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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겨울 미국의 국론은 여전히 갈라져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미국의 해외에서 일어나는 일에 참견하지 않는다는 몬로주의의 전통을 백 년 이상 지켜오던 터였다. 그런데, 영국에서 처칠 수상이 매일같이 미국의 참전을 호소한다. 그리고, 영국계와 프랑스계 미국인들은 미국의 참전을 정부에 연일연야 호소하였다. 그러나 독일계 미국인들은 미국의 2차 대전 참전을 반대하는 반전평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쪽에서 참전하자고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방금 대공황의 터넬을 빠져나온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할 비용이 어디 있느냐며 반대하였다.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도 영국 처칠 수상의 호소와 미국 국민들의 반전 여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뉴딜의 영웅이요 단호한 리더십의 루즈벨트도 선뜻 참전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12월 7일 일본 공군이 낙원과도 같았던 진주만을 공습하여 미 해군을 거의 전면시키자 잠자는 호랑이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2001년 9.11 테러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유발하여 내었듯이 일본 공군의 진주만 공습이 미국 여론을 하루 아침에 참전 여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날로 미국의 남자들은 징집되어 유럽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미국의 모든 공장이 군수산업에 동원되고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일년 만에 미국은 해군 함대를 회복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편에서 독일군과 싸우던 미국이 다른 한편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듬해인 1942년 한해가 또 기울어가고 있었을 때 만주의 정예군 장교들은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독립할 것을 벌써 내다보고 있었다. 밀본군은 진주만만 폭격하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무력해지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시 배를 만들어내는 미국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였다. 그리고 관동군 정예 부대가 남쪽 태평양 군도에서의 전투를 위해 파병되어야 했을 때 일부 엘리뜨 장교들은 그것이 승산없는 전쟁임을 이미알고 있었다.
일본인은 나쁘다. 그러나 모든 일본인이 나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조선인 제자들을 사랑해 주던 일본인 선생들의 이야기가 있지 아니한가. 대구사범학교 교련 교관이었던 그리고 훗날 관동군 대좌가 되었던 아까끼와가 바로 그 선한 일본인이었다.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서 꼴찌를 한 것은 황국신민 양성 교사를 만들려는 일본에 대한 항거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문경 교사를 그만 두고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가기 위해 박정희가 1940년에 만주군관학교를 지원할 때 그가 추천서를 써 주었다. 아까끼와는 일본육사 엘리뜨였으며 그의 추천이 만주인, 중국인 혹은 일본인이 아니면 입학하기 힘들었던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듯하다.
대구사범학교 시절부터 박정희의 항일 정신과 민족 정신을 유심히 관찰하고 격려하던 아까끼와와 박정희의 인연은 만주에서도 이어졌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그는 관동군 고위 장교로서 만주국에 있었다. 그리고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할 무렵에 아까끼와는 관동군 정예병력을 인솔하고 남양 군도로 떠나야 했다. 그때 그는 박정희에게 이런 작별 인사를 편지로 보냈다: "이제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패망하고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지만, 자네는 굳건하게 살아서 자네 민족과 자네 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그리고 그는 그 말대로 남양 군도에서 죽었다.
그러면 20대 청년이었던 박정희는 만주국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곳에서 그는 신천지를 보았다. 여전히 전기불과 철도가 현대 문명의 전부였던 조선은 만주국에 비교하면 시골이었다. 본래 만주는 조선의 큰 상인들이 사업을 배우기 위애 가 보아야 하는 곳이었다. 조선의 큰 사업가도 만주에 가 보면 자기 사업은 명동과 구멍가게의 차이로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정희는 우뚝우뚝 선 산업시설들과 힘차고 활력 있게 돌아가는 경제를 보았다. 이때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산업화 사회의 풍경은 훗날 그가 우리나라에서 과학입국과 산업혁명을 추진하는 동기 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시 만주국은 조선인에게 어떠한 나라였던가? 그 당시 일본인 국적을 갖지 아니하며, 일본 천황에게 신사참배하지 않고 조선인이 쉽게 국적을 취득하며 전문직 분야에서 종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만주국이었다. 만주국은 그 시대의 조선인들에게 이민 천국이요 기회의 나라였다. 인구 삼천 오백 만 명 중에 조선족이 200만명이었으며, 고등문관 고시 등 각종 행정고시들을 통해 조선인이 고위 관직에 속속 진출하였다. 예를 들어 박정희의 대구사범 동기 서정귀는 만주국의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한뒤 신경 에서 만주국 행정부의 고등관으로 있었다. 그리고 훗날 국무총리가 되어 1964년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모셨던 정일권씨도 일본육사 출신도 하늘에 별따기였던 만주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자기 밑에 중국인 장교들과 일본인 장교들을 거느리고 있던 고위 군관이었다.
