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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지 집성촌 종가 스크랩 유일재 김언기선생
이장희 추천 0 조회 138 15.01.12 20: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시집오니 식구만 30명… 힘들었지만 그리워"
종가를 지키는 마지막 宗婦(종부)
광산 金씨 유일재(惟一齋) 종부 김후웅 할머니

입력 : 2004.09.16 10:53 20'

▲ 광산 김씨 유일재 종가의 종부 김후웅 할머니의 소원은 ‘남북통일’이다. 한국전쟁 때 북으로 간 남편을 한 번 더 만나기 위해서다. 김 할머니는 남편도 자식도 없는 종갓집을 1년에 18번씩 제사를 모시며 55년간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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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것 좀 고쳐주시면 고맙겠소.” 김후웅(81) 할머니는 추석 준비로 마음이 바쁘다. 차례 음식 장만을 위해 시내로 나가야 하는데, 할머니의 수족 역할을 하는 유모차가 고장이 났다. 작년부터 아프기 시작한 허리 때문에 할머니는 유모차를 앞세우고 밀어야만 걸을 수 있다. 대신 나가서 장을 봐줄 사람도 없다. 남편과 자식 없이 산 지가 벌써 55년째다.

경북 안동에서 퇴계로를 따라 2km 정도 가면 나오는 와룡면 가구리의 광산(光山) 김씨 유일재(惟一齋) 종가. 한때 서른 명이 넘게 득시글거리며 살던 집은 이제 텅비었다. 종손도 없고 차종손(다음 종손)도 없는 종가엔 팔순의 늙은 종부와 강아지 한 마리만이 살고 있었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였던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가문의 14대 종부(宗婦) 김후웅 할머니는 열아홉에 시집와 62년을 종부로 살았다. 이 중 남편과 함께했던 세월은 7년에 불과하다. 하나뿐인 아들과는 이 세상에서 2년밖에 같이 못 살았다.

김 할머니의 삶은 ‘기구하다’는 말로 모자란다. 처음 시집왔을 때 한솥밥 먹는 식구만도 30명이 넘었다. 새댁이라고 방 한 칸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 신부는 시조모와 한방을 썼고, 신랑은 사랑채 어른과 함께 지냈다. 어른들이 한 달에 한 번 합방할 날을 잡아주면 하룻밤 같이 지낼 뿐이었다. 어린 신부에게 주어진 일은 태산 같았다. 끼니마다 디딜방아를 찧어 밥을 해야 했고, 하루에 물을 서른 동이씩 길어와야 했다. 제사는 1년에 18번 돌아왔다. 그러던 중 임신을 했다. 아들을 낳았지만 두 돌을 갓 넘기고 홍역으로 세상을 떴다. 종부는 “방아 찧어 어른들 밥하는 일이 먼저였고 물 길러 가는 일이 우선이었다”며 “아이 병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고 말했다. 먼저 간 자식은 어디다 묻었는지 누가 묻었는지도 모른다. 묻으러 가는 날도 방아만 찧었다고 한다.

아이는 또 낳으면 된다는 어른들 말씀에 마음놓고 울지도 못했지만 아이를 가질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좌익활동을 하던 남편이 한국전쟁이 터지자 북으로 갔기 때문이다.

종부는 그러나 종손이 반드시 돌아올거라 믿으며 이를 악물고 종가를 굳건히 지켰다. 그 믿음은 54년 만에 현실이 됐다. 금강산에서 열린 이산가족 상봉 자리에서 꿈에도 그리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북에서 처녀 장가를 들었고 자식도 낳았다. 상봉은 덧없이 짧았다. 같이 보낸 시간은 5시간 정도. 그나마 시댁 식구들 때문에 단 둘이 있을 수도 없었다.

김 할머니는 지금도 이산가족 상봉 때 찍은 사진이 빼곡히 들어있는 액자를 머리맡에 두고 잔다. 김 할머니는 “옳지도(예쁘지) 않은 얼굴, 아무리 잘 찍어도 옳게 나올 리 있겠소?” 하며 사진 찍기를 한사코 마다 하더니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하얀 모시 저고리와 녹색 치마를 조심스레 꺼냈다. “나 죽은 뒤라도 영감이 볼지 모르니까 옳게 찍어주이소.”

