. 그러나 의회에서의 투표지연은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실용성이 있는 발명에 나섰다. 그는 얼마후 주식상장표시기(체커)를 발명했다. 그가 발명한 것중에서 가장 독창성 있는 발명은 1877년에 만든 축음기이고,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발명은 1879년에 이룩한 실용 백열등 개발이다.
에디슨이 전기조명시스템을 최초로 발명한 것은 아니다. 그 몇년 전 파리에서는 가두조명용으로 아크등이 이미 실용화돼 있었다. 그러나 에디슨의 발명은 송전시스템과 일체가 돼 일반가정에서도 쓸수 있도록 된 에디슨전구 였다. 그는 백열등의 보급을 위해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을 거쳐 소켓․스위치․안전퓨즈․적산전력계․배전방식등을 고안하고 효율높은 발전기와 배전반의 설계 등 배전․송전․발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체계를 개발했다.
1882년 세계최초의 화력발전소인 중앙발전소와 에디슨전등회사가 뉴욕에 설립됐고 그 이후 전기의 가정이용은 세계곳곳으로 확산되어 산업계의 전력이용을 자극, 공업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1891년에 영화 촬영기와 영사기, 1891~1900년에 자기선광법(磁氣選鑛法), 1900~1910년에 에디슨 축전기 등을 계속 발명했다.
그가 태어난 밀란의 생가는 사적(史蹟)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시간주 디어본으로 옮겨진 멘로파크의 연구소와 웨스트오렌지의 연구소는 각각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1905년] 정치인 유진산/柳珍山 출생
1905. 10. 18 충남 금산~1974. 4. 28 서울.
호는 옥계(玉溪).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자퇴했고, 이후 보성중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다가 중퇴했다. 1942년 만주로 건너가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정계에 투신하여 주로 청년조직의 결성과 청년운동의 활성화에 전력했다. 1946년 4월 9일 좌익청년단체 조선민주청년동맹에 대항한 우익청년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을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김두한이 감찰부장으로 있던 이 단체는 미군정에 의해 폭력단체로 해산명령을 받자 1947년 '청년조선총동맹'이라는 조직으로 개명하여 계속 반공활동을 전개했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 기념우표 탄생
← 고종황제 어극 40년 경축기념 우표
구한국의 유일한 기념우표로 우리나라 최초의 기념우표이기도 하다. 조선조 26대 고종황제의 어극 40년과 육순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우표와 기념메달 제작을 비롯하여 기념비 건립 제막식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으나, 돌림병(호열자/콜레라)의 유행으로 기념 축하 행사를 다음해인 1903년 4월 30일로 연기하였다. 기념우표는 제 날짜인 1902년 10월 18일에 예정대로 발행 되었다.
[1893년] 프랑스의 작곡가 구노(Charles Gounod) 사망
프랑스 파리 출생이다(1818).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1836년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작곡 등을 공부하였다. 1839년에는 로마대상을 받아 이탈리아에 유학했다.
그후 독일을 거쳐 프랑스에 돌아온 후부터 극장음악에 흥미를 갖고 공부하였으며, 몇 차례 실패작을 쓴 후 《벼락치기 의사》(1858)와 대표작 《파우스트 Faust》(1859)의 성공으로 오페라 작곡가로서 유명해졌다. 그후 《로미오와 줄리엣》(1867) 등의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오페라는 일반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음악 분야에서 활약하였으며, 직접 합창단을 만들어 자작과 고전적 종교작품의 소개에 힘썼다.
그는 프랑스음악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양식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메율, 브와엘디외 등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나 스스로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했다고는 할 수 없다. 작품의 특징은 아름다운 선율에 있지만, 같은 시대의 마이어베어처럼 지나치게 화사하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며, 알맞게 절제되고 조화도 잘 되어 있다. 작품은 오페라 이외에 오라토리오․칸타타 등의 종교작품과 《아베 마리아》 《세레나데》 등 가곡이 많은데, 특히 후자는 후일의 프랑스가곡 발전을 위한 기초가 되었다.
[1867년] 미국, 알래스카 공식 매입
1867년 10월 18일 미국의 국무장관 윌리엄 헨리 슈어드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공식 매입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 내각에서 장관을 맡고 있던 슈어드는 1860년초부터 러시아가 쓸모없는 땅으로 여기던 알래스카를 매입하려고 시도했다. 결국 1866년 12월 주미 러시아 공사 에두아르트 데 슈퇴클 남작과 협상해 1867년 3월 29일 러시아령 북아메리카를 미국에 양도하는 계약 초안을 작성하고 다음날 아침 조인했다. 그해 10월 18일 알래스카의 매입이 공식화되었다. 매입가격은 720만 달러로 에이커당 약 2센트였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은 알래스카를 싸게 샀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언론은 '슈어드의 아이스박스', '슈어드의 어리석은 짓'이라며 비난했다. 1880~90년대에 알래스카에서 금이 발견되자 미국인의 정착이 크게 촉진되었고, 1912년 의회의 인준을 받아 알래스카 준주가 되었다. 1959년 1월 3일 알래스카는 미국의 49번째 주가 되었다.