그러면, 신생국 만주국은 어떠한 나라였던가? 신생국 만주국은 당시 국가건설을 막 시작하던 나라였다. 그리고 만주족, 중국인, 조선족, 몽고족과 일본인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다민족 국가였기에 머리가 우수한 조선인들이 빨리 고위 관직에 진출하여 주인 의식을 가지고 국가 건설에 참여할 수 있었던 나라였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훗날 국가건설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명치유신 후의 일본 유학의 특징은 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화란, 미국 등에 유학생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십 년 서구에서 배운 것과 수십 년 일본에서 경험하여 얻은 모든 지식을 그들은 만주국에서 아낌없이 공유하였다.
집은 집짓는 구경을 많이 한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정주영씨의 현대건설의 시작이던가? 그것은 벽돌 나르는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면 일제시대에 누가 국가건설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겠는가? 조선총동부 하에서 조선인의 직책은 한정되어 있으며, 설사 고위 관직에 올라가도 친일파 경력으로 낙인찍힐 뿐이었다. 그러면 사실상 빨치산 혹은 마적단이었던 공산주의 계열 독립군이 국가 건설을 위한 훈련을 쌓을 수 있었는가? 아니다. 그들 중 대부분의 주특기는 놀구 먹으면서 동포들 등 쳐먹는 것이었다. 그러면, 미국에서? 아니다. 미국은 그저 구경하며 지식을 배울 수 있는 나라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만주국은 조선인이 고관 대작이 되어 주인 의식을 가지고 국가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나라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경험이 어떻게 대한민국 국가건설에 유용하게 씌여질 수 있었는지를 한번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6.26 동란의 잿더미 위에서 시작했던 박정희 대통령 정권보다 이제는 어엿한 경제대국 소리를 듣는 시대의
노무현 정부에 인재가 더 많아야 할텐데 실은 그렇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 정권의 각료들은 국가 건설의 능숙한 목수들이었으나, 양김씨 정권 이래 노무현 정권도 시행착오만 계속 범하고 있다. 이들은 아예 국가건설을 하지 않지만 기껏 한다는 수도 이전마저 그들의 서투른 목수 역할이 국민을 불안케 한다. 바로 여기에 오늘 우리가 3공화국 인재들은 다시는 얻을 수 없는 인재들이었음을, 만주국 국가건설에 동참함으로 그들이 얻었던 경험은 좌파 운동권이 결코 흉내도 낼 수 없는 것임을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이다.
4.19와 5.16 한국 근현대사의 두 거대한 정변이었다. 4.19쿠데타의 필연이 5.16혁명이었다. 만약 2공화국에 한가지 업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1961년 4월 19일에 첫번째 4.19 기념행사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2공화국 때부터 4.19쿠데타를 4.19의거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실 어떤 의미에서 4.19 쿠데타는 친일파 무리가 항일운동가를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었다. 윤보선 대통령도 장면 총리도 모두 민주당에서 뽑혔다. 그리고 민주당에서도 신파가 주류였는데 바로 이 민주당 신파가 속칭 친일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장면 총리의 여러 친일 행적 중에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에 지원하도록 연설하는 부역이 있었다.
사실, 2공화국 시절 청와대 비서관들도 5.16군사혁명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일어났어야 할 혁명이었다고 회고한다. 즉, 4.19 시위를 하였던 학생들이 언제 김일성 만세를 외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며, 북한으로 넘어가겠다는 그들의 행진이 언제 김일성에게 남침의 기회를 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순진한 학생들을 선동하여 파출서에 돌을 던지게 한 것은 좌익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3.15선거가 부정선거라는 주장은 민주당 신파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마산에서 3월 15일 한 교육공무원이 사석에서 대통령과 부통령은 소속이 같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대통령과 부통령은 정당 소속이 같아야 한다. 민주당이 집권한 후에 자기네도 대통령도 총리도 민주당에서 독점하지 아니하였던가!
3.15 부정선거가 있었는가? 아니다. 없었다. 명계남 부정선거운동단도 없었던 시대에 부정선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 박사는 신병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치료 중 사망하였으니 단독 후보 선거였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에는 부정선거의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을 수 없었다. 문제는 대통령과 부통령이 같은 정당 소속이면 독재라는 그들의 논리였는데, 그것이 독재인가? 미국에서는 대통령과 부통령 소속이 다른 것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이승만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 이상 부통령 선거는 할 필요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속칭 친일파로 구성된 민주당은 있지도 않은 부정선거 소문을 퍼뜨렸으며 그들이 장악한 여론은 유혈 쿠데타를 점화하였으며, 항일 운동가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하여야 했다.
