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26
5월15일 [부활 제5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Qh-klzZVKc (송영호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94745233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진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매일같이 빼먹지 않고 렉시오 디비나(聖讀)를 꾸준히 해온 지가 벌써 30여 년이 다되어 갑니다. 성독의 은총이나 위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말씀 한마디, 단어 하나가 살아 숨 쉬는 느낌입니다. 때로 말씀이 살아서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 같은 경우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양식이 되는지 모릅니다. 몇천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도 그때마다 새로운 에너지를 제게 건넵니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 묵시록 21장 3~4절)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난해하면서도 흥미로운 책인 동시에, 성경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책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을 읽거나 해석하거나 묵상할 때 꼭 유념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안에는 유다 묵시 문학 특유의 상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정통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 안에서 읽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어마무시한 메시지를 접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당신 백성을 향해 그분께서 건네시는 희망과 격려 차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이비 목자들과 이단자들이 요한 묵시록을 악용하면서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성경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글자 그대로 종말이 곧 올 것이라는 가르쳤습니다. 아직도 종말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큰 혼란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치 어린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잘했을 때 칭찬도 하지만, 그릇된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는 강한 질타와 경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두려운 표현들은 그런 사랑의 틀 안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큰 틀에서 바라보니 묵시록은 세상 따뜻한 성경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때로 격려와 위로도 하시지만. 때로 강력한 질책이나 경고도 하시는 하느님, 그 모든 것이 다 사랑 때문인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 성경이 묵시록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 선포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진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칭찬이나 격려만 하지 않습니다.
실패와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하는 우리는 하느님 말씀의 진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매일같이 빼먹지 않고 렉시오 디비나(聖讀)를 꾸준히 해온 지가 벌써 30여 년이 다되어 갑니다. 성독의 은총이나 위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어떤 때는 말씀 한마디, 단어 하나가 살아 숨 쉬는 느낌입니다. 때로 말씀이 살아서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 같은 경우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양식이 되는지 모릅니다. 몇천 번을 되풀이해서 읽어도 그때마다 새로운 에너지를 제게 건넵니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요한 묵시록 21장 3~4절)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난해하면서도 흥미로운 책인 동시에, 성경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책이 요한 묵시록입니다. 요한 묵시록을 읽거나 해석하거나 묵상할 때 꼭 유념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 안에는 유다 묵시 문학 특유의 상징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문자 그대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정통 교부들이나 신학자들, 성경학자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 안에서 읽고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어마무시한 메시지를 접하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당신 백성을 향해 그분께서 건네시는 희망과 격려 차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이천년 교회 역사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이비 목자들과 이단자들이 요한 묵시록을 악용하면서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성경 근본주의자들은 요한 묵시록에 표현된 글자 그대로 종말이 곧 올 것이라는 가르쳤습니다. 아직도 종말에 대한 그릇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큰 혼란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은 마치 어린 아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잘했을 때 칭찬도 하지만, 그릇된 길,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는 강한 질타와 경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요한 묵시록의 두려운 표현들은 그런 사랑의 틀 안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큰 틀에서 바라보니 묵시록은 세상 따뜻한 성경입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시기에, 때로 격려와 위로도 하시지만. 때로 강력한 질책이나 경고도 하시는 하느님, 그 모든 것이 다 사랑 때문인 하느님의 마음이 잘 드러난 성경이 묵시록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 선포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의 진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습니다.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칭찬이나 격려만 하지 않습니다.
실패와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칭찬뿐만 아니라 피눈물 나는 질책도 서슴지 않는 분이 곧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씀의 중심, 결론에는 언제나 우리를 향한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8TtKYOzKWBA
++++++++++++++++++
<그냥 사랑하면 되는데, 왜 굳이 예수님 말씀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가?>
오늘 복음도 역시 요한복음이 성찬례를 제정하신 성목요일에 관해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란 계명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 계명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꼭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선 사랑은 왜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기쁨으로 충만’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러한 계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행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소유하는 행복과 사랑하는 행복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행복은 허무하게 빨리 끝나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얻는 행복은 오래갑니다.
워런 버핏은 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버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유하는 목적이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에서 75년간 한 연구에서 ‘행복은 관계’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관계, 그 관계 안에 소속되는 기쁨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행복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관계가 해소해주는 인간의 욕망은 ‘소속감’입니다. 이 소속감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하리 핼로우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원숭이는 젖을 주는 어미보다 따듯한 어미를 선택했습니다. 젖은 짧은 행복을 주지만, 따듯한 어미는 소속감을 줍니다. 그 소속감이 자신을 더 오래 생존시켜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계를 맺으려면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공동체 안엔 그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랑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 명령을 따르며 그 공동체에 속해있습니다. 가정보다는 사회가 그 사랑의 정도가 약하겠고, 사회보다는 교도소가 더 약할 것입니다. 물론 교도소보다는 동물의 무리가 사랑의 정도가 더 약합니다. 우리 각자는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 그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사랑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명령은 언제나 ‘피조물의 수준’의 사랑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이라 믿으며 사랑하라고 하면 이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사람의 수준만큼밖에 사랑하지 못합니다.
