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조경택 코치는 감독으로 어떤가요?' 라는 글을 보고 문득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2000년, 그리고 2001년 얘기입니다.
우선 두 가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첫째, 저는 그 글을 쓰신 분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둘째, 2000년 당시 기억이 최근의 상황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다만, 최근 며칠간의 야구 뉴스와 글을 보고 문득 떠오른 그 시절 기억이 생각나서 이 글을 씁니다.
14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죠.
1988년 최동원, 1996년 이상훈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는데
2000년에는 좀 규모(?)가 컸습니다.
최근에 야구를 보기 시작한 분들은 그 사건을 기억 못하시겠지만
올드팬들은 아마 기억 나실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2000년 1월, 송진우-양준혁-최태원-박정태-강병규 등이 선수협 결성을 시도했습니다.
누구는 반대하고, 누구는 찬성하고, 그러면서 이런저런 사건사고와 함께 일이 진행됐는데
이승엽-김기태-김태형-이호성-그리고 조경택 등 5명의 선수가 "선수협의 배후세력을 폭로하겠다"며 기자회견을 엽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반대파였던 것인데,
"선수들이 스스로 권익 보호에 나서야 한다" vs "아직은 시기상조다, 나쁜 의도를 가진 배후세력도 있다"는 의견이 맞선겁니다.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협에 참여한 선수와 그렇지 않은 선수로 나뉘었고
선수협을 탈퇴하는 사람, 새롭게 가입하는 사람 등등이 얽히면서 양편으로 나뉘어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많은 팬들은 선수협을 지지했고
선수협의 배후를 거론한 5명의 선수들을 '선수협 5적'이라며 비난하고 나섰습니다.
을사오적에 빗댄 표현으로, 당시 선수협을 찬성한 팬들이 그 선수들을 얼마나 비판했었는지 알 수 잇는 단어죠.
그러다 결국 시즌이 시작됐고, 선수협 논의는 다음 시즌으로 미뤄집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2000년이 지나갔고, 선수협은 2001년 스토브리그에 다시 활동(?)을 시작합니다.
송진우가 회장으로 재추대됐죠
이때도 갑론을박, 선수들 역시 참여파와 비참여파로 여전히 양분됐습니다.
그런데 송진우가 회장으로 추대되고 며칠 후
이호성과 김태형 등이 '아직은 시기상조다'라며 다시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KBO와 구단들이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최태원 심정수 박충식을 각 구단에서 방출한겁니다.
네, 진짭니다. 송진우가 한화에서 방출 됐습니다.
(송진우는 실제 대전구장 사무실을 방문해 유니폼을 반납했고, 카페에서는 송진우 방출 반대 서명운동이 벌어졌죠)
구단과 KBO는 초강수로 선수협 사태를 진압(?)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충격적인 조치로 오히려 선수들이 하나로 뭉칩니다.
LG가 당시 주장 양준혁의 방출에 항의하며 선수단 전원이 선수협에 가입했습니다.
(선수협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던 김재현이, 반대파 유지현을 제외한 모든 선수들을 설득해 단체 가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롯데 선수들은 '박정태 선배를 복귀시키지 않으면 구단과 계약하지 않겠다'며 총파업(?)을 선언해버립니다.
한화와 SK, 해태 두산 선수들도 줄줄이 선수협에 단체로 가입했죠.
참고로 저는 'LG선수들이 개인적이고 겉멋이 들었다', '롯데는 모레알이다' 그런 악플을 볼 때마다 이때 생각이 납니다.
당시 선수협을 지지했던 팬으로서, LG와 롯데에게 갚아야 할 은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이후 선수협의 활동 및 변질과는 별개의 문제로 말입니다)
각 구단에서도 선수협 참가자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가입 멤버가 하나도 없던 삼성에서 이승엽이 독자행동을 하며 선수협에 가입해버렸습니다.
(선수협 오적 시절 이승엽은 당시 삼성 고참 김기태의 손에 이끌려 갔다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삼성이 여론을 의식해 이승엽의 가입만 허용했다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삼성은 노조를 인정하지 않죠)
문광부와 공정위까지 나서 사태를 중재하기 시작하자 결국 선수협은 공식 단체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제가 엊그제 '조경택 감독'글을 보고 흥미를 느낀 지점이 있습니다.
이승엽이야 아직도 야구를 잘하니까 논외로 치고
이호성은 불미스런 일로 세상을 떠났으니까 이 글에서 빼고 말하자면
당시 선수협을 반대했던 나머지 선수들이 은퇴 후 계속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는 겁니다.
김태형은 결국 두산 감독이 됐고
김기태는 시즌 중 감독자리를 박차고 나갔는데도 내년 시즌 기아 감독으로 복귀할 뻔 했죠.
조경택 코치도 한화에서 오랫동안 주류(?)코치로 활동하고 있고요.
