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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순영/의사)
의사들은 왜 코로나 백신을 계속 접종할까?
의사들이 코로나 백신 접종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 필자에게는 뜻밖의 상황이라 놀라운 한편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는 세상일에서 하강의 최저점은 언제나 예상보다 늦고 깊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백신 사망자 위령제, 국회에서 벌어진 피해 보상에 대한 간담회는 아득히 먼 세상의 일이거나 실제가 아니라 가짜처럼 비쳐진다. 코로나 감염병과 mRNA 백신에 대해 그동안 축적된 소중한 데이터들이 국민 건강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되지 않는 대신 ‘백신 비즈니스’에 이용되기 위해 왜곡되거나 어떤 것은 지워졌다. 의학에 있어서 절대적인 원칙으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왔던 ‘환자에게 해가 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도 백신 비즈니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미 감염되어 항체가 생성된 사람에게 백신은 필요치 않으며, 호흡기를 통한 바이러스의 감염은 백신에 의한 후천 면역보다 선천면역이 담당한다는 의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의학 지식은 진위가 불투명한 전설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의사들에게 신중하게 다루어졌어야 했을 그 많았던 의학적 문제 - 방역, 마스크착용 의무화, 백신패스, 유전자 백신의 안전성- 들은 의사들로부터 가장 많이 외면당했고 오히려 시민, 학생, 종교인등 비의료인에 의해 제기 되었다.
코로나 백신 부작용으로 며칠을 죽도록 앓았던 사람, 접종 후부터 갑자기 지병이 악화되거나, 없던 병이 생기거나,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증상으로 시달리는 사람에게도 예외 없이 백신이 투여되었다. 마치 백신 맞고 죽지 않은 것이 재접종의 이유라도 되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축적된 의학적 근거에 따라, 1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대학과 수련과정에서 힘들게 배우고 익혔던 지식과 경험에 따라 의료행위를 해야 하는 의사의 본분과 가치가 백신 비즈니스에 의해 휴지처럼 구겨져버렸다.
코로나 백신 접종이 현재로서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왜 의사들이 백신 접종에 매달리고 있을까? 그 이유에 대해 필자는 꽤 여러 날을 숙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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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영(의사/코로나진실규명의사회 공동대표) 페북 글(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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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1) 마케팅이 창조한 세상을 실제 세상보다 더 진짜로 여긴다.
2) 합리화 하면 못할 일이 없다.
출처 : 면역학자 배용석 | 블로그
https://m.blog.naver.com/byspoets/223272718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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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중에서
1, 2차에서 끝나지 않고 5차까지 접종하는 건 무엇보다도 탐욕 때문이다.
할멈은 공짜에 대한 탐욕이고, 의사는 백신을 놔줄 때 마다 생기는 돈에 대한 탐욕이다.
이들은 공짜고, 돈만 받는다면 6차 7차 뿐 아니라 수십 차까지도 맞고 놔주고 할 것이다. 공짜가 아니고, 한 푼도 못 받는다면 이들은 당장이라도 맞지 않고, 놔주지 않을 것이다.
출처 : 면역학자 배용석 | 블로그
https://m.blog.naver.com/byspoets/223282820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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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른 의사들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현대의 지적·윤리적 분위기는 상대주의가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다수가 옳지 않다고 하면 옳지 않은 것이 되고 만다. 한류로 떠들썩하지만, 실상 한국인은 그 어느 때보다 무기력하다.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더욱 심해졌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으며, 고난이 닥치면 극복하기보다 포기하는 것을 택한다. 모든 것을 평준화하고 그 속에 사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한국인이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무기력의 원인은 무엇일까?
수 천년동안 인류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들은 서로 만나 의견을 나눈 적도 없지만, 대체로 동의했던 삶의 기본 규범과 가치, 윤리와 도덕이 존재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본성을 갖고 태어난다는 귀중한 증거중 하나이다. 아무리 인체를 해부해도 찾을 수 없지만, 모든 인간은 마음을 갖고 있다. 마음속에는 본능과 본성이 담겨 있는데, 본능은 생존에 관한 것이고, 본성은 삶에 관한 것이다. 본성은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악보다 선을, 불의보다 정의를, 모순보다 합리를, 불행보다 행복을, 속박보다 자유를, 가난보다 부를, 슬픔보다 기쁨을, 실패보다 성공을, 추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성의 내용이다.
