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똑바로 살아라”
산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단내를 품게 하는 시대에도 가을 햇살은 여전히 따사롭다. 책을 읽으며 정도전의 희망과 고뇌를 잠시 접는다. 짝짝이 신발로 입궐하던 그는 의심과 욕심의 두 마음 중 어느 것을 먼저 베어 버렸는지 궁금하다. 우리들의 시대에도 이런 짝짝이 마음들이 또아리를 튼 채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가을의 마을로 가자. 후박나무 숲을 넘어 옥순봉 바람으로, 바람의 앞길을 트는 가을 햇살과 더불어 누군가의 숨결들이 샘물에 젖은 가을의 한 마을로 가 보자.
여자가 흐른다 아스라한 기억들이 울긋불긋 산에 매달린다 전람회의 그림들이 한 컷 한 컷 또렷하니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건낸다 진도는 이미 홍주로 붉어진 채 몇 번이고 이름을 지우고 만나는 여인처럼 향기롭다 에오스의 밤은 스물다섯해 동문들이 스물하나의 외래산 술병을 흔들고 이제 스물여덟해 동문끼리는 벌써 지겨워진 사회와 느끼한 진보주의자들의 불투명한 그림자를 논하고 시인들의 마을 입구를 서성거린다 늘 따스한 손으로 생명을 어루만지는 완이형이 슬쩍 취기를 부릴 때에도 먼저 모자속으로 눈을 감추는 '살아있는' 화석의 역사 광주에서 흘러온 선배는 강고하니 오늘을 거부한다 그래서 완연한 아침햇살을 불러들인다 나는 더 먹먹하고 싶었다 변방으로 떠밀려 오지 않았다고 한 시대의 조류를 벗어나 저 먼 유구열도 삼별초의 숨결이 기왓장에 스몄다거나 건달바 보다 더 유려한 노래를 배중손이 불렀을까 표류의 시대를 재조명하는 것은 결국 이 따스한 남쪽 섬마을 겨울의 초입에서 서슬푸르게 매운 향기를 품는 외대파들과 동행하며 고군면 향동리 고개 넘어 장밭 금계리에서 초상재 마을로 그래 술향기처럼 우리는 흐른다 이 가을이라고 도리장나무 누런 속삭임이 마구 마구 물들이는 첨찰산 두뭇재 실뱀처럼 흘러내려와 운림예술촌 한 여자의 아득한 미소를 담은 울금막걸리를 마신다 그때쯤 한 시인은 정동진의 흔들리는 소나무를 지우고 누군가 함부로 쓴 낙서를 교정하는데 몰두한다 그래야 여기 의신면 초상리 점재 흥타령이 구실잣밤나무에 한없이 감기며 나 또한 해인의 맑은 눈빛을 닮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진도의 제일봉 첨찰산(486)이 남쪽으로 흘러 덕신산(德神山)을 세웠다가 다시 남해를 향해 한 자락을 펼친 곳에 품새를 잡은 곳이 의신면 초상마을이다. 이 마을은 진돗개 보존마을로 지정되었는데 이곳 출신 허정무 한국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의 별칭이 또한 “진도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해마다 음력 2월 영등살에 바다가 열리는 띠섬(茅島)이 초하 초중 초평의 마을을 지나 뽕할머니의 기원을 안고 앞바다에 자리하고 있다. 이 네 마을을 흔히 초사리(草四里)라 부른다. 국악인 신영희씨도 이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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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상마을 입구에 있는 허정무감독 표지판 | 현역시절 “진돗개”라는 별명으로 근성있는 축구경기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했던 허정무 국가대표감독이 요즘 연승행진을 벌이며 국민들을 모처럼 즐겁게 해주고 있다. 허감독은 이곳 의신면 의동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늘 집에서 학교까지 축구공을 드리블하며 연습에 열중해 네델란드 프로축구팀에 입단, 맹활약을 했다. 그가 다녔던 의신면 초사리(102번지)에 있는 초등학교는 1944년 7월 20일 의신국민학교 초사분교로 인가를 받았다가 45년 10월 19일 의동국민학교로 승격 인가를 받고, 1945년 11월 22일 개교하였다. ‘우뚝 솟은 봉화산이 북천에 섰고/ 초사천 맑은 물이 흐르는 이곳/ 우리학우 배우는 초석이 되니/그의 기상 거룩하다 우리의 의동’. 교가내용이다. 교화는 겨울에 붉은 꽃을 피우는 동백꽃이고, 교목은 소나무다. 교정에는 많은 해송들이 지금도 넉넉한 어개를 자랑한다. 대지 3,000㎡에 운동장 1,700㎡, 실습지 240㎡ 관리실 2개, 정규교실 6개, 그리고 과학실 등 특수교실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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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입구 원래 표지석, 연자방아 돌로 세웠다 | 초상 마을 입구에는 “허감독의 고향마을”이라는 커다란 표지판이 눈길을 끈다. 진도축구협회에서 만들어 세웠다. 바로 옆엔 연자방아가 마을 표지석으로 정취를 준다. 지형이 갈마음수형국 이라 하는데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형국으로 보면 앞들에 물이 들어서야 할 것이지만 바닷물은 물러가고 뒷산의 저수지가 물을 담아 그 역할을 하는 듯하다.