박수홍 씨는 현재 형과 100억 가까이 소송을 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된 데에 어머니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박수홍 씨에게 가족을 먼저 생각하도록 교육하였습니다. 어머니가 박수홍 씨에게 가족 사랑을 강조했지만 그건 실제로 박수홍 씨의 결혼까지도 반대하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박수홍 씨는 가족의 반대가 자기 팔 한쪽을 끊어내는 고통이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여 가족 안에서의 소속감을 느끼던지, 자유로워하고 싶으면 그 사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박수홍 씨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가족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가 해 준 카레가 맛있다고 했다가 어머니가 일주일 내내 카레를 해 주어서 투정을 부렸다고 합니다. 엄마는 돈 번다고 유세하느냐며 3일을 단식투쟁하였고 결국엔 박수홍 씨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의 소속감을 담보로 어쩌면 자녀를 이용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튜브에 보니 ‘딸 같은 며느리 원하는 박수홍 엄마에게 돌직구 날려버린 박명수’란 제목이 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독립시켜 잘 살게 하는 목적으로 자녀를 키워야 합니다. 하지만 박수홍 씨 어머니는 딸처럼 자신에게 잘해주는 며느리를 아들을 통해 얻고 싶었습니다. 거기 출연한 어머니들은 대부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들은 나이가 들었어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젊은 며느리를 원했고, 딸처럼 딸이 없는 자신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박명수 씨가 딸 같은 며느리는 만들 수 없다고 못을 박으니 거기 나온 어머니들의 표정이 안 좋아졌습니다. 이상민 씨의 어머니는 “아니야, 그렇게 만들어야 해!”라며 단호하게 말했고, 다른 사람은 안 돼도 나는 만들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는 안 된다고 말하는 박명수 씨에게 “지금은 시엄마들이 잘하면 따라오게 돼 있어요!”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가정에 속하려면 자신의 사랑의 수준까지는 올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요구하는 사랑이 진정 사랑일까요? 인간도 피조물입니다. 인간이 요구하는 사랑 안에는 반드시 피조물의 생존욕구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사랑의 명령을 따르다가는 피를 빨립니다. 같은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도 인간의 명령을 따를 때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른이 되었다면 이제 사람이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봐야 사람의 공동체에 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그 공동체 안에 갇힐 뿐입니다. 다 자신처럼 만들려고 하는 명령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하느님만이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본성은 창조자만이 지닌 특권입니다. 창조자는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인간을 창조자로 만들려는 것이고, 인간은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인간을 자신처럼 만들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사랑하십시오. 그래야 하느님처럼 됩니다. 그래야 하느님 가족으로 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라는 명령이라도 누구나 자신처럼 만들기 위해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 명령을 따르면 그 사람처럼 됩니다. 명령은 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그 명령하는 사람처럼 됩니다. 명령 안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의도가 명령보다 큽니다. 누군가 그 명령을 따를 때 그 명령하는 사람의 의도에 사로잡힙니다. 의도는 욕구입니다. 욕구는 본성입니다. 그러니 내가 하는 모든 명령은 다 누군가를 나의 욕구를 채우거나 나의 욕구대로 만들려는 틀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 명령을 따를 때 그 사람처럼 되는 것입니다.
밀링거 대주교가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사제들을 서품하고 자신만의 교구를 만들고 가톨릭 주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파문당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의 성 마리아란 여인과 통일교식으로 결혼하였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전파하는 주교로 살았습니다. 여러 사제가 밀링거에 의해 주교와 사제로 서품되고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교회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명을 어기며 서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처럼 사랑하게 될까요? 아닙니다. 밀링거 대주교가 사랑한 방식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모든 명령 안에는 ‘나처럼’이 들어있습니다. 결국 밀링거를 통해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더라도 밀링거의 공동체에 속하게 되는 것이지 하느님의 공동체에 속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이 하느님이라 믿는 이가 사랑하라는 말에 순종하십시오. 그래야 그 공동체에 속하게 되고 그 본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늑대가 인간 아기에게 명령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모든 명령을 다 따라도 아기는 늑대처럼만 됩니다. 늑대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늑대의 본성에 한정됩니다. 인간이 사랑하라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도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처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본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발을 씻기시며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여기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분처럼 사랑해야 그분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르는 이유는 그 공동체에 속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친구의 발을 씻어주는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하는 이유는 하느님으로서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누구나 자기 본성만큼 사랑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고 사랑하려면 인간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하라는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처럼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그리스도께서 이끄시어 완성하시는 그 ‘새로움’은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궁극적인 해방을 기다리며 신음하는(참조: 로마 8,19) 온 세상을 포용하고 있다.
묵시록은 악의 완전한 패배를 묘사하고 있다. “나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묵시 21,1). 여기서 새로움은 사물의 ‘새로움’이 아니라 인간의 새로움이다. 묵시록은 이 새로움을 천상 예루살렘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21,2) 이 예루살렘은 하느님 구원의 사랑을 영원히 거행하기 위해 세상 종말에 어린양의 주위에 모이게 될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암시한다.