 

김언기 ( 金彦璣 : ) ( 1520 ~ 1588 )

 

자는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惟一齋), 본관은 광산(光山) 안동의 구담과 이계에 살다가 도산근처의 가야리에 거처하였고 퇴계의 문하에서 배웠다.

 

서당을 지어 후진을 가르치며 날마다 학자들과 더불어 강설하여 문하생 중에 성공한 자가 많았다.종인인 김부필, 김부인,김부륜과 유성룡, 정탁, 구봉령, 권춘란, 권호문, 김팔원과 가까이 지냈으며,유일재실기 문인록에 의하면 백인국, 남치리, 정사성, 권태일, 백현룡,

박의장, 신지재, 신지효, 권춘계.신준민, 남의록, 권우직 등 189명의 학자가 배출 되어 당시 안동 문풍을 진작시킨 공이 크다는 칭송이 있었다.

 

려강서원의 동주(원장)을 지냈고 백련사를 헐어 불상을 강물에버렸다.

 

영해부의 교수를 지냈으며 향년69로 졸하였다.옥계서원에 김자수와 배향되었고 이광정 찬행장, 김굉 찬갈명 하였다. 유일재실기 단권이 있다.

 

 

         ▲ 유일재 종택. 유일재 김언기는 〈산중잡곡〉을 쓴 갈봉 김득연의 부친이다. 
             사랑채 툇마루에 앉은 이가 이 댁의 종부다.

한글 시가를 찾아 떠나는 이 기행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그간 누차 뇌었듯 고을마다 시인묵객들로 넘치지만 정작 한글로 그 시대와 삶을 기록한 이는 드문 까닭이다. 비록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노래하는 데 그쳤다고는 하나 퇴계나 송암 같은 학자 문인들이 여러 편의 한글 시가를 남긴 것이 돋보이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한글 시가를 찾아가는 오늘의 여정은 안동시 와룡면으로 향한다. 와룡면 가구리(佳邱里)에 있는, 광산김씨 유일재공파의 종가인 유일재(惟一齋) 고택을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안동의 광산김씨는 구담, 가구, 외내 등 세 군데에 뿌리를 내렸는데 가구리에 세거해 온 이들을 유일재공파로 부른다.

 

애당초 유일재의 조부인 담암 김용석이 무오사화 때 화를 피해 낙향했던 곳은 구담(안동시 풍천면)이었다. 그러나 손자인 유일재 대에 이르러 와룡 가야(佳野)로 이거했는데 유일재의 9대손 도상이 다시 이곳으로 옮기면서 이 집을 구입하였다고 한다. 이 집이 경북 민속자료 제113호로 지정된 유일재 고택이다.

 

유일재 김언기는 퇴계의 문인으로 여강서원의 창건을 주도하고 초대 원장을 역임하는 등 교육활동에 힘써 당시 안동의 문풍을 일으키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 기행의 주인공은 유일재가 아니라 그의 맏아들 득연이다.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 1555∼1637)은 서애 유성룡과 한강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다. 그는 중년에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급제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시작(詩作)에만 전념했다.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 주둔한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 보급에 힘썼고, 명군의 장수들과 교유하여 문장과 덕행으로 그들로부터 추앙받았다.

 

그는 병자호란 때 삼전도의 치욕을 듣고 비분강개, 병을 얻어 죽었다. 평생 시작에 전념한 이답게 그는 만만치 않은 글을 남겼다. 그가 남긴 문학 작품으로는 임란 이전 지방 사림의 생활을 그린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을 비롯, 한글 가사(歌辭) 〈지수정가(止水亭歌)〉와 모두 71수의 시조가 있다.

