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주에서 동족으로 60km, 寧波(영파)에서 서쪽으로 1백km쯤 되는 곳에 있는 인구 10여만의 소도시로 중국적인 아름다움에 가득차 있다. 시 면적의 10%가 운하여서 동양의 베니스라고도 불린다. 시내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운하, 자동차가 지나기 어려울 만큼 좁은 곡선형의 다리가 인상적이다. 중국의 다른 곳에 비해 부패가 심했던 이 도시는 그만큼 현대화도 뒤떨어진 도시다. 중국 근대의 최고 문필가 노신(1881-1936)의 고향이며 이 지방의 전통적인 술 소흥주가 유명하다. 춘추전국시대에는 越(월)나라의 도읍지였다. 그래서「臥薪嘗膽(와신상담)」이라는 고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노신기념관
노신은 1881년 지주의 아들로 소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周樹人(주수인)으로 어릴적 소흥에서의 추억은 그이 작품「고향」에 잘 나타나 있다.『혹한을 무릅쓰고 2천여리를 거쳐 20여년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하던 고향으로 나는 돌아왔다. 계절은 한겨울 고향이 가까워옴에 따라 날씨도 흐리고 차디찬 바람이 선창에 불어와 우 소리를 냈다. 배 사이로 바라보면 회황색 하늘 아래 외로운 듯한 마을들이 여기저기에 누워있고 아무런 활기도 없었다. 끊임없이 내 마음에 비애가 인다』(노신의「고향」에서 그의 소설 고향」에는 그 어릴 적 친구 潤土(윤토)가 상상력이 뛰어나고 재기 넘치는 농사꾼의 아들로 등장한다. 공교롭게도 윤토의 아들이 나중에 이 노신기념관을 운영하게 되었다.
瀋園(심원)
소흥 동남쪽에 있는 송나라 시대의 우명한 정원으로 남송의 시인 陸遊(육유)(1125-1200)의 고사가 유명하다. 육유는 금나라에 대해 철저한 저항을 주장한우국시인이었다. 육유가 스무살 되던 해에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塘婉(당완)과 결혼하였으나 어머니가 그녀를 미워하여 결국 이혼에 이르고 만다. 그후 10년만에 육유는 그녀를 이 정원에서 재회하게 된다. 그때 느낀 슬픔을 그는「 頭鳳(차두봉)」이라는 유명한 시로 표현했다.이 시를 읽은 당완은 또「차두봉에 부쳐」라는 시로 화답하고 곧 숨을 거두었다. 육유는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팔십평생을 사는 동안 많은 시를 남겼다.
소흥 양조장
중국 8대명주의 하나로 손꼽히는 紹興加飯酒(소흥가반주)는 멥쌀과 밀을 鑑湖(감호)의 맑은 물로 빚어낸 것으로 2천 4백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중국의 대표적인 황주이다. 이 술을 거북모양으로 생긴 독특한 병에 넣어서 판다. 소흥역에서 광장끝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加飯酒(가반주)를 비롯한 여러종류의 술을 빚는 소흥양조장이 있다. 부근 일대에는 술 향기가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