이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온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천상 예루살렘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묵시 21,2)라는 표상으로 제시된다. 이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선택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했던 혼인 비유의 주제가 나타나고 그 예언적 사상이 실현되고 있다. 이 혼인 관계는 죽음 앞에서조차 변치 않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당신의 동반자로 포용하시는 혼인애를 들어 높여주신다. 그러기에 나머지 대목에 나타나는 기쁨의 의미도 알 수 있다.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묵시 21,3-4)
복음: 요한 13,31-33a.34-35: 새 계명을 주겠다
이 혼인의 계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양쪽에서 흘러나와 나누어져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을 기꺼이 받아주실 것을 의심치 않으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이의 무한한 사랑의 관계를 드러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 현존의 징표를 일치해서 반향 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어 당신의 현존을 확장하도록 하신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제자들의 완전히 새로워진 사랑을 통해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3-35절) 예수께서는 이 새 계명을 계약으로써 제자들에게 남기시려 한다. 예수님의 이 계약도 무상의 선물이다. “새 계명을 주겠다.”(34절)의 주다라는 동사는 보통 선물을 뜻한다.
그러나 어떻게 계명이 선물이 될 수 있는가? 그 계명이 어떤 의무를 부과하기보다 우리가 존재의 차원을 발견케 하고 또한 형제적 사랑을 나누게끔 되어있는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인적인 내적 신비를 깊이 알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을 밝혀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제 단지 하느님의 뜻만을 알아보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형제적 사랑을 새 계명이라 하는가? 율법에서도 이웃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 마태 22,39)는 계명을 원수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시면서(마태 5,43-48) 당신의 계명으로 만드신다. 그러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34절)고 이웃 사랑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바로 당신이 지금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수난의 길에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을 그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형제들에게 발을 씻어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의미한다.(요한 13,1-20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새 계명’이 법적인 계명의 의미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묵시록과 복음의 내용이 새로운 이라는 형용사에서 수렴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계명 등등. 그러나 이 새로움은 이 세상 마지막에 가서 그 빛을 발하게 되겠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즉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랑으로, 그 사랑의 새로운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활성화해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셨던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분을 닮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그 안에 세상을 포용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잠시뿐이다.”(요한 13,31-33ㄱ)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영광’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수난과 죽음이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여기서 ‘되었고’라는 말은, ‘이미 시작되었고’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영광은 곧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인류의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고, 부활은 인류를 억압하고 있는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신 일이고, 승천은 인류와 영원히 함께 계시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일입니다. 그 일들은 모두 인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인류 구원’이라는 대사업은, 예수님으로서는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고, 아버지로서는 아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 자신에게는 큰 기쁨과 행복이 되는 일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되는 일입니다. 묵시록을 보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어린양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고 있습니다.(묵시 7,9-10)>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곧 닥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라는 말씀은, 시간이 정말로 얼마 안 남았다는 뜻입니다. 뒤의 16장을 보면,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시점에서 수난은 조금 뒤에 일어날 일입니다.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시간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떨어져 있게 되는데, 그 시간은 짧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신 시간은 ‘만 이틀’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의 시간’에도 적용됩니다. 그 시간이 인간의 시간으로는 길게 생각되지만, 하느님의 시간으로는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2베드 3,8)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 말씀은, 죽음을 앞두고서 마지막으로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유언’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유언’이기 때문에 더욱더 새겨듣고 실천해야 합니다.) ‘새 계명’이라는 말은,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계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이해되는 계명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15장에 있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요한 15,9)라는 말씀과 짝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셨고, 바로 그 사랑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입니다.(요한 3,35)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입니다.(요한 15,13) 그렇게 ‘모든 것’을(목숨까지도) 내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또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속 사람들은 흔히 ‘좋아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을 ‘사랑의 정의’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는 ‘섬김’이 곧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고, 그렇게 섬기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 22,37) 그리고 이웃을 나 자신처럼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마음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고, 그렇게 귀하게 여기면서 아끼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마태 22,39)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라는 말씀도 ‘사랑’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낮춤’과 ‘섬김’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 셋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에서 ‘서로’라는 말은, ‘모두가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서는 ‘서로’라고 표현하셨지만, 우리로서는 ‘내가 먼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사랑 실천을 통해서 너희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여라.”, 즉 “사랑으로 신앙을 증언하여라.”라는 명령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신앙에 관해서 아무것도 증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너희끼리만’이 아니라 ‘너희부터’입니다. 사랑은 내가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온 세상 모든 사람으로 확산하여야 합니다. 울타리를 쳐놓고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심’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2021년 통계를 보았습니다. 26억 명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32%였습니다. 처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20명가량이었다고 합니다.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열심히 선교하였고 50년이 지났을 때는 1,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 복음 선포에 큰 역할을 한 사람은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개종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업적은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나자렛 예수님의 공동체를 독립된 교회로 만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대교에서 요구하는 할례와 율법준수의 의무를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이방인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3번에 걸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기에 300년이 되었을 무렵에 신자 수는 3,000,00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20명이 시작했는데 150,000배가 늘었습니다.