인간에게 본성이 없었다면 문명이 만들어졌을까? 철학, 과학, 예술, 미학, 심리학, 그밖에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발견과 발명은 인간 본성의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인간의 본성은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문명에 의해 가장 많이 훼손되었다.
첫 번째 훼손의 대사건은 진화론의 등장이었다. 진화론은 1859년 『종의 기원』으로 시작되어 70년 동안 학계에서 갑론을박하다가 1930년부터 일반 대중에게까지 퍼져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100년 전 사람과 그 이후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100년 전 사람이 신의 피조물이었다면 이후 사람은 원숭이의 자손이었다.
두 번째 훼손은 현대 물리학에 의해서였다. 자연의 모든 법칙은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물질들의 물리적 작용의 결과며,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사고, 판단, 행동 역시도 물질의 작용의 결과일 뿐이라는 의식을 만들어냈다. 인간은 ‘기계 속 유령’이 되었다. 형이상학은 자취를 감추었고 사랑, 상상, 관념, 희망, 기쁨, 정열 등의 비물질적인 것이 레고 블록을 쌓듯 뇌의 물질적 작용에 의한 것이 되었다. 지동설에 의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것처럼, 현대 물리학에 의해 인간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를 물질이 차지하게 되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아니라 과학이 만물의 척도가 되었다.
세 번째 훼손은 생명공학에 의해서였다. 제임스 왓슨과 프란시스 크릭은 DNA 나선 구조를 발견해 생명 현상이 DNA 염기서열에 의해서 일어남을 밝혔다. 인간은 ‘이기적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기계’가 되었다. 유전자를 갖고 있는 모든 동식물의 개조, 개량, 복제가 가능해졌다. 양, 개, 원숭이의 복제가 이루어졌다. GMO 식품, GMO 동물들이 만들어졌으며, mRNA 백신이 만들어져 세계인에게 접종되면서 새로운 인종인 GMO 인류가 탄생하였다.
현대 인류는 이렇게 본성을 훼손당하여 무력해졌다. 한편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세습 왕가의 독재에 의해 인간성이 말살되었고, 남쪽에서는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만들어진 속도의 독재에 의해 인간성이 약화되었다. ‘빨리 빨리’라는 말로 대변되는 속도의 독재는 사회의 각 부분에 얄팍함, 경솔함의 거품을 만들어냈고, 거품들이 터질 때마다 비극적인 참상이 드러났다.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IMF외환위기 사태 대표적인 사례다. 많은 것을 빨리 소유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숙고와 토론은 배제 되었으며, 학교에서는 주입식 교육만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도 위선적인 유물론자들이 정치판에 뛰어들어 혼란을 가중하였다. 그들이 내건 진보는 사상과 이성의 꾸준한 성숙이 아니라, 소유의 빠른 평준화였다. 이들로 인해 한국인은 더욱 물질화 되었다.
"인간은 본래 자유롭게 태어난 존재인데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는 루소의 말은 한국에서 가장 현실화 되었다. 한국인의 인간 본성은 세계인보다 더 빠르게 위축되고, 무력해져 갔다.
무력해진 인간이 비판의식, 저항의식을 잃는 것은 당연하다. 자발성은 타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기 위해 타인들과 같아지는 것에만 발휘되었다. 강요가 없음에도 한국인은 자발적으로 타인과 같아지려고 움직였다. 의사라고 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다 접종받기 때문에 접종받는 국민처럼, 의사들도 다른 의사들이 다 접종하기 때문에 접종하였다. 국민들이 그런 것처럼 의사들도 다른 의사들과 같아지지 않으면 고립될 것이며 집단에서 추방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홀로코스트가 진행 중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할 것인가?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23,12,04 Dr.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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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맡은 역할이 행동을 결정한다.
진료실은 사회라는 거대한 연극무대의 작은 축소판이다. 진료실 무대에서는 환자라는 배역과 의사라는 배역에 충실한 배우들이 한편의 연극을 펼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사의 말을 잘 듣고 의사 마음에 쏙 드는 좋은 환자 배역에 충실하다. 한편 의사는 환자를 잘 낫게 하는 유능하고 친절하며 평판 좋은 의사 배역에 충실하다. 적어도 진료실 안에서는 나쁜 의사, 나쁜 환자의 배역을 맡는 것을 누구도 싫어한다.