[1859년] 베르그송 Henri(-Louis) Bergson 출생
1859년 10월 18일 태어남 / 1941년 1월 4일 죽음
베르그송은 과정철학을 발전시킨 프랑스의 철학자이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양육․교육 과정이나 관심사는 전형적인 프랑스식이었고 많은 세월을 프랑스 파리에서 보냈다. 베르그송이 당대의 가장 대중적이고 영향력 있는 강연자 겸 저술가로 발돋움하는 데 발판이 된 저서는 <시간과 자유의지:의식의 직접 자료에 대한 소론 Essai sur les donnees immediates de la conscience>(1889)과 <물질과 기억: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한 소론 Matiere et memoire:Essai sur la relation du corps a l'esprit>(1896)으로, 그의 저작 전체는 지속이 사물의 가장 내적인 실재를 이루고 있다는 자신의 직관의 의미와 함축을 더 풍부하게 탐구해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저작으로 꼽히는 베르그송의 가장 유명한 책인 <창조적 진화 L'Evolution creatrice>(1907)는 생물학이 그의 사상에 끼친 영향을 보여줌과 동시에 과정철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1915년 이후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불멸의 40인' 회원이 됨으로써 프랑스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고 1927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777년] 독일의 극작가, 소설가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 출생
오데르 강변의 프랑크푸르트 출생.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가헌(家憲)에 따라 군적(軍籍)에 들어갔으나(1792), 소위 임관(1797) 후 얼마 안 되어 퇴역하였다(1799). 같은 해 고향의 대학에서 철학․물리학․수학을 배우고 칸트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1800년 베를린으로 가 그 이듬해 봄에 평생 그를 위로․보호해 준 3세 연상인 이모의 딸 울리케(Ulrike)와 함께 파리로 갔다가, 1802년 스위스로 옮겨서, 비극 《슈로펜슈타인가(家) Die Familie Schroffenstein》(1803)를 집필하고 독일 희극의 최고 걸작 《깨어진 항아리 Der zerbrochene Krug》(1812)의 집필에 착수하였다. 이어 바이마르를 방문하여 괴테, 실러, C.M.빌란트 등을 만났으며, 다시 파리로 가서, 자기 시재(詩才)에 절망을 느끼고 원고를 불태워 버렸다(스스로 큰 희망을 걸었던 비극 《로베르트 기스카르 Robert Guiskard》의 초고도 포함).
1804년 귀국 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의 말단 관리로 취직(1805~1806), 희극 《암피트리온 Amphitryon》(1808) 및 2, 3편의 단편소설을 쓰고, 비극 《펜테질레아 Penthesilea》(1808), 소설 《미하엘 콜하스 Michael Kohlhaas》(1810)를 착수하였다. 한때 프랑스군에 잡혔다가, 후에 드레스덴에 살면서(1807~1809), 낭만적인 기사극(騎士劇) 《하일브론의 쾨트헨 Das K thchen von Heilbronn》(1810) 및 나폴레옹 1세에 대한 반항과 증오를 담은 애국극 《헤르만의 싸움 Die Hermannsschlacht》(1821)을 집필하였다. A.뮐러와 협력하여 잡지 《푀부스 Ph bus》를 창간(1808), 또한 신문《베를린 석간 Berliner Abendbl tter》을 발간하였다(1810). 그 사이에 삶의 감정과 의무와의 상극을 그린 수작(秀作) 《홈부르크의 공자(公子) Prinz Friedrich von Homburg》(1810)를 완성하였다.