나자렛에서 시작한 교회가 세계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313년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인정하였습니다. 박해받던 교회는 황제의 명령으로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강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의 법, 제도, 문화, 정치는 교회의 조직, 제도, 전례, 법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교회는 로마가 깔아놓은 길을 따라서 로마의 보호를 받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를 인정하는 데는 한 가지 전설이 있습니다. 꼭 이겨야하는 전쟁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십자가를 상징하는 깃발을 만들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에서 본 깃발을 만들었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는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갔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믿음과 아들인 황제의 체험으로 교회는 성장하였고 400년에 신자의 수는 30,000,00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20명이 시작하였는데 1,500,000배로 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이 전한 복음이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사도 바오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걸출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오늘날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하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라고 하셨습니다. 유다교도, 이슬람교도 선교와 전도를 사명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불교도 선교와 전도를 사명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박해받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순교한 사람들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들이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둘째는 20명에서 시작한 교회 공동체가 오늘날 26억 명으로 성장한 것은 커다란 기적은 아니라고 합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개종해서 이루어진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통계적으로 가능한 성장이라고 합니다. 10년에 30%씩 성장하면, 1년에 3%씩 성장하면 오늘날과 같은 교회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100명이 1년에 3명을 전도하면 가능한 숫자라고 합니다.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 때문에 변화된 사람이,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구전으로 그 기쁨과 행복을 이웃에게 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전해진 복음은 봄이 되면 이곳저곳에 꽃이 피듯이 복음의 꽃으로 피어났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주변에서 보았습니다. 마을의 굿은 일을 도맡아서 하는 프란치스코 형제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던 마태오 형제님, 잘못한 이웃을 예수님 때문에 용서해 주었던 마르코 형제님, 물난리 난 현장으로 달려가서 손자를 등에 업고 청소해 주셨던 아가다 자매님, 17년 동안 정성을 다해서 가족들을 돌보며 결혼 선물로 남편으로부터 예비자 교리 신청서를 받았던 안나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놀라운 표징과 업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삶이 변한 사람들이 말과 행동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새로운 계명을 실천할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아무조건 없이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한다면, 나에게 잘못한 이웃까지 사랑한다면, 사랑 때문에 고통과 수난을 기꺼이 감수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수 있습니다.
=====================
[광주대교구 이준호 세례자 요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서로 사랑하여라.”>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은 이 사랑의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요한 15,9)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이 참되신 것은 아버지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아버지는 어떻게 사랑하셨을까요? 그것은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낸다는 것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놓는 그런 모진 사랑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아들은 자기를 죽음에 내놓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신뢰하며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기꺼이 죽음을 향하여 당신의 몸을 내놓으셨습니다.아들을 죽음에 부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의 마음에서 우리는 사랑의 절정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오늘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 사이에 일어난 사랑을 지금 제자에게 요구하십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도망쳤던 이유는 그분처럼 희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당신의 몸을 희생으로 바쳤을 때 그 죽음을 보며 제자들은 인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남을 부활시키는 죽음이었습니다. 남을 부활시키고 그분은 밀알처럼 썩어 사라지셨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예수님이 오늘 주신 이 새 계명은 인류가 예수님의 방식으로 서로 사랑할 때 완성될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박광호 베드로 신부님]
오늘 독서에서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여러 이방지역을 다니며 주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둘째 독서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면서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참고로, 금년 ‘다’해의 주일에는 원래 루카복음을 묵상하게 되어 있지만, 부활대축일부터 삼위일체 대축일(6월 12일)까지는 요한복음의 내용을 묵상하게 됩니다.
1. 제1독서 : 사도행전 14,21-27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교여행을 떠납니다.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습니다. 또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가 거기에서 배를 타고 다시 안티오키아로 갔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온 세상에 증거하기 위하여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러 넓은 지역을 다니며열성적으로 전교하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 제2독서 : 요한 묵시 21,1-5
오늘 묵시록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게 됩니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으며, 모든 것은 새롭게 됩니다.
3. 복음 : 요한 13,31-33ㄱ.34-35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고,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모범을 보이신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말씀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라 하시고, 또 새 계명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떠나실 것을 예고하시며 제자들에게 ‘유언’의 말씀을 남기십니다.
(1) 영광
“영광”이란 아들이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을 뜻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아버지와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필연적입니다. 떠나심으로써 부활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시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고, 또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시게 됩니다. 참된 영광이란 봉사와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2) “잠시뿐”과 주님의 현존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라 하셨는데, “이제 곧”이나 “잠시뿐”이란 말은 슬프게 들리지만,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곧 세상을 떠나시게 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육체적으로는’ 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육체적으로’ 현존(現存)하시는 주님을 뵈옵던 것에서,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이처럼 믿음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그분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며 실천해야 모습입니다.
(3) 사랑의 계명과 주님의 현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알아보고 가능하게 할 중요한 계명을 남기셨습니다.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자기 중심적이거나 이기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이 사실은 곧이어서 모범으로 생생하게 보여주시는데, 바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모범입니다.
