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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1장 26-27절 이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7-경건한 자가 되게 하소서2
여러분 최근에 어떤 실수를 한 일이 생각이 납니까? 아니면 기억에 남아있는 실수한 일이 생각이 나십니까? 밭에가서 일을 하다가 낫으로 대나무를 베는데 힘이 빠진 상태에서 대나무를 자르다가 실수해서 낫으로 다리를 찍었습니다. 다행히 장화를 신고 긴 옷을 입어 큰 상처는 나지 않았지만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또한 가끔 아내가 부엌 일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오른 손으로 칼을 들고 일하다가 왼손을 베는데 치료 역시 오른 손이 합니다. 낫을 들고 다리를 찍는 실수를 해도 치료는 역시 손이 합니다.
저도 설교를 준비할 때 컴퓨터로 하는데 실수해서 오타가 날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설교준비를 하고 설교할 때 그 틀린 글자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표시를 해주었다가 컴퓨터에 입력시킬 때 다시 수정합니다. 아침 편지를 보낼 때 역시 가끔 그렇게 실수로 오타난 채 보낼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신체에서 실수를 제일 많이 하는 부분이 어느 것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혀일 것입니다. 발을 헛디딜수도 있고 손으로 하는 일이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생각도 잘못할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숨쉬는 것을 잘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노래를 잘하면 잘할수록 숨쉬는 부분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그런데 숨을 잘못 쉬면 노래가 이상해집니다. 일반 사람들은 잘 몰라도 전문가들은 쉽게 잡아 냅니다. 또한 책을 읽다가 틀릴 수도 있고, 책을 쓰는 사람이 잘못 쓸수도 있습니다.
실수는 여기저기서 나타납니다. 인간이라면 실수는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조심을 해도 실수는 합니다. 이 실수로 인해 자기 자신이 다칠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심해도 실수는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어차피 실수 할 것을 굳이 잘하려고 애쓸 필요가 있나 대충대충 살면되지”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삶을 살려는 영적 갈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선을 행하려는 영적인 갈망이 있습니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써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나바와 함께 이방인 집에 초대받아 가서 음식을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마침 유대인들이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을 지독할 정도로 정죄를 했습니다. 그것을 아는 베드로가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것을 본 바나바도 역시 베드로를 따라 자리를 피했습니다. 이것이 교회들 가운데 퍼지고 퍼져서 영적인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따로 구분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찾아가서 공개적으로 책망을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소중히 여기시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하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똑같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느냐?”하고 책망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마음으로 그것을 찔려 하다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로인해 모든 유대인 성도들과 이방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되었고 교회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갔던 베드로였지만 그는 주위 환경으로 인해 영적인 실수를 범했습니다.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수를 인정하면 교회는 큰 유익이 되고 덕이 됩니다. 그리고 본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길을 계속해서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일에 이런저런 실수를 하지만 신체 중에서 잘못과 실수를 가장 많이 하는 부분이 바로 혀입니다. 혀는 참으로 길들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혀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쑥 불쑥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들이 어떤 경우는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편 141편 3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하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혀로 인해 일어나는 악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시인은 자기의 입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하고 있으며 자신의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인데도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한 나라의 왕이 말을 잘못하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여러분 역시도 기도하면서 깨어있지 않으면 어떤 말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말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지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은 그 받은 상처 때문에 평생 아파하는데도 말입니다. 돌에 맞은 개구리는 죽어가고 있는데 돌을 던진 사람은 자기가 던진 돌에 의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말 때문에 그 받은 성처와 충격으로 인해 일평생 어떤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셨습니까? 여러분들은 “그 사람이 그것 밖에 안되니까 그렇겠지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여러분들이 한 말을 다른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마도 길길이 뛰면서 며칠동안 분노를 식히지 못할 수도 있고 그것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말할 때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들을 지를 생각하면서 말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누군가의 말로 인해 문득문득 아픔이나 분노를 느끼신다면 여러분들의 하지 말아야 할 말 때문에 누군가도 여러분들처럼 그런 아픔과 분노를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습니다. 말로 받은 상처는 대부분 그 말한 사람의 진심어린 회개가 상대방에게 있는 오랫동안 곪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말한 격하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말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만이 평생 그것을 가지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6-8절을 보면 혀의 위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경건에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이 여기 있습니다. 혀는 잘 길들여지지 않습니다. 혀는 불과 같고 혀의 세계는 불의의 세계와 같습니다. 야고보 기자는 마치 지옥을 연상시키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혀의 위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혀는 분란을 일으키며 수많은 죽음과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마치 지옥의 세계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역사를 보면 수많은 말로 인해 일어난 전쟁과 죽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지만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말 한마디는 나라를 곤경에 빠뜨릴 수도 있고 망하게 만들 수도 있으며 자기 나라 국민들을 파국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말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먼 사람까지 멸망시킬 수도 있으며 아니면 용기를 주고 세워줄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부모의 말 한마디에 의해 대성한 위인들이 있고 부모가 하찮게 여긴 자식이 자라서 온 세계에 악을 끼친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부모의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가 역사의 위인이 되게 하고 부모의 말한마디가 역사 속의 악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경건치 못한 사람의 말은 자신과 자식과 타인의 파멸을 가져옵니다. 혀가 불이기 때문이며 불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의 말은 자신과 자식들과 타인에게 크고 귀한 복을 주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한 것을 들으신 그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27-3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너희 말이 네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듣고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을 경건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26절에는 말과 연관된 헛된 경건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고 방종하게 두는 그런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경건한 사람이라고 우겨도 하나님은 그를 결코 경건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자기는 어느 정도 경건하다고 생각하면서 경건을 훈련하지 않습니다.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경건한 삶을 훈련해야 합니다. 아침에만 경건의 시간을 가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께 배웠던 말씀을 삶을 통해 순종해 나가는 법을 훈련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침에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주의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만을 보면서 성경에 있는 말씀들을 발견하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이 왜 위험합니까? 바리새인들 역시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었고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유능했고 능통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는 사람으로 보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지 않고 성경이 가리키는 율법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주의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었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맨 앞으로 가서 기도를 했고, 세리는 맨 뒤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을 자랑했고, 세리는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했습니다. 바리새인인 성경에 나와있는 대로 자신이 살아온 것을 열거했고 세리는 자신이 삶속에서 하나님 앞에 지은 죄들을 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더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을 받고 돌아갔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바로 세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은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을 ㅅ랑함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느냐의 문제를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진정한 경건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정의한 것입니다. 하나는 26절에 기록하신 것처럼 경건치 못한 자의 말의 문제고, 하나는 27절에 기록하신 것처럼 행동의 문제입니다.