2공화국의 문제는 윤보선 대통령도 장면 총리도 누구에게 굱대 통수권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것이며, 미국 등 외국 정부에서도 윤보선 대통령도 장면 총리 중 누가 외교의 주체였는지 몰랐다는 사실이다. 노빠들은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지만 외국에서 볼 때는 가장 후진적인 정치였으며, 5.16군사혁명은 그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필연이었다. 만주국에서 각 분야 전문가였던 이들이 5.16 의거 이후에 국가 건설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만주국은 온전한 독립국이었으되, 또한 경제 파트너 일본이 이 신생국의 국가건설에 일본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와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나라였다. 그리고 일본이 소련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연구하여 적용한 것이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일본은 단순히 제국주의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대륙 진출이 불가능하였다. 아직 미국 시장이 없었던 시절에 섬나라 일본 경제는 한계점에 다달았으며 중국 시장이 절실히 필요하였더. 당시 내부적으로 공산주의를 본국에서, 그리고 외부적으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만주에서부터 방어하여야 했던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였었다. 그리고 소련의 경제개발5개년 계획은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만주에서 먼저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실험한 후에 그 모델을 일본에 이이식하여 적용하려던 것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 프로젝트가 무산되었다. 패전 후 일본은 맥아던 장군의 군정의 경제정책 모델에 따라 경제가 발전한다. 애석하게도 남한의 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에게는 경제 정책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자본과 기술과 자원과 시장 경험이 없는 나라에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해방되기 4~5년 전에 한 사람의 조선인 청년이 내일의 조국의 국가 건설을 위한 일군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박정희가 신생국 만주국의 엄청난 산업시설과 경제적 부강의 경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과학을 배우기로 결심하였으며, 만주국 황제 부의의 추천으로 일본육사에서 공부할 때 군사과학 병과인 포병학교에 지원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대구사범학교에서 성적이 꼴찌였던 박정희가 일본 과학 엘리뜨들이 모였던 일본육사 포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는 일본 정신교육에 관계되는 학과에서는 낙제점을 받았어도 원채 과학 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기에 일본육사 전체 대표였으며, 3등으로 졸업하는 영예를 안았다.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서 성적이 꼴찌였던 것은 그의 항일 정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일본육사 포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는 성적을 가지고도 일본육서 전체성적에서 3등이었던 것도 그의 항일 정신 때문이었다. 자기 나라가 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조선인이, 더구나 전혀 조선인의 애국심을 위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한 조선인 청년이 애국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였을까? 가능하였다. 박정희의 전기가 그 생생한 증거이다.
일부 오만하고 몰지각한 일본인들이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국이었다는 허황된 주장을 하지만 만주국과 일본국 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에서 일본국은 만주국의 경제 파트너요 군사 동맹국이었을 뿐이었다. 만주국 정부에 참사라는 경제정책 고문이 있었기는 했지만 만주국 국적을 가지고 부의 황제의 임명을 받는 직책이었기에 적어도 외형상으로 만주국은 온전한 독립국이었다.
그런데 역사 기술에서 만주의 원주인은 누구냐 하는 문제가 나온다. 이웃 나라 만주국을 무력으로 정복한 모택동과 공산당 사가들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중국의 원주인은 청나라였으며, 청나라 황제 부의가 중국과 만주의 원주인이었기에 만주의 원주인은 누구냐 하는 문제가 나온다. 오늘날 만주국의 역사는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이었다고 주장하는 몇몇 픽션 작가들의 주장과 만주의 원주인이 도둑놈 모택동이라는 중국 공산당 사가들의 왜곡된 주장에 의해 알려져 왔다.
그래서 만주국의 역사는 몇몇 몰지각한 일본인의 편견과 중국 공산당 떼놈들의 왜곡된 주장에 의해 알려진 것이 아니라, 실재로 만주국 국가건설에 참여하였던 그 시대의 조선인들의 증언에 의해 객관적으로 다시 기록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국 역사의 교훈이 무엇이던가? 그것은 찬란한 경제적 부흥을 이루고도 자주 국방 능력이 없어 소련놈들에게 뜯기고 모택동 도둑놈의 공산당 군대에게 전부 빼앗겼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 떼놈들이 자기네가 만주국 원주인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다 보니 오늘날 만주국의 역사조차 브리타니카 사전에서도 제대로 기억되지 아니한다. 우리 민족 역시 그꼴이 될뻔하였는데, 한 사람 이승만 박사가 국제사회에서 희미한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말하여 우리나라를 되찾아 주었다. 오늘날 국민 전제가 달겨들어도 독도 하나 지키기 힘겨운데 이승만 박사는 한반도 전체를 세치의 혀로 되찾아온 것이었다.