발을 씻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행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지극한 봉사요 섬김입니다. 그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겸손과 섬김의 표시이지만(겸손도 사랑임, 1코린 13,4), 나아가서 그들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겪으시는 데에까지 나아가게 됩니다.(10-11)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그러한 사랑을 실천하라고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그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현존(現存)을 다시 가능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참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부활하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영원히 ‘현존’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 제자가 되게 하며, 교회 안에 보이지 않게 현존하시는 주님을 드러내게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고 믿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특징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많은 일을 벌이거나 큰 사업을 하거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참다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이 세상에 보여주게 되며, 또한 세상은 그들의 참된 사랑을 보고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현존해 계십니다.
주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고, 그분을 선포하는 제자들(혹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일치되어 사랑하지 않고 서로 분열되고 서로 미워한다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서로 일치하고 사랑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평소에도 길가다가(마르 9,33), 혹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의 청(마태 20,21)을 듣고서 서로 누가 높으니 하며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봉사하고 섬기라는 교훈을 주셨습니다(마르 9,35 ; 마태 20,25-28).
예수님께서 곁에 계셔도 상황이 그러한데, 이제 세상을 떠나실 때가 가까워지자 그분은 많이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셔도 제자들끼리 서로 섬기고 일치하고 사랑하라고 여러 번 신신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다행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서로 일치하고 협력하며 예수님의 일을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그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투며 분열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4. 오늘의 실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아버지의 생명에 참여하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더 이상 하늘에만 살지 않으십니다. 이제부터 세상 안에, 사람들 사이에, 인간의 마음 안에도 사십니다. 인간이 세상에 살만한 가치를 지니게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위하여 한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예수님 사랑의 증거자가 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러이 부활하셨지만 교회는 때때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합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주님을 신앙으로 체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을 함께 나누는 바로 거기에 언제나 계십니다.
주님께서 현존해 계심을 증명하는 것이 서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계명의 대상은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의 대상’은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물론, 주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모든 이들’까지 포함됩니다.
종교심이나 신심이 깊을수록 독선적이거나 편협하거나 배타적이거나 고집스러워질 위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한 자세는 사랑의 계명에 어긋납니다. 남을 포용하는 넓은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늘 강조하셨습니다.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남을 소중히 여기고 배려해야 하고 남과 공존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은 나라 안에서나 전 세계적으로 종교 간의 갈등과 가진 자의 횡포와 못 가진 자들의 고통이 난무하는 오늘날 깊이 반성하며 고쳐나가야 할 중요한 태도입니다.
남은 무시하고 자신의 배를 하느님으로 섬기는 이기주의가 판을 칩니다. 나아가서 갈등과 분쟁과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피해를 끼치는 것은 이 사랑의 계명에 정반대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피해와 살인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남은 도외시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주의로 여기는 것도 이 사랑에 어긋납니다. 그리스도교 국가에서조차 그러니, 예수님의 계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일시적인 자선이나 동정은 사랑의 계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창조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서로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를 이루는 길입니다.
=====================
《춘천주보》 말씀의 향기
[춘천교구 윤헌식 F. 하비에르 신부님]
<사랑의 새 계명>
오늘 복음 내용은 예수님의 작별 담화 주요 부분으로, 세 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되신다는 것', '떠나신다는 것'. '사랑의 새 계명'이 그것입니다. '영광' 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 요한 복음사가는 이 표현을 통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예수님의 운명을 알려주고, 이미 예언된 구약 성경의 고난받은 주님의 종을 연상하게끔 안내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광이란 말로 당신의 파스카 신비를 함축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떠나심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구원론적 차원을 지닌 당신 사명을 완성하시기 위해 떠나시면서 제자들을 새로운 상황에 대비시키시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듣고 따랐지만, 이제부터는 성령을 통해 현존하시는 예수님과 일치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예수님은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십니다.