환자 없는 의사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 같이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다. 환자가 있어야만 의사의 가치가 존재한다. 환자 없는 의사가 된다는 것은 생계 문제이전에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는 가장 무서운 일이다. 환자는 의사의 요구에, 의사는 환자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무언의 합의가 진료실에서 조성된다. 이에 따라 과잉 친절, 과잉 검사, 과잉 치료의 시나리오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병원의 규모가 크고, 의사의 유명세가 클수록 이 시나리오는 보이지 않는 복종의 거미줄이 되어 환자는 물론이고 의사까지도 이에 따라 움직이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페르소나는 제2의 자아, 혹은 쓰거나 벗는 가면이다. 페르소나는 가정교육, 학교교육, 직업, 사회 문화, 관습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페르소나가 강하면 자아는 약해진다. ‘자아’는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인식과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를 의미한다. 자아 상실은 행위의 주체가 자신이 되지 못하고, 타인, 제도, 관습, 상황, 페르소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권위와 권력을 갖게 되는 상황이나, 그런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은 페르소나와 자아를 동일시하거나, 자아를 쉽게 잃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 증명하는 유명한 사회심리 실험이 있다.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과, 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이다.
스탠리 밀그램은 사람이 어떻게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는 거대 악이 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졌다. 1961년 그는 미국의 예일 대학교에서 하나의 실험을 고안하여 실행하였다. 실험은 참가자에게 “이 실험은 처벌이 학습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는 것이다”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피험자의 65퍼센트가 연구진의 지시에 따라 다른 피험자(실제로는 연기자)에게 연속으로 전기 충격(피험자는 진짜 전기 충격기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가짜였음)을 가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권위에 복종하여 악을 행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포드 대학에서 가짜 교도소를 만든 후 평범한 대학생을 임의로 교도관과 죄수로 나눈 후 입소시켜 관찰하였다. 당초 계획은 2주였으나 일주일 만에 중단하고 말았다. 교도관의 가혹 행위와, 죄수의 정신쇠약으로 통제 불능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공익변호사, 카톨릭 사제, 가석방 심사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도 실험임을 잊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실험의 주관자이며 관찰자였던 짐바르도 마저도 교도소 소장처럼 행동하였다.
사람들은 분명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처럼 권위에 복종을 하며,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처럼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본래 악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은 복종하는 다수가 아니라 불복종하는 소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밀그램의 실험에서도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35%가 있었고, 짐바르도의 교도소 실험에서도 가혹행위를 하지 않는 교도관이 있었으며, 끝까지 이성을 잃지 않는 죄수도 있었다.
의사 중에도 유전자 백신을 아무 의심 없이, 자동기계가 되어 놔주는 의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의사가 있다.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까? 이것은 자아 상실과 실현의 차이다. 즉 인식과 행동의 주체가 자신에게 있느냐 타인에게 있느냐의 차이다. 많은 관념론 철학자들(칸트, 헤겔, 쇼팬하우어 등)을 비롯해 힌두교의 우파니샤드 철학, 불교의 유식설,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혼 불멸설, 플라톤주의의 이데아론, 기독교 신학은 자아실현이 ‘지적 통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런데 의사의 지적 통찰을 방해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사라는 페르소나다. 의사들 대부분은 몇 평 안 되는 진료실에 갇혀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평생을 산다. 보건소, 의협, 질병청에서 보내온 각종 공문, 정보, 지침, 교육 증명서 요구, 자주 바뀌는 심평원의 심사 기준 등등 의사의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와 순응을 강요하는 채찍들이 너무 많아지고 있다. 그리하여 의사들은 점점 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동기계가 될 위험성을 많이 갖게 되었다.
지적통찰을 위해서는 의사라는 페르소나를 잠시 벗고 자아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현재 벌어지는 현상을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합리적 사고는 반드시 보편적 상식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해야 한다. 과학이 만든 허구, 비관적인 예측, 과장된 공포의 개입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 합리적인 사유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내면의 선함이 융합되면 깊은 믿음이 생기는데 이 믿음이 지적 통찰이며 이것은 자아실현의 용기를 만들어준다.
악이 평범하듯, 선도 평범하다. 평범한 악과 평범한 선의 차이는 최종적으로 용기에 달려 있다.
오 순영 칼럼리스트 / 가정의학과 전문의·코로나진실규명의사회
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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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약 카르텔, WHO, 각국 정부, 보건 당국이 결탁하여 사기 팬데믹을 조장하고 백신을 맞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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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cafe.daum.net/saintfullgospel/NqOe/1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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