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세기 영국 하노버 왕조(House of Hanover)
독일, 영국의 왕조 중 하나이자 인도 역사상 유일하게 인도 전역을 통일한 왕조이다. 하노버 선제후 가문에서 영국 왕위를 획득하고 선제후령이 승격하여 하노버 왕국까지 지배했다. 20세기 초반엔 독일 제국 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령까지 차지한 적이 있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부군 앨버트 공의 가문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로 교체되지만 현 영국 왕실인 윈저 왕조 또한 모계로는 하노버 왕조의 직계 후손이다.
상단의 문장의 중앙에 하노버 선제후 가문의 문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노버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배출한 유서 깊은 중세 독일의 명문가 벨프 가문(Welfen)의 후손이다. 벨프 가문의 직계 조상은 9세기경의 백작 가문으로 그 이전 기원은 분명치 않다. 이 벨프 가문은 구 벨프 가문으로 불리는데, 11세기에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 이후 밀라노의 에스테 가문의 하인리히가 마지막 구 벨프 가문 공작이었던 외삼촌의 영지를 상속 받아 신 벨프 가문을 창시하게 된다. 벨프 가문은 결혼 등을 통해서 작센 공국에 바이에른 공국까지 차지하면서 강성해졌고 12세기경 하인리히 사자공(獅子公, Heinrich der Löwe, Henry the Lon) 때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 필적하는 위세를 지니게 되었다. 바르바로사와 사자공은 거의 평생에 걸쳐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만년에 황제의 권위를 앞세운 바르바로사의 술책에 걸려 사자공은 광대한 영지를 몰수당하고 국외로 추방당하는 비운을 겪었다. 이때 바르바로사는 벨프 가문에 거의 멸문 수준의 가혹한 징벌을 내렸다. 이로써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가문보다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벨프 가문의 가세는 크게 기울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에서 벨프 가문에 우호적인 세력도 많았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에 적대적인 세력도 많았기에 벨프 가문은 비교적 빠르게 재기할 수 있었다. 벨프 가문에게 바르바로사 황제가 지나치게 가혹한 징벌에 대해 제후들의 여론이 나빠졌고 이에 바르바로사의 아들인 하인리히 6세는 즉위하고 나서 벨프 가문에서 몰수한 영지의 일부를 돌려주어야 했다. 또 마침 역사상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때마침 등장하여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벨프 가문을 지원했다. 이에 하인리히 사자공의 셋째 아들 오토 4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당선되었다. 13세기 중반에 다시 제국 회의에서 제후들이 벨프 가문에 대한 징벌 완화를 결정하여 호엔슈타우펜 가문 황제는 하인리히 사자공의 막내아들의 외아들 즉 손자 ‘오토’에게 다시 영지 일부를 환수했다. 과거 작센 공국의 일부인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땅이었다. 사자공 시절 드넓은 영토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은 영토지만 이를 바탕으로 벨프 가문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을 세우고 북독일에서 영향력 있는 제후가 되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으로 불리며 여러 개의 분가들이 나뉘었다 합쳤다를 반복하며 가문을 이어나갔고 하노버로 수도를 옮기면서 가문명도 하노버 가문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17세기 말 라이프니츠의 연구로 고문서와 족보를 뒤져서 사자공 시절 몰수당하며 행사하지 못한 선제후 권리를 당시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레오폴트 1세는 선심 쓰듯이 인정해주며 9번째 선제후가 되었다.
단순히 족보와 레오폴트의 선심으로 선제후가 된 건 아니고 그 당시 독일의 정세가 굉장히 미묘했던 것이 이유인데 1685년 팔츠 선제후령의 비텔스바흐-지메른 가문 출신인 카를2세의 죽음으로 칼뱅파 가문이였던 직계가 끊기고 가톨릭을 신봉하던 비텔스바흐-노이부르크가가 팔츠 선제후 위를 차지함으로써 팔츠 선제후령은 칼뱅파에서 가톨릭으로 환원된다. 여기서 루이 14세는 팔츠 계승권만 노린게 아니라 프랑스 영향력을 이용하여 선제후들을 자신편으로 돌리려고 애쓰는데 아직 레오폴트의 장자 요제프가 차기 황제로 선출되지 못한것을 이용하여 (사실 레오폴트 1세의 황제 선출도 방해 한 전력도 있다.) 사돈인 바이에른 선제후를 황제 선거에 출마시키고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한 대신 자신을 차기 황제인 로마왕으로 선출하자는 이중 제안을 하기도 했다. 바이에른 선제후는 이 제안을 거부하긴 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선 레오폴트 1세가 프랑스의 방해 때문에 황제직위 승계가 잠시 난항이었던 과거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기존 선제후 단속과 새로운 우호 세력을 선제후로 신설할 것을 검토했다.