 

시조 71수는 일단 양에서 다른 시인들의 그것과 비길 수 없다. 지금까지 전하는 조선시대의 시조 작품은 2천여 수 정도다. 송강 정철이 남긴 시조 작품이 107수, 단가의 대가로 불리는 고산 윤선도의 유작이 75수니 갈봉의 시조 71수는 이들 대시인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리 알려진 시인이 아니다. 정작 중등학교에서 서른 해 가까이 아이들에게 우리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내게도 그는 낯선 시인이다. 교과서에서 그의 시는 한 편도 소개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창비의 〈한국고전시가선〉(임형택·고미숙 엮음, 1997)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 유일재 종택은 와룡면 가구리에 있다.

 

 

 

집 뒤에 자차리(고사리) 뜯고 문 앞에 맑은 샘물 길어
기장밥 익게 짓고 산채갱(山菜羹) 무르게 삶아
조석(朝夕)에 풍미(風味)가 족함도 내 분인가 하노라.

                        *산채갱 : 산나물로 지은 국.
 

 

 

 

 

 

▲ 유일재 종택은 낮은 솔숲을 지고 남서향으로 앉아 있다.

 

〈한국고전시가선〉에 실린 그의 시조는 〈산중잡곡(山中雜曲)〉가운데 한 수다. 〈산중잡곡〉은 49수의 연시조로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지내는 풍류를 읊은 작품이다. 이른바 ‘물외한인(物外閒人)’의 풍모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시편이다. 이 시 한편을 갈무리하고 아내와 나는 갈봉의 자취를 찾아 나섰다.

 

유일재 고택은 와룡면 소재지에서 우회전, 예안으로 가는 길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오른편에 펼쳐진 마을, 가구리 초입에 있다. 5백여 년 전 순흥안씨가 들어와 연 이 마을은 그 형국이 밤송이가 벌어지는 모습인데다가 마을에 밤나무가 많아 ‘밤실’ 혹은 ‘율리’(栗里)라 불린다.

 

남향한 마을 뒤에는 낮은 산, 마을 앞에는 내[가구천]가 흐른다. 들판에 펼쳐진 마을은 여느 시골마을처럼 고즈넉하기만 하다. 길가에 서 있는 안내 표지석조차 쓸쓸해 뵌다. 좁은 마을길 옆으로 사과가 익고 있는 과수원 저 쪽에 나지막한 솔숲을 등지고 고택이 서 있다.  
 
고택은 ‘ㅁ자’ 모양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당은 정침의 왼쪽 뒤편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중문 쪽에서 바라보면 정면에 안채가 있고 양 옆으로 사랑채와 행랑채가 안마당을 감싸고 있는 ‘폐쇄적인 배치’다. 1700년대 말에 건축된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어 경북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 유일재 종택의 사당 

 

사당 앞 공터에 차를 대고 내리자, 방금 외출에서 돌아온 듯 80대의 허리 굽은 종부가 어디서들 왔는가고 묻는다. 초면이지만 우리는 이 노인을 알고 있다. 유일재 고택에 서린 종부의 기구한 삶과 세월은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이는 한 점 혈육도 없이 아흔아홉 시부를 모시고 6·25 때 북으로 간 남편을 기다리며 반세기를 살아왔던 여인이다. 의성김씨 종녀로 태어나 서른여덟 칸 기와집, 광산김씨 문중의 종부가 된 그이의 삶은 곧 이 땅 현대사, 그 굴곡 많은 세월의 켜를 온몸으로 견뎌왔다.


연중 제사가 열여덟 번, 열여섯 식구에 사랑에 묵는 손님과 과객이 늘 예닐곱인 이 대갓집에서 그이가 산 시집살이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날마다 삼시 세끼를 위해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어야 했고, 돌아앉을 여유도 없이 물을 긷고 바느질을 하고, 감주 담그기와 조과(造菓)를 그칠 수 없었던 게 종부의 일상이었다.

 

혼인 이듬해 맞은 해방은 그러나 그이에게는 재앙으로 돌아왔다. 다정다감했던 남편이 좌익으로 활동하더니 그예 안동형무소에서 징역을 살았고, 출옥 후 서울로 피했다가 다시 감옥에 갇혔다. 마지막 면회는 1949년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터졌고, 젊은 부부는 헤어졌다…….

