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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등산계의 명함들입니다.
등산계 상급단체와 등산잡지사 그리고 명망가들과 산사진관련, 관광관련 해서 20장입니다.
명함속에 담겨있는 일본 등산가들의 멘탈리티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는 기회가 될거고요.
또 겸사로 이런저런 일본 등산계와 우리 산악계에 관한 이러저러한 교양소설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기대하는 건,
오래된 명함집을 정리할 때에 "등산박물관"을 떠올릴 인연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오래된 옛 명함집들, 결국에는 소리소문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함께 모이면 산악문화의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우치노 신이치, 우치노 가오리 부부의 명함이다.
구글에서 우치노 가오리라고 검색하면 북알프스와 한국에 대한 그들의 애정을 엿볼 수 있다.
아내인 가오리상은 한국에 유학을 온 적이 있어 현재 한일간 등산교류에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한국과 친한 일본인 프로 가이드 중에 야스무라 쥰 상도 있다. 지금 이 사진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 상상 밖이 아닐까 싶다.
*사진출처
그리고 히로세 등산학교를 운영하는 프로산악가이드 히로세 노리후미 도 있다.
2010년 인수봉과 백운산장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출간하였다고, 그와 각별한 사이인 이규태 성균관대 산악부 OB가 통역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손에 들고 있는 빨간 책을 말할 것 같은데 내용이 어떨까 궁금하다.
이 두사람을 통해 인수봉을 오른 일본인들이 최소 사단병력은 될 것이다. 두 분의 명함을 갖고 싶다.
나카무라 타모츠 선생의 명함.
그냥 '일본 산악회 회원'이라고만 적고 있다. 멋있다.
하단에 일본 알파인 뉴스 편집장(지금은 아시아 알파인 뉴스)이라고만 적혀 있군.
나카무라 타모츠에 대해서는 --> 여기를
대학교수이자 일본산악회 회원. 그리고 일본 산서회의 회원 마사토 오키교수,
작년 한국산서회 '회보'에 '일본산서회'의 내력에 대해 기고한 좋은 글이 있다.
재작년 그가 내한했을때, 한국산서회 회원들과의 환담 자리를 보시려면 --> 여기를
일본산악회 창립 110주년 기념해서 일본의 산악계의 총화로 만든 대작 ' 인도 히말라야'의 편집을 맡았다. 이 책의 저자엔 최초의 여성 황금피켈상 수상자인 고 다니구치 케이도 있다.
마사토 교수는 이 책의 편집을 맡아 일본산악협회에서 시상하는 제6회 일본산악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이 상은 등산, 클라이머 그리고 산악문화연구자를 대상으로 한다.
이 책은 산악서적 전문 출판사인 '하루재 클럽'에 의해 금명간 번역되어 나오는 걸로 알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두개의 등산 장비사를 들라면, 몽벨과 스노피크가 되지 않을까.
몽벨 의류는 뭐랄까 한국에서 일본에서만큼 지명도를 갖지 못한데 반해, 스노피크는 남다르다.
스노피크 야마이 토루 대표이사사장의 명함이다. 재생지같다.
우리말로 이사에 해당하는 취체 또는 취체역(取締役)은 일본어로 '도리시마리야쿠'라고 읽는다.
'산과 계곡사'의 전 대표이사겸 사장인 아키하루 아와츠의 명함.
얼마전 월간 산이 '50년'이 되었는데, 일본의 등산잡지사 '산과 계곡'은 1930년에 태어났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재 세계 최고(最古)의 등산잡지라고 한다. '산과 계곡사'라는 글씨도 창립때부터 변함이 없다.
가와사키 미유키는 "산과 계곡사" 창립자인 가와사키 요시조(川崎吉蔵)의 손녀딸
이름이 미유키 또는 신세츠로 읽는 심설(深雪)이라니, 참으로 등산가 집안답다.
그녀는 동경에서 태어나, 전(前) 황후와 현 황후 그리고 피천득의 아사코와 성심여대 동문이다.
졸업후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도 근무했다고 하니 영어는 물론 독일어에도 능통하시겠다.
가와사키 미유키는 현재 사장직을 맡고 있다.
산과 계곡사는 임프레스 그룹 소속으로, 이 출판 그룹의 일년매출은 150억원정도 된다고 한다.
아시아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기와라 히로시 "산과 계곡사" 편집장의 명함.
2016년 아시아 황금피켈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한 나카무라 선생과 함께 한 일본측 인사들.
우측이 하세가와상, 우측에서 두번째가 가와사키 상
타나베 오사무.