사랑은 메아리라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 발을 씻어 주려고 몸을 낮추신 분의 사랑, 수난 때 당신을 부인할 것을 분명히 아시면서도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고 그에게 형제들을 맡기기까지 하신 사랑, 당신을 팔아먹은 유다의 발을 씻기신 사랑끝내는 모두를 위해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사랑, 바로 이 무조건적이며 이타적인 사랑이 새 계명이며 이웃 사랑의 토대입니다. 이 새 계명은 새로운 계약의 현실과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새롭습니다. 마치 예레미야가 율법과는 다른 마음에 새겨질 하느님의 법을 이야기하듯, 예수님과 내밀한 친교가 생겨날 때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웃 사랑은 그 자체로 성령의 구체적인 징표이며 예수님 제자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거처가 사람들 가운데 있고,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에는 틀림없이 눈물도,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힘과 용기를 내시고 부활의 기쁨을 살아갑시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
《서울주보》 생명의 말씀
[김한수 토마스 신부님(종로성당 주임)]
<내가사랑한 것처럼 너도…>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시설을 견학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시물을 둘러보던 와중에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습니다. 안중근 토마스가 뤼순 감옥에서 썼다는 글, '경천'을 만났습니다. 짧은 약지의 손도장이 찍혀 있는 그의 글, 사진으로만 보던 그 글씨를 마주 대합니다. 선물 같은 순간입니다. 그의 글씨 앞에 멈춰 한참 동안 마음의 흔들림을 겪습니다. 하느님 법을 따르는 가톨릭 교인의 신앙과 민족의 해방을 위한 헌신 사이에 겪었을 고뇌를 상상해 봅니다. 자기 삶을 이끌었던 '경천애인(人)'의 계명이 자기 목숨을 내어 주는 헌신에까지 이르게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옷을 사랑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감내하며 택한 방식일 것이라 감히 짐작하며 감탄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7-39) '경천애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원천인 십계명만 보더라도 제3계명까지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으로, 4계명부터 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으로 귀결됩니다. 그렇게 구약의 백성, 신약의 백성 모두가 하느님 법으로 간직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경천애인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전혀 새롭지 않은 계명을 새로운 계명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 시기를 떠올리면 그 새로움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새로운 계명입니다. 당신이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분명 새롭습니다. 동시에 두렵기도 합니다. 내 나름대로, 내 상황에 맞게, 내 능력껏 사랑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에, 당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래서 새롭고도 두렵습 니다.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았고, 절망을 희망으로 변화시키는 하느님의 힘을 당신을 통해 실감합니다. 당신이 하느님과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고 있는데, 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 새롭지만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인물들만이 실현 가능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다시 그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 말씀의 가능한 지점을 살펴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당신처럼 사랑할 수 는 없지만, 나도 나름대로 사랑하렵니다. 나만 사랑받으려 하기보다 나도 사랑하며 살아가렵니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나도 나누렵니다. 그렇게 새로운 계명을 나름 실현해 나가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서로>
요한 13,31-33ㄱ.34-35 (새 계명)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너는 나를 사랑하고
그리하여 서로
나는 너에게 가고
너는 나에게 오고
그리하여 서로
너에게 나를 주고
나에게 너를 주고
그리하여 서로
나는 너를 품고
너는 나를 품고
그리하여 서로
너 있어 나 있고
나 있어 너 있고
그리하여 서로
너와 더불어 나이고
나와 더불어 너이고
그리하여 서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이고
그리하여 서로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서로 사랑하여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에페소서 5장2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 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 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내 놓으신 주님께서는 간절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13,34-35)
왜 새 계명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그런데 그 중심을 보면 ‘내 중심’입니다. ‘너 자신처럼’사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 중심’으로 사랑을 시작하였다면, 이제부터는 ‘죽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 예수님의 시대에 옛 계명이 다시 주어졌으니 새 계명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새 시대가 주어졌는데 새롭게 살아가라. 알고 있는 것이 앎 자체가 아니라 아는 바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서로 사랑하여라.”는 말씀 중에 ‘것처럼’을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사랑은 결국 희생을 동반한 사랑입니다.
젊은이들의 혼인을 준비하면서 사랑이 무엇이냐? 고 묻게 됩니다. 그 대답은 다양하지만 ‘주는 것이다. 베푸는 것이다. 주어도 주어도 더 주고 싶은 것, 주어도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다.’라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베품’에 대한 대답이 주를 이룹니다.
그런데 사랑은 일방통행일가요? 쌍방통행일까요? 하면 대부분은 “상방통행”이라고 답합니다. 모순되는 대답을 합니다. 이 답에는‘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갈려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일방통행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거룩해서, 큰 공로를 세워서 사랑하시고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까? 우리의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바로 그분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부족함 때문에 더 큰 사랑이 필요합니다.
13절15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제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가 되는 필요충분조건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많은 지식, 교양이 있고, 거룩한 체험을 하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여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해야”제자가 됩니다. 결국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랑의 휘장을 달고 다녀야 합니다.
익명의 성인은“우리가 사랑하는 성인들과 함께 천국에서 사는 것, 그것은 가장 순수한 영광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성인들과 함께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매일 같이 백색순교를 요구하는 인내의 삶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천상을 갈망하는 만큼 이 세상에서 인내를 가지고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아우구스티누스) 사랑하는 곳에 하늘의 문은 이미 지상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노래는 그 노래가 불리어질 때까지 노래가 아니다. 종은 그 소리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요, 사랑은 사랑이 나누어질 때까지 사랑이 아니다.”(송봉모)라고 했습니다. 입술로 하는 사랑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랑을 갈망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 사랑의 길을 걸으셨으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입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그 나름대로 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리를 삶에서 실천하도록 계명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그리스도교의 계명은 “사랑하여라!”로 요약됩니다. 그런데 이 계명의 목적어가 구약과 신약이 조금씩 다르고, 또 신약에서도 공관 복음과 요한 복음이 서로 다릅니다.
