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 대부분이 현재 생존해 있기에 그들의 이름을 밝히지 못합니다. 제가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요 그런 조직속에 살았던 제 자신이 너무도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양해해 주시시 바랍니다.)
요즘 영화계에 새로운 돌파구가 생겼다고 한다. 그동안 40년 이상 그저 그렇게 잊혀지고 그렇거니 하며 지냈던 그 사건. 바로 12.12 신군부 쿠데타를 다룬 영화말이다. 바로 서울의 봄이야기이다. 나는 그 시절 대학을 막 졸업하고 지금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직장에서 어떻게 나의 인생을 살아야할 지 너무도 고민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에 종사를 해야하지만 나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방황하던 나를 그 당시 나의 친구 한명이 찾아와 조언을 해주었다. 친구가 고교시절에 국어에 흥미가 많으니 혹시 기자되어 볼 의향이 없느냐고 말이다. 나는 당시 대학교 시절 그 험악했던 상황에 데모 한번 하지 못했다. 역사적 관심이 적었고 나 하나 하루하루 생존하는 그 힘조차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교에 계엄군이 진주하고 탱크가 학교 캠퍼스를 장악했을 시절에도 그냥 학교앞 막걸리집에서 세월을 죽이고 살았다. 목표도 없이 희망도 없이 미래도 없이 그렇게 했다.
친구의 권유로 기자라는 직업에 흥미를 갖고 기자시험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28일 첫번째 방송사 시험일이다. 날짜를 보면 뭔가 기억이 나지 않는가. 바로 전 전날밤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살해됐다. 10월 27일은 나의 아버지의 회갑날이었다. 가족들이 다 모여 아버지 회갑연을 준비하며 하객을 맞이하는 그런 날에 한국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당시 나의 바로 바로 윗 형은 군인이었는데 아버지 회갑연 참석하자 마자 귀대를 해야 했다. 당시 밤 10시 이후 통행이 금지됐다. 아버지 회갑연에 참석했던 하객들은 서둘러 귀가를 서둘러야 했다. 그렇게 아버지 회갑연은 계엄령하에 막을 내렸다.
10월 28일 나에게는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모 언론사 시험을 치러야 하는 날이다. 아버지의 회갑연과 어수선한 나라상황속에 어느 학교에서 시험을 치뤘다.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상식 논문이었다. 논문시험의 제목이 기억이 난다. 국가적 난국속에 언론이 해야 할 책무였다. 어제 마신 술이 채 깨지도 않았는데 무슨 시험제목이 이런가 하면서 그냥 나와버렸다. 독재자가 비명에 갔는데 뭘 어쩌라는 것인가. 잘 수습해서 나라를 잘 이끌어야 하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박정희의 군부독재 18년속에 언론은 제 구실을 못했는데 이 시점에서 무슨 역할인가 하는 마음에서 그냥 시험장을 나와 버렸다.
일년이 지났다. 또 다시 언론고시가 시작됐다. 당시 1980년 가을이었다. 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군부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하지만 당시 일반 국민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난리를 일으켰고 나라의 영민한 지도자와 군인들이 그 폭도들을 진압했다는 정도만 알려질 뿐이었다. 물론 당시 타임지나 뉴스위크 등 세계적 언론들은 한국의 광주민주화운동을 보도했지만 그런 기사는 칼로 찢혀진채 일반에게 뿌려질 뿐이었다.
1980년 늦가을 언론사 시험이 시작됐다. 지난해의 그 회사가 아닌 다른 언론사에 시험을 치뤘다. 그 회사는 신문과 방송을 공유하고 있었다. 당연히 박정희 독재시절 이뤄진 일이었다. 다행이 1차시험 즉 필기시험에는 통과했다. 다음은 실기와 면접시험이었다. 그 회사는 과거 광화문에 존재했다. 실기시험과 면접시험을 마치고 발표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 이 나라에 정말 요상한 일이 벌어진다. 바로 언론 통폐합이다. 전두환 군부세력은 마음에 들지 않는 비판 언론을 제거한 것이다. 방송은 kbs, mbc 만 나두고 모두 없앴다. 신문도 조선 중앙 동아 한국 경향 등 6개만 나두고 모두 폐간시켜 버렸다.
내가 응시했던 모 방송사는 문을 닫았다. 그때 그 회사 사장이 보낸 편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 귀하도 잘 아시겠지만 저의 회사가 문을 닫게 됐습니다. 같이 일을 하지 못하게 된 점 사죄드립니다. 앞으로 같이 만나 일할 날을 기약하겠습니다." 그렇게 나의 방송사 진입은 실패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났다. 배운 것이 기자시험보는 것이라 또 시험을 보았다. 1981년 가을이다. 그렇다가 어떻게 해서 모 방송국에 합격했다. 하지만 첫 출근때 보도국에 보였던 분위기는 횡한 썰렁한 그런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였다. 자신이 다녔던 회사가 없어지고 강제로 합병된지 얼마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청운의 희망을 품고 입사한 나와 나의 선배들의 모습은 달라도 많이 달라 있었다. 기존의 방송사 기자들은 마치 전쟁 승리자처럼 보였고 합병당한 선배들은 패잔병처럼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의 기자생활은 시작됐다.
생활을 하면서 기존의 선배들 가운데 상당수가 강제 퇴직 당한 것도 알게 됐다. 그 사유도 웃긴다. 사상이 불건전하고 사생활이 문란하고 회사생활에 부적합하다는 이유 등이다. 지나가던 개도 웃을 사유이다. 남아 있던 기자들의 상당수는 그냥 휑한 시선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상화됐다. 그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일을 어떻게 다 글로 남길까. 내 스스로도 불편하고 그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 회사 모 선배가 나에게 한 말은 전해야 할 것 같다. " 자네는 이 회사에 어떻게 들어왔는가. 여기는 외눈박이 섬일세. 자네가 두눈을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는 한쪽 눈은 제거해야 생존이 가능할 걸세. 외눈박이 세상에 "두눈박이는 장애인일 뿐이고 생존가능성이 없다고 봐야하네"
그렇다. 1980년대의 그 암울했던 언론사의 현실이 아직도 되풀이 되고 있다. 정권이 바뀌면 특정 방송국과 통신사 등등은 사장이 바뀌는 것이 일상화됐다. 내가 일했던 1981년 이후 내가 일했던 장소는 정권이 바뀌면 사장이 바뀌는, 그 희안한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다. 언론의 사명은 진실 추구인데 사장이 바뀌고 국장이 바뀌고 부장이 바뀐다고 그 기본 정신이 바뀌면 되겠는가. 하지만 기자는 그 회사를 그만두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의사는 개업하면 되고 검사나 판사는 변호사 자격으로 활동하면 되지만 기자는 그만두는 즉시 백수가 되고 만다. 그래서 그 사명감이라는 요상한 의무를 어떻게라도 붙잡고 싶어 한다. 그런 얄팍한 심정을 이용한 정권의 기자 이용은 지금도 널리 활용된다. 그래서 기레기가 나오는 것이다.
2023년 12월 14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