한편 팔츠 선제후가 가톨릭으로 돌아가면서 여덟 명의 선제후 중에 개신교 신자는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밖에 남지 않았고, 1690년에는 작센 선제후마저 폴란드 왕위계승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개신교 신앙을 유지한 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개신교 제후들은 어떻게든 개신교 선제후를 한 명이라도 늘려줄 필요가 있었다. 한편 독일 지역은 1685년 루이14세의 팔츠 계승 전쟁 후에 1697년 대동맹 전쟁이 재발해서 루이 14세가 사돈인 전직 팔츠 선제후 자리를 요구한데다가 역시 사돈집안 바이에른 선제후를 꼬셔서 같은 편으로 회유하려고 했는데 레오폴트 입장에선 한 명이라도 합스부르크 가문을 지지해 줄 강한 세력을 원했다. 단순 개신교 선제후 한 자리 늘리기 위해 하노버를 선제후로 승격시킨 것이 아니고 각자의 상황에 따른 복잡한 정치 역학적 상황이 작용한 것이다.
선제후 작위를 받은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다음 2대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폰 하노버(게오르크 1세)’가 1714년 영국 왕실 왕위에 당첨되어 조지 1세로 즉위하며 영국의 통치 가문이 되었다. 현재의 엘리자베스 2세도 하노버 왕가의 후손이 된다. 세계사 과목에서는 이때부터 영국 국왕의 비중은 거의 없고 대신 토리당, 휘그당, 총리 이름 등을 외우게 된다. 1714년 스튜어트 왕조의 앤 여왕이 죽으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단절된다. 그 남은 친척 중 가장 가까운 사람을 왕으로 모셔오게 되었는데 가까운 혈통이라는 게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인 독일의 하노버 선제후비 조피(Sofia, 1630년∼1714년)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제임스 1세는 딸 엘리자베스 공주를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에게 시집보냈었는데, 그녀가 바로 소피아 선제후비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이미 앤 여왕보다도 훨씬 고령이었던 소피아가 만 84세로 앤 여왕보다 2개월 먼저 사망함에 따라, 그 아들인 조지 1세가 영국의 추정상속인이 되어 하노버 왕조를 개창한다. 조지 1세는 그냥 외손자도 아니고 조지 1세 기준으로 보면 외가의 외가였다. 앤 여왕과는 촌수로 6촌이니 조선 철종과 고종처럼 아주 먼 친척은 아니다.
문제는 조지 1세는 혈통만 제임스 1세의 후손이지, 완전 ‘독일인’이었고, 갑작스레 영국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한참 오랫동안 고국인 하노버 선제후국을 지배하고 있던 군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영어 한마디도 할 줄을 몰랐고 결국 믿을 만한 오른팔을 만들어 수상으로 임명하는 정치를 시행했다. 이때 초대 총리로 20년 넘게 국정을 책임진 사람이 바로 로버트 월폴로버트 월폴(Robert Walpole, 1676년∼1745년). 덕분에 그는 입헌군주제의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독일어만 하고 영어를 못해서 국정을 내팽겨쳤다는 흔히 알려진 먼나라 이웃나라의 설명은 당시 유럽의 공용어가 프랑스어임을 부연설명하지 않고 농담으로 넘어간 것으로, 신하들과 의사소통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고 한다. 조지 1세는 오십 평생을 독일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 왕정이 그렇듯 신하들이 궁전에 들어와서 알현하는 독일식 궁정 통치에 익숙해서 무엄하게 왕이 신하들 만나러 출근하러 가는 영국의 의회 시스템이라는 요상한 시스템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대리인 겸 연락책 신하를 보낸 것이다.
이 무렵 프랑스어의 다른 이름이 국제어였다. 스웨덴 왕가에 양자로 간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도 프랑스어를 스웨덴 귀족들도 다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고 하고 러시아 궁정에서도 프랑스어 못하면 야만인 취급했다. 또한 프로이센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도 논문이나 저작은 프랑스어로만 작성할 정도로 유럽 상류층에선 프랑스어가 보편화되었다. 민주주의 국가 미국만 봐도 20세기 초반까지 상류층에서 별로 실용성이 없는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배우며 그들만의 리그의 장벽으로 삼았다. 이러한 풍조는 사실상 20세기 초중엽까지 계속되다가, 양차대전으로 영불 등 구 열강들이 몰락하고,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계가 만들어지면서 미국의 ‘영어패권주의’ 와 소련의 ‘러시아어패권주의’ 앞에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아직 FIFA 등에서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고, 다수의 프랑코포니 국가가 존재하는 등, 프랑스어의 위상은 결코 낮지 않다.
