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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바이러스가 바꾼 우리의 일상,
뉴욕 대보살 선당 (Dai Bosatsu Zendo 大菩薩禪堂)
온라인 법회를 시작하다
글 | 홍성미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학교는 문을 닫았고, 직장인들도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재택근무를 한다. 월급쟁이가 그나마 다행이라는 말도 한다. 작은 식당이나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벌써 한 달 넘게 가게 문을 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긴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더욱 지치게 만드는 것 같다.
여러가지 변화 중 필자의 피부에 가장 와 닿는 것은 교육환경의 변화다. 대학 뿐만 아니라 초중고, 유치원까지 모든 수업이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되었다. 배우는 학생들도 가르치는 교사들도 새로운 교육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대학 과정에선 별 문제가 없겠지만, 학생과 교사가 직접 만나지 않고 이루어지는 초중고 학생들의 온라인 수업은 COVID-19라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아마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카드가 없는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들은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어쩌면 다가올 미래의 새로운 교육 플랫폼이 될지도 모르는 이러한 가상 학습 환경을 체험하고 있다.
교육이란 지식을 쌓는 것 만이 목적이 아니다. 특히 나이가 어린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들의 경우는 더 그렇다. 이때는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또래 집단 안에서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은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타인에 대한 이해, 더 나아가 조화를 통해 그들과 함께 지내는 법을 학습과 체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침팬지 100마리가 앉아 있는 스타벅스에 홀로 들어가 커피를 한 잔 사고, 무사히 살아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집단은 오직 인간들 뿐이라고 한다. 인간은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고도, 나와 다른 무리 속에 들어가 함께 공생할 수 있을 정도의 진화를 이루었고, 이러한 차이는 인간이 모든 동물계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로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가장 인간적이고 또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배운다. 한 사람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다양한 과정들이 필요하다. 단순 지식을 습득하거나, 어떤 고유 분야에 대한 연구는 어쩌면 누군가를 직접 만나지 않고도 가능한 영역일 수 있다. 하지만 물리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사회성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등이 그것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어쩌면 사람들은 가상 환경에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경계를 조금은 더 분명하게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는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성 유행병이 마치 연래 행사처럼 인간의 삶에 밀접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한다. 더 어렸을 때부터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과 사회성을 배양할 수 있는 창의적이고 집중적인 교육들이 절실해질 지도 모르겠다.
코로나로 인한 변화는 비단 교육 환경 뿐만이 아니다. 이 메일을 열어 보면 그 변화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뉴욕의 미술관, 도서관, 카네기 홀이나 링컨 센터, Broadway Direct과 같은 문화 관련 단체들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을 위한 다양한 온라인 문화 공연과 미술 서비스를 제공한다. 사람들의 답답함을 해소시켜 주기 위한 작은 노력들이다.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대한 염려의 목소리도 늘고 있다. 모든 사회 활동이 멈추고 갑자기 자가 격리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심리 변화를 재미있게 풍자한 그렇지만 결코 웃기만 할 수도 없는 영상들이 회자되기도 하는데, 타인과의 교류가 차단된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우울증과 같은 증상을 앓고 있던 사람들은 감정 기복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데 앞장 서 왔던 많은 명상 센터들과 영성 지도자들의 사회적 역할과 조언이 더 절실한 요즘인지도 모르겠다.
다양한 영성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제공해 왔던 미국 동부의 오메가 인스티튜드(Omega Institute), 게리슨 인스티튜드(Garrison Institute), 통찰명상회(Insight Meditation Society=IMS), 달마 드럼 센터(Dharma Drum 법고산사) 등 많은 명상 전문 센터들도 화상 회의 어플을 이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이메일을 통해 보내고 있다. 또한 개인 워크샵과 리트릿트(retreat, 안거)을 통해 명상과 요가를 지도하던 영성 전문가들도 화상 만남을 통한 명상과 요가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제공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무료다. 미리 등록을 하고 시간에 맞춰 접속한 후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된다.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 온라인 법회를 시작하다
미국 불교계의 경우에는 뉴욕 북부 캐츠킬(Catskill)에 위치한 임제종계열의 사찰 다이 보사주 젠도(대보살 선당,Dai Bosatsu Zendo)가 온라인 법회를 시작하며 코로나 상황에 빠르고 적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다. 보사주(Bosatsu)는 산스크리트어로 “보살”을 뜻하는 일본식 발음으로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를 한국어로 해석하자면 “대보살 선당”으로 부를 수 있다.
