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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사도행전 5,27-33
요한 3,31-36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순절 날, 베드로 사도, 단 하루만에 삼천명 회개시킴!’
‘베드로 사도, 예루살렘에서의 기적! 다리 저는 이를 낫게 하다!’
‘사도들을 기만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 그 자리에서 즉사!’
‘초대교회 공동체에 낯뜨거운 추문 발생, 그리스계 유다인 과부들의 식량배급에서의 푸대접!’
‘초대교회의 희망 스테파노 부제, 장렬히 순교!’
루카에 의해 저술된 사도행전을 읽고 묵상하다보면 마치 오늘날 조간 신문을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신자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했는지?
어떻게 살고자 노력했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기에, 초대교회의 신앙과 공동체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좋은 지침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물론 성경 전체의 최종적인 저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그때 당시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언제나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신자들은 물론이고,
더불어 바로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의 신앙을 키워주고자 저술된 책입니다.
사도행전을 봉독할 때, 본문의 내용을 나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본문 내용을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받아들이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본문 내용을 나 자신의 걱정과 욕망, 나 자신의 희망과 좌절로 이해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때 사도행전의 한 말씀 한 말씀은 곧 나를 위한 하느님의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사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한 저자에 의한 하나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루카 복음서의 2부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으로 꽉 채워져 있다면,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향하는 사도들의 여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결국 사도행전은 하느님의 말씀이 어떻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고 있는가를 소개합니다.
사도행전의 주된 관심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하느님의 영, 곧 성령께서 살아계심을 입증하는 것, 역동적인 선교의 힘이 존재하는 것, 사도들을 비롯한 복음선포자들의 열정적 활동을 소개하는 것, 엄청난 저항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확장되는 주님의 복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좀 더 성장하고 쇄신되기를 희망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우리 모든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은 사도행전 속으로 깊이 들어가봐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성공적으로 복음을 선포한 가장 큰 비결이 무엇이었는지 유심히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다양한 도전과 위협 앞에서도 어떻게 똘똘 뭉쳐 앞으로 나아갔는지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베드로 사도 등 교회 지도자들은 어떻게 신자들을 사목했는지?
초대교회 공동체 평신도들은 어떤 모습으로 기도하고 살아갔는지?
거듭 숙고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살기등등한 유다 최고 의회 법정 대사제 앞에서도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은 조금도 거칠것 없이 주님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행전 5장 29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5월2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독서 : 사도행전 5,27-33
복음 : 요한 3,31-36
<하늘을 나는 법>
한 중년 신사가 몹시 심한 비바람 속을 나는 큰 항공기에 탔습니다.
비행기의 크기와 네 개의 엔진의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비행기는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때 그의 옆자리에는 아홉 살 가량의 소년이 앉아 있었는데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는 소년은 온통 두려움으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소년이 신사를 올려다보며 “아저씨도 무섭죠?”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사는 미소를 지으며 “아니, 이건 정말 재미있는 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년에게 금방 변화가 왔습니다.
두려움과 긴장으로 떨던 소년의 얼굴은 그의 본 모습대로 개구쟁이로 돌아갔습니다.
사람은 위로부터 날 수도 있고 아래로부터 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고 하십니다.
모든 것 위에 계신다는 말씀은 마치 물 위를 걷는 것처럼, 하늘을 나는 것처럼 이 세상 것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아이는 신사의 말을 믿어 세상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를 위로부터 난다고 합니다.
위에 계신 분의 말씀을 믿었기에 위로부터 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세상을 즐기고 싶다면 세상에 속해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위에 서야합니다.
물속에 빠져서는 물을 즐길 수 없습니다.
파도타기를 하던, 윈드서핑을 하던, 요트를 타던 물 위에 있어야합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주문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물 위에 뜰 수 있는 배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물 밑이 아닌 물 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이와 같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슈퍼맨이 되어서 하늘을 나는 꿈을 자주 꾸었습니다.
실제로 날다가 배가 까진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하늘을 어떻게 날아야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 것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하늘로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 어떤 사람이 와서 형이 자신의 유산까지도 다 가로챘다고 형에게 자신에게도 유산을 나누어주라고 말해달라고 청했습니다(루카 12,13-15).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그런 일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그것이 정당한 일이던, 그렇지 않던 예수님은 세상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루는 헤라클레스가 길을 가다 괴물의 기습공격을 받았습니다.
헤라클레스는 그 괴물을 두들겨 쓰러뜨린 후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 3~4배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더 센 힘으로 때려 눕혔는데 이번에는 더 커진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 커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자 헤라클레스는 아테네 여신을 찾아갔습니다.
아테네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괴물의 이름은 ‘다툼’인데 때릴게 아니라 못 본 척 놔두면 저절로 작아져 힘을 못 쓴다네.”
심을 가질수록, 생각을 할수록, 말을 할수록 그것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커져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이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들이 세상 것일 때는 내 안에서 괴물이 되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됩니다.
하늘나라의 신민이 된 우리는 세상 것에는 관심도 없고 생각도 하지 말고
말도 피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일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3,31-38 :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 위에 계시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위에서 온 뿌리에서 나셨고, 당신 안에 본성적으로 아버지의 선하심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기에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기 때문에 탁월한 분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왔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 참되고 거짓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따르려 하지 않는다.
