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3:22]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하늘로 맹세하는 자 - 이 구절 역시 20절과 21절에 이어 똑같은 형식을 취하면서 그 강조점을 점증 시키고 있다. 즉 헬라어로 '우라노스'는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인 하늘을 말한다. 그리고 이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지며 인격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본문에서는 피조물이면서 하나님이 거하는 장소적 의미로 쓰여졌다. 5:34에서도 역시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와 같은 의미로 묘사한다. 하나님의 보좌 -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행위와 하나님의 보좌를 두고 맹세하는 행위를 동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헬라어로 '드로노스'라고 하는 보좌는 '왕좌' 또는 '옥좌'(공동번역)로 해석한다. 이 단어는 왕이나 지배자의 권자로 사용되기도 하고
하나님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하늘과 동등하게 또는 그리스도의 자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으로 보아 장소적 의미의 '하늘'로 볼 수도 있으나 그보다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보좌를 두고 맹세한 것은 하나님과 맹세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 위에 앉으신 이 - 이 구절은 20절의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과 21절의 '그 안에 계신 이'라는 구절과 같은 형식을 취하여 '그 위에 앉으신 이'라고 문장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단과 성전 안에 있는 이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에 대한 관계성이 옮겨가고 있다. 여기서 '그 위'란 앞에 나온 '하나님의 보좌'를 가리킨다.
따라서 '앉은 이'는 하나님이 된다. 20-22절은 세번째 저주 선언문의 결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 결론은 22절이 된다. 그런 점에서 20, 21절은 마지막 결론인 하나님에게로 이끌기 위해 서술한 잠정적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같이 3단계에 걸쳐서 결론을 이끌어 냄으로써, 이 비판의 내용이
(1) 맹세에 대한 무조건 거부가 아님을 차근 차근히 밝혔고..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맹세에 관한 가르침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알기 쉽게 설명하였다.그리고 (3) 성전 중심이나 예물 중심 사상을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갔다. 이와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삼단논법의 형식을 사용하였다. 즉 제단-성전-하늘로 옮겨가고,
그 위에 있는 모든 것-그 안에 계신 이-그 위에 앉으신 이의 형식으로 관점을 옮겨감으로써 자연스럽게 제단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맹세의 관계를 옮겨갔다. 따라서 모든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듯이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박하와 십일조를 드리되 - 여기서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도 그 저주의 대상이 13절과 15절의 형식과 똑같이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지목된다. 비판의 내용은 그들이 사소하고 세분된 규정과 전통에는 아주 민감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근본적인 율법 정신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십일조 - 소출의 10분의 1을 바치는 율법의 규정으로서 그 기원은 족장 시대에 두고 있었는데 모세의 계명에서 법제화되었다. 이 십일조의 근본 취지(趣旨)는 (1) 자신의 소유에 대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인정과 (2) 이웃 사랑(구제) 및 성전 운영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자발적 사랑의 예물로서가 아닌 강제적 의무 규정으로 고착화 시켜, 이것을 통해 유대인됨과 율법 완수자됨의 규준으로 삼았다. 박하 - 헬라어로 '헤뒤오스몬'이라고 하는 독특한 향내를 지닌 채소이다. 이는 유월절 쓴나물의 양념으로 쓰였으며(출 12:8) 그 향내로 인해 회당의 방향제로 쓰였다고 한다.
회향은 헬라어로 '안네돈'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미나리과의 식물이며 양념에 사용되는 식물로서) 약품과 향료에도 사용된다. 근채는 '퀴미논'이라고 부르는 식물로서 이 역시 미나리과에 속하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는 양념이나 약품으로 사용된다. 근채를 다른 말로 구민초라고도 한다.