먼저, 구약에서는 대표적인 목적어가 “주 하느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에서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공관 복음을 보면 신약의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전통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계명에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발견되는 이웃 사랑에 대한 계명을 덧붙여 ‘사랑하여라!’는 계명의 목적어를 이중으로, 곧 하느님과 이웃으로 밝혀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사랑의 이중 계명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예수님께서 주신 새롭고 유일한 계명이 “서로 사랑하여라.”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어지는 요한 복음 15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여라.”(15,12.17)
따라서 적어도 요한 복음에서 ‘사랑하여라!’는 계명의 목적어가 분명히 하느님에게서 사람에게 옮겨 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한쪽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 간의 사랑이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단 하나의 계명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은 ‘서로’라는 낱말에 주목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첫째 편지가 들려주는 다음의 말씀도 함께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참사랑!>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힘들고, 기도하기가 힘들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것이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너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너를 예수님처럼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는데, 그 사랑은 '아가페요 펠리칸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요한13,31)
이 영광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인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서로가 너를 위해 죽음으로써 나와 하느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그대로 실행하였더니, 평화가 찾아왔다고 내게 몇 번에 걸쳐 힘주어 말씀하시던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준 사랑은 '내가 죽는 사랑',
그래서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면, 오늘 제2독서에서 전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인 천국'이 지금 여기에서 건설될 것입니다.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21,3.4)
이 엄청난 선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방식으로 서로 사랑합시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길을 가다가 주인 잃은 지갑을 주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다음의 보기에서 선택해보세요.
1) 가까운 경찰서나 경비실에 맡긴다.
2) 모른 척 그냥 간다.
3) 지갑 속 현금 액수에 따라 1번 또는 2번을 선택한다.
아마 대부분 1번을 선택해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1번을 선택했다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지갑을 주어 경비실에 맡겼는데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것입니다. 지갑 주인이 지갑 안에 130만 원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니 조사받으러 출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선행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도둑으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로, 이 사람은 법정까지 가게 되면서 1,300만 원을 변호사비로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여러분에게는 오지 않을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위의 질문에 이제 몇 번을 선택하시겠습니까? 1번이 정답이라는 것은 분명한데, 2번을 선택해야만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사실 이런 곤란을 겪을 확률은 높지 않습니다. 어쩌다 생겼던 단 한 번의 일을 기억하면서 선행을 포기해야 할까요? 어쩌면 선행을 하기 싫은 것이 아닐까요? 손해를 보더라도 사랑 실천에 적극적인 모습,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여라.’를 실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 하신 고별사 부분입니다. 당신의 떠남은 육신의 작별일 뿐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널리 퍼지는 세상을 맞게 된다고 하시지요. 이로써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이 모든 말씀에 주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얘들아”(요한 13,33)라는 호칭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버지가 아들을 정겹게 부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랑하는 제자들이 더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작별하고 나면 지금 당장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 없는 동안 주님과 함께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 안에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사랑으로 이 세상을 힘차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사랑 실천에 주저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만드는 우리입니다. 사랑과 멀어질수록 주님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주님과 진정으로 하나를 이루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커다란 은총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삶>
-꿈, 사랑, 선교-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성서는 결국 하느님의 승리에 대해 말합니다. 시종여일, 철두철미 하느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영적 승리의 삶을 삽니다. 이런 영적 승리의 삶을 살았던, 증언하는 무수한 성서의 사람들이요 우리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이 믿음의 후예인 우리들 역시 영적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즐겨 인용해 왔던, 앞으로도 죽는 그날까지 인용할 주제는 영적전쟁에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승리의 삶일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라는 좌우명시 한 연을 인용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주님의 전사로서의 전우애, 주님의 학인으로서의 학우애, 주님의 형제로서의 형제애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를 이룹니다. 혼자서의 구원은 불가능하듯이 혼자서의 영적승리도 불가능합니다. 하느님 말씀과 기도의 무기와 더불어 공동체 형제들의 도움으로 비로소 가능한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주님의 전사입니다. 믿음의 전사, 말씀의 전사, 평화의 전사, 사랑의 전사, 희망의 전사등 끝이 없습니다. 죽어야 제대인 살아 있는 그날까지 영적 전투를 수행해 가야할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지난 번 금요강론 공부시 나눴던 내용이 생각납니다. 왜 영적전쟁의 삶이냐에 대한 좋은 이유를 밝혀 주는 내용입니다.
“베네딕도는 인간을 ‘내리막 경사길(a downward slope)’ 도상에 있는 존재로 보는 것 같다. 우리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둘 때, 우리는 마냥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 무너져 버린다. 죄는 어떤 것을 행하는 것뿐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베네딕도는 본래 좋게 타고난 것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상적 낙관적 이상의 비전을 갖지 않은 듯 하다. 그는 사람이 듣기를,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 경우를 통해서 인간의 악한 경향의 현실을 알았다.”
참 날카로운 성인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입니다. 오늘은 성 파코미오 아빠스 축일이자 우리 요셉수도원의 최종근 파코미오 원장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작년에는 토요일이라 기념미사를 봉헌했는데 이번은 주일미사라 주례는 파코미오 원장이, 강론은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이 세상 나라의 군인들과 주님의 전사인 성인들이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군인이었다가 회심하여 주님의 군인이 된 성인이 참 많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파코미오는 물론이고, 성 마르티노, 성 프란치스코,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세상의 군인이었다가 회심하여 주님의 전사가 된 분들입니다.
