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엡6;13]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6;13]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투쟁한 선한싸움에 관한 마지막 편지를 쓸 때
아시아의 모든 사람이 그를 버렸음에도,
바울은 끝까지 선한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울은 인생의 가장결정적인 순간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할 때 ,그를 환호하는 군중도 없었다.
사실 교회는 대부분 그에게 등을 돌렸으며, 세상은 그의 목을 자르려고 했다.
고린도 후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돌아 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고후4;8-11절]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 우리는 속이는 자 ,,무명한 자 같으나 ..죽은 자 같으나...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근심하는 자 같으나...가난한 자 같으나 ... 아무 것도 없는 자 ,,,,로 취급을 받았느니라
고후11;23-29]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바울이 왜? 구구절절 일일이 소개하는 이유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충분히 그가 무너질수 있는 이유는 충분하다.
사실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쓴이유는?
교회가 바울을 등지고 거짓 선생들을 좇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거의 2년을 투자하며 가리 쳤지만 그곳에서 배반을 당했다.
교인들은 바울의 외모를 공격하는 삶들까지 있었다.
바울이 못생겼으며 말이 어눌했다는뜻이다.
거짓교사는 사방에서 공격했다.
바울에 대한 사람들에 신뢰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
그의 가르침에 최대한 헐뜯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아무리 온 세상의 교회들이 그렇게 변한다 하더라도....하나님의 말씀은 바뀔 수 없습니다. 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어 질 것입니다 (마 5:18).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교회들이 변질되어 가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이러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은“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 (유 1:8)”이 횡행할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 진리를 외치기는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절대 진리를 거부하는 다원주의 세상에서 성경만이 참 ‘진리’라고 외치면 뭇매를 맞기 딱 알맞다.
동성애, 이혼, 낙태, 간음 등 성경이 조금의 타협 없이 죄라고 지목하는 것을 죄라고 말하기 쉽지 않다. 죄라고 말하면 ‘사랑이 없다’는 평가가 바로 내려진다.
그것도 기독교 내부에서 말이다.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5)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후2; 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알면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디모데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목자라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은 막중한데 비해서 그의 나이는 어렸고 그의 마음은 여렸습니다(딤전4:12). 디모데가 무거운 책임을 감당하려고 했을 때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세상의 거짓말, 신학과 철학과의 영적인 전쟁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공격해야 한다고 합니다.
전신갑주을 입으라
왜 ? 이런 말씀을 했을까. 영광을 수치로...
하나님의 백성이 죄에 빠져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거두신다. 에스겔은 환상 가운데 이를 보았다 .
에스겔서 8장 에스겔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 가운데 성전 마당 오른쪽에서 행해지는 우상숭배를 보여 주셨다...어떻게 이지경이 될을까?
겔8;10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에스겔은 성전안뜰에 들어갔을 때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태양을 숭배하기 위해서 동쪽을 향해 절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16절]
* 즉 장로들이 우상을 섬기며 은밀한 의식을 행하는 것을 설명한다.
즉 지도자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수 있었다.
이 환상을 보고 에스겔은 크게 괴로워 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대신 사탄을 받았들인다.
하나님은 자신의 존전에서 행하는 죄을 묵인 할수 없어서 성전을 떠난다. 마치 하나님께서 마지못해 슬픔가운데 떠나셨던 것처럼 말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딤후2; 15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대형 교회의 부럽다.-- 목회자 기까히 그들의 잘못을 보면서,,, [간음. 사기. 부흥사 -차와 횡령.. 부흥.. 갈등... 기도 하면서 깨닫음 ...
이단 ...말씀에 벗어나..-부흥, * 부흥은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배이스로 깔고, 인간의 달란트[재능] 로써 할수 있다는 것.
* 사역에[말씀의 깊이] 깊이 집중하면 사역의 넓이는 하나님 몫이다.
랍비는 예배을 하나님의 말씀 학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다.
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가 살아 남는법은
고후4;16절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
“낙심” 헬“카크” 라는 어근에서 나온 “에크카케오” 라는 말은 악, 죄 와 타락을 가리킨다.
이것은 단순히 낙담하거나 ,
소진하지 않는다는뜻이 아니다.
이말은 내가 비겁함이나 게으름이나 부도덕이나 무관심이나 소명과 의무를 포기하는 것 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4;1]”
바울은 직분이 긍휼[불쌍히 여겨 돌보아 줌],
곧 자격이 없는자에게 주신 은혜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딤전1;12-15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직분이 긍휼이다. ,직분 자체가 긍휼이다.
예수님은 [ 마5;16절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겉으로 표현되는 것을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난 말씀은 이사야 6장 2~3절입니다.
사 6:2-3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스랍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을 ‘거룩하다’고 선포했고, 온 땅에 충만한 그분의 거룩하심을 ‘영광’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결국,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혹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잘’ 혹은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고전6;20절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다시 말하면 너희 몸을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신 10:15).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택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족속이 되었습니다.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 으로 세상을 사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 우리 세우셨다. [전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 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모두의 삶은 도덕적, 윤리적, 영적 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 들을 “ 신성한 성품에 참여 하는자 [벧후 1;4] 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성경은 권면합니다.
시간과 진실은 함께 한다.
시간이 지나면 , 진실은 밝혀지게 마련이다.
히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우리는 그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마지막 승리를 그리스도 드리길 원했다.
그 특권을 절대 놓치지 않았다. 이는 바울의 승리요, 하나님의 영광 일 것입니다.
루즈벨트(T. Roosevelt)는 ”쉽게 삶을 산 사람치고 그 이름을 가치있게 남긴 사람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도 주님은 그들을 쉽게 살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