 

▲ 종택의 대문에 붙은 ‘기린지문’, ‘봉황지정’ 입춘방이 외롭다

 

노인과 성씨가 무엇이냐는 둥, 일상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갈봉 선생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했더니 그러냐고 눈빛이 달라진다. 소생도 없이 반세기를 홀로 살아온 이 노인을 지탱케 한 것은 가문의 영광이고, 위대한 조상이 남긴 향훈(香薰)이었을까.

 

노인 혼자서 사는 집답지 않게 대문간에는 입춘방이 붙었다. 대문에는 ‘기린지문(麒麟之門)’, ‘봉황지정(鳳凰之庭)’ 안채 기둥에는 ‘우순풍조시화연풍(雨順風調時和年豊)’이 붙었다. 그러나 쓸쓸하게 안노인 한 분이 지키고 있는 덩그런 기와집에 붙은 그 문구는 가을처럼 쓸쓸했다.

집안으로 드니 노인은 방문객 앞에서 집안이 어수선하여서 ‘남세스럽다’고 손사래를 친다. 괜찮다고, 이 큰 집을 노인이 어찌 감당하겠냐고 짐짓 위로하면서 나는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정갈한 장독대가 사람 사는 집의 훈기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장독대 옆에 흐드러지게 핀 붉은 소국이 오히려 쓸쓸함을 더했다.

 

갈봉의 흔적을 찾으려 왔다고 했지만, 기실 이 고택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을 리는 없다. 이 집은 갈봉의 8대손이 도상이 구입한 집이고, 갈봉은 인근 가야리에 살았던 것이다. 그는 문집 〈갈봉유고〉를 남겼는데 이 책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갈봉은 가야에서 모두 49수의〈산중잡곡(山中雜曲)〉을 썼다.〈산중잡곡〉은 갈봉이 장편 가사 <지수정가>를 짓고 난 다음 남은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을 시조라는 단가 형식에 담아서 읊조린 작품이다. 49수의 내용은 대개 물외한인으로 자연 속에 살아가는 작자의 생활 태도, 시문과 사장(辭章)에 대한 생각, 인생의 덧없음과 노경에 대한 탄식 등이다.

 

〈산중잡곡〉의 노래들은 대부분 평시조의 형태를 충실하게 취했다. 이 노래들은 우리말의 맛을 잘 살려서 쓴 것이라기보다는 그 ‘시상(詩想)’과 ‘상상력’에서 범상치 않은 단면을 드러낸다고 평가 받는다.

 

 

벗이 오마 하거늘 솔길을 손수 쓰니
무심한 백운(白雲)은 쓸수록 다시 난다.
저 백운아 동문(洞門)을 잠그지 마라. 올 길 모를까 하노라.

 

 

벗을 기다리면서 화자는 솔길을 손수 쓴다. 지상에서 솔길을 쓰는 데 맞추어 하늘에서는 흰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그예 화자는 모여드는 구름에게 동네 어귀를 닫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지상과 하늘을 조응시킨 시상도, 동네 문을 잠근다는 발상도 신선하고 유쾌하다. 

 

 

히히히히 또 히히히히
이래도 히히히히 저래도 히히히히
매일에 히히히히 하니 날마다 히히히히로다.

 

 

그러나〈산중잡곡〉의 노래 가운데는 일반 평시조와는 상당한 거리를 가진 작품도 있다. 웃음소리 ‘히히히’를 반복하고 있는 이 시조는 크게 보면 평시조의 3장 6구 형식을 대체로 지킨 작품이긴 하다. 그러나 그 어투는 여느 양반 시조들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것이다. 초야에 묻힌 선비의 한정은 때로 형식의 일탈조차 감행하게 하는지 모른다. 

 

 

배고프면 바구니 밥 먹고 목마르면 바가지 물마시니
이리하는 가운데 즐거움이 또 일어난다.
남들의 부운(浮雲) 같은 부귀야 부러워할 줄 있으랴.

