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동지＞(9회)

[해암]

연재소설＜동지＞(9회)

  “꼭 그걸 강조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의 얼굴에 짙은 실망이 떠올랐다.
  “저는 좋아하는 분이 따로 있어서요.”
  재희는 ‘남자친구’란 말 대신 ‘좋아하는 분’이라고 했다. 남자친구란 말에서 느끼는 어딘가 모를 경박함 때문에,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 말을 동지에게 갖다 붙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동지를 향한 그런 류의 경외심에 가까운 태도는 그와의 대화에서도 나타났다. 어릴 적부터 친 남매처럼 익숙한 두 살 위의 연인에게 그녀는 쉽게 반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그녀에게 동지의 존재는 컸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성학은 이메일로 자주 소식을 전해왔다. 메일은 언제나 간단했다.
  안녕, 재희씨! 연구실로 가기 전에 몇 자 적습니다. 오늘은 교수님과 중요한 실험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이 실험이 잘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응원해주세요. 성학.
  안녕, 재희씨! 오늘 낮에 비가 무지막지 쏟아졌습니다. 제 기억에는 한국에서 이런 비를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침 시간이 나기에 밖에 나가 한참 동안 빗속에 서 있었더니 답답하던 가슴이 뚫리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자주 메일을 쓰고 싶지만 참습니다. 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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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 재희씨! 잘 계십니까? 오늘 지도교수님이 저녁을 사주셨는데, 술도 조금 마셨습니다. 이런 일이 흔치는 않지만, 가끔 교수님께서는 제게 남모를 어려움은 없는지 알고 싶으신가 봅니다. 오늘은 애인이 있는지 물어보시더군요. 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셨다면 대답하기 쉬웠을 텐데. 제가 괜한 말을 했나요? 밤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제 자야겠습니다. 아름다운 꿈 꾸세요! 참 서울은 밤이 아니군요. 안녕! 성학.
  때로는 좀 더 길고 속마음을 드러내는 글도 있었지만, 회신할 때는 그가 작은 오해라도 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재희의 집 거실)
 
  퇴근하여 돌아온 딸에게 희경이 물었다.
  “누구야?” 그녀는 눈으로 거실 한쪽에 놓아둔 딸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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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스트셀러 작가의 변명이 고작 그거야? 좀 더 설득력 있는 말은 못 찾았니?” 엄마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누구도 그냥 아는 사람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보내지는 않는다. 재희는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한참 동안 말을 골랐지만 역시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성학의 존재를 모른다는 건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재희의 대학 시절이라면 성학 역시 그녀에게 대시했던 많은 남학생 중 하나였으므로 굳이 어머니에게 얘기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그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뒤라면, 온갖 시시콜콜한 얘기를 다 하고 사는 모녀 사이에 이미 얘깃거리가 되어 있는 편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굳이 어머니가 모르는 이유를 찾는다면 성학의 존재를 안 뒤에 어머니가 보일 반응이 조금은 걱정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재희는 뭔가를 얘기할 생각으로 식탁 의자에 앉으며 어머니를 쳐다보았다. 어머니가 얼른 머그잔 두 개에 커피를 따라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앉았다.
  “자 이제 우리 딸의 흥미진진한 얘기를 들어볼까?” 재희가 얘기의 줄거리를 간추리는 동안 희경은 눈을 반짝이며 기다렸다.
  “흥미진진한 걸 기대하신다면 아마 실망할 거예요.”
  성학에 관한 얘기는 그를 알아 온 시간에 비해 얘깃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대학 삼 학년 가을에 성학이 그녀를 찾아왔던 장면을 빼면 그 뒤로는 미국에서 보내온 짧은 이메일들이 전부였고 그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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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가 이룬 학계에서의 명성에 관한 얘기가 다였다. 재희는 얘기를 짧게 마무리 지었다.
  “그 사람이라면 나도 알지. 우리 딸 인기 최고네!”
  “엄마만 알아요?”
  “물론 온 국민이 다 알지. 어쩌면 장차 세계가 다 알게 될지도 모르고. 근데 동지도 그분을 알아?”
  “언제가 얘기했어요. 그분은 처음부터 오빠의 존재를 알구요.”
  “조금은 예민한 문제잖아?”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말아 올렸다.
  “아유, 오빠를 모르세요? 꿈적도 안 해요.”
  “그건 좀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자극이 필요할지도 모르긴 하지만. 그러나 네 마음은 ‘오직’ 이겠지?”
  “아니었으면 해요, 엄만?”
  “아니 그냥 물어본 거야.”
  “엄마의 기대를 못 받쳐드린 건 아니고?”
  “천만에! 내 선택도 너와 같아. 오해하지 마!”
  뜻밖의 반응이었다. ‘뭐야?’ 하는 표정을 짓는 아주 짧은 틈을 둔 뒤, “풉!” 하고 웃음을 흘렸다. 보통의 엄마라면 다른 반응이 나와야 맞지 않을까? 그러는 편이 훨씬 상식적이란 생각을 했다.
  딸에게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세속의 삶과 높은 벽을 쌓은 사람으로 경제면에서 능력을 발휘할 어떤 가능성이나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스승이 전수해준 깊은 내면의 성취, 그 목표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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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매진하는 사람이다. 이 남자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해 보이지만,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데는 아직은 관심이 없다.
  다른 한 남자는 언젠가는 노벨상 수상이 유력시되는 저명한 물리학자다. 머지않은 미래에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그를 교수로 모시기 위해 경쟁을 벌일 것이고, 세계 곳곳에서 그를 초빙하여 짧은 강연을 듣기 위해 깜짝 놀랄만한 대가를 제시할 것이다. 한두 시간 그의 강연을 듣는 데 지불하는 만큼의 돈을 저축하기 위해 평범한 샐러리맨이라면 십 년쯤 짠 내를 풀풀 풍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물리학자는 다른 한 남자와는 다르게 딸의 손이 자기의 어깨 위에 놓이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현실적인 삶과는 완벽하게 동떨어진 남자의 손은 들어준다.
  “엄마도 이제 얘기해줄 때가 되지 않았어요?”
  “무슨?”
  “엄마의 그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비상식적이고 특별한 팬심에 대해, 아니 그 배경에 대해.”
  “특별한이나 비상식적 같은 말을 둘씩이나 갖다 붙여야 직성이 풀릴까?”
  “응, 나로서는 그래! 엄마가 지지해줘서 고맙긴 한데, 그래도 비상식적이고 특별한 건 사실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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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사람은 틈만 나면 사람의 일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묻지만, 신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티벹 격언-
 
