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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분기를 지냈습니다. 한 겨울을 보냈고 봄도 무르익어가고 있습니다. 3월의 낮 평균기온이 평년보다 높아서 벚꽃도 일찍 피었답니다. 우리 집 근처에도 벌써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활짝 다 피어버릴 듯합니다. 장관을 기다립니다.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우리 주변이 그냥 꽃동산 아닌가요? 직장인도 출퇴근길이 꽃길이 될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이 좀 힘들고 어려워도 모처럼 얼굴들 다림질 좀 하면 좋겠습니다. 매양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돈 드는 일도 아니고. 안팎으로 으르렁대는 상황이지만 속된 말로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입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차피 세월은 갑니다. 그것을 빌미로 버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의 갈 길을 가야지요.
우리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는 꼬마들이 나와서 뛰노는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사람 사는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겁습니다. 10년 후 20년 후의 저 녀석들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 사이 지나간 10년 20년 하고는 다른 속도로 발전하겠지요. 얼만 다른 세상을 살게 될지 궁금합니다. 또한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늘은 지금의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지, 으르렁거리는 주변 상황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벚꽃은 여전히 3월에 피어날지, 바다 생선은 맘 놓고 사먹을 수 있을지, 과연 바닥을 기는 택시보다 하늘을 나는 택시가 더 많게 될지 등등. 우리는 그 때를 살아남아 누릴 수 있을지, ㅋㅋ 잠깐 공상과학을 그렸습니다. ㅎㅎ
주말로 시작하는 새 달입니다. 꽃바람 쐬며 건강하고 복된 주말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 2023년 4월 1일 김종우 목사 드림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언 27 : 17)
<소울 메이트>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친구 사이의 우정이 강할까, 연인 사이의 사랑이 강할까? 마치 어린아이에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하는 질문 같기도 합니다. 좀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비교하기 어려운 상황 아닌가 싶습니다. 그 어느 쪽이든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친구를 위해서 또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유지되면 그 세월만큼이나 단단해집니다. 물론 둘 다 신뢰가 바탕이 되지요. 흔히 고난 중에 우정이 빛나고 고통을 견디며 사랑이 다져지기도 합니다. 그 어느 쪽도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그리고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평생의 친구요 인생의 반려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친구도 그렇고 애인도 그렇고 서로 아주 비슷한 사람이 모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성품의 사람이 엮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장단점은 있습니다. 하지만 갈등은 서로 다른 쪽에서 더 자주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이 비슷하다면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권태가 생기지 않을까 싶습니다. 속된 말로 재미가 없는 것이지요. 서로 다르면 오해가 발생할 여지가 많습니다. 상대를 이해하기 어려워질 때 말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수용해가며 자신의 감정의 폭이 넓어집니다. 서로가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해하기 어렵고 수용이 되지 않는다면 서서히 멀어지기도 합니다. 상대를 바꾸게 되지요.
‘미소’와 ‘하은’이는 서로 매우 다릅니다. 미소는 매우 개방적이고 활달하며 멋대로 입니다. 반면 하은이는 다소 참하고 소극적이면서 고소공포증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지 못합니다. 제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기야 배를 타고 나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나가야만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주에 계속 살고 있습니다. 그런 하은이가 제주를 떠난다는 것은 대단한 변화를 예상하며 또한 대단한 계기가 있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결혼식장에서 갑자기 돌변하여 도망쳐 나오고는 비행기에 오릅니다. 놀란 어머니가 그래도 딸을 이해하고 떠나보냅니다. 처음으로 제주 밖으로 나가는 딸이 무사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며.
초등학교에서 만난 미소와 하은이는 학교생활부터 다릅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하은이에게 반하고 멋대로, 아니 자유롭게 비상하는 미소의 삶에 반하여 서로는 단짝이 됩니다. 어느 날 하은이는 미소에게 너도 그림을 그려보라고 권합니다. 연필로만 그리는 하은이와 다르게 미소는 크레용으로 그립니다. 사람 같기는 한데 묘합니다. 이게 뭐야? 하은이가 묻습니다. ‘마음.’ 그때 하은이가 깨닫습니다. 마음도 그릴 수가 있구나. 여태 하은이의 그림을 보면 있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것도 연필로만 그리니 마치 흑백사진을 보는 듯합니다. 감탄이 절로 나오지요. 하지만 나타난 그대로이지 속을 어찌 알겠습니까? 미소의 대답에 뭔가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들 앞에 ‘진우’가 등장합니다. 하은이의 눈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미소는 즉각 눈치를 챘습니다. 미소는 적극 나서서 둘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왜 좋아해? 이유가 있습니까? 아무튼 진우의 눈빛에 반한 하은이는 그 눈빛을 그림에 담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세 학생은 같이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미소는 학교생활보다는 스쿠터를 타고 배달을 합니다. 학교공부보다 삶의 현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미소의 가정환경도 그렇게 미소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엄마를 떠난 미소는 갈 데도 없고 하은이와 함께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긴 시간 붙어 지내며 자매보다 더 끈끈한 정을 쌓아갑니다. 그런데 이성이 그들 사이에 껴들었습니다.