명함 참 단촐하다. 토카이산악회, 신슈대학산악회. 일본 히말라야 협회 그리고 일본산악회.
시골 할배 같은데, 그(田辺治)는 특히 2006년 로체 남벽을 초등정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등산가이다.
그의 성정은 같은 시기 한국로체원정대의 기록이 잘 보여준다.
6일 저녁은 일본팀이 초대한 식사모임이 있었다. 왕궁 정문 인근의 고도(古都)라는 일식집이었는데 우리측 전대원이 참가하고 일본은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참가했다. 일본 원정대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정중했다. 다나베 오사무(45) 대장은 우리 팀을 손님이라며 상석에 앉길 권유했고 이충직 대장은 연장자인 다나베 대장에게 상석을 극구 사양하며 양보했으나 다나베 대장이 손님이라며 완곡한 요청으로 끝내 앉게 되었다.
정갈한 음식이 순서대로 큰 접시에 나왔고 이를 덜어서 각자 먹는데 다나베 대장은 이충직 대장과 한국 대원들이 먼저 들도록 권했다. 일본 팀 전원은 반주로 나오는 맥주는 물론 심지어 물까지 먼저 마시길 권유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에 일본팀에서 마무리하는 변(辯)을 이충직 대장에게 요청했고 이 대장은 한국팀 .일본팀 모두 남벽등정을 하고 무사하게 돌아가서 나중에 서울 인수봉 등반을 합동으로 하자고 인사말을 했다. 이에 다나베 대장과 대원은 흔쾌히 박수로 화답했다.
인사말이 끝나자 다나베 대장은 로체남벽 사진을 꺼내 보이면서 낙석과 눈사태로 주의할 구간, 난이도가 높은 구간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다나베 대장은 베이스캠프 자리가 협소한 관계로 반씩 공정하게 나누어 갖자고 지도를 그려와서 우리 측에 제의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한국팀에 대한 일본팀의 이토록 자상한 배려와 예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게 특별히 없는데 말이다. 잘 사는 선진국 국민, 또는 '친절한 일본인'이라고 하기에는 그리 평범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념과 국경과 종교를 초월한 산악인 고유한 정신세계의 또 다른 모습이라 믿고 싶다.
다나베 대장 옆에는 동갑인 전형적인 일본 여성상인 부인이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녀는 항상 메모를 했다. 우리의 모든 대화를 모두 기록했고, 또한 가끔씩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질문을 해서 자신의 기록에 추가했다. 다나베 대장은 항상 부인과 동행하는데 자신의 개인 비서역도 맡아서 하며, 대부분의 원정등반에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한다고 했다. 특이한 것은 일본팀에는 별도의 베이스캠프 매니저가 있는데 곧 일본을 출발해서 나중에 합류할 예정이라고 했다.
일본팀 대원들의 특성은 대부분 산에 열정적으로 몰입해 있는 시기의 산악인들이었다. 직업을 보면 산장관리인, 등산가이드, 장비점 직원, 등산아카데미 강사 등등으로 장기간 원정을 떠나는 젊은 산악인의 직업 특성에 있어서 한국와 일본은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이제는 사라진 '마운틴'지의 이영준 기자가 그와 인터뷰한 기사가 있다. 나에게 그 기사는 '독도'너머에 있는 일본의 산악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충격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운틴지가 사라진 지금은 그 기사를 만나기 어려운데, 이마저도 사라질까봐 사진파일없는 텍스트 기사를 전재한다. 일독을 강권한다.
오사무 다나베는 우에무라 나오미 이후 일본 산악계의 맥을 잇는 알피니스트라고 할 만큼 첨예한 등반을 여러 번 해온 인물이다. 그는 2008년 열린 아시아황금피켈상 후보에 오르며 한국을 처음 방문했었는데, 2006년 겨울 일본 로체 남벽 원정대 대장으로 팀을 이끈 것과 함께, 자신이 2차 등정조로 난공불락의 남벽을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을 계기로 한국 산악계에도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굳게 다문 입술과 그을린 얼굴, 거친 수염, 그 속에 빛나는 눈동자에선 결코 하루 이틀 만에 덧바를 수 없는
산에서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건 세로쓰기로 된 빛바랜 고전을 들췄을 때 맡았던 냄새와도 같았다.
