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역사를 되살리는 회복의 길
가야의 역사는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와 연합해 가야를 공격했던 때를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전기에 속하며 당시 가야의 중심국가였다. 고령의 대가야는 후기 가야를 주름잡던 맹주(盟主)였다.
가야는 건국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와 달랐다. 여러 나라로 분할된 채 발전한 것이다. 500년 이상 존속하다가 532년 금관가야가, 562년 대가야가 멸망함으로써 나머지 여러 소국도 신라에 병합되었다. 가야의 역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가락국기』 등에 전해오지만, 대부분 삼국을 중심으로 쓰인 터라 가야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다루지 못했다. 가야는 우리 고대사의 한 축이었음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와 비교해 기록이 적다는 이유로 잊힌 왕국으로 남아 있다. ‘가야 문명의 길’은 가야 문화권인 경북, 경남, 전북에 산재한 780여 개소의 고분군을 연결함으로써 가야의 역사를 되살리는 회복의 길을 연 셈이다.
빛나는 땅, 창녕의 비화가야
화왕산(757.5m)은 봄에는 연분홍색 진달래로, 가을에는 단풍보다 화려한 은빛 억새로 유명한 명산이다. 우뚝한 화왕산을 중심으로 낙동강이 휘감고 그 주변 벌판은 비옥하다. 이 아름다운 땅을 창녕이라 부른 것은 고려시대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화왕(火王)이라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비지국, 비자화, 비사벌, 비화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빛나는 땅, 빛이 나는 풍요로운 땅임을 강조한 것이다. 화왕산 기슭에 자리한 20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크고 작은 고분들이 마치 아라비아 상인이 끌고 가는 낙타의 대 행렬 처럼 이어진다. 사적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昌寧 校洞과 松峴洞 古墳群) 가운데 교동에 해당하는 고분군이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고대 비화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고분군의 범위는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 경사면에서 서쪽으로 뻗어 있다. 고분군에는 모두 300여 기의 무덤이 있는데 그중 봉분이 남아 있는 무덤이 120여 기, 그렇지 않은 것이 180여 기이다.
무덤의 구조는 돌로 네 벽을 쌓아 덧널을 만들고 시신과 부장품을 넣은 다음 천장돌을 덮는 구덩식 돌덧널무덤과 돌로 세 벽을 쌓고 천장돌을 덮어 무덤방을 만든 다음 한쪽으로 시신을 넣고 무덤 입구를 막아 추가 합장이 가능하게 만든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다. 출토된 유물 중에는 신라와 백제, 일본에서 전해지거나 영향을 받은 것도 다수 확인되었다.
교동의 고분군은 20번 국도와 창녕박물관을 중심으로 두 구역으로 나뉜다. 두 구역 모두 큰 고분을 중심으로 작은 고분들이 위성처럼 자리해 있다. 창녕박물관에서는 고분에 대한 자세한 정보와 창녕의 역사까지 살펴볼 수 있다. 1996년 개관한 이래 증개축을 거친 이 박물관은 1층 상설전시실과 야외 계성고분이전복원관 등을 갖추었다. 전시실에는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과 무기류, 토기류, 장신구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송현동 15호분 무덤 입구 쪽에서 발굴된 어린 여성의 유골이다.
송현동 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비화가야의 고분군이다. 왼쪽 귀에만 금동 귀걸이를 하고 묻힌 이 유골은 정강이와 종아리뼈가 유난히 닳아 있었다고 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이 같은 변형은 고된 노동의 흔적이다. 이후 1년간의 ‘가야사람 복원연구’를 통해 유골은 16세 순장 소녀로 밝혀졌다. 현재 밀랍으로 복원했으며 발굴지인 송현동의 명칭을 따서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송현이의 운명은 참 기구하다. 어린 나이에 시녀로 살다 죽음마저 강요받아 주인과 함께 매장되었다. 송현이의 눈빛이 유난히 우수에 차 보이는 것은 벗어날 수 없었던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일명 ‘노을 맛집’으로 SNS에서 유명하다. 석양빛이 고분 사이로 내리쬘 때 주변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데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특히 파릇한 잔디가 금빛으로 빛나 영험한 기운마저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합천의 다라국
거창의 산간에서 발원한 황강이 합천 골짝을 적시다 합천호에 머물며 쉬어 간다. 합천호를 에두른 도로는 소문난 드라이브 명소이다. 황강이 낙동강과 합류하기 전 강변 구릉에 이르면 사적 합천 옥전 고분군(陜川 玉田 古墳群)을 만난다. 이 고분군은 4세기에서 6세기 후기 가야연맹을 구성했던 다라국 지배층의 무덤이다. 고분은 능선을 따라 넓게 분포하고 있다. 고분의 총수는 약 1,000기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며 지름 20~30m의 고총고분(高塚古墳) 또한 27기에 이른다.