분명 진우와 하은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입니다. 어느 날 숲속에서 아주 가벼운 한 사건이 생깁니다. 남자란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순간의 감정변화를 겪을 수 있습니다. 실수? 그럴 수 있습니다. 그 후 진우의 목에 걸려있던 행운의 목걸이가 미소의 목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내 하은이의 마음속을 뒤집어놓습니다. 즉 의심 분노 그리고 이해와 용서 사이를 오갑니다. 미소는 답답함을 이유로 제주를 벗어납니다. 하은이와 진우는 동거하며 살다가 결혼으로 결정합니다. 그런데 식장에 입장해야 하는 시간 현장을 도망칩니다. 나도 자유롭게 날고 싶어, 미소처럼. 미소가 바라던 이국의 풍경을 마음에 그리며 찾아 나섭니다.
하은이가 그린 한 소녀의 얼굴이 바라보는 사람을 너무 또렷하게 응시합니다. 매우 인상적입니다. 전시하는 관장이 수소문하여 미소를 찾아냅니다. 그 얼굴은 바로 미소입니다. 그리고 미소를 통해 원작자를 찾으려 애씁니다. 미소도 본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은이의 아기를 키운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요. 남겨둔 인스타그램을 통하여 과거를 돌아봅니다. 지나온 30년 어간의 세월이 활동사진처럼 지나갑니다. 웃고 울고 분노하고 원망하고 했던 시간들이 이제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들 세 사람의 사랑의 열매로 예쁜 딸이 자라고 있습니다. 영화 ‘소울메이트’(Soulmate)를 보았습니다. 그림처럼 배우들의 예쁜 연기와 애틋한 마음을 봅니다.
궁창 위와 궁창 아래
지면이든 화면이든 가끔 우주의 신비함을 보여주는 발견을 보도합니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저 멀리 우주의 광경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도해줍니다. 물론 과학의 놀라운 힘이지요. 빛의 속도로 1년을 달려가서 미치는 곳을 가리켜 ‘1 광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자체만도 실제적인 거리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먼 곳입니까? 빛의 속도라는 것이 1초에 이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속도로 1년을 달린다면 어디까지 가는 겁니까?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구를 1초에 일곱 바퀴 반씩 도는 속도조차 가늠하기 어렵지요.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 밖 저 멀리 어디엔가 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1년을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화에서 가끔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어쩌면 장래에 생길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거리를 상상해 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 그렇게 어마어마한 공간을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그냥 우연히 생겨져 있었다고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궁색한 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놀라운 일입니다. 한도 끝도 없는 우주 공간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왕상 8 :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서 솔로몬은 고백하였지요. 그 온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권능을 생각하게 합니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만 바라보아도 느껴집니다. 저 끝은 어디일까, 상상이 됩니까?
세상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면 그런 것은 문젯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아멘!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딤후 3 : 16 - 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유익할지라도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해지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가 세상 만물 창조에 대해서 전해주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지식은 이미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새삼 천지창조를 말씀하려는 것이 아니지요.