직전 이장을 맡았던 허인환씨의 안내로 마을 뒤 서당터와 제각을 찾았다. 마을회관 앞에 자리한 정자가 주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었다. 돌담이 정겹게 쌓인 골목을 올라 학도제 가는 길에 “큰샘”이 아직도 맑은 물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함께 찾아간 허선무(65)씨는 자신이 잠시 살았던 집을 가리키며 “내가 클 때는 겁나게 큰 집이었는데…”한다.
인환씨는 샘을 가리키며 “예전에는 이 샘물을 동네사람이 모두 사용했제. 지금이 물이 참 좋아” 라고 했다. 작은 송사리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발딛음돌 옆에는 바가지가 놓여 있었다. 산밑으로 층층이 들어선 마을로 늦가을이라 그런지 더욱 한적해 보인다. 햇살도 나른하니 길가에 널린 고추를 한가로이 말려주고 있다. 가을볕은 노인들에게 더더욱 소중한 벗이 되는 듯하다. 여느 마을을 가도 햇볕 잘 드는 바람벽 아래 서넛이서 어깨를 맞대고 앉아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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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위쪽 점재가는 길 옆 사당 앞에 있는 큰샘 | 마을에는 현재 31호에 62명이 살고 있으며 허헌길(87.의동초 교사 정년)씨가 가장 연로한 어른이고 허헌주(79)씨가 노인회장을 맡고 있다. 부녀회장은 문영자씨이며 초등생 2명 등 학생이 7명이다. 그래도 많은 편에 속한다. 이주여성 가정은 아직 없지만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는 젊은 부부들도 있었다. “인자는 타성받이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인환씨는 예상했다. “잘된 사람은 잘되어서 안 오고 잘 안된 사람은 그 나름에 사정으로 못 오는 것이 고향”이라고 규정을 한다. 맞는 이야기다. 명절이나 휴가철 빼고는 찾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
양천 허씨의 집성촌, 학도계로 학문숭상 풍조 세웠다
마을 안에 제각이 2개이며 모두 양천 허씨 제각이다. 약 11년 전에 세웠다고 한다. 이 마을은 초전(草田) 또는 점촌이라 불렀으며 놋쇠로 솥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남겨 “불무톳골”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입촌조는 송씨라고 알려졌다. 현재는 양천 허씨가 다수를 차지한다. 매년 정월 14일 밤에 “생기복덕 있는 분”을 제관으로 뽑아 동제를 모신다. 마을 앞 현재 대파 밭 부근으로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당나무도 당샘도 보이지 않는다. 제수비용은 각 호당 얼마씩 거둬 마련한다. 가물 때에는 마을 앞 남산(의동초 교가의 봉화산)에 올라 불을 피우기도 했다. 마을 앞 양두구재로 올라가다 보면 뒷산에 큰 바우가 보인다. 허 노인회장은 “그곳에 부엉이가 살아서 그렇게 불렀제”하신다. 그 뒤로 넘어가면 얼마 안 가서 “정샘이 절터”가 나온다고 한다. 정샘이절터는 사상리 덕신산 자락에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빈대 때문에 중이 못견뎌 도망갔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저수지 위쪽을 “안마굴청”이라 부르며 오래된 집터도 있으며 68년 한해 때 저수지를 만들기 전에도 마을에서 만든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물세도 전혀 내지 않았다. 지금도 초상마을은 집집마다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다. 내년 초 쯤에야 청룡수원지로부터 물을 받아 상수도가 공급될 예정이다. 의신에서는 아직도 11개 마을이 상수도 공급이 안되고 있다고 한다. 연주리가 올해 말 상수도시설이 완공되고 그 다음 차례로 이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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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관 옆 골목, 위로 올라갈수록 돌담들이 잘 쌓여있다 | 마을 뒷산 오른편에 학도계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사당은 허 원씨의 할아버지되는 훈장과 그 제자들을 기리는 사당이다. 현재는 위패가 14개 모셔져 있다. 허산(50.국립남도국악원 과장)씨는 아버지 허 원씨의 유훈을 받들어 서당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배출된 제자들이 또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초상리는 학문을 숭하는 풍조가 세워졌다고 한다. 목마른 말이 물을 탐하듯 학문에 힘을 썼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 마을의 지형과 관련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온다. 전체의 형세가 “키”의 모양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만 모이는 곳이라 부촌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출신 허정무감독은 55년 1월 13일 생으로 되어있으나 실제로는 53년생이라고 한다. 키176cm에 체중 82kg으로 수원대학교대학원을 나왔다. 1980년 'PSV 아인트호벤' 입단, 2007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 2005년~2007년 12월 전남 드래곤즈 감독과 2007년 제21회 스포츠서울 올해의 프로축구 대상 올해의 감독상 2006년 FA컵 최우수 지도자상을 수상했다. 취미가 바둑으로 서울에 부인 최미나씨와 함께 살고 있다. 최씨는 TBC에서 한국 방송사상 첫 남녀 공동 MC로 나서며 인기를 끌었던 스타다. 80년 7월 18일. 스포츠 스타 허정무와 방송 스타 최미나가 결혼했다. 당시 연예 뉴스에 인색하던 일간지들도 둘의 결혼 소식을 사회면에 보도했을 정도로 화제였다.