말의 문제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경건치 못한 사람에게서 나온 말의 문제를 말씀하셨고 진정한 경건의 문제 역사 두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27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지금 세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행에 민감합니다. 유행에 뒤지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생각하며 왕따를 시키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이야깃 거리가 온통 인기있는 가수와 연예인 이야기이며 그들의 노래를 모르면 안되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앞다투어 그 연예인에 대한 신상정보를 조사합니다.
조금더 큰 청년들은 운동선수들에 매료됩니다. 축구선수나 야구선수, 농구선수에 열광합니다. 물론 배구선수들에게도 호감을 갖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 대하여 연구하고 이야기하며 즐거워합니다. 더 나이가 든 어른들은 건강에 관한 정보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래서 등산을 하기도 하고 운동시설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맛과 건강에 좋은 음식점이나 음식에 대하여 관심을 갖습니다. 또한 옷에 대한 관심도 많습니다.
좀더 나이가 든 사람들은 여행에 관심이 많습니다. 물론 젊은 세대들도 여행을 많이 갑니다. 그렇지만 나이든 사람들도 여행중독에 빠질 정도로 해외나 국내 여행을 다닙니다. 일년에 몇차례씩 다닙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쓰는 것은 아깝지만 자신들을 위해 쓰는 것은 전혀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런 세상의 유행과 풍습을 따라갈 때 하나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이웃사랑은 뒷전에 밀려납니다. 선교적인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교회는 영적인 경건을 회복할 때 사명감을 다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경건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서 돌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난한 자들을 사랑과 긍휼과 연민으로 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돌보며 돕습니다. 이것은 교회적으로도 해야 하며 여러분들 개인적으로 해야하는 경건한 삶입니다. 그들을 돌보며 돕되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면 자칫 잘못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마음으로 정죄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저사람은 경건의 모습이 없어”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구합니다. 어제 경건했다고 해서 오늘도 자연적으로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로인해 세상의 가치기준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하나님을 계속해서 거스리며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라고 하는 것을 세상은 더욱더 즐기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것을 따라가면 되겠습니까?
우리는 매일매일을 새롭게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시작해야 합니다. 마치 종들이 아침 일찍 해야할 일들을 하기 위해서 주인 앞에 나아가 하루의 일과를 지시받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지런한 주인은 아침 일찍 준비된 몸과 마음으로 자기 앞에 나온 종들에게 오늘 하루 해야할 일을 지시할 것입니다. 그 지시 사항 가운데는 어제 했던 일도 오늘 반복해서 시작해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른 점은 오늘 역시 주인에게서 그것을 해야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주인과 오늘의 주인이 같고, 어제 한 일과 오늘 한 일이 같아도 중요한 것은 마치 주님이 새롭게 명령하신 것처럼 오늘 다시금 들은 말씀을 마음에 담고 명하신 일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벽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셨기에 어제 왔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뵙기 원했을 때 예수님은 기도하는 자신을 찾아온 제자들에게 “오늘은 다른 마을로 가서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서 왔노라”하고 말씀하시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다른 마을로 가셔서 전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들 역시 다른 마을로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예수님은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나라로 이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고아와 과부를 위시한 가나한 자들을 찾아 돌보거나 세속에 물들지 않기 위해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할 때 혼자 싸우지 않고 항상 성령과 동행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성령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이유는 오늘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오늘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오늘 할 일을 지시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경건의 시간에 듣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아침에 일어나 성경을 펴놓고 하나님께 오늘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을 여쭙고 하나님이 마음 속에 성령을 통해주신 말씀을 순종으로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속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유혹들을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에 분량에 이를 때까지 영적 싸움을 계속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경건은 치열한 내적 싸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경건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서 서 있고, 성령이 전해주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사탄이 들이미는 이 세상의 떡과 명예에 대한 유혹과 소유에 대한 모든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고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를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으로 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입을 사용하되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십시오, 자녀들에게 남편과 아내에게 경건한 말을 사용하여 그들의 삶을 복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겸손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하십시오. 이 세상의 그 어떤 유혹도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여러분을 넘어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면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간구하는 여러분들을 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 명절에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더욱 경건하기를 구하십시오. 주님이 가족들에게 해주고 싶어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듣고 그 말씀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온 가족들이 주님이 주시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언제나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삶이 주어지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