다시 새깁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당신 백성의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롬 8 :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아멘! 그러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똑같이 성경을 들고 있는 마귀의 말을 듣게 됩니다. 마귀가 자기가 만든 책을 들고 떠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경을 들고 설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분별하려 애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기에 어렵다는 것이고 그래서 분별해야 합니다. 하와에게 와서 미혹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성경을 들먹였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성경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고후 11 : 13 - 14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들이 어디에서 활동하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오늘날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 하며 하나님의 교회에서 대단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분별하느냐 하는 것이 숙제입니다. 어찌 보면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듯이 마귀 사단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곧 영은 육을 들어 사용한다는 것이지요. 당연히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이며 사단 마귀는 마귀의 말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들어보면 압니다. 마 15 : 1 - 3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여기 나오는 장로들의 유전을 9절에서는 “사람의 계명‘이라고 칭합니다. 즉 하나님의 계명과 사람의 계명이 대립합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사람의 계명은 사단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을 주장하던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거든요.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전하는지 아니면 사람의 계명 즉 자기가 연구한 것 또는 사람의 말을 하는지는 들어보면 압니다. 마귀의 사자들, 마귀의 종 된 목자들은 제 것으로 말합니다. 자기가 연구한 것을 가지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럴 것이다 또는 이렇게 생각한다,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그 가운데서 예언은 연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주어야만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열어주어서 그것을 보고 전하는 것이고 마귀의 종은 자기가 연구해서 깨달았다 하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통과 이단을 가지고 설왕설래합니다. 특히 정통이라고 우기는 교단들이 어쩌면 정통이 아니라 전통을 유지하려 발버둥치는 듯이 보입니다. 마치 예수님 때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려고 발버둥친 것과도 같습니다. 장로들의 유전이 곧 조상 때부터 지켜온 전통이지요. 그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 즉 정통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셨고 인간의 전통을 단호히 물리치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인간의 전통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정통을 지켜야 합니다.
성경의 창세기는 육적 세상만물의 창조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육적인 사실을 빙자하여 영적인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육적인 사실이 아니라 영적인 진리입니다. 창세기의 사건을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하고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인 진리를 깨닫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 말씀이 처음부터 애매모호하게 됩니다. 앞뒤가 잘 맞지 않는 듯 보입니다. 예를 들어서 태양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이미 식물은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저녁과 아침이 역시 첫째 날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지요. 그 저녁과 아침은 태양이 뜨고 짐으로 발생하는 호칭인데 말입니다. 구차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이미 다 있는 상태로 말씀하시는 것이니까요. 지금 육적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영적 세계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창 1 :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 즉 땅이 이미 있는데 10절에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 하신 땅은 도대체 무슨 땅인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신구약이 완성되는데 약 1,7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 구원의 여정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예컨대 씨를 뿌리면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고 줄기가 뻗고 자라야 합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여정도 그와 같다는 뜻입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단박에 끝내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늘에서 존귀함을 받던 하나님의 천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쫓겨났습니다. 그가 땅으로 내려와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장악하였지요. 하나님은 그 세상을 구원하시려 계획하셨고 세상 가운데서 실현해 나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 당신 자신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 가운데 당신이 택한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 가십니다. 인간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닐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신 하나님은 육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이미 이 육은 사단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면 다 죽은 자들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세웁니다. 그 일을 무엇으로 하십니까? 요 1 : 1 - 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아멘! 하나님은 말씀으로 계시고 말씀으로 역사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입에 말씀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먹으면 살고 이 말씀을 말하면 삽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택하시어 그에게 생기를 넣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생령이 되었답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생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바람이라도 불어넣으신 것입니까? 그게 아니라 생명이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은 아담의 영이 살아나서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마귀가 똑같이 자기의 말을 사람에게 먹이고 자기의 말을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하나님 말씀처럼 들리게 하지요. 누구에게 그러겠습니까? 자기들끼리는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와서 미혹하는 겁니다. 처음 하와에게 와서 미혹했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의 생활 습관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새로운 생활에 적응이 되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로 구원을 받은 것은 이제 하나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것에 불과합니다. 자라야 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은 광야생활과도 같습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늘 어린아이로 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 1년이고 10년이고 똑같은 상태라면 그것은 장애가 있다는 뜻입니다. 병들었다는 말이지요. 고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태어난 상태로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엡 4 :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골 1 ;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아멘! 그렇게 우리가 자라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우리가 자라지 않기를 원합니다. 많이 알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자기가 통제하기 편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만 들어라 합니다. 다른 데 가서 듣지 말라고 합니다. 물론 아무데나 가서 아무거나 들어서는 안 되겠지요. 어디를 가나 분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별은 다시 말하지만 말을 들어보면 됩니다. 자기 말을 하는지, 자기 지식을 전하고 있는지, 전통을 강조하고 있는지 들어보면 압니다. 하나님의 종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가지고 전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 하는 말은 없습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더라,’ 하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고 전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비밀로 감추어두었던 것을 풀어서 전해줍니다. 먹을수록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시 119 : 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깨달아 알아가는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봉해진 책이 열리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 가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다시 오고 싶습니다. 들을수록 더 듣고 싶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합니다. 눅 10 :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마리아처럼 말씀을 듣는 그 자리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창 1 : 6 - 8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둘째 날의 사건입니다. 궁창은 하늘입니다. 그렇다면 하늘 아래의 물은 무엇이고 하늘 위의 물은 무엇일까요? 전에 이것을 구름과 땅에 흐르는 물로 해석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 또한 그러려니 믿었습니다. 달리 해석할 방법도 없었습니다. 구름도 수증기를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육적 자연계에서 해석을 찾으려니 그것밖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내 뭔가 부족함을 지우지 못하였습니다. 도대체 하늘 위는 어디고 하늘 아래는 어디인가요? 하늘의 기준이 없으니 말입니다. 차라리 구름 위와 구름 아래라고 한다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늘, 어디부터 위고 어디부터 아래인가요?