다라국은 삼국시대 전반 지금의 경남 합천군에 있었던 가야연맹의 소국으로 알려져 있다. 고분군이 자리한 일대가 옥전(玉田) 즉, 구슬밭으로 불릴 정도로 고분군 발굴 이전에도 작은 구슬 같은 것이 많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옥전 고분군에서 발견된 구슬은 평범한 유리구슬이 아닌 곡옥(曲玉)이다. 곡옥은 반달 모양으로 다듬은 구슬로 끈에 꿰어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로만글라스도 함께 발굴되었는데 로마제국에서 제작된 유리잔으로 당시 다라국의 해외 교류를 엿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로만글라스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확인되었다.
세련된 세공 기술을 자랑이라도 하듯 권력을 상징하는 금관, 군사력을 의미하는 철제 판갑옷과 말갑옷 등도 발굴되었다. 옥전 M6호분에서 출토된 금관은 신라의 금관을 닮았고, 옥전 M23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는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라국이 신라, 백제와 매우 밀접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옥전 M3호분에서는 널 아래에서 주조쇠도끼 121점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당시 주조쇠도끼는 돈과 같은 역할을 해 무덤 주인의 막강한 권력과 부를 과시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가야에서 칼은 신분을 상징하는 무기로 손잡이와 칼집이 얼마나 화려한가에 따라 신분의 고하를 나타냈다. 따라서 신분이 높을수록 화려한 장식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데 최고 지배자의 무덤에서 용과 봉황 문양으로 장식된 칼이 출토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옥전 M3호분에서는 용과 봉황 문양으로 한껏 멋을 부린 봉황 문양 고리자루큰칼 한 자루와 용봉 문양 고리자루큰칼 두 자루, 용 문양 고리자루큰칼 한 자루 등 총 네 자루가 출토되었다. 용과 봉황은 고대 신화에서 신령스러운 동물로 꼽히는 만큼 고리 내부는 물론이고 손잡이 위아래, 앞뒷면까지 용 열 마리 내외가 배치되어 있다. 특히 손잡이 위아래에 있는 용은 가야인의 섬세한 금속공예 기법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꼽힌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분군 아래에 있는 합천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남원 운봉·아영 일대의 가야
전북 남원에 가야 고분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가야 고분군이라고 하면 으레 경상남북도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원 아영면 아영분지 동쪽 산지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에 봉토분 40기가 조성되어 있다. 사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南原 酉谷里와 斗洛里 古墳群)이다. 이곳은 5~6세기 가야연맹 중 가장 서북부 내륙에서 형성된 대표적 고분군으로 지리적으로 가야연맹의 최대 범위에 속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막연히 가야 고분군으로 알려져 오다가 1989년 발굴조사가 본격화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났다.
현재 발굴조사가 마무리된 무덤은 32호 석곽묘와 36호 석실묘이다. 32호 석곽묘는 수혈식으로 구덩이를 파고 돌로 네 벽을 쌓은 다음 시신과 부장품을 묻고 뚜껑돌을 덮어 만든 무덤이다. 봉토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아 피장자(被葬者)가 지배층임을 알 수 있다. 36호 석실묘는 횡혈식으로 밀폐된 곽(槨)이 아니라 출입이 가능한 석실에 무덤방을 만들고 한쪽 측면을 개방해 추가 매장하도록 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류, 통형기대 외에도 중국계 청동거울과 백제계 금동신발, 목걸이, 유리구슬 등이다. 이들은 백제 왕릉의 부장품과 매우 흡사해 서북부 가야 정치체가 백제와 자율적으로 교섭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기 가야의 맹주, 김해 금관가야
금관가야의 역사는 다른 가야국처럼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 굽다리접시, 화로 모양토기, 판갑옷, 비늘갑옷, 덩이쇠, 철제 말갖춤새 등이 있다. 출토 유물 중에는 철제로 만든 것이 많다. 당시 김해가 철의 주요 생산지로서 금관가야가 철기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던 금관가야는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살려 인접 국가와 철을 매개로 활발히 교역했다.
사적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은 김해를 관통하는 해반천을 끼고 야트막한 구릉과 평지에 조성된 금관가야 지배층의 무덤이다. 대형 무덤일수록 구릉 능선부에, 규모가 작은 널무덤은 구릉 주변의 낮은 곳과 평지에 조성되어 있는데, 지배계층과 피지배층의 무덤이 입지에서부터 다름을 보여준다. 대형 무덤이 있는 구릉을 ‘애구지’라 부르는데 ‘작은 구지봉’이라는 뜻이다. 구지봉은 예부터 신령한 곳으로 여겼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이곳에서 알을 깨고 나왔기 때문이다. 구지봉에서 약 600m 떨어진 곳에 애구지가 있고, 고총고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애구지 또한 매우 신령한 곳임이 분명하다. 대성동 고분군은 주변에 고층 아파트들이 우뚝 서 있어 마치 고분군을 에워싼 거대한 숲처럼 보인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확인하려면 대성동고분박물관을 찾아보자. 국립김해박물관, 김수로 왕릉, 김해민속박물관 또한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에 있어 한번에 둘러보면 좋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
[문화재청, 문화재사랑. 2022-12월 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