 

산중에는 백운(白雲)이 있고 산외(山外)에는 녹수(綠水) 있다.
구름 찾아 나물 캐고 물가 따라 고기 낚아
일신(一身)이 한가히 지내니 만사(萬事)가 무심(無心)하여라.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녹음(綠陰)이 난다.
금수(錦繡) 추산(秋山)에 밝은 달이 더욱 좋다.
하물며 백운(白雲) 창송(蒼松)이야 일러 무엇하리요.
 
도원(桃源)이 있다 하여도 예전에 듣고 못 봤더니
홍하(紅霞) 만동(滿洞)하니 이 진정 거기로다.
이 몸이 또 어떠하뇨, 무릉인(武陵人)인가 하노라.

 

 

그의 시조는 대체로 대구의 표현과 일상어의 사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 특징이다. 이 노래들은 각각 자연 속에서의 소박하고 한가한 생활, 계절에 따른 자연의 아름다움 등을 통하여 자연에 묻혀 사는 풍류와 멋을 노래한다. 자신의 삶이 이루어지는 곳이 곧 ‘무릉’이고, 자신이 곧 ‘무릉인’이라는 자부심은 조선조 선비들의 은일(隱逸)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 준다.

 

이 밖에도 갈봉은 여러 수의 연시조를 남겼다. 선친의 문하생들이 모여 스승을 추모하는 시회에서 국화주를 대접하며 감사의 뜻을 피력한 연시조〈회작국주가〉를 비롯하여〈계우제회가〉,〈희영적벽가〉, 〈영회잡곡〉,〈산정독영곡〉등이 그것이다.

 

객들이 마당을 둘러보고 있을 무렵, 노인은 집안의 상사를 인척들과 나누느라고 전화가 길어지고 있다.  노인이 살아온 저 파란 많은 세월을 얘기를 청해들을 수도 있으련만, 첫 방문에 그걸 꿈꾸는 것은 욕심이다. 우리는 고택 밖으로 나와 그이가 힘들게 방아를 찧었던 디딜방앗간을 둘러보았다.

 

▲ 종택 앞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 종택의 안마당. 정갈한 장독이 사람 사는 훈기를 전해주었다

  

유일재 종택의 종부가 죽은 걸로 알고 제사를 지내왔던 남편을 만난 것은 2003년 2월, 금강산에서였다. 1949년 감옥에서의 면회 이후 무려 54년 만이었다. 2박 3일 간의 짧은 만남. 남편은 이북에서 새로 가정을 꾸려 살고 있었다. 그이는 금강산 상봉 현장에서 울지 않았다고 했다.

 

두 돌을 갓 넘긴 아들을 잃고 평생을 혼자서 살아온 그이에게 남편은 무엇이었던가. 그 남편을 빼앗아간 ‘사상’은 무엇이었던가. 이제 ‘통일’이 무엇인가를 깨우치게 된 이 여든 고령의 노인에게 조국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차마 그 후일담을 여쭙지 못했다.

 

노인의 파란 많은 삶 앞에서 300년도 전 조상이 남긴 노래를 찾으러 온 우리의 발길은 무람할 뿐이다. 고결한 선비요 ‘우국의 은사’로 기려지는 선조의 영예는 가문의 과거일 뿐이다. 그러나 반세기 이전에 이 땅을 할퀴고 지나간 이데올로기의 광풍 앞에서 진행되어 온 역사는 현재형이다. 그 압도적 무게 앞에, 여든다섯 노인의 실존은 외롭고 쓸쓸하기만 하다.

 

3백여 년 전의 조상 갈봉 김득연은 ‘붉은 노을’[홍하(紅霞)]이 ‘마을에 가득’[만동(滿洞)]한 이 한촌을 ‘도원’이라고 노래했지만, 소생도 반려도 없이 반백년 세월을 지켜온 종부에게 이 집은 정녕 무엇일까. 서둘러 인사를 드리고 율리를 떠나면서 아내는 멀어져가는 쓸쓸한 고택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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