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민들은 오직 용왕님과 영등할머니, 성황당 배성주신께 종업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마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면 마을 신앙 서낭신을 모시는 서낭당이 어촌마다 있었다.
어민들은 제물을 풍성하게 차려놓고 지극정성으로 바다를 관장하는 신께 비는 것만이 파도와 바람을 이겨내고, 만선이 되어 돌아오리라 믿었다.
그러나, 1976년 10월 28일, 이런 믿음이 소용없음을 일깨워준 큰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나라 어선 사상 최대의 참사가 된,‘10.28 태풍’이 독도와 대화퇴 중간에 있는 삼각지에서 벌어진 것이다.
묵호, 속초, 주문진 어선 41척이 이곳에서 조업하다, 7척은 침몰하고 10척은 실종 되었는데 사망 선원이 327명에 달했다.
실종된 선원 가족들은 부두에 불을 피워놓고 열흘이 넘도록 혹시나 살아 돌아오려나 기다리며 통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실종자들은 끝내 저 넓고 깊은 동해 바다에 소리 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대화퇴는 독도에서 동북쪽 240마일에 있고, 일본과 공동수역이었다.
수심이 60미터에서 100미터에 바닥은 암반으로 되어 있어 수많은 해초와 플랑크톤이 서식했다.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곳이라 각종 고기가 몰려 들었다.
특히, 오징어는 우리나라 어획량의 60프로가 잡힐 만큼 황금어장이었다.
그날 일기예보는 경보가 아닌 폭풍주의보였다.
그러나 삼각파도가 불시에 닥쳐왔다.
대화퇴를 어민들은 삼각지라고 불렀다. 삼각파도가 많이 닥쳐오기 때문이었다.
파도 높이 10미터 이상을 삼각파도라고 했기 때문이다.
삼각파도를 겨우 피한 어선들은 울릉도로 피했지만 나머지는 전부 실종되거나 침몰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일기예보 수준은 맞는 확률이 30프로 였다. 일본은 이미 지금과 같은 수준이어서 일본배들은 미리 준비를 하거나 출항을 하지 않아서 피해가 전혀 없었다.
묵호항의 어선들이 무동력선에서 동력 철선으로 전환되는 시기가 70년대 중반부터였다.
무동력선과 교체된 ‘고데구리’ 라는 새끼 트롤선은 작았지만 엔진이 있어 빠르고 힘이 있었다.
연안의 고기를 싹쓸이 할 정도로 잡아 들였다.
이시기는 꽁치, 양미리,노가리,가자미,명태, 이면수 등이 엄청나게 잡히던 시기였지만, 값이 싸서 노력에 비해 큰 소득이 없었다.
냉동기술이 부족하던 때라, 모든 배들은 어름으로 신선도를 유지 하거나 말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배에서 말린 오징어를 ‘배오징어’ 라고 해서 맛도 좋았고, 값도 비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