기자회견 멤버는 아니지만, 당시 반대파였던 김경기도 올해 SK의 유력 감독후보 군 중 한명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선수협을 반대했기 때문에 구단에서 일부러 자리를 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증거도 없고, 확신도 없습니다.
김태형 감독-김기태 감독 내정설도 그저 하나의 우연일 수 있겠죠. 그들 모두 감독이 될 만한 연차가 됐으니까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기태-김태형-조경택의 이름이 최근 며칠새 넷상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니 문득 그때 생각이 납니다.
여담입니다만, 선수협 사태때 글 한편으로 옮기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일성 위원은 투쟁(?)중이던 선수들에게 숙식을 제공했고
해외에서 뛰던 이상훈과 정민철, 일본 진출이 확정된 구대성이 1천만원씩을 선수협 활동비에 쓰라며 기부했습니다.
선동열은 초기 선수협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다 KBO복귀를 앞두고는 관계를 끊었고
모 유명 선수들은 기자들과 팬 앞에서 서로 고함치며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S급 타자가, 또 다른 S급 타자에게 방망이를 들고 덤볐다는 얘기도 있는데 제가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MBC 100분토론에 이호성과 강병규가 출연했었고
당시 KBO총재는 "프로야구를 없애버리겠다"는 발언으로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죠.
만일 지금처럼 홈페이지를 비롯해 수많은 사이트에 야구팬들이 몰려있던 시절이었으면 아마 더 큰 난리가 났을겁니다.
저보다 더 자세히 기억하시는 분들도 있고
당시 양재동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직접 선수협 홍보 전단지를 돌리며 지지를 호소하셨던 팬들도 많겠지만
낯익은(?) 이름들 덕분에 문득 그 시절 생각이 나서 한번 써봤습니다.
최근에 야구팬이 되신 분들께는 낯선 일이겠지요.
송진우가 한화에서 방출됐었다니요
(물론, 한화가 아니라 kbo에서 내린 결정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프로야구 감독 자리는
다른 정치적인 고려 말고, 무엇보다도 능력과 성과가 더 중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정인을 지목해 저격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론적인 얘기이니 양해 바랍니다.
첫댓글 디테일을 잊었었는데 다시금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6241 개의 글 중 수천개의 글은 읽었다고 자부합니다만... 가장 씁쓸하게 와 닿는 글입니다... ... 제 현실과 닿아서 더 그런걸까요...^^;;;
아.. 조경택 코치님의 그런일이 있었군요.... 음... 많은 생각이 들게하는군요
이때부터 송진우 선수를 송회장님이라고 불렀던거 같은데 맞는지? (전 꼬꼬마 시절이라;;)
실력과 공정한 승부로 평가받는 프로 스포츠라도 경기 외적인 부분에서는 역시 사람 사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방출된후 어떻게 됬나요? 다시 없었던일로 됬나요?(송회장님)
문광부와 공정위 중재로 선수협이 정식 단체로 인정 받으면서 방출조치가 철회됐고, 선수들은 소속팀으로 복귀했습니다. 물론, 트레이드 등으로 해당 구단과는 사이가 안 좋게 헤어진 경우가 많고요. 송진우만 원 소속팀 한화에서 더 뛰었죠.
참 씁쓸한 과거네요...
불공평한 갑을 관계 문제는 아직도 유효 한거 같습니다
기억납니다. 그때는 대학교 1학년때라. 갑-을관계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땐데..
지금 생각해보면. 갑-을 관계는 어쩔 수 없는 관계인거 같아요.
선수협 선수들이 정의로워 보이고, 선수협5적이 비양심적으로 보이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처-자식이 있고, 꾸려나가야 할 가정이 있다면. 선수협5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이해는 됩니다.
젊었을때 패기로는(지금도 젊다고 생각하지만.) 선수협 5적인 사람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 글을 읽어보니..그 사람들 처지도 감정으로는 힘들지만,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됩니다.
대한민국은 참 갑을관계 좋아하죠. 사견이지만 영원히 풀리지 않고 공존하리라고 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능력외에 어느정도 정치력이 필요한 사회입니다. 다만, 능력보다 정치력이 더 좋은 경우는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더라구요.
1선발님은 닉네임처럼 야구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네요..열정도 대단하시고 ...멋지네요.. ..개인적으로 지금 송진우나 정민철이 지도자로서 조금만 잘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송진우 ..너무 안타까워요..정민철이도 그렇고 ....
장충체육관에서 선수협 행사? 했던 기억도 나네요 ㅎ" 그때의 강병규님...ㅎㅎ...
그 당시 장충체육관 콘서트 때 선수협 선수들에게 싸인받은 티셔츠가 아직도 있는데, 그 때 기억이 떠오르네요...
반대파는 김기태만 알고 있었는데 더 있었군요.
조경택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