일본의 전통 사찰 양식을 그대로 본떠서 지은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는 서양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일본 사찰의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는 불법승 삼보를 상징하는 Threefold Sangha 라는 이름으로 이번 온라인 법회를 열었다. 1976 년에 완공된 후 승려들이 머물며 다양한 불교 행사와 탬플스테이를 제공하고 있는 아름다운 캐츠킬(Catskill) 산맥에 위치한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 1968년에 설립되어 최초로 임제종 계열의 일본 선불교를 서양에 소개했던 뉴욕 맨해튼 업퍼이스트에 위치한 뉴욕 젠도(New York Zendo), 그리고 1956년에 불교 학자 D.T. 스즈키가 일본의 선불교를 서양에 알리는 것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일본 선불교 단체 중 하나인 젠 스터디 소사이어티( The Zen Studies Society)가 모두 같은 소속이다.
로코 스님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는 주지 스님과 이사회가 공동 운영을 한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미국 여성 불자였던 신지 로코 로쉬 (Shinge Roko Sherry Chayat Roshi)가 주지가 되면서, 일본 전통 불교의 모습 그대로 서양에 뿌리를 내리고 싶어했던 초대 주지들의 염원과 달리 현재는 90% 이상의 신자와 이사진들이 서양인들로 채워지며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는 미국화된 불교의 길을 걷고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돌발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같은 문화를 공유하는 스님과 신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빠른 소통과 결정의 결과가 아닐까 한다. 주지 스님인 신지 로코 로쉬 (Shinge Roko Sherry Chayat Roshi)는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 뉴욕 젠도(New York Zendo), 젠 스터디 소사이어티( The Zen Studies Society), 그리고 사라큐스 젠 센터(Zen Center of Syracuse)의 주지를 모두 총괄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자, 다이 보사주 젠도(Dai Bosatsu Zendo)는 사찰의 모든 행사와 일정을 취소하고, Zoom이라는 화상 회의 어플을 이용한 법회와 Weekly 명상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공안을 공부하는 신자들과 학생들을 위한 스님과의 독대(Interview)도 화상으로 이루어 진다. 정식 법회는 일주일에 두 번,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11시 30분, 목요일 저녁 7시부터 8시 30분에 Zoom을 통해 이루어 진다. 그리고 초심자들은 금요일 저녁 7시부터 8시 30분에 있는 법회에 미리 참석한 후 본 법회에 참가해야 한다.
이러한 화상 법회는 젠 스터디 소사이어티 ( The Zen Studies Society)와 사라큐스 젠 센터 (Zen Center of Syracuse)의 주관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법회는 좌선으로 시작하는데, 화상 참가자들은 30분 동안 함께 좌선을 한 후, 주지스님의 법문을 듣는다. 그리고 법문이 끝나면 서로 질문을 하고 답을 듣는 단체 토론( group discussion) 시간을 갖는다. 이러한 정식 법회 이외에도 일주일 내내 좌선 시간(Open Zazen)이 열려 있다. 사라큐스 젠 센터(Zen Center of Syracuse)의 주관으로 이루어지는 좌선 시간(Open Zazen)은 시간이 허락되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고, 30분, 40분, 또는 1시간으로 이루어진 좌선을 인터넷 공간에서 함께 한다. 또 불교를 공부하는 스터디 그룹 활동도 온라인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수업을 주관하는 담당 선생님이 화상 회의의 호스트(Host)가 되어 강의를 진행한다.
사실 평소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Zoom과 같은 화상 회의 어플은 모두에게 낯설고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용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구든지 한 번만 해보면 쉽게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그 한 번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법회를 듣기 위해 참석한 신자들이나 화상 법회의 기술적 진행을 돕는 운영자들 모두 함께 배우는 자세로 Zoom을 이용한 화상 법회를 진행했다. 코로나19 라는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자 하는 작은 마음들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닌 물리적 거리두기
주지 스님인 신지 로코 로쉬 (Shinge Roko Roshi)는 법문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란 용어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필요에 의한 물리적 거리두기는 한시적으로 있을 수는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또 인터넷이라는 환경을 통해 사회적 유대감이 오히려 더 견고해 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법회의 장점은 멀리 있는 사람들도 거리에 상관없이 한자리에 모여 법회를 보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이기 위해 부담해야 하는 시간적 물질적 비용없이 인터넷을 통해 만날 수 있다는 건 어떤 면에서 볼 때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닌 사회적 거리 좁히기에 탁월한 해법처럼 보이기도 했다.