조국을 중국 공산당 떼놈들에게 빼앗긴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여전히 티베트인들은 미국 등 세계 각처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다. 마치 만주국이 국제사회에서 잊혀진 역사가 되었던 것처럼 티베트도 국제사회에서 잊혀진 역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조국 잃은 티베트인들이 인도 산기쓹에 망명 정부를 세워놓고 아무리 미국 백악관 앞에서 농성하여도 전혀 미국 정가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이 잊혀진 역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제 사회에서 잊혀진 역사가 될뻔하였던 우리 민족의 역사를 말하여 조국의 광복이 가능하게 하였던 이승만은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던가?
1961년 2공화국의 첫 4.19 기념식--그것은 친일파들이 이승만의 그 모든 항일 운동을 부정하는 행사이기도 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항일 운동가였기에 일제 시대에 자기 조국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청년 시절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리고 오래 동안 해외에서 망명생활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우리 민족의 해방은 한일합방 문서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국제사회에 알리는 그의 외교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씨와 장면 총리와 민주당 신파는 일제시대에 편하게 지내며 쉽게 출세하는 길을 선택한 자들이었다. 노빠들의 용어로 속칭 친일파들이었으며 일제 시대에 국내 기반이 단단하였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평생은 해외에 망명하여 항일 운동을 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망명보낸 것을 기념하는 첫돌 기념식을 1961년 4월 19일 가졋다. 그리고 한 달이 채 못되어 5월 16일에 조국 근대화와 산업혁명의 두 기치를 들고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던 것이다.
* 지금 지만원 소장과 원희룡의 토론 생방송 동영상을 클릭하시면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첫댓글 3.15가 부정선거가 아니라뇨? 야인시대도 안 보셨습니까? 물론 이승만은 관여 안 했습니다만, 이기붕일당이 부통령이 당선되기 위해 부정하지 않았습니까? 부정선거 진상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최류탄을 발사하여 마산에서 김주열학생이 눈에 최류탄이 박혀 숨졋고,
이 사진이 신문에 나서 고대학생들이 4월 18일날 경무대로 진격하다 수십명이 이정재일당에게 폭행을 당해 부상당했고, 이 사건이 알려져 4월 19일날 4.19의거가 발생한 것 아닙니까?
이승만은 죄가 없습니다만, 주위에 아첨꾼들만을 앉혀 놔 스스로의 귀를 막아버린 것은 잘 못이지요.
나도한번님, 그런데 <부정선거 진상을 요구하는 시위대에>는 아마 님이 조금 잘못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아니었어요. 님은 당시 중학생이던 김주열 학생이 어느 도시 학생인지 아십니까? 이 질문에 답해 주시면 제가 그 다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마산입니다..
나도한번님, 부정선거 진상을 요구하는 시위가 아니라 마산에서 재선거하자는 요구를 선관위가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 교육 공무원이 사석에서 대통령과 부통령 정당 소속은 같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공무원이 중립을 지킨 것이 아니니 선거를 다시 하자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었지만 그것을 상세히 말하지
아니하고 무조건 마산에서 재선거하자고 하였으니 선관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일 개 도시를 위해 선거를 다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선관위가 그 요구를 수용하지 아니했다고 해서 시위대가 돌맹이로 파출소를 때려 부수고, 경찰과 국회의원들 집에 찾아가 때려 죽이고 그 가족에게까지
몰매를 주고 있는데, 어느 나라 정부가 급히 경찰을 보내 시위 진압을 하지 않겠습니까? 시위대가 중학생들까지 선동해야 할 이유도 없었지만 빗발처럼 날아오는 돌맹이에 맞으면서 처음 쏘아 보는 최류탄 발사하다 보면 머리에 돌맹이 맞고 쏠 때 오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개된 사태 전채를 보지
아니하고, 김주열 학생 죽은 것만 선전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당시 그들이 마산과 경찰과 국회의원들을 죽이고 그 가족들에게 폭행하여야 했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시위 진압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국민에게 알려 주었다면 사태는 그토록 과격하게 진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