하느님의 승리요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다음 요한복음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겨놓은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래도 우리의 평생 분투의 수행과 노력은 필수입니다. 영적승리를 위한 삶의 비결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첫째, 꿈입니다.
제가 참 많이 강조하는 것이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어제 별내성당에서의 특강도 ‘희망의 여정’, ‘희망의 순례자, 희망의 전사로 삽시다’라는 주제로 나눴습니다. 참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필수 전제 조건은 꿈이자 희망, 비전입니다.
세상 꿈이나 희망이 아닌 궁극의 꿈이자 희망인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런 생생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하느님의 꿈을 지닐 때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은 거의가 하느님 꿈쟁이들이었습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요한 묵시록이 궁극의 하느님의 승리를 보여주면서 진짜 궁극의 하늘 나라 꿈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나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고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얼마나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현실감있게 느껴지는 은혜로운 하늘나라 꿈의 현실인지요! 언젠가 하늘나라의 꿈을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사는 우리들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새롭게 하며 오늘 지금 여기서 새 하늘 새 땅의 현실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이런 생생한 하늘 나라의 꿈을, 희망을 지녀야 절망하거나 타락하거나 변절하지 않고 한결같이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하늘 나라의 현실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하늘 나라의 꿈이자 희망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괴물도 되고 폐인도 될 수 있습니다. 평생 이런 하늘나라의 꿈을 지니고 희망의 순례자로 살 때 비로소 참나의 성인이 될 것이며 이런 참나의 성인은 우리 삶의 궁극의 목표이자 행복이 됩니다.
둘째,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은 물론이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때 주님께는 영광이 되고 주님도 우리를 영광스럽게 해주십니다. 온갖 고행, 극기, 절제 잘해도 사랑이 없으면 모두 헛된 노고입니다. 지난 금요강론 중 나눈 잊혀지지 않는 내용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은 외적 고행으로가 아닌 순종의 사랑으로 주님을 따른다. 우리는 고행보다는 사랑의 순종을 좋아해야 한다, 고행은 교만을 가르치고 사랑의 순종은 겸손을 가르친다. 사랑의 순종은 모든 덕중 최고의 덕이자 모든 덕의 어머니로,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억지로, 마지못해 순종이 아니라 사랑의 순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장엄한 사랑의 명령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궁극의 처방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구원은, 하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습니다. 새 계명은 뭐 비상한 것이 아니라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 좋을 대로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그 아가페 순수한 사랑의 새 계명을 실천할 때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이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으로 실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고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셋째, 선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관상, 사랑의 친교로 자족해선 안됩니다. 사랑의 관상은 끊임없이 사랑의 선교로 열려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선교는, 사랑의 복음화는 우리 교회공동체의 존재이유이자 사명입니다. 우리의 신원은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이자 관상가요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이자 활동가입니다.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을 극진히 사랑했던 주님의 제자들이요, 밖으로는 이웃에 대한 선교열정의 사랑에 불탔던 주님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다음 그림같은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고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그들은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선교사들은 주님의 사람들이자 철저히 교회의 사람들입니다. 성인들의 공통적 특징이 교회에 대한 충실하고도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이들이 선교사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 주님의 제자들이자 세상 사람들을 주님의 교회로 인도한 선교사의 롤모델이 바로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참으로 세상 모든 이들이 복음화의 대상이자 하늘 나라 실현의 대상이요, 우리 삶의 제자리에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밖으로는 주님 선교사로 살아감이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의 승리에 참여한 우리의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1.하늘 나라 생생한 꿈을, 희망을, 비전을 지니십시오.
2.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십시오.
3.각자 삶의 자리에서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로 살아가십시오.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키며 늘 새롭게 살아갈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참 아름답고 좋고 놀라운 하느님의 꿈,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21,5) 아멘.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bvCKd43lNQ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요한 13, 34)
사람은
계명을
필요로 한다.
새 계명은
새로운
실천이다.
실천을
다시 새기는
새 계명이다.
새 계명의
근본정신은
분명히 참된
사랑이다.
생활의 중심에
있어야 할
새 계명
사랑이다.
이렇듯
참된 사랑은
사람을 살린다
사랑은
관계를 통해
확장되는 참된
생명이다.
참된 생명
참된 사랑은
서로를
올바른 길로
이끌며 삶을
바꾸며 인생을
변화시킨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라
생명이다.
생명의 실천인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계명이
아니다.
새 계명인
사랑은
우리를
일상의
현장 속으로
끌어들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사랑을
실천하신다.
실천이 흔들리면
생활의 기본이
흔들리게 된다.
우리의 생활은
욕망의 노예가
아닌
하느님 자녀들이
누리는 건강한
사랑의 참된
계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를 살리시는
새 계명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행복이다.
그릇된 욕망을
치유하는
새 계명이
우리를
새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랑에 감사하는
삶의 새 계명이다.
생활 속의
실천이
진정한
사랑임을
믿는다.
서로를 참으로
사랑하는 새 빛이
우리를 비춘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