코로나 19가 수면 위로 떠 올리는 것들
맨해튼에는 오후 7시가 되면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환호성을 지른다. 지나가는 차들도 이에 응답 하듯 경적을 울리며 약 5분간의 동네 축제가 열린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재택 근무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웃에게 서로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동네 스타벅스가 온라인 주문을 받으며, 문을 열자 가게 밖 주변에 사람들이 모인다. 물론 그들은 주문한 커피나 음식을 기다리고 있지만,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함께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며, 왠지 그들이 목말라하고 있는 건 익숙한 스타벅스의 커피 맛과 향기가 아닌, 타인의 응시를 통한 존재감, 그리고 그 존재 확인을 통해 무의식이 느끼는 안정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19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존재하는 사회적 동물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군중 속에 고독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외로움이란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있고 없음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의미 있는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그 핵심이 있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타인과의 의미 있는 교류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도덕성과 투명성이 요구되는 사회
코로나19 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어쩌면 우리 한국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의 대응을 보며, 우리국민이 얼마나 품격 있는 도덕성을 갖고 있었는지 그리고 투명성이 오히려 문제를 더 빨리 해결할 수 있는 핵심 열쇠라는 것을 직접 체험한 것이다. 또 돈만 많으면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고정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부의 크기가 인간의 양심, 도덕성의 크기와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세계의 많은 석학들은 코로나 전과 후 인류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견한다. 미국의 경제 공항 당시와 지금의 경제 지표들이 유사하다는 점을 들며, 역사적 시각에서 다가 올 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인류의 미래는 철저하게 오늘의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투명성(clarity)과 협력 (collaboration)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방역 접근법과 중국을 포함한 미국, 유럽 국가들의 대응 자세는 극과 극이었다. 한국은 투명성을 바탕으로 국민들의 협조를 통한 해법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반면 다른 국가들은 사상 유래가 없는 국경 폐쇄와 도시를 통째로 닫는 고강도 격리 정책을 택해야만 했다. 물론 초기 대응 시기를 놓쳤다는 이유도 있지만, 정부와 국민간의 신뢰가 없다면 투명성과 협력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한 투명성과 정보 공유, 서로에 대한 아낌없는 협조만이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콜라보레이션의 시대로
경쟁에서 협력을 강조하는 인식의 변환은 교육계에서 먼저 있었다. 북유럽의 교육이었다. 영국이나 미국식 경쟁 모델이 아닌 학생들의 협력(collaboration)을 강조한 북유럽의 교육, 그리고 그 학생들이 OECD 학력 평가에서 1등을 차지하며, 세계의 모든 교육계가 북유럽의 교육 모델을 연구하기 시작했었다. 작은 바이러스가 전세계에 융단폭격을 날리며 세상을 멈춰 세운 지금, 경쟁이 아닌 협력이란 인식의 변화는 교육계 뿐만이 아닌 지구촌 전반에 걸친 대대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장이라는 무한 경쟁의 공간이 성장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과열된 경쟁의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성장의 목적을 망각한 채 승부에만 집착을 하게 되었다. 경제발전도 마찬가지다. 경제발전을 통해 우리가 원했던 것은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더 안전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애초에 왜 우리가 그 길을 떠났는지 그 목적을 망각한 채 경제발전이라는 수단에 매몰되어 우리의 많은 소중한 가치들을 희생시켜 왔다. 코로나 19는 오랜 시간 어긋나 있던 이러한 인식의 축을 바로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이러스는 국경이 없다. 환경도 국경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코로나 사태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세상을 바꾸는 건 사람들의 힘이다. 경쟁에서 나눔과 협력의 시대로, 나부터 바꿔야 세상도 바뀐다.
적응력과 창의력은 인간이 가진 두 개의 열쇠다
필자의 동네에는 작고 오래된 유대인 빵집이 하나 있다. 필자는 아침마다 그 빵집에서 문자를 받는다. 신선한 빵이 나왔다는 소식과 온라인 주문과 배달에 대한 정보들이다.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대처하는 탁월한 적응력을 보며, 그 작은 가게가 오래 생존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연도 행운도 아니었다는 생각을 했다.
인류가 가진 가장 위대한 희망은 적응력과 창의력이라고 빌 게이츠는 말한다. 인류는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해 힘든 시간을 적응해 왔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의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은 채 검사하기(드라이브 스루)나 빠른 진단 키트 개발 등과 같은 창의력을 통해 위기에 대처하는 탁월한 적응력을 보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는 국가라는 한계를 넘어 지구촌이라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아낌없이 채워줄 때 인류의 미래가 있다고 말한다.
보살이 더 절실히 필요한 시기
빌 게이츠 재단은 세계 보건 향상이나 환경 개선을 위한 사업과 개발 지원을 많이 한다. 그는 돈이 많은 자선사업가라서 후진국들의 보건 향상을 위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세계가 하나라는 정확한 사실에 근거해 그들의 건강이 우리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냉철한 판단력을 통한 계획된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판단과 인식은 단지 빌 게이츠와 같이 거대한 부를 가진 몇몇 자선 사업가들만의 깨달음으론 부족한 시간이 왔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의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한 작은 변화와 실천에서 시작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인류의 문명사적 대전환을 암시하는 전주곡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카드를 고를지 그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우리는 새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 이삿짐을 정리한다. 평소 무심코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따져 보며, 버릴 것과 가지고 갈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버릴 것은 무엇인지, 또 가지고 가야 할 것은 무엇인지 자기 자신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작업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빌 게이츠의 모습에서 보살이 보이는 듯 했다. 우리도 역시 그동안 수행을 통해 갈고 닦았던 보살의 진정한 실력을 발휘해야 할 시간이 다가 왔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