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한 장면. 사진제공=SBS
‘딩동!’ ‘딩동!’
1993년 12월 29일 저녁 7시경 서울 송파구 거여동의 한 아파트. 집주인 최성준 씨(가명·34)는 벌써 10여 분째 집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집안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없었다. 계속 초인종을 눌러보고 문을 두드려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아내 이경민 씨(가명·31)는 이날 따라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니, 도대체 이 사람이 어딜 간 거야?’
평소와 비슷한 시각에 퇴근한 최 씨는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는 아내를 원망하며 애꿎은 초인종만 눌러대고 있었다. 결국 최 씨는 아내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한 여성의 무모한 질투와 열등감이 불러온 참극에 대한 얘기다.
최 씨가 ‘SOS’를 요청하며 전화를 건 사람은 아내의 절친한 친구 임주연 씨(가명·31)였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여고 동창인 두 사람은 학창시절 둘도 없는 단짝 친구였다. 하지만 이들은 졸업 후 연락이 끊겼다가 약 2년 전 인터넷 동창찾기 사이트를 통해 다시 만나게 됐다.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던 차에 어렵사리 재회한 두 사람은 그 후 여고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어느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특히 미혼인 데다가 특정한 직업이 없었던 임 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이 씨의 집에 드나들며 친하게 지내오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자연히 임 씨는 이 씨의 집을 자주 왕래하게 됐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임 씨는 이 씨의 어린 두 자녀와 남편과도 마치 한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가 됐다. 따라서 최 씨가 제일 먼저 임 씨에게 아내의 행방을 묻는 것은 당연했다.
“주연 씨, 오늘 따라 애들 엄마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네요. 혹시 무슨 연락 못 받았어요?”
“어머, 그래요? 집에 없어요?”
“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온다간다 말도 없이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정말 이상하네요. 조금만 기다려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최 씨의 전화를 받은 임 씨도 걱정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최 씨의 집 앞에 임 씨가 헐레벌떡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성준 씨, 아직 아무 연락없어요?”
“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요.”
“저도 정말 걱정되네요. 같이 찾아볼까요? 어? 저게 뭐지?”
그때였다. 복도로 통하는 창문을 통해 집안을 둘러보던 임 씨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창문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냈다. 바로 현관 열쇠가 들어있는 이 씨의 손가방이었다. 설마 강도라도 든 것일까.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두 사람은 서둘러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의 비명소리가 집 안에 울러 퍼졌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거실에는 최 씨의 아내가 치마를 덮어 쓴 채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는데 목이 나일론 끈으로 묶여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작은방에서는 최 씨의 아들(3)과 딸(1)도 줄줄이 숨진 채 발견됐다. 발견 당시 아들의 목에는 보자기가 감겨 있었으며 딸의 얼굴에는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졸지에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잃은 최 씨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수사팀도 현장의 참혹함에 말을 잃었다. 새해를 불과 며칠 앞두고 일가족 3명이 집안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조사결과 사인은 모두 질식사였다. 이들은 비슷한 시각에 차례로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사망한 지도 불과 서너 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됐다.
초기에 수사팀은 동반자살일 가능성에도 주목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던 이 씨가 어린 자녀들과 함께 자살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현장 검증결과 타살 정황이 더 짙었다.
도대체 최 씨의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또 범인은 누구이며 범행 동기는 무엇일까.
현장검증을 실시한 수사팀은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우선 집안에 없어진 금품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체 상태 등으로 보아 범행이 이뤄진 것은 이날 오후 3~5시경이었다. 범인이 대낮에 금품을 노리고 침입한 것이었다면 분명 현금이나 패물 등 없어진 물건이 있어야 했을 터. 하지만 집안에는 패물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을 뿐 아니라 특별히 집안을 뒤진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최 씨의 집에는 외부인이 억지로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 현관키가 훼손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복도 창문을 뜯고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더구나 문은 정상적으로 잠겨 있지 않았던가. 평소 출입문과 창문 등 문단속에 각별히 신경을 썼던 이 씨가 문을 열어놨을 리도 만무했다. 의문점은 또 있었다.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고 보기에는 집안이 너무도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집안에 낯선 이가 침입했더라면 집안은 어지럽혀져 있어야 했다. 특히 이 씨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범인에게 반항을 했을 텐데 집기 등 집안은 여느때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적어도 돈을 노린 강도의 소행이 아니라고 직감한 수사팀은 면식범에 의한 원한살인 쪽으로 수사방향을 틀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조사한다는 수사방식에 따라 가장 먼저 조사대상에 오른 사람은 당연히 남편 최 씨였다. 하지만 최 씨에게서는 특별한 혐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사건 당일 최 씨는 평소대로 아침 일찍 출근해서 회사업무를 보고 정상적인 시각에 퇴근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 씨의 집안은 누가 보나 화목한 가정이었다. 부부 사이도 좋았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었다. 최 씨는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이 없다고 진술했는데 실제로도 최 씨 부부는 주변으로부터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버린 최 씨는 조사과정 내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넋이 나가 있었다.