1980년 나가노 현의 신슈대학교(信州大學)산악부에서 등반을 시작한 오사무 다나베는 1982년 가네시히말3봉(7111m·현재는 2봉으로 바뀜) 등반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25차례 히말라야 등반대에 참가했다. 늘상 텔레비전이나 스포츠신문을 장식하는 최단, 최대, 최고의 잣대로 본다면 30여년의 세월동안 25차례라는 숫자는 별 의미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는 8000m급 고산이라곤 고작 11번을 등정했고 개수로는 9개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그의 행보에서 읽을 것은 숫자가 아니라 내용이다. 오사무 다나베가 오른 8000m급 봉우리 9개 중 4개는 신루트 등정과 동계초등 등의 특별한 기록을 갖고 있다. 7000m급에서는 로부체캉, 갸지캉, 란타출리 등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의 산들을 초등했고, 지난 가을에는 미답봉이던 네팔의 리줌(7050m)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하기도 했다. 1박2일간 함께 야리가다케(3180m)를 오르며 나눈 그와의 짧은 대화에서는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이 듬뿍 묻어나와 내심 내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산을 오르는 동안의 침묵에서 나는 그 걸음에 담긴 진정한 산꾼의 내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탈을 오르내리는 그의 몸짓은 신중하고도 가벼웠으며, 후줄근한 차림새 속에서도 눈은 빛났다. 그와의 본격적인 인터뷰는 한국말에 능통한 본지 일본통신원 우치노 가오리씨의 도움으로 산에서 내려와서야 이루어졌다. 첫 질문은 “어떻게 산을 접하게 되었는가?”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행사로 이곳 야리가다케를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 산을 접하게 됐고, 대학교에 들어가 산악부에도 입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대학교에서 농학을 전공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와 관련한 일을 해본 적은 없으며, 대학 3학년 때 학교산악부에서 꾸린 가네시히말 원정대에 참가한 이후 줄곧 히말라야를 오갔고,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아직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등산가이드라고 소개했는데, 주로 60대 여성들을 상대로 산행을 안내해주며, 스스로 가이드라는 것을 따로 광고하지 않기 때문에 한두 명을 데리고 1년에 5~6번 정도만 북알프스를 찾을 정도로 그다지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느냐? 아내의 반응은 어떠냐?”고 묻자 그는 “아내는 내가 등산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 가장 가까이에서 응원해주는 사람이다. 적게 버는 대신 조금씩만 소비하고 사는 데 익숙해져 괜찮다”고 말했다. 지난 로체 남벽 등반 때도 그의 아내는 베이스캠프까지 동행했었다. 다나베는 “아내는 한국 드라마를 매우 좋아해서 텔레비전도 자주 보지만, 난 지금까지 아키하바라(일본 최대의 전자상가)에도 딱 한번, 그것도 등반 중 쓸 무전기를 사기 위해서 가봤다”고 말했다.
이메일도 없다는 그에게서 다니구치 지로의 산악만화 <신들의 봉우리>의 주인공 ‘하부 조지’가 떠올랐기에 그 책을 본적이 있냐고 물었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었다. 책에서 주인공은 동경의 찬란한 불빛을 뒤로하고 네팔에서 소박한 삶을 살며 동계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단독으로 시도한다. 그는 대신 북알프스를 무대로 한 이노우에 야스시의 50여년 전 소설 <빙벽>은 여러 번 읽었다고 말했다. 세로쓰기로 된 빛바랜 고전을 우연히 들췄을 때 맡았던 냄새가 그에게서 나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산행 중 다나베는 신은 지 20년 쯤은 되어 보이는 낡은 가죽등산화에 빛이 바랜 80년대 스타일의 빨간 배낭, 손에는 공사장에서 쓰는 목장갑을 끼고 이제 나오지도 않는 가지다(Kajitax) 피켈을 들고 있었는데, 그런 반면 복장은 나머지 장비를 전부 팔아도 사기 힘들 것 같은, 꽤 명품으로 알아주는 값비싼 브랜드를 입고 있어 의아한 생각이 들었었다. “스폰서가 있는가?” 묻자 꼭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몇해 전부터 일본 몬츄라에서 등산복을 후원받고 있습니다만 돈을 받는 것은 없습니다. 히말라야 등반을 갈 땐 주변 산악인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때문에 저는 여러 산악회에 가입하고 있습니다. 신슈대학교산악부OB회와 일본산악회 등 큰 규모의 산악회는 재정이 좋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또 일본히말라야협회와 지역의 토카이산악회에서도 크고 작은 지원을 해줍니다. 이런 도움들이 있을 땐 10만 엔에서 30만 엔 정도 개인비용을 들이고, 그렇지 않을 땐 1백만 엔 정도 돈을 털어 등반을 갑니다.”
