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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는 성도
고전 3:10-15
1.
미국의 목사이며 소설가인 밴 다이크의 소설 `대저택'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웅장한 집에서 살던 한 부자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올라갔습니다.
천국에서 살 집을 보여주는데 얼마나 허름하고 부족한지 비가 새는 오두막집이었습니다.
너무 상심한 부자의 눈에 언 듯 보기에도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건축되는 것이 보였습니다.
"도대체 저 웅장한 집은 누구의 것입니까? 누가 살 집이기에 저렇게 큽니까?"
"당신 옆집에 사는 가난한 의사가 살 집입니다."
부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의사는 동네에서 조그마한 병원을 운영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는 부자의 질문에 천사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천국의 집은 땅에서 보내오는 재료로 집을 짓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의사는 너무 많은 재료를 보내와서 그 재료를 다 사용하여 집을 짓다 보니 이렇게 큰 집을 짓게 될 수밖에 없었소.
그러나 당신이 보내온 재료는 너무나 부족하여 오두막의 지붕을 씌우기에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소설에 나오는 픽션이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정신은 분명 신앙적이고 성경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만히 놀고 있어라 그리해도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충성할 때 그때에만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공산주의는 차별이 없는 것을 모토로 내걸었습니다.
누구나 공평하게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사상을 주장은 언 듯 보기에 공평하고 굉장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즘 공산주의 사상이 공평하다는 것 때문에 다 무너지고 있습니다.
차별이 없는데 누가 열심히 일을 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기독교는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자신이 충성하고 노력하고 애쓴 만큼 하나님의 상급이 다르게 주어진다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요 천국의 상급입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게 하시므로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슨 집을 짓고 있는지 한 번 냉철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두막집으로 지어져가고 있을까? 아니면 대저택으로 지어져 가고 있는가?
3.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건축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 모두는 집을 짓는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집을 짓는 자인데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주장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건축자의 비유는 이미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집을 짓는 자인데 어떤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지으므로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끄떡없는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모래위에 집을 지으므로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그대로 쓰려져버리는 집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204장을 보면, “세상 모든 사람들 집을 짓는 자니/ 반석 위가 아니면 모래위에 짓네./
우리 구주 오셔서 지은 상을 줄 때 세운 공로 따라서 영영 상벌 주리./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반석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이 찬송가 가사 그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집을 짓는 자입니다.
저도 집을 짓고 여러분도 집을 짓고, 남자도 집을 짓고, 여자도 집을 짓고, 젊은 사람도 집을 짓고 늙은 사람도 집을 짓고, 농부도 집을 짓고, 사업하는 사람도 집을 짓습니다.
무슨 집입니까? 인생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우리성도들은 특별히 신앙의 집을 짓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집을 짓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릴 천국의 집을 짓습니다.
우리 모두가 집을 짓는 자라고 선언한 이상 우리는 자신의 집을 잘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모든 사람이 집을 짓는 건축자인데 기왕 집을 지을 바에야 지혜로운 건축자들이 되어서 아름답고 튼튼한 집을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집을 어떻게 지어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만약 꿈에라도 하늘나라에 가면 어떻게 지어져 가고 있는 집을 보실 것 같습니까?
조그만 오두막집입니까?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훨씬 큰 대저택이겠습니까?
저는 정말 여러분들이 8,90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좋은 집에 살기를 바랍니다만,
무엇보다도 이사도 없고 한 집에서 영원히 살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좋은 집에 살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4.
그러면 어떻게 아름답고 좋은 집을 지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견고한 터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로마는 제국 내 모든 도로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침략자나 반란자를 빨리 제압하기 위해서는 좋은 도로가 급선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보다 내구성 있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심지어 그 포장 두께가 90센티에서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도로를 건축하기도 하였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도로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함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건물이 크면 클수록,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그 기초가 튼튼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집이나 신앙의 집을 지을 때도 기초가 정말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물질의 기초위에 짓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돈이 기초가 되고 있고 그 돈이 많으면 기초가 튼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돈의 기초는 정말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모래와 같은 기초인지 모릅니다.
그 기초위에 세우진 인생의 집은 또한 행복할 수 없고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삼촌인 아브라함을 따라 나온 롯은 자신의 집을 물질에 세우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목자와 삼촌의 목자가 싸울 때에도 삼촌에게 양보를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결정할 때도 그의 기준은 어디로 가야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느냐? 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는가를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목축하기에 좋은 환경만을 생각하며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집을 물질의 기초위에 세웠을 때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자신의 집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모든 재산이 다 유황불에 사라졌습니다.
자신과 두 딸이 겨우 목숨만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도 자신의 인생을 물질과 권력에 기반을 둔 집으로 건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철저한 소외와 고독과 따돌림을 받으면서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능력과 생각과 가치위에 집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철저하게 자신에게 실망을 하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인생의 기초가 지금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헛되고 헛된 것에 기초를 세우고 그것이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그 위에 열심히 집을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곧 없어지고 무너지고 행복하게 할 수 없는 인생의 기초위에 우리의 집을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초위에 인생의 집, 신앙의 집을 건축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집, 행복한 집, 영원한 상급으로 남을 수 있는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다른 어떤 것이 신앙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많은 이단 교파에서는 자신들의 교주의 기초위에 신앙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교주가 하나님인양 그 교주를 섬기고 그 교주에게 충성하고 그 교주의 말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집을 잘 짓고 사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유일한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기초 외에는 신앙의 집을 지을 다른 터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어떤 말씀도 어떤 교리도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 이라는 모토를 가지고 잘못된 교회를 개혁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인생의 집, 신앙의 집을 지어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른 어떤 것의 기초위에 인생의 집을 짓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6.