진도개의 근성과 충직함을 갖춘 허정무 감독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 엘리트로 살아온 허정무 감독. 그러나 그도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뒤늦게 축구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교장선생님 댁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목포중을 졸업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때 1960년대 축구 국가대표를 지낸 허윤정(진도읍 출신)씨가 진도에서 열린 체육대회에서 뜀박질 잘하는 허 감독을 보고는 축구를 권유했다. 1974년 졸업과 함께 연세대에 입학한 그는 그해 열린 테헤란아시안게임 직후 국가대표로 뽑혔다. 1980년 7월 23일 그는 결혼한 지 5일 된 신부를 남겨두고 혈혈단신 유럽으로 떠났다. 부인 최씨는 두 달 뒤에야 아인트호벤으로 날아갔다. 네덜란드에서 낳은 큰딸은 네덜란드의 한자어를 그대로 따서 화란이라고 이름 지었다. 네덜란드에서 허정무가 유명해진 것은 요한 크루이프 때문이었다. 1983년 FA컵 준결승에서 허정무의 집중 마크에 시달린 아트사커의 지휘자 크루이프는 그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고 말았다. 크루이프는 나중에 “허정무는 정말 훌륭한 선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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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상마을 아이들과 함께 웃는 허정무감독 | 진돗개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함흥철 감독이 “진도야! 진도야”라고 부르면서 비롯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경기를 앞두고 “너 오늘 잘하면 진돗개 되지만, 못하면 똥개 된다”라고 했다. 이 악물고 뛰었고, 진짜 진돗개가 된 것이다. 허 감독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끈 뒤 선수 생활을 접었다. 대표팀 트레이너 시절인 1989년 축구협회장인 전 대우그룹 회장과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한국기원 총재도 맡고 있던 김 전 회장이 우연히 협회에서 마주친 허 감독에게 바둑 한판을 두자고 했다. 김 전 회장이 두 점을 접어줬다. 허정무 감독의 승리. 김 회장은 맞바둑으로 한 번 더 두자고 했다. 이번에도 허 감독이 이기자 주위 사람들은 “좀 져 드리지, 왜 두 번 다 이겼느냐”고 타박했다. 허 감독은 바둑을 두면서 인생과 축구를 배운다고 했다.
의심 많은 이장은 사진만 챙겨가고
다시 동네로 돌아간다. 작물은 주로 대파를 재배하며 유자(진도문화해설사 허상무)재배도 좀 한다. 허인환씨가 재미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저그 뒷재를 넘어가면 널찍한 바구독이 있어. 그란데 옛날 어른들이 거기에 있는 발자국을 호랭이 발자국이라고 했어. 그란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이 꼭 공룡 발자국 같단 말이여” 고군면 향동으로 가는 지름길로 예전에는 그 길을 많이 사용했지만 지금은 수풀에 덮였을 것이라고 했다. 옷차림을 다시 해 꼭 찾아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법하다.
의신면지 1차 교정본(박병훈 주필)에는 1700년대 점촌(店村)리로 적혀있으며 마을 인근에서 솥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초상과 향동간의 고개를 ‘점재’라고 부른다. 뒤에 초전의 윗마을이라 해 초전상리라고도 불렸다. 시거인은 송무(宋武)라는 분으로 임진왜란 때 송희립장군의 손자로 고흥에서 왔다고 한다. 그리고 1700년대 초반 양천 허씨가 들어와 집성촌을 이뤘다. 양천 허씨(허 대)의 부인들이 홍주를 만드는 비법을 알아 전승했다고 한다.
출향 인사들은 매우 많지만 간략하니 소개한다.. 전대인물로 허복(지산면장), 허찬(진도면장), 허중각 허윤술 허남선(의신면장), 허염(교장), 허중현(장안약국), 허병운(외항선 선장. 신비의바닷길 조가비전시관 유물 기증)등이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허양무(군청 기획실장), 허필회(농협 군지부장), 허찬무(은행장), 허승철(기획재정부)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인사들이 있으나 생략한다.
마을은 지키는 자들이 품격을 만든다. 명성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친절과 따스한 눈빛이 관심을 불러 모으지 찾아와 애써 찍어준 사진까지 거저 얻으려하거나 인색을 떨 필요는 없다. 끝까지 안내해 주신 허인환(63)씨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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