오사무 다나베는 1997년 K2 등반 때 첫 대장을 맡은 이후 대부분 팀을 꾸려 등반을 했지만, 전부 그런 것은 아니라 때론 대원으로도 참가했었다. 가고 싶은 산이 있는데, 어떤 곳에서 등반대를 꾸린다고 하면 지원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에게 ‘다나베 대장’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저는 히말라야에 가는 것만으로도 매우 좋습니다. 그때 그때 가고 싶은 산, 가고 싶은 루트를 정하고 나면, 그 산에서 제일 효과적인 등반 방식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선택합니다. 그것이 알파인 스타일이라면 그렇게 시도를 하고, 극지법이라고 판단되면 또 그렇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등반스타일은 “꼭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등반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 첫 8000m 14봉 등정 이후 한국 사회에서 “우리나라가 14봉 등정자 4명을 보유한 산악선진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그의 생각은 어떤지, “일본은 산악선진국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일본은 아직 14개 봉우리를 모두 오른 사람이 없다.
“오은선씨는 행운 있는 산악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어떤 의미로 본다면 선진국이라 할 수 있고, 달리 보면 아닙니다. 일본에는 고산의 어려운 루트를 등반할 수 있는 클라이머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선진국입니다. 하지만 그 수가 매우 적고, 또 어느 곳을 오른다 한들 사회적 반향을 거의 찾을 수 없어 한편으론 선진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일본에는 매년 히말라야에 계속 갈수 있는 형편이 되는 산악인이 없다며 한국 산악인들이 물질적으로 매우 풍요롭게 등반하는 것 같아 부럽다고 했다. 자신은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동계초등하거나 로체 남벽을 처음으로 모두 돌파했을 때에도 산에서 내려와 강연 요청 한번 들어온 적 없고, 생활에서 달라진 것도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다나베는 지금까지 일본 내에서 스포츠 분야와 관련한 상을 몇 번 받았지만 메달이 전부라고 덧붙였다. 지난 산행 중 산장에서 다나베를 알아본 주인은 2천 엔짜리 와인 한병을 선물로 주었었다. 다나베는 “나는 조금 유명하지만, 산꾼들 사이에서일 뿐”이라고 말했었다.
“14봉을 전부 오른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내 목표는 처음부터 14봉이 아니었다. 만일 그게 나의 목표였다면 메스너 이후 고작 스물 몇 번째 등정자가 됐을 것이기 때문”이라며 “현재 12개를 오른 다케우치가 조만간 일본 첫 14봉 등정자가 될 테지만, 그건 그가 택한 삶의 방식일 뿐 이후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나는 거기에 응대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고작, “앞으로 10년 정도는 더 등반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에게 히말라야 등반 정보를 어떻게 얻으며, 누구와 함께 등반하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7~8년 전에 나온 <히말라야 명봉사전>이나 <산과 계곡>에서 나오는 <암과 설> 등의 잡지에서 기본적인 정보를 얻습니다. 하지만 주로 한 봉우리를 등반할 때 얻는 주변 산들의 사진과 정보에서 다음 목표를 고를 때가 많습니다. 강한 대원들을 모아야 할 땐 수소문을 해서 함께 등반하자고 편지를 보내 설득합니다. 처음 본 대원과 함께 등반했던 경우도 있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곤 “당신에게 산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도, 그 또한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산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곳이고, 또 나를 실험하며, 실현할 수 있는 곳이다.”
“히말라야에 가면 갈수록 나는 가난해진다. 그래서 아직까지 자가용도 없다”며 인터뷰를 마쳤던 오사무 다나베는 다음 날 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이 타고 왔던 버스를 얻어 타고 가미코지 아래 대중교통이 다니는 터미널까지 함께 내려갔다. 햇살 부서지는 차창 밖, 손그늘을 하고 줄곧 다른 손을 흔들고 있던 일본 최고의 알피니스트를 보며 문득 예수의 산상수훈 첫 마디가 생각났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이 사회에서 부자가 진정한 산악인이 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일과도 같은 것인가. 주머니 속 정상의 개수를 세지 않는 가난한 알피니스트에게 산은 더 광활히 펼쳐진 것이니. ⓜ
눈과 얼음으로 덮인 야리가다케 정상부를 등반 중인 오사무 다나베. 그에게 한국에 바위를 하러 올 생각이 없느냐고 묻자 자신은 고전적인 알파인 등반이 더 좋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산악인이지만, 일본에서는 '너 누구냐'라고 묻거나 술한잔 사주는 이 없다고 기사는 전한다. 이게 사실인게 구글에서 이미지 검색해도 몇장밖에 없다.