두 번째는, 견고한 재료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건축에 있어서 부실공사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하청제도입니다.
원청자가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얼마의 마진을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그 사람은 또 얼마의 마진을 남기고 또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이런 일을 몇 차례 반복하다 보면 마지막에 시공하는 사람은 전혀 이익을 남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손해보고 할 수는 없으니까 결국 재료를 나쁜 것으로 써서 거기에서 이익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건물은 엉터리로 지어져서 부실 공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만 이런 하청제도는 건축에 있어서 자재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과 같은 건축 재료가 나오는데 이것을 둘로 구분해 보면 불에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집을 지을 때 좋은 재료는 불에 타지 않는 것이요 불에 타는 것은 좋은 재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의 기초요 신앙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기초 위에 집을 짓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도 드리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봉사의 결과는 언제나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할 수 있는 것과 인정 할 수 없는 것,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남을 수 있는 것과 남을 수 없는 것.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말 굉장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고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건 너를 위해서 한 일이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아니지 않느냐?
네 이름 내려고, 네 자랑 하려고, 너 폼 잡으려고 한 거지 나를 위해서 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불 앞에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될 때에 얼마나 안타깝고 허망하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충성이 주님의 테스트에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수고가 주님의 심판에서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튼튼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집을 지으려면 불에 견딜 수 있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불에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고, 끄떡없이 남아 있는 집을 지어야 합니다.
7.
그런 집을 어떻게 지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좋은 동기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마지막까지 남는 것과 남지 않는 것 그 차이는 동기에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느냐 아니면 정말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의 향기를 위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하느냐 여기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온갖 일을 하고 온 부서를 다 뛰어다니며 일을 해도 자신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다 불타 없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인정할 수 없는 것들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미 영광을 다 받았으니까 하나님이 주실 것이 없는 것입니다.
봉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봉사의 양이 아니라 봉사의 질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느냐? 그것이 진정으로 견고한 집을 지을 수 있는 비결인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말씀대로 지어야 합니다.
한국 창조 과학회 이사이신 김수웅 장로께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과학자들이 각종 배를 만들어서 시험을 했는데 제일 큰 파도와 험한 물결 속에서 마지막까지 견디고 쓰러지지 않은 것이 노아의 방주였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농사를 짓는 사람이지, 목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설계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배수량이 20,000톤, 용적이 14,000톤∼15,000톤인 방주를 지었습니다.
양을 240마리씩 실을 수 있는 기차 522대 분입니다.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동물이 45,000마리입니다.
그런데 45,000마리가 들어가도 방주의 3분의 1정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런 거대한 배, 그러면서도 가장 안전한 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하나님 말씀을 따라 지었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인생의 방주 인생의 집을 지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지으면 그 배는 안전하고 그 집은 아름답고 튼튼한 집이 될 줄 믿습니다.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으리니"(마7:24)
내 생각, 내 지혜로 하면 안 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설계해주신 대로 방주를 지었을 때 훌륭한 배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노아가 자기 생각으로 배를 지었으면 작은 배도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아이디어,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으니 큰 작품을 만든 것처럼,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 말씀대로 따라 살면 위대한 인생의 방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랑으로 지어야 합니다.
사랑보다 우리의 집을 아름답고 견고하게 만드는 재료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쓰시는 재료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쓰신 재료이고 성령님이 쓰신 재료였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쓰신 재료가 사랑입니다.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 우리를 항상 지키시고 인도해주시는 성령님의 사랑이 영원한 것처럼 우리가 사랑으로 행할 때 그 사랑은 영원할 것이고 어떤 시험의 불에도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상급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나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니"
사랑의 집을 지었던 스데반 집사, 손양원 목사, 마더 테레사 수녀, 그들의 신앙의 집은 지금도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으로 인생의 집을, 신앙의 집을, 하늘나라의 집을 짓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
이렇게 지은 집은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심판하십니다.
13절에 보면, “그 날에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나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어떠한 집을 짓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아주 쉽게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는 자기가 지은 집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심판의 불에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면 받을 상급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받습니다.
구원은 받되 불 가운데서 받는 것 같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됩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었습니다.
자신과 두 딸만 구원을 받고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어떤 기초 위에 집을 짓고 있습니까?
어떤 재료로 집을 짓고 있습니까?
하늘나라에 여러분의 살집이 어떻게 지어져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 나타날 때 타고 없어지는 재료로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남을 재료로 집을 짓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지금까지의 집이 잘못 지어져 가고 있었다면 주저 없이 과감하게 허물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나중에, 기회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때 주님에 의해 허물어 버림을 당하지 말고 지금 스스로 허물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라도 타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 좋은 재료로 튼튼한 인생의 집, 신앙의 집, 하늘나라의 집을 지으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기초위에 좋은 재료로 집을 지을 수 있는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