생각을 바꿔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은 무엇일까요? 하늘부터 봅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 하늘이 눈에 보이는 저 푸른 창공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본래는 영계의 하늘을 뜻합니다. 그 하늘을 육계에 상징적으로 세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장막입니다. 출 25 : 8 - 9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을 시켜 나를 위하여 짓되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대로 장막의 식양과 그 기구의 식양을 따라 지을찌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성소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은 장막입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보여주셨고 모세가 백성을 시켜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시겠다, 하셨습니다. 그것이 땅에 있는 하늘입니다. 계 13 :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장막 곧 성막을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물이 무엇인가 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라 하는 동리를 지나실 때의 일입니다. 야곱의 우물 가에서 한 여인을 만납니다. 그 여자와 대화를 나누지요. 물을 달라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깜짝 놀랍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4 :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이 생수를 주신답니다. 바로 우물이 있는 데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우물의 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육적 입으로 마시는 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바로 그것을 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처음에 여자가 깨닫지를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말을 나누면서 드디어 예수님이 약속하신 바로 메시야임을 깨닫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됩니까? 28 - 29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너무 감격하여 자기 할 일조차 잊어버리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전파합니다. 그 말씀이 말씀대로 여인의 마음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 것입니다(14절).
그 뒤에 보면 물을 모으고 뭍 곧 땅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바다 가운데 육지가 생긴 것입니다. 창 1 : 9 - 10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바다 가운데 섬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면 바다는 무엇이고 섬은 무엇인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바다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물고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땅에 올라와야 합니다. 많은 물이 출렁이는 바다는 온갖 말로 뒤덮인 세상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다니엘이 이상을 봅니다. 단 7 : 3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바다에서 짐승 넷이 나옵니다. 그 뒤에 그 해석을 봅니다. 17절 “그 네 큰 짐승은 네 왕이라 세상에 일어날 것이로되” 네 짐승은 네 왕이고 바다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온갖 말로 뒤덮인 세상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이 세우신 섬으로 가야 세상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먹게 됩니다. 마치 노아가 홍수 난 세상에서 방주를 타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방주를 벗어나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이야기하시면서 바다를 비유하셨습니다. 마 13 : 4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물고기를 잡아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립니다.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는 것이지요. 여기 물고기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지요. 마 4 : 19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어부인데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답니다. 이 어부는 세상에서 헤매는 영혼들을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말씀으로 건져내는 일을 하는 목자입니다.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내듯 건져내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곧 생명의 말씀으로 잡아내야 합니다. 어디에서요? 바다 같은 세상에서.
이제 종합하여 정리해봅니다. 하늘 위의 물이 있고 하늘 아래 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하늘 아래 물 즉 땅의 물, 사람이 만든 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고 사람의 계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은 물이되 먹어도 되는 물이 있고 먹어서는 안 되는 물이 있습니다. 생수가 있고 독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거나 마시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달린 일입니다. 우리의 장래가 달린 일입니다. 그러므로 분별해야 합니다. 영을 육으로 해석하고 가르쳐주는 자가 바로 사단의 종입니다. 영생으로 가는 길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길을 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듣고 분별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오래 다녀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 말이 나온다면 기꺼이 박차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 물은 살리는 물이 아니라 죽이는 물입니다. 우리가 신앙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천국에서의 영생 아닙니까? 영생의 양식을 찾아가야 합니다. 미련이나 정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궁창 위의 물 곧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찾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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