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웅
가슴으로 읽는 피사체다
다가오는 바퀴의 출렁임 어찌 저리 붉은가
한 치 오차도 없이 내면의 벽을 무너뜨린 가을은 불타는 수레를 끌고 간다
여위어진 머리칼을 손질하는 햇살을
가방에 담고 일탈을 꿈꾸던 나도
사랑의 자음을 노래한다
구심점을 잃은 산들도 진부한
굴렁쇠를 벗어나지 못했다.
단편소설
단풍/ 전기웅
홍엽으로 타오르는 산과 계곡
나무들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고,
바람은 더 차가워졌다,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이런 가을을 마주할 때면 마음속에 작은 불씨가 켜지는 듯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함께 피어났다. 단풍은 너무도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그 아래 서 있는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지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이번 가을엔 속리산으로 떠나볼까,
매년 반복하는 다짐을 올해도 어김없이 입에 올렸다. 하지만 변화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 출퇴근길을 지나며 마주치는 붉은 나무들 아래에서, 나는 오히려 과거에 묶여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특히, 오래된 그 길이 나를 붙잡았다. 그곳은 내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마지막 대화를 나눈 자리였다. 단풍이 절정이던 어느 날, 우리는 서로를
떠났고 뒤늦은 후회로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결국 뒤돌아섰다. 그때의 붉은 단풍은 내 가슴속에 날카로운 상처로 남아 있었다. 그 길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아직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올해 가을, 나는 그 길로 다시 가야만 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아니 어쩌면 스스로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
산길에 들어서자, 단풍은 이미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나무들은 타오르듯 붉었고, 그 아래 깔린 낙엽들은 바람에 나부끼며 작은 소리를 냈다. 마치 누군가 내게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에 나는 자꾸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혼자가 아니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낯익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처음엔 내 착각이라 여겼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올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너?”
그녀였다. 몇 년 만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모습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적인 외모와 깊어진 눈빛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아직도 이 길을 걷는구나.”
그녀의 말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그냥… 단풍이 예뻐서.”
“그게 네 마음 같아 보인다.”
그녀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단풍 하나만으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본 듯한 그녀의 촉에 나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걷기만 하던 오솔길에
말없이 서있는 연리지나무 앞에,
다다르자 오래 묵힌 감정들이 하나둘씩 살아난다
그녀의 어깨가 조용히 흔들리다.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의 내 선택이 옳았는지, 아니면 너무 서둘렀던 것인지 지금도 자신할 수 없었다.
“미안해. 그땐 내가 너무 겁이 많았어. 네가 내 곁에 있으면 내가 더 나약해질 것 같았어.”
내 말에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썼어. 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여기 있다는 거야.”
그 말에 나는 숨이 막힐 듯한 감정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에는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그저 다시 마주한 순간에 대한 온전한 수용이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내가 그녀를 떠났던 이유, 그 후의 삶, 그리고 여전히 그를 떠올리게 만들던 단풍까지.
해는 천천히 지고 있었고, 산길의 단풍은 점점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우리의 대화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는 후회하지 않아.”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말했다. 그 말은 내게 작별 인사처럼 들렸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일행과 함께 그녀는 먼저 길을 떠났고,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남아 있었다. 단풍 아래에서 우리의 마지막 대화를 다시 되새기며, 이번 가을이 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단풍은 결국 사라지겠지만, 그 붉음이 내게 남긴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길에 나섰다. 하지만 어제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단풍 아래에서 마주한 과거는 이제 내 안의 상처가 아닌, 새로운 불씨가 되어 있었다. 나는 이제야 단풍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나는 추억을 하나 지니고
가을이면 붉게 물든 단풍잎 같은
사랑을 남몰래 꺼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그 사랑은 내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준다.
첫댓글 존경하는 선생님, 단풍을 배경으로 한 감정의 얽힘과 내면의 비추임이 가을의 정취와 어우러져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언제 또 소설을 쓰셨는지 궁금하며, 앞으로도 더 좋은 작품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단편 쪽으로 눈을
돌려봅니다
정시인님
좋은 글 많이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