 
 

 
(2008년 5월 31일, 토요일)

  촛불집회는 점차 폭력시위 양상을 보였다. 시위대는 도심의 도로를 점거하였고 제지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5월 29일 농림수산식품부가 행정안전부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장관고시 관보 게재를 요청하자 시위대는 흥분하여 청와대로 몰려들었다.
  5월 31일 밤은 뭔가 공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오늘 밤 기필코 경찰의 차단선을 뚫고 청와대로 밀고 들어가자며 결의를 다진 시위대는 내자・적선 사거리와 동십자 사거리 방향으로 짓쳐들어갔다. 광장은 심란하고 위태로웠다.
  재희는 역사박물관 앞에서 시위 군중을 지켜보다가 동지가 저녁 수련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인사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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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애초에 시위를 염두에 두지 않은, 연인을 만나러 가는 여자였다. 그녀의 차림새는 장딴지를 살짝 가리는 검정색 미디스커트에 아이보리 컬러의 데님 자켓을 매치하여 수수한 외양을 겨냥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색과 잘 어울리는 피치 계열의 크롭티를 받쳐 입어 아름다운 몸매를 은근슬쩍 드러내는 센스도 놓치지 않았다. 머리는 컬이 들어간 반묶음 스타일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였으며, 편안한 웨지 샌들을 신고 중간 크기의 물색 숄더백을 느슨한 길이로 맸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스타일리시한 계산된 옷차림이었다.
 
  그날 밤공기는 눅눅하고 무거웠다. 저녁 수련이 끝나고 두 청년 제자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뒤의 일묵서예는 어둠 속에 잠겨 고요했다. 재희는 일묵서예의 대문을 들어서며 광장이 안겨준 심란함과 위태로움을 털어버리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인기척을 듣고 내다보는 지선을 향해 “언니, 저예요.”라며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지선도 “어서 오세요. 늦었네요.”라며 그녀를 반겼다. 재희는 지선의 친밀한 미소를 등 뒤로 느끼며 이층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은 안 오나 했지.” 동지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떠올랐다.
  “기다렸어요?” 하며 재희는 동지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숄더백을 벗어 곁에 내려놓았다. 동지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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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사]

화려체나 만연체없이 간결체로 일관하는 사건의 전개가 매우 흥미롭군요. 그래도 언젠가 심리묘사나 장면묘사를 할 때 좀더 풍경화처럼처럼 자세하고 구체적인 전지적 기술이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참았다가 마개를 열고 뿜어내는 분수를 종종 맞으니 한여름이 시원합니다.

[월몽]

광우병 시위, 촛불행진, 미국대학, 일묵서예, 역사박물관, 운명, 2008년5월....남과여....

[순우]

필연인가? 우연인가? 운명인가? 신도 알지 못하는 물음. 필연도 우연도 아닌 필연, 우연과도 같은 운명이 아닐까요?
묻어둘 수 없는 성학의 마음, 한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성학의 절제된 메일의 속내를 재희도 모를 리 없겠지요.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동지를 향해 있고... 그러니 운명이랄 수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