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돌의 간극
강익수
눈 깜짝하는 사이
100년이 지나간다
한 걸음 내딛는 사이
1,000년이 지나간다
말 한마디 건네는 사이에
10,000년이 지나갔다
달팽이 걸음은 광속의 행보
하나의 문장이면 수만 년이 걸리는데
너희는 수 초 만에 완성한다
잠깐의 묵언수행이면
너희는 세상의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말의 홍수를 쏟아낸다
종이 다른 소통의 부재는
이렇듯 느림과 빠름의 간극인데
너희는 이를 생물과 무생물이라 한다
100년도 무른 너희들이
빠른 것만 쫓아가니
지구가 돈다
----애지문학회 사화집 {북극 항로}에서
새로운 금맥金脈을 찾아나서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고, 그 금맥을 찾아 재빠르게 투자를 하는 것은 가장 용기가 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의 충복忠僕들이 배신을 때리지 않게 보살펴 주는 것은 의로운 일이고,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처럼 해마다 수조 원씩 기부를 하고도 수십 조 원씩 사익을 챙기는 것은 가장 어진 성자의 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돈을 쫓아가면 할 일이 많아 지고, 시를 쓰면 할 일이 적어진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 모든 성자들의 가르침이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쫓아가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아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새로운 금맥을 찾아내는 것이다. 더 많이, 더 빨리, 새로운 금맥을 탐구하고 발견하며, 그 황금의 금맥에 내 소유의 깃발을 꽂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황금의 법칙인 것이다.
지식도 돈이고, 시간도 돈이다. 인맥도 돈이고, 정의도 돈이다. 합법과 불법을 규정하는 것도 돈이고, 사랑과 불륜을 규정하는 것도 돈이고, 그 모든 것의 최종 목표는 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옛날의 사람들은 시간 개념도 없었으며, 네것과 내것에 대한 소유개념도 거의 없었다.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는 하루살이나 봄에 태어나 가을에 죽는 풀들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고, 10년을 살다가 죽는 개나 60년을 살다가 죽는 인간들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천년을 살아도 하루를 사는 것과도 같았고, 하루를 살아도 천년을 사는 것과도 같았다. 다리가 짧은 오리와 다리가 긴 학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고, 가난하게 살다가 죽거나 부자로서 살다가 죽는 것 사이에도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세계는 그야말로 최선의 세계였던 것이다.
자연의 세계는 무위의 세계이며, 강익수 시인의 [사람과 돌의 간극]에서처럼, “눈 깜짝하는 사이/ 100년이 지나”가고, “한 걸음 내딛는 사이/ 1,000년이 지나간다.” “말 한마디 건네는 사이에/ 10,000년이 지나”가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수만 년이 지나간다. 이상한 역설같지만, 이 세상에 최고의 느림보인 “달팽이 걸음은 광속의 행보”였던 것이고, “하나의 문장”을 완성하려면 적어도 “수만 년이” 걸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무위가 아닌 인간의 세계에서는 수만 년의 시간의 일을 수 초 만에 완성하고, “잠깐의 묵언수행이면” “세상의 도서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말의 홍수를 쏟아낸다.” 달팽이와 인간, 풀과 나무와 인간, 바위와 인간 등, 즉, “종이 다른 소통의 부재는/ 이렇듯 느림과 빠름의 간극인데/ 너희는 이를 생물과 무생물이라 한다.”
오늘날의 시간 개념은 만물의 영장인 자본가의 법칙이고, 돈을 벌고 돈을 소유하는 탐욕에 따라 그 시계바늘을 움직여 나간다. 일분과 일초도 돈이고, 하루와 이틀도 돈이고, 한 달과 두 달도 돈이다. 일년 이년도 돈이고, 십년 이십년도 돈이고, 저출산과 고령화 대책도 돈이다. 돈을 쫒아가면 그 모든 것이 빨라지고, 이 빠름 속에서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과거로, 현재에서 백악기로, 백악기에서 챗GPT의 세계로 자유자재롭게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이처럼, 이와도 같이 “100년도 무른 너희들이/ 빠른 것만 쫓아가니/ 지구가 돈다.”
자본의 시간은 빠름의 시간이고, 빠름의 시간은 탐욕의 시간이다. 탐욕의 시간은 승자독식구조의 시간이며, 승자독식구조의 시간은 너와 나, 즉, 우리 모두가 다같이 공멸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탐욕은 배가 크고 입이 크며, 그토록 먹고, 또 먹어도 만족을 하지 못하는 욕구불만으로 가득차 있다. 일분 일초, 하루 이틀, 일년 이년 십년, 그의 일생내내 빛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돈을 쫓아가면 그 탐욕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들과 딸들과 그의 이웃들과 함께, 무차별적인 소송전을 벌이다가 지구촌을 다 파괴시키고 죽어가게 된다.
이에 반하여, 느림의 시간은 자기 만족의 시간이며, 자기 만족의 시간은 모든 탐욕을 버리고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행복의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시인과 달팽이는 인위적인 것, 사치스러운 것, 탐욕적인 것, 오만과 독선을 다 버리고 자연과 하나가 되기 때문에, 하루를 살아도 오천 년처럼 살고, 오천 년을 살아도 하루처럼 살다가 간다. 이 세상의 만물들은 모두가 다같이 부모형제와도 같고, 저마다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기 때문에 배가 부르면 노래를 부르거나 잠을 잔다.
스마트폰이 인간을 지배하고, 챗GPT가 인간을 노예로 삼는다. 빠름의 시간은 인간이 인간을 빠름의 노예로 삼는 자기 파괴의 시간이지만, 느림의 시간은 이 빠름의 시간을 정지시키고, 이 자본의 노예들을 구원해주는 시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이 [사람과 돌의 간극]의 시인, 강익수 시인의 전언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상기온과 함께 지구가 폭발하면, 다시금 기나긴 침묵의 시간을 거쳐, 느림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만물의 평화와 만물이 공생공존하는 그날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