[1697년] 이탈리아 화가 카날레토(Giovanni Antonio Canal) 출생
← 카날레토가 그린 유화 〈석공의 작업장〉(1730경)
카날레토(1697. 10. 18 ~ 1768)는 주로 베네치아와 영국의 풍경을 빛이나 대기의 효과를 교묘히 표현하여 파노라마풍으로 그린 화가이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매우 정교한 사실적인 풍경화였으며 당대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표현력과 구성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화가이다. 또한 카날레토는 렌즈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이용 일종의 스크린 위에 상을 맺어 소묘나 밑그림용 풍경의 상을 얻는 장치인 카메라 오티카(오늘날 사진기와 같은)를 개발했으며 자와 컴퍼스를 이용 가장 효율적인 배치에 의한 기획적인 풍경을 많이 남겼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는 독특한 그의 그림들은 평범한 풍경일 지라도 빛의 변화에 따른 세심한 배려에 의해 너무 사실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들 때도 있으며 때로는 매우 차갑게 느껴져 회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도안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685년] 낭트칙령 폐지
신구교간의 갈등으로 36년동안 프랑스를 피로 물들인 위그노 전쟁이 한창일 무렵 프랑스 변방의 신교(新敎) 국가 나바르에 젊은 왕이 있었다. 그는 1572년 프랑스 왕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파리로 갔다가 1만명의 신교도가 죽음을 당한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을 겪고 그곳에 3년반 동안 볼모로 잡힌다. 그 또한 위그노라 불린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프랑스 왕위 계승자가 되자 교황이 그를 파문하면서까지 왕위계승을 막았지만 그는 1598년 앙리3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국왕 자리에 오른다. 그가 바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사랑받았던 앙리4세였다.
그는 위그노였지만 즉위하자마자 지긋지긋한 종교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4월13일에는 낭트칙령을 발표한다. 칙령에 따라 위그노에게는 광범위한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파리만 빼놓고는 어떤 지역에서든 예배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신교도는 지역을 제한받은 것이 못내 불만이었고 가톨릭은 신교를 인정한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종교통합이 효과가 있었는지 종교전쟁은 서서히 끝이 나고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685년 10월18일, 태양왕 루이14세(그림)가 낭트칙령을 폐지했다. 위그노가 누려온 모든 종교적시민적 자유가 박탈돼 다시 종교혼란에 휩싸이자 40만명 위그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그들은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 등지로 발길을 돌렸다. 가톨릭은 속이 시원했는지는 몰라도 주로 상인공예인군인들로 구성된 위그노가 떠난 공백은 프랑스에 너무나 컸다.
[1503년] 교황 피우스 3세 사망
본명은 Francesco Todeschini Piccolomini.
1440경 시에나 공화국 시에나1503. 10. 18 로마.
교황(1503 재위).
1460년 숙부인 교황 피우스 2세에 의해 시에나 대주교 및 부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교황 밑에서 사절로 활동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족벌주의를 비판했고, 알렉산데르가 죽자 교황선거 비밀회의를 장악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로 바티칸을 포위했다. 그는 1503년 9월 22일 로마인들의 보호하에 열린 추기경 회의에서 피우스 3세로 선출되었다. 그해 10월 1일 즉위식을 가진 그 직후 죽었다.
[1130년] 주자학을 집대성한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 1130~1200) 출생
자는 원회(元晦)․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노인(雲谷老人)․둔옹(遯翁). 존칭하여 주자(朱子)라고 한다. 이름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 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 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 《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 《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 《논맹정의(論孟精義)》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 《서명해의(西銘解義)》 《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 《통서해(通書解)》 《정씨외서(程氏外書)》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밖에
2005년 대구지하철 2호선 개통
2005년 한국·루마니아 확대정상회담(서울)
2005년 `만인의 연인` 심은하 결혼식
2002년 약대 6년제로 전환. 2007년까지 단계적으로 도입키로
1997년 코카콜라 로베르토 고이주에타 회장 사망
1996년 유엔 국제해양법재판소 발족
1990년 첫 남북통일음악제 평양서 개최
1989년 헝가리 41년 만에 헌법 개정안 통과. 국호를 '헝가리 인민공화국'에서 '헝가리공화국'으로 개명
1989년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퇴진
1989년 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유엔 연설, 6자회담 제안
1985년 서울지하철 3~4호선 준공
1984년 시인 앙리 미쇼 사망
1981년 그리스총선, 사회운동당 승리
1979년 부마사태로 비상계엄 선포
1978년 카터 미국 대통령, 중성자탄 생산명령
1977년 서독 특공대, 인질구출작전 성공
1972년 미국-소련, 통상협정 조인
1967년 소련 인공위성 비너스4호, 최초로 금성에 착륙
1962년 알제리아와 쿠바 수교 합의
1962년 케네디, 그로마코 소련외상과 독일문제해결방안 토의
1961년 라오스왕국, 푸마를 임시정부 수상에 임명
1950년 무공훈장령 공포
1948년 소련군, 점령체제 끝내고 북한철수 개시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무기휴회
1946년 1시간반 길이의 정규방송 시작
1941년 일본 도조(東條) 히데키 내각 성립. 이 내각이 태평양전쟁 개시
1923년 전국산업대회 열림
1922년 윤덕병 등 조선노동연맹회 결성
1918년 체코 독립선언
1912년 이탈리아-터키, 로잔느조약 조인(트리폴리전쟁 종결)
1907년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헤이그협약' 채택
1906년 정부, 최초의 기념우표 발행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775년 수도회 설립자 파울루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