친자매처럼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잃어버린 친구 임 씨도 마찬가지였다. 임 씨는 경찰조사 내내 큰 소리로 흐느끼며 친구를 잃어버린 슬픔을 격하게 표현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경찰에서 임 씨는 ‘사건 당일 오전 이 씨의 집에 가서 놀다가 돌아왔다’고 진술했다. 150만 원을 이 씨에게 빌려준 뒤 아이들과 놀다가 집에 왔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었다. 평소에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이 씨의 집을 왕래하며 가족처럼 지내온 것을 보면 이날 임 씨의 방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임 씨는 친구의 말벗이 되어주고 아이들을 잘 돌봐주는 등 자매처럼 지내왔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임 씨는 가족 못지않게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임 씨는 ‘오전까지 멀쩡했던 친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오열했다.”
하지만 수사팀은 임 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임 씨의 왼손 새끼손가락에 나 있는 상처였다. 그것은 분명 끈이나 밧줄 같은 것을 세게 조이거나 잡아당길 때 생길 수 있는 상처였던 것이다. 수사팀이 보기에 분명 오래된 상처는 아니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팀은 순간 일가족이 모두 목 졸려 살해됐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노끈이나 헝겊으로 목을 조를 때 힘을 주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상처나 자국이 생길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수사팀은 임 씨의 말과 행동을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상한 점이 드러났다. 임 씨는 경찰서에 들어서면서부터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통곡을 했지만 눈물범벅이 되어 있어야 할 얼굴은 의외로 말끔했다. 연극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임 씨는 손가락 상처에 대해 ‘언제 어디서 난 상처인지 잘 모르겠다’며 얼버무렸다. 하지만 눈빛이 흔들리는 것까지 감출 수는 없었으며 수사팀이 의심스러운 눈길로 손을 계속 쳐다보자 손을 급히 감추거나 만지작거리며 당황하는 표정도 역력했다.”
더욱 수상한 것은 임 씨의 행적이었다. 임 씨는 사건 발생 시각의 알리바이를 입증하지 못했다. 임 씨는 오전에 이 씨의 집에서 나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수사팀의 추궁에 임 씨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건 당일 오전 일찍 이 씨의 집에 들러 150만 원을 빌려주고 ‘볼 일이 있다’며 서둘러 돌아갔다. 그리고 오후 3시께 임 씨는 다시 이 씨의 집을 찾아왔다. 평소와 다름없이 차를 마시고 TV를 보며 놀던 임 씨는 ‘이모랑 놀자’며 이 씨의 아들을 데리고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보자기로 이 씨의 아들을 목졸라 살해한 임 씨는 큰방에 있는 이 씨에게 왔다. 그리고는 ‘깜짝 쇼를 준비했으니 보러가자’고 거짓말한 뒤 눈을 가리고 따라오게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나선 이 씨의 뒤에서 목을 졸라 순식간에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10개월 된 이 씨의 딸마저 살해했다.
이후 임 씨는 범행 후 현관열쇠가 들어있는 이 씨의 손가방을 들고 나간 뒤 문을 잠그고 복도로 통하는 창문으로 손가방을 밀어넣은 뒤 태연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범행 당시 임 씨는 단순 자살로 꾸미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임 씨는 가장 친한 친구와 그 가족을 상대로 왜 그런 범행을 저지른 것일까. 조사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임 씨의 범행동기는 다름 아닌 질투 때문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앞서 언급했듯이 임 씨는 동창사이트에서 이 씨를 다시 만난 후 친가족처럼 가깝게 지내왔다. 하지만 가까이 지낼수록 행복한 이 씨의 모습과 자신의 상황이 점점 비교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상하고 듬직한 남편이 있는 데다가 귀여운 아이들을 키우며 단란하게 사는 친구가 부러웠던 것이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친구의 모습은 결혼도 못하고 외롭게 사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될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자괴감에 빠졌던 것 같다. 실제로 임 씨는 경찰조사에서 ‘친구가 행복하게 사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고 시간이 갈수록 소외감을 느꼈다. 친구는 겉으로는 내게 잘해줬지만 뒤로는 나를 은근히 무시했다. 또 친구네 시댁에서 내가 자주 찾아가는 것을 두고 안 좋은 소리를 하고 경계해 화가 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임 씨의 범행동기는 단지 화목한 가정에 대한 질투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사결과 임 씨는 친구의 남편 최 씨에게 남몰래 연정을 품어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임 씨는 평소 휴대전화로 최 씨에게 “당신같이 좋은 사람이 왜 그렇게 빨리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임 씨의 수첩에서는 ‘죽은 뒤 내 재산을 최 씨에게 남기겠다’는 메모도 발견됐다. “친구가 화목하게 사는 모습에 대한 질투와 친구 남편에 대한 짝사랑,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긴 쓸데없는 열등감이 겹쳐 살인을 저지른 것 같다”는 것이 수사팀이 내린 결론이었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