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시기’, 신김치·찬밥·반찬 ‘한소끔’…한끼 식사서 별미로
경북 김천시 대항면에 있는 식당 '기찻길 옆 오막살이' 갱시기.
‘역촌’ 김천서 시작…경북 전역 흔히 먹어 햇곡식 나오기 전 남은 찬거리 섞어 끓여
김치·밥 ‘핵심’…콩나물 거의 빠지지 않아 국수 넣어 양 늘리고 나물 더해 맛 내기도
밥알 살아 있고 꿀떡 넘어갈 만큼 퍼져야 김천식 갱시기는 고구마 넣어 건더기 푸짐
자작한 국물에 쫑쫑 썬 김치와 푹 퍼진 밥알, 여기에 콩나물·가래떡·국수가 한데 어우러진 다홍 빛깔 한그릇. 익숙한 재료로 만든 낯선 이 음식 이름은 ‘갱시기’다. 갱시기는 김천에서 시작해 경북 전역에서 흔히 먹던 향토음식이다.
가을걷이는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나오기 전, 부엌에 있는 거라곤 곰삭은 김치와 찬밥뿐일 때 멸치육수에 남은 찬거리를 모두 넣고 한소끔 끓여 먹던 것이 기원이다. 이것저것 형편 되는 대로 섞어 끓인 터라 생김새는 떨떠름해도 맛은 좋다. 추운 겨울 뜨끈한 갱시기 한술이면 꽁꽁 언 몸이 스르륵 녹는다. 1950∼1960년대를 산 사람이라면 소박하지만 따뜻한 그 맛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갱시기는 그 이름부터 특이하다. 유래는 무엇일까? 정확한 내력은 알려진 바 없지만 문헌에 따르면 갱시기는 ‘갱식(羹食)’에서 나왔다. ‘갱(羹)’은 채소가 섞인 고깃국이란 뜻이다. 예부터 역촌이었던 김천엔 기차를 타려는 사람과 근처에 선 시장에 드나들던 사람이 많았다.
그들이 재빠르게 먹고 갈 수 있는 국밥 파는 곳도 흔했다. 당시 국밥 문화가 일반 가정집으로 퍼지면서 국밥이 갱식으로, 다시 갱시기가 됐다는 설이다. 완성된 밥을 한번 더 끓여낸 음식이라 ‘다시 갱(更)’자를 붙여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생쌀을 불려 물에 넣고 끓이는 죽과 갱시기는 엄연히 다르다.
지난 김장철에 담가둔 김치는 갱시기 맛을 좌우하는 핵심 재료다.
갱시기의 핵심은 김치와 밥이다. 그외 부재료는 각자 사정에 따른다. 다만 과거 집집이 길러 먹던 콩나물은 거의 빠지지 않았단다. 쌀로 만든 떡국떡은 소위 ‘있는 집’에서나 곁들일 수 있었다. 식구 많은 집에선 국수를 넣어 양을 늘렸고 먹다 남은 나물을 더해 맛을 내기도 했다.
동네마다 집마다 재료가 조금씩 달랐고 부르는 이름도 갱죽·갱시기국·개양죽·갱생이죽 등으로 차이가 있었다. 다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곤궁한 시절 식구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궁여지책으로 만든 끼니란 점이다. 특별한 재료 없이 요리해도 꽤 맛이 좋았고 이거 하나면 반찬이 별달리 필요가 없었다. 궁핍한 살림에 이만한 음식이 또 있을까.
당연히 조리법도 간단하다. 육수에 묵은지·찬밥과 손에 집히는 대로 재료를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 소금과 간장으로 간하고 깔끔한 맛을 위해 참기름은 넣지 않는다. 보통 멸치육수를 쓰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맹물도 괜찮다. 양념이 쏙쏙 밴 김칫소가 국물 맛을 책임져줄 테니. 김천에선 갱시기에 감자나 고구마를 넣어 먹었다. 둘 다 겨울철 구하기 쉬운 구황작물인데다 포만감이 좋아 오랫동안 속을 든든하게 해줘 없는 살림엔 더없이 고마운 식재료였다.
휘뚜루마뚜루 만들 수 있는 것이라지만 신경 써야 할 점도 있다. 바로 시간이다. 갱시기 매력은 ‘죽도 밥도 아니라는 것’. 문자 그대로 죽이라기엔 밥알이 살아 있어야 하고 밥이라기엔 몇번 씹지 않아도 꿀떡 넘어갈 만큼 퍼져야 한다. 밥을 많이 넣고 오래 끓이면 밥이 불면서 지나치게 뻑뻑해져 떠먹기에 불편하다. 밥을 적게 넣어 살짝만 끓여내면 맑은 국물의 국밥이 된다. 정답은 없고 적당한 밥 양과 조리시간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과거 어엿한 한끼 식사였다면 이젠 별식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들어 농촌 살림살이가 나아지자 농번기 새참으로 먹는 별미 대접을 받았다. 지금은 일반 가정 식탁에 자주 오르지 않는다. 보릿고개가 옛말이 된 것처럼 갱시기도 추억 속에나 있는 음식이 됐다. 전문으로 내놓는 식당도 크게 줄었다. 고깃집에서 서비스로 내놓는 정도다.
김천시 대항면에 있는 식당 ‘기찻길 옆 오막살이’는 귀한 갱시기 맛집이다. 고구마를 넣어 건더기가 푸짐한 게 전형적인 김천식 맛이란다. 본래 토종닭백숙이 주력 메뉴였는데 단골손님 부탁으로 내놓던 것이 소문이 났다. 메뉴판에 없어도 알음알음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이곳은 멸치육수를 낼 때 한약재를 넣는 것이 특징이다. 또 단골손님 취향에 따라, 식당 냉장고 사정에 따라 레시피가 달라지는 점도 맛의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