또한 정치 참여를 아예 못 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조지 1세와 조지 2세 등의 군주들은 태생부터가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국보다는 독일 내 하노버 영토에 관심을 더 많이 기울였다. 조지 1세는 하노버 선제후국의 군주로서 여러 전쟁에 직접 참전하여 공을 세워 하노버의 영토를 넓히는 등 하노버의 국력을 신장시킨 명군주였다. 하지만 그 후대인 조지 3세 이후에는 영국에서 태어난 왕들이 즉위하면서 점점 하노버는 찬밥으로 취급되었다. 하노버 선제후국은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국가 중에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이에른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때문에 독일 내에서도 그 규모는 무시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노버 선제후국과 영국과는 군주가 동일한 것이지 별개의 주권 국가였으며, 정치 시스템 역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국법도 다르고 의회도 달랐다. 영국이 입헌군주였던 것처럼 하노버 선제후국에서도 별도의 내각이 존재했다. 다만 명예혁명 이후 국왕의 권력이 제한되었던 영국에 비해 하노버에서는 군주의 직접적인 권한이 훨씬 강했고, 조지 1세나 조지 2세는 직접적인 통치권이 강했던 하노버에서의 통치에 더 큰 흥미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바다로 둘러싸인 영국과 달리 유럽 한복판에 위치하여 다른 나라들과 접해 국경을 형성했던 하노버 선제후국은 주변국들과 영토 싸움이 활발했고, 특히 당시 프로이센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서부 독일로까지 야금야금 영토를 넓히고 있었기 때문에 하노버 선제후국은 이에 치열하게 대응해야 했다. 하노버 선제후국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비롯한 유럽 대륙 내의 각종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전쟁의 결과는 하노버의 영토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다. 섬나라로써 다른 나라의 침략에서 자유로웠던 영국보다 정세가 급박한 하노버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만 18세기 이후 대영제국의 힘이 강성해졌고, 독일 내에서도 프로이센의 힘이 급격하게 커지면서 다른 영방국들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하노버 왕조의 왕들 역시 독일의 하노버에서 태어나기는커녕 제대로 하노버 땅을 방문하지도 않는 사람이 많았고, 점차 하노버보다는 영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하노버 선제후국은 잠깐 나폴레옹에게 망해서 하노버 궁정의 독일계 신하들과 군인들은 국왕폐하가 계시는 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고, 영국은 이들을 토대로 왕립 독일인 군단을 만들어 나폴레옹 전쟁에 보내기도 했다. 빈 회의 결과 하노버 가문(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은 친척지간이던 브라운슈바이크-볼텐뷔텔 공작령과 분리되어 서로 분가하고 하노버 선제후령은 교회령과 기타 듣보잡 소국을 합병하면서 영토도 확장하고 왕국으로 격상한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 이후로 하노버 왕가의 하노버 왕위와 영국 왕위가 분리되었다. 영국 왕실의 왕위계승은 연장자가 아니라 직계 우선에 여계 상속도 인정이 되는 터라 조지 3세의 3남인 윌리엄 4세가 죽고 조지 3세의 4남 켄트 공작의 딸 빅토리아 여왕이 물려받지만 살리카법상 독일에서는 여성의 왕위계승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지 3세의 5남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하노버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자로 태어나거나 아예 태어나지 않는 등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동군연합이 더욱 오래 지속되었다면이라는 IF성 떡밥이 있지만 동군연합이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19세기 말 민족주의 열풍 때문에 민족감정을 짓눌렀던 여러 왕가들이 쫓겨난 데다가 프로이센에 극히 부정적인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왕가도 프랑스를 편들다 혁명으로 왕실이 쫓겨날까봐 무서워서 프로이센 주도의 소독일주의(Kleindeutsche Lösung)에 굴복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에 방해로만 작용했을 거란 주장은 큰 설득력은 없다.
이후 영국계의 하노버 왕조는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 앨버트 공의 가문인 독일의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Sachsen-Cobourg-Gotha)로 이어진다. 그러나 조지 5세가 즉위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과 대판 싸우고 있던 국민감정을 고려하여, 1차대전 중인 1917년 독일 색을 싹 빼고 왕조명을 별궁의 이름인 윈저로 개칭한다.
하노버 왕국을 차지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후손들은 프로이센의 독일 통일 과정에서 오스트리아 편을 들다가 왕국이 점령당해 추방되었고, 하노버 영토를 되찾고자 절치부심하다가 빌헬름 2세 때 화해하고 에른스트 아우구투스 3세가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상속받아 독일제국 내 통치 가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영국 국민들의 반감을 사서 1917년 작위박탈법에 따라서 영국 귀족 작위를 잃어버렸고, 독일 제국이 패망하면서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군주 지위도 날아가서 완전히 몰락했다. 어쨌든 에른스트 아우구스트(3세)는 1931년 들어 다시 영국 왕족임을 ‘자칭’했고(성씨에 Königlicher Prinz von Großbritannien und Irland를 추가했다.), 1957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4세)는 영국 정부와의 소송에서 승소해서 영국 국적도 취득(즉, 이중국적)하였다. 단 1917년 날아간 컴벌랜드 공작 작위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