이상에서 나열한 식물 종류는 이스라엘의 농작물 중 매우 사소한 수확물이다. 따라서 이와같이 사소한 종류를 나열한 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레 27:30의 규례에 따라 얼마나 십일조에 철저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비판은 이렇게 세세한 십일조 생활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에 나오는 그들의 행실에 대한 비판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비적으로 그들의 십일조 생활을 강조한다. 율법의 더 중한 바 -
여기서 '더 중한 바'(바뤼테라)란 '더 어려운 일이나 `더 힘든 일')이 아니라 지엽적(枝葉的)이거나 사소한 일과 대조되는 '더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일 또는 '더 중요한 일'을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아주 중요한 율법'으로 번역되어 있다. 따라서 이 말은 율법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고 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차등(差等)적인 율법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앞에 나온 사소한 십일조 행위와 대비시킴으로써 더욱더 중요한 율법을 소홀히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고 있다. 의(義) - 헬라어로 '크리시스'라고 부르는 이 말은 종말적 심판의 의미를 나타내기도하고 재판, 판단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옮음와, 공의, 의 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에서의 '의'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닌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이해를 분명하게 하도록 돕는다. 인 - 헬라어로 '엘레오스'라고 하는데 공동번역에서는 '자비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자비'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는 것으로 사용된다. 이 단어는 22:37-40의 내용을 참고하여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 -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 신뢰, 신용, 약속, 서약, 증거, 담보, 보증, 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신뢰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가지 종류의 단어, 의,인, 신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보일 수 있지만 의, 신, 인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버렸도다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버렸다'로'공동번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 여기서 예수의 치밀함을 엿보게 된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인의 십일조 행습은 무조건 비판을 가할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모두 지켜야 할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의미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하는 예수의 선언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십분의 일세를 바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정의와 자비와 신의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는 형태로 번역되어 있다.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마 23: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소경된 인도자여 - 이 구절은 3번째 저주문의 시작인 16절과 똑같은 문구이다.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실에 대해 또다른 형태의 비판을 가하기 위해서이다. 그러기 위해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면서 다음의 비유를 말하고 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
비유적이면서 상징적이고 과장된 표현이다. 하루살이와 약대를 극적으로 대비시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분하였는데 이러한 과장법은 19:24에도 나타나고 있다,특징적인 과장법들). 한편 여기에 나오는 하루살이는 팔레스틴 기후에서 흔한 곤충이자 가장 조그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하루살이는 담근 포도주통에 몸을 던지곤 했는데,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나 음료로 사용하기 전에 채로써 포도주를 걸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정한 곤충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나마 그것을 섭취함으로써 부정을 덧입을까 해서이다. 그리고 약대는 팔레스틴에서 가장 몸집이 큰 짐승으로 취급되었으나
이것 역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동물로 간주되었다. 이와같이 부정한 곤충과 동물을 비유로 들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부정적인 것으로 강조한다. 더욱이 그들이 삼킨 약대는 곧 그들의 무한정(無限定)한 탐심과 육체적 향락 및 무절제한 죄악을 암시한다.
여하튼 이 비유는 네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 요약하고 있다. 즉 하기 쉬운 일에는 생색을 내며 자랑하고 어려운 일에 대해서는 무른 척 하여 책임을 피해가는 위선적인 종교인에 대한 비판이다.
[마 23: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이 시작된다. 여기서는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제정될 의식적 정결에 관한 것과 관계가 있다. 여기서 '잔과 대접'은 먹고 '너는 그릇을 통칭한 말인데, 이것을 정결히 한다함은 곧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표면적이고 가식적인 율법적 청결을 빗대어 묘사한 것이다.
실제로 잔과 대접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종교적 의식보다는 음식을 깨끗하게 담기 위함이다. 따라서 물론 안팎을 모두 깨끗이 해야 되지만 우선적으로 깨끗이 해야 할 부분은 그릇 안쪽일 것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릇 안을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다.
다시 말해 정작 중요한 것은 속마음인데 겉으로는 거룩하고 깨끗한 척하면서 속마음은 탐욕과 방탕으로 채웠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네번째 저주 선언문인 23,24의 내용과 비슷하다.
탐욕과 방탕으로 - 탐욕'은 헬라어로 '하르파게라고 하는데 '강탈', '약탈', '도둑질'이라는 뜻을 가졌다. 이는 주로 물질적인 측면의 죄악을 암시한다. 그리고 '방탕'은 헬라어로 '아크라시아'인데 그 뜻은 '자제력 상실','무절제'이다.
이는 주로 윤리적 측면의 범죄를 암시한다. 한편 이 내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수 있는 구절이 7:15의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마음속에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즉 남의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은 실제로 남의 것을 착취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강조점은 악한 마음과 동시에 그 악독한 마음에서 비롯된 그들의 행위를 비판하는데 있다고 하겠다.
[마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소경된 바리새인아 깨끗이 하라 - 이 본문은 진지한 충고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소경된 바리새인'라는 호칭은 24절의 형태를 따랐지만 구체적으로 바리새인을 지칭하였고 복수형이 아닌 단수형을 사용하고 있어 더욱 강렬한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이 24절과 다르다. 눅 11:41의 평행구는 조금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즉 "안에 있는 것을 '구제하라'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이다.여기서 '구제하라'는 말은 아람어로는 '깨끗하다'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누가복음과는 의미상의 차이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이 본문의 전체적 의도는 다섯번째 저주 선언문의 내용이 갖는 목적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 목적은 속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이다. 물론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의'(義), '인'(仁), '신'(信)에 입각하여 행실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로, 결국 위선된 자기 생활로부터 전적으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즉 회개하고 거룩에 이르라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는 것과 행실을 바꾸는 것은 먼저와 나중이 없다.
실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와 나중으로 구별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겉치레와 외식에만 치우쳐 있는 그들의 편협(偏狹)한 생활을 비판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