더 재미있는 건 그것도 구글에서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사진이다.
그와 인터뷰한 한국의 마운틴지 기사라는 거, 놀랍지 않은가. 그것도 이 글의 맨 처음 소개한 우치노 가오리가 일본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다. 참 세상 좁다.
참고로, 그는 일본히말라야(Himalaya)협회 소속이다.
우리나라에도 명망가들 중심의 한국 히말라얀협회가 있고 '히말라얀 저널'을 펴낸다.
재미있는 것은 그 표기방식이다.
영어로는 형용사 'Himalyan'으로 해야 하지만, 우리의 언어습관은 일본처럼 명사인 '히말라야'라고 해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한국산악회가 형용사 코리안 Corean + 형용사 알파인 alpine + 명사 클럽 club이지만, 한국어로는 명사로 취급하여 한국 산악회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일본산악회 미야시타 히데키 회장.
놀랍게도 일본산악회 로고도 없다. 단촐한 내용을 세로로 적고 있다.
일본산악회 홈페이지에 가보면 언제적 명함인지 알 수 있지만, 그러자면 시간이 끝도 없어....스톱.
재미있는 것은 그들의 전화번호에 8000m 가 담겨 있지 않다.일본대는 세계 최초로 마나슬루 봉을 초등했는데, 그마저도 넣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 제일 상급산악단체인 일본 산악협회의 명함. 역시 단촐하다. 로고도 없다.
일본산악협회 클라이밍위원장, 사이타마 산악연맹 부회장, 사이타마현 고등학교 체육연맹 등산전문부 부장, 전국 고교클라이밍연구회 대표 등을 맡고 있는 이의 명함이다.
신슈의 한 산악가이드협회 소속 이사의 명함이다.
좌측에 살짝 흰꽃이 보이는 건, 명함뒤를 보니 그가 야생생물자료정보실 대표직을 맡고 있어서이다.
2000년을 전후해서 활약한 일본의 스포츠 클라이머이다. 탑 클라이머는 아니었다.
같은 시기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 클라이머가 바로 유지 히라야마 이다.
일본 국제관광진흥기구 서울사무소 소장의 명함
하단의 요코소(ようこそ)는 환영합니다라는 뜻. 상단의 일본 로고에 눈길이 오래 간다.
우리네 관광 로고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네. 참 내. 지금도 이런 황망스러운 거 쓰는지 모르겠다.
좌측은 한국 관광 로고, 오른쪽은 "I Soul You'와 함께 서울 로고라고 한다. 참내...
태극이니 뭐니 온갖 의미를 들이대보았자, 우리나라 사람조차 이게 무언지 곧바로 알 사람 얼마일까.
언젠가 듣기에 이 로고 결정에 5천만원 썼다고 하는데, 명색이 서울인데 1억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본다
비록 적(!)이지만 참 잘만들었네.
디자인 비용으로 일본엔화로 한 오천만엔 들었으려나.
나처럼 일본에 한번도 안가본 외국인이라도 곧바로 일본인줄 알겠다.
조국을 위해서 적으로부터 배우자. 배워서 남주자. 조국에게 바치자.
일본 북알프스의 관문인 타네야마 산장의 이사 명함
한국인이다. 언젠가 TV에서 일본 북알프스의 한 산장지기가 한국인이라는데...
주식회사는 다르지만, 역시 타테야마 산장의 홍보실장으로 한국인이다.
흐릿한 뒷배경이 딱딱하긴 하지만, 멋있다.
산 관련해서 명함을 만들 때 이렇게 하면 좋겠다.
야리가다케 관광주식회사의 대표 명함.
창악(槍岳)의 모습이 멋있다. 한국인 중에도 저곳을 오른 이가 몇천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
산악사진동인 '사계 회원의 명함.
처음으로 이렇게 화려한 명함을 본다.
산악사진동인 '사계' 동인이자, 일본산악사진협회 회원의 단촐한 명함.
그리고 산악사진 동인인 사계의 대표 명함.
파란색 작은 꽃이 앙징맞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데 야생화에 관심이 많다면 곧발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일본 등산가들의 명함을 통해 이런저런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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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 있게 읽었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니 取締役(사장)은 "도리시마리야쿠"로 읽는 게 좋겠습니다.
교수님 감사드립니다.
'토리시마이야쿠'가 아니라 '도리시마리야쿠'가 맞네요...~
제가 'り' 하고, 'い'하고도 제대로 못읽고.. 기초가 너무 부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