신앙인으로서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참되심을 증언하는 것이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인간은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그분을 닮아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위에서 오신 분의 말씀을 따른다면, 그는 진리가 하느님께 가깝고 소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다. 말씀을 따름으로써 그분이 참되심을 고백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34절) 아드님이 아버지의 말씀이시다. 우리도 말을 하려고 할 때에, 말하려는 개념이 이미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의 말이 되어 표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도 말씀을 품으셨고, 아드님을 낳으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낳으셨으며 아드님을 통하여 시간을 창조하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아버지의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을 성령 안에서 하신다. 이 아드님은 성령을 온전히 지니고 계시며, 친히 성령을 부어주시고 우리는 그분께 성령을 주십사고 청한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주셨다.”(35절)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외아들로서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분 손에 모든 것을 내주셨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아들이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은 당신과 같은 존재이시므로 또 다른 당신을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유일한 말씀이시자 지혜이신 그분은 본질적으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을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시다. 단지 그것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셨다는 것이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6절)그러나 아드님을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과 관련하여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믿음은 착한 생활과 행동이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36절)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는 것은 치유 받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분을 믿고 따른다면 하느님의 분노가 떠나고 생명이 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3,18)고 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따라 그분을 닮을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용기와 지혜를 청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2019.5.2.목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295-373) 기념일
사도5,27-33 요한3,31-36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영원한 생명
-예수님이 답이다-
어제 5월1일 용인에서 있었던 말씀의 성모 영보 수녀회 종신서원식에 참석했습니다.
잘 아는 지인의 따님인 이 분다 수녀 한 분의 종신성원식날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시련을 믿음으로 잘 통과하고 본격적 ‘예닮의 여정’에 오른
이 분다 수녀에게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오늘은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 안토니오의 전기’를 쓰신 분으로 참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하느님 은총으로
78세 장수를 누리신 성인이십니다.
평생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 이단에 대항해 ‘참 하느님이시며 참 사람’인
예수님을 선포하셨고, 믿음의 싸움중에 다섯 번이나 유배당했던 백절불굴,
믿음의 용사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입니다.
성 바실리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오와 함께
동방의 4대교부라 일컫는 분입니다.
얼마전 사진 작가 자매와의 주고 받는 카톡 메시지가 생각납니다.
요즘 신록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의 수도원 길이 하도 신비롭고 아름다워
자주 지인들에게 하늘길이란 명명하에 사진을 보내 드리곤 합니다.
“이 길은 1년 365일 아름답습니다.”
문득 ‘1년 365일 아름다운 영혼이면 얼마나 좋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어
즉시 주고 받은 덕담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영혼도 365일 아름답습니다!
사진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신비를 관상하니 자매님은 하느님의 신비가요 관상가입니다.”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더 아름답게 쓰란 말씀으로 새기겠습니다.”
재치있는 겸손한 답변이 일품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혼은 365일 아름답습니다.
이레네요 성인은 살아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이라 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빛나는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하는 생생한 진리입니다.
마침 며칠전 수도원 배경의 신록의 축제 한창인 불암산을 보며 쓴글도 생각납니다.
-봄/여를/가을/겨울
해마다/세월 흘러/나이 들어 늙어도/언제나 새롭고 좋은 산
늙어도 낡지 않는 산
매력있다/바라봄 자체가/위로와 치유다/평화와 기쁨이다
사람도 산처럼 그렇게 살 수는 없나
늘 새롭게 좋게!-
주님은 전례를 통해서만 아니라 신록의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생전 처음 피정 왔다는 어느 자매도 ‘수도원이 너무 아름다워 깜짝 놀랐다.’고 고백했습니다.
하여 주님의 평화를 찾아, 또 자연을 통해 주님의 위로와 치유를 찾아 많은 분들이
수도원을 찾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전례와 자연은 물론, 사람을 통해서도 치유와 위로를,
평화와 기쁨을 선물로 받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을 닮은 ‘예닮의 사람들’이 사도들이요 성인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이 답입니다.
우리가 평생 사랑하며 닮기를 추구하는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이 예수님의 신원을 환히 밝혀 줍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께서 한량없는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을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그분 손에 내 주셨다.”
위에서 오시는 분, 하늘에서 오시는 분, 친히 아버지께서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시는 분,
하느님의 한량없는 신뢰와 사랑을, 성령을 받는 분,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받으신 분,
바로 이 파스카의 예수님을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이런 우리의 모두이신 주님을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입니다.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른다.”
아드님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입니다.
믿을 때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되는 영원한 생명의 구원입니다.
새삼 믿음 역시 은총임과 동시에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좋아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순종을 통해 확인되는 믿음입니다.
아드님을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합니다.
아드님께 순종하는 자는 바로 진리이신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입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영원한 생명이요 성령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베드로와 사도들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대사제에게 심문받는 베드로와 사도들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당당합니다.
오히려 사도들에게 심문받는 대사제처럼 보입니다.
베드로의 답변은 그대로 사도들의 핵심적인 선포내용이자 설교의 짧은 요약입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순종하는 이들이게 주신 성령도 증인이십니다.”
부활의 증인들인, 파스카의 주님의 증인들인 사도들이요 우리들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영도자요 구원자입니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선사되는 성령입니다.
바로 파스카의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어 당신 부활의 증인들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행복기도’중 한 대목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이제